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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전 30분이 가장 창조적인 시간 - 『위로』 이시형

나와 타인을 위로하는 태도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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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취업포털들이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새해, 당신의 소망과 목표는 무엇인가요?’ 가장 많은 응답은, 자기계발과 이직·전직이었어.

지난 연말, 취업포털들이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새해, 당신의 소망과 목표는 무엇인가요?’ 가장 많은 응답은, 자기계발과 이직, 전직이었어. 그 뒤엔 외국어 공부, 승진?연봉인상, 재테크, 운동?몸 관리 등이 있었고. 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으면서도, 서글픈 어떤 현실을 맞닥뜨린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하늘을 날거나 지구 평화를 바라는 소망도 아니요, 우주를 유영하겠다는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은 아니었어.

그 응답에 대해, 단순하게 말할 순 없을 거야. 그렇잖아. 돈을 더 벌거나, 더 넓은 집으로 옮기거나, 비싼 차를 사고 싶다는 생각 때문만은 아닐 거잖아. 정여울 문학평론가의 이 말이 콕 박히더라. 우리는 얼마나 원치 않는 일에 자신을 소진시키는 것일까. 이 모든 힘겨운 노동이 단지 밥벌이를 위한 것인가.

그러니까, 내겐 ‘자기계발’이라는 말이 주는, 그것이 전부는 아닐지라도,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고픈 뉘앙스. ‘이직?전직’에서 뿜어져 나오는 밥벌이의 지겨움. 정말이지, 정작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건, 어떤 다짐보다 위로가 아닐까 싶어서. 그렇게 새해의 소망과 목표를 말해야 하는 그 안간힘이 눈에 밟혀서.

정여울 문학평론가의 다시 이 말. “사람들은 10억만 있으면, 시험만 끝나면, 결혼만 하면, 빚만 갚으면, 대학만 가면, ‘그때가 되면’ 진정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갖가지 ‘이다음에 ~하면’의 조건을 달아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이다음에’로 유예시킨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이다음에’라는 것이 결코 오지 않을 것임을. ‘이다음에’를 결정하는 것은 주변 상황이 아니라 나 자신의 결단뿐이라는 것을.”

아마도 많은 경우, 자기계발과 이직?전직의 응답 이면엔, ‘진정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한 단계로서’라는 말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왜 우리는 항상 그렇게 돌아가기만 하는 걸까. 이다음에, 라는 토를 달고서. 그것이 어쩌면 위로해야 할 이유가 아녔을까. 지금의 나를 충분히 위로하기. 그리하여, 쉽게 지치거나 포기하지 않도록 하기. 괜찮아, 토닥토닥.

지난해 12월의 마지막 날의 오후는 그런 위로를 건넨 날이었어. 나를 향해, 함께하는 다른 사람을 향해. 『위로 : 국민의사 이시형 박사의』(이시형 지음|생각속의 집 펴냄) 출간기념으로 가진, ‘이시형 박사님과의 오후 티타임’. 시간은 분절되지 않는 법이지만, 달력상으론 한 해가 넘어가기 십여 시간 전. 한 해가 접히고 새로운 해가 다가오는 시간, 이시형 박사가 함께한 세로토닌 마음처방전.


세로토닌 박사, 詩를 말하다


책을 간단히 말하자면, 『위로 : 국민의사 이시형 박사의』는, ‘시(詩)’로 다독이는 마음처방전과 같은 책이야. 이른바 ‘세로토닌 포엠(serotonin poem)’이라 일컫는 건강한 시들을 통해 마음을 정화하고 위로하는. 이시형 박사는 그래서, 우선 정신분석전문의로서 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갔어. 부제를 말하자면, ‘시, 시인 그리고 광기’. 청마 유치환 시인에 대한 기억 하나.

“시인들은 대체로, 정상적인 사람이 없다. 살짝 기인이 많고, 광기도 있고, 상식적으로 납득 안 가는 사람도 있고. 내가 대학을 다닐 때 청마 유치환이 최고 인기 시인이었다. 하루는 우리 대학에서 특강을 했다. 나는 항상 수업시간엔 제일 앞줄에 앉았고, 이날도 그랬다. 늦게 오는 사람들 때문에 특강이 아직 시작이 안 됐는데, 청마 선생이 백목을 들곤 내게 이러는 거야. 자네 성냥 있어? 그래서, 내가 담배 드릴까요?, 라고 했다. 청마 선생이 창밖을 보더니, 이러는 거다. 세상인심아, 담배만 같아라.”

아하, 시인의 진면목을 맞닥뜨린 순간 같지 않아? 만약 정신과 환자가, 백목을 갖고 담배 피운다하면 돌았다 할 텐데, 시인의 눈에는 그 백목이 담배로 보인 거지. 시인과 보통사람의 차이, 혹은 시인과 정신병의 차이쯤 될까. 시인은 백목인줄 알면서 담배로 여기고, 정신병은 누가 뭐라 해도, 백목을 담배로 여기고 이를 피려고 하는 것. 이 박사는 그것을 1차 사고와 2차 사고로 설명했어.

“1차 사고는 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논리적, 합리적이지 않은 사고의 원형이다. 예술가들은 내가 들고 있는 백보드 펜이 담배로 보이는 거야. 다른 말로, 천재성이다. 시란 뭐냐. 시는 1차 사고를 2차 사고로 바꾸는 과정, 즉 예술 과정이다. 소설도, 그림도 마찬가지다. 시상이 떠오르는 게 1차 사고다. 2차 사고가 너무 가미되면 재미가 없고, 사실적이 된다. 또 1차 사고가 많으면 난해해서 이해를 못한다. 시인은 1, 2차 사고를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다. 예술가와 예술가가 아닌 사람의 차이다.”

이 박사는, 꿈의 특징으로 상징(Symbol)을 들었어. 시인들은 1차 사고에 상징을 굉장히 많이 쓴다는 거야. 그 다음 응축(Condensation). 시인은, 응축을 잘하기 때문에 말 한마디로 천하를, 세상을 이야기할 수 있는 거야. 그래서 시는 짧은 법이고. 직업별로 가장 머리 좋은 사람은 누굴까? 이 박사는 ‘시인’을 꼽아. 그러니, 시인이 아닌 우리는 산문을 쓰고.

“시인이 아닌 보통사람은 어느 때, 1차 사고를 가장 잘 할 수 있을까. 정신이 왔다갔다, 즉 몽롱한 상태에서다. 술을 잔뜩 마셨다거나, 잠이 올 때, 누군가에게 얻어맞았을 때와 같은. 사람에겐 알파(α)파와 세타(θ)파가 있는데, 졸린다는 건 알파파에서 주기가 더 느린 세타파로 가는 거다. 1차 사고는 잠재의식이다. 맑은 현재 의식에서 잠재의식으로 넘어갈 때, 창조적으로 된다. 시상이 아니라도,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가 있는데, 바로 그런 상태에서다. 그래서 반드시 메모를 해야 한다. 자기 전 30분이 그런 면에선 굉장히 중요하다. 알파-세타파로 넘어가는, 잠들기 직전이 가장 창조적인 시간 중 하나다.”

건강한 시는 건강한 마음을 불러옵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시를 세로토닌 포엠(serotonin poem), 그 시가 전해주는 마음의 평온을 세로토닌 마인드(serotonin mind)라고 부릅니다.… 한 편의 시가 이렇게 큰 힘이 되어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p.5)


당신은 어떤 아픔과 고민이 있나요


그리고 이 자리에 함께한 사람 각자가 겪은 혹은 겪고 있는, 2010년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나 고민과 아쉬움을 공유하는 시간이 이어졌어. 누구에게나 우울한 날이 있듯, 누구에게나 고민이 있다. 그리고 그 고민의 무게는 잴 수 없다. 누구의 것이 무겁고 가벼운 가를 따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얘기.

누군가는 가족과 함께 하다가 떨어져 지내면서 부모님이 흔들리는 모습에 안타까워하고, 교사를 하면서 학생들과 마음 마찰을 겪고 남자친구와 이별하고, 외할머니를 잃은 상실감에 힘든 시기를 보냈다. 혹자는 특별히 나쁘고 힘든 일 없이 무미건조한 생활을 하면서 마음의 침체를 겪었다. 아내가 4년 전 암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긴 하나, 늘 그것이 자신 잘못이 아닌가, 괴롭기도 하다는 남편도 있었고.

두 명의 딸 가운데, 작은 딸이 먼저 결혼해서 약간 부담이 됐던 엄마, 군에서 의문사 당한 친척동생 건으로 군대에 항의하다가 윗선에서 강한 태클이 들어오면서 무서워 이를 철회했다는 한 대학생, 고3 아이를 둔 부모로서 이상과 현실의 격차에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던 사십대 후반의 여성, 이십대 후반에 처음 찾아온 연애의 순간에 희열과 흔들림이 함께 한 여성, 원하는 대학이 아닌 대학에 들어가서 인생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 같아 힘들었던 대학생과 그런 아이의 문제로 마음고생을 하고, 양성평등이 구현되지 않는 교회 현실에 사역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면서 남이 아닌 나도 위로 받을 때가 됐다는 교회 전도사도 있다.

물론, 세상엔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가. 교사로 정년퇴임했는데, 돌아보니 대리인생 같아서 끊어진 다리 앞에 서 있는 것 같고, 책을 아무리 읽어도 길이 보이질 않아 외롭고 위로받지 못하는 것 같아 이시형 박사에게 길을 묻고 싶어 왔다는 여성도 있다. 임용고시를 공부했는데, 다른 게 하고 싶기도 해서 아직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대학4학년과 부모 뜻대로 법을 공부하고 있지만 정작 하고 싶은 건 패션디자인이라 고민하고 있다는 로스쿨 재학생도 있다.

또 8년 정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박사과정을 공부하는데, 이 길이 맞는지 고민도 하고 언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방황도 했던 30대 중반의 여성의 이야기. 물론, 자신의 투정을 받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아프지만, 홀로 있음 또한 즐기고 그 외로움을 통해 다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려. 또 다른 누군가는 희망찬 웃음을 터트리고,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네. 고민을 토로하고, 조언을 얻고 싶기도 하고,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자신에게 위로가 되는 시간. 아, 자신을 이야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어떤 위로의 순간이 있구나.

자학과 우울감에 빠지는 것은 현재가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낭떠러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긍정적인 셀프이미지만큼 사람을 밝고 활기 있게 변화시켜주는 것도 없습니다. (p.24)

상처를 주고받는다는 건 어쩌면 살아 있음의 또 다른 증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상처가 아니라 상처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자세입니다. (p.35)


상처와 고민에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


이 박사가 슬며시 물었어. 느낌이 어떤가. 굳이 이 박사의 조언이나 위로가 첨가되지 않아도 그들은 어느덧 자신을, 타인을 위로하고 있더라. 각자, 이렇게 자신의 느낌을 말하더라.

“누구나 아픔, 시련을 겪는 게 약인 것 같다. 시행착오는 겪어가는 거고, 자연이 많은 위로를 주는 것 같다. 작년에는 남이 나를 위로했는데, 이제는 내가 나를 위로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

“올해, 독서치료를 했다. 독서치료 하면서,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것을 알았다. 진정한 치유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그 말을 마음에 담고 있다.”

“부모님의 강요로 특정과에 갔다는데, 나는 고3때 학과를 선택할 때, 부모에게 서운했다. 관심이 없었거든. 한 번쯤이라도 뭘 공부하고 싶고, 어딜 가고 싶은지 물어봐줬으면 했는데, 아쉽다. 나는 내가 뭘 하고 싶었는지 몰랐다. 무난하게 갈 수 있는 과를 갔고, 부모 신세 안지는 장학금 받는 대학을 다녔으나, 졸업한 뒤 뭘 하고 싶은 게 없었다. 하고 싶은 걸 발견할 때까진 무난하게 할 수 있는 회사생활을 하고 있고, 지금도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도 굉장히 어려운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농구를 굉장히 좋아하고, 아는 사람 중에는 선수출신이 있다. 그는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농구만 했다. 대학에 가서 선수생활을 했는데, 그만뒀다. 좋아하는 것을 취미로 가지는 것과 직업으로 하는 것은 다르다는 거다. 직업은 따로 갖고, 좋아하는 것으로 직업적인 스트레스를 처리해야 하는데 좋아하는 걸 직업적으로 가졌을 때는 그것을 염두에 두라고 하더라.”


아, 그래. 고민은 끝이 없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이 고민이구나. 해답은 어쩌면 스스로 찾고, 찾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어. 자신의 이야기에 고민과 답이 함께 공존하는 경우도 있고. 처음 보는 사람들이지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이야기함으로써 짐을 조금씩 덜어내는 느낌이랄까. 물론 이 과정에서 다른 이의 고민이 내 고민과 어떤 점에서 다르고, 어느 지점에서 차이가 나는지를 발견할 수도 있어. 이야기는 계속 돼.

“퇴임까지 전력질주를 하다 보니, 정작 하고 싶은 일을 하기엔 늦었더라. 교사 생활도 재밌고 보람 있으나,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지금 하고 있는 일과 견줘서 더 하고 싶으면 빨리 뛰어들어야 할 것 같더라. 진로 문제는, 인생 노후에 맞닥뜨리는 건 또 다른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감성지수가 높아야 하는 일인데, 지금은 그 감성지수가 젊었을 때를 따르지 못한다. 감각이 많이 죽었다. 그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크다.”

“딸이 없고 아들만 둘이라, 목메달이다. (웃음) 아들들은 현재 결혼할 생각을 안 하는데, 간섭하거나 독려, 집착을 하진 않는다. 주위 친구나 친척들은 독려해서 가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얘기하고, 아직 지들 엄마가 뒷바라지 하니까, 마음 아픈 측면도 있지만, 어쨌든 아들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 인생이 있고, 많은 부모들은 간섭과 잔소리를 사랑이라 생각하는데, 그게 집착이 아닐까도 싶다. 제발 비교를 안했으면 좋겠다. 내 가정은 가정이고, 비교 하니까, 갈등, 고민, 어려움, 자살도 많이 생기는 게 아닌가. 현 정권하에 정의, 도덕, 공감, 위로, 이런 게 절실한 시대가 됐는데, 참 안타깝다. 거기에 목말라하지 않는 시대가 됐으면 좋겠다.”

“고민이랄 건 없고, 고맙고 운이 좋았던 것 같다. 현재 교사인데, 아이들과의 관계가 힘들어서 자원봉사를 나간 적이 있다. 그때, 내 상황에 대해 무척 감사했고, 그분들에게 위로를 받았다. 지금도 진로, 연애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데, 내 꿈은 재능기부다. 2010년은 정말 힘들었는데, 그 시기를 겪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걸 발견하게 된 것 같다. 대학생, 취업준비생들에게 자원봉사를 적극 추천한다. (웃음)”

“올해 본 영화중 <시>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다시 보고 싶다. 정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영화여서 다른 분들께 계속 권한다. 극중 주인공이 많은 연세에도 시를 배우고자 하는 건 대단한데, 그 내면에 얼마나 많은 상처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한두 달 가슴이 너무 아프기도 했다.”

“나는 무조건 도전하는 스타일이고, 나를 발견하자고 했다. 그러면 젊음이 유지된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형제들은 법조인이지만, 나는 헌신만 하고,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우기만 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부터 법 공부를 시작했다 하루 열세시간을 공부하는데, 무척 즐겁다. 길 가의 풀꽃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밤에 공부하면서 풀벌레 소리를 듣고 달 보고. 노후에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즐겁다. 젊은이들과 에너지를 공유하면서 조언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젊은이들에게 즐거운 기쁨을 준다는 얘기를 듣는 것 자체가 무척 행복하다. 나이를 떠나 도전해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인공위성과 별빛을 가려낼 줄 아는 사람, 주워온 조약돌 하나도 보물처럼 간직하는 사람, 책을 읽느라 깊어진 눈으로 새벽을 맞이하는 사람, TV 다큐멘터리를 보고 슬며시 눈가를 훔치는 사람, 한 송이 들꽃 앞에 한동안 걸음을 멈춰선 사람, 그들이 바로 진정으로 강한 사람들입니다. (p.68)


고독력,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힘


그렇게 위로에 위로를 보태는 시간, 이시형 박사도 함께 거들어. “직업이 정신과 의사다 보니, 여러분 이야기를 듣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호강에 겨운 이야기 하고 있네. (웃음) 정신과에는 행복한 사람이 없다. 정말 딱한 사람이 많다. 그 분들 비교해서는 별 것 아니지만, 내가 보기엔, 나름대로 고민이 많은 거지. 지금이 집단 치료 시간은 아니지만, 집단 치료를 해보면 자기네들끼리 얘기한다. 그게 뭐 고민이냐, 내 같으면 그런 것 갖곤 고민도 안 하겠다, 이러면서. 집단치료에서 서로가 싸우는 걸 보면, 고민은 주관적인 거다. 남 고민 갖고 심하다, 아니다, 고 얘기하긴 어렵다.” 아무렴, 고민의 무게나 깊이는 결코 측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게지.

이 박사는 지금이 ‘모라토리엄 세대’ ‘모라토리엄 사회’라며 말을 이었어. 무슨 말이냐고? 들어 봐. “여러분은 복된 세대다. 빚을 진 사람에게 빚을 연장해주는 게 모라토리엄인데, 현대 청년의 심리가 이른바 ‘모라토리엄 심리’다. 옛날 우리는 재수를 하면 끝장이었지만, 요즘은 평생 대학생도 많다. 이런 건 특권이다. 부모의 재력이 넉넉하지 않으면 모라토리엄 세대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거다.”

이 박사가 예로 드는 것은, 싱글족. 이들은 아무 책임이 지지 않는다면서, 돈 잘 쓰는 세대요, 왕이라고 말한다. 요즘은 이 세대에게 잘 보여야 음악, 소설, 음식 등 모든 것이 잘 팔리기 때문이란다. 아무런 책임도 없고, 빚을 안 갚는다는 것. 이 박사는, 빚을 갚지 않고 이를 연기하는 세태를, 모라토리엄 인간, 모라토리엄 세대, 모라토리엄 사회라고 칭했다.

“모라토리엄 사회는 상당히 부유한 사회다. 행복한 세대에 살고 있고, 가치관도 다양해졌는데, 모라토리엄 세대를 연장하려는 건 문제가 있다. 지난해 UN통계를 보니 저출산으로 지도상에서 없어질 나라가 한국이라더라. 특단의 조치가 없는 이상, 한국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주례할 때 애는 3명 이상을 낳으라고 주문한다. (웃음)”

고독감 아닌 고독력. 즉, 고독할 수 있는 힘을 기를 것을 이 박사는 권해. 남에게 위로 받고 싶고, 고민을 털어놓고 싶은 건 본능이라는 것. 그런 한편, 혼자서도 즐겁고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해. 혼자 있을 때도 그것이 가능하면 여럿이 있으면 즐겁고 만족할 수 있다는 거지. 결론은, 고독력 없이는 큰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다. 혼자 있을 수 있는 힘도 있어야 한다.

정여울 문학평론가의 말 하나만 더 인용하자. 난, 이 말을 종종 내뱉으면서 나를 달래거든. 너도 그렇게 해 봐. “온종일 오직 자기 자신하고만 대화해도 미치거나 지겹지 않을 수 있을 정도의 빛나는 내공, 365일 오직 자기 자신을 벗 삼아 놀아도 지지치 않을 정도의 열정.… 무릇 신체의 리듬은 의지의 리듬을 따라가지 못하지만, 우리 몸의 리듬이야말로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진정한 음악이 아닐까.”

…혼자라야 가능한 일도 있기 마련입니다. 산책, 독서, 사색, 자기반성, 계획, 꿈 등이 그렇습니다. 이때 우리가 느끼고 즐기는 고독은 ‘고독감(孤獨感)’이 아니라 ‘고독력(孤獨力)’이어야 합니다. 같은 고독이지만 이 둘의 의미는 엄연히 다릅니다. 고독감은 수동적이며 감상적인 측면이 강한데 반해, 고독력은 능동적인 마음상태로서 혼자일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고독감이 마이너스의 감정이라면 고독력은 플러스의 힘입니다. (p.17~18)


진로? 열 번을 바꿔도 괜찮아!


그래, 어쩌면 지금은 진로에 대한 문제가 가장 화두지. 각자 풀어낸 이야기에서도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것이 그것을 방증하잖아. 우선 이 박사의 의견은 이래. 열 번을 바꿔도 괜찮다!

“김재현 교수가 성공에 대해 재밌는 정의를 한 게 기억에 난다. 성공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고맙게도 그 일을 함으로써 밥을 먹을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일, 바뀔 수 있다. 무엇을 하고 싶다. 그러면 진짜 해 봐라. 인생행로를 바꾸는 것에 절대 늦은 건 없다. 내 나이가 한계라고 여기면 한계가 설정된다. 공부를 할수록 머리는 좋아진다. 나도 깜짝 놀랐다. 나는 원래 머리가 좋은 사람인데, (웃음) 이렇게 기억력까지 살아있을지 몰랐다. 이 나이까지 이렇게 건강하고 활동적이고 머리 좋고, 이럴 줄 알았다면 그렇게 서둘러 살지 않아도 됐을 텐데. (웃음)”

일자리와 행동에 제약을 주던 나이 개념이 많이 퇴조하는 ‘에이지 프리(age free)’ 사회. 이 박사가 강조하는 거야. 나이에 관계없이 평생 현역으로 뛸 수 있어야 한다는 거지. “진로 문제는 열 번도 더 바꿀 수 있고, 성공의 의미도 이젠 달라야 한다. 나는 이승이 좋다. 그래서 부처님도 생로병사(生老病死)에서 ‘생’을 가장 먼저 쓴 건 아닐까. 인간은 갈등과 번민을 안고 살아가고, 일생은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이다. 자장면을 먹을지, 우동을 먹을지 고민하고 해결하는 것도 슬기다. 그걸 행복으로 생각하느냐, 스트레스로 생각하느냐는 각자의 책임이다.”

비록 ‘불안증폭사회’에 살고 있지만, ‘지구촌 불안동지’로 감염되지 않기. “우리는 늘 불안과 걱정 속에서 시간을 낭비합니다. 그 대부분의 불안들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이나 염려가 90퍼센트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불안감이 지나치면 일도 사랑도 제대로 해내기가 어렵습니다.”(p.29)

이시형 박사의 새해 덕담, “여러분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낀 것은 여러분은 정말 진지하게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존경스럽다. 내 젊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행복한 세상에 태어난 것도 있지만, 그 자체가 위로라고 생각한다. 고민하고 인생을 진지하게 깊이 생각하고. 삶의 자세가 진지해서 좋았다. 내년에도 고민 해결은 안 돼야지, 해결 되면 재미없다. (웃음) 내가 해주기보다, 여러분 스스로가 적정해주고 위로해줘라. 위로는 주고받고 그렇게 하는 거다.”

그렇게 마무리 된 2010년 12월31일의 어느 풍경. 위로를 주고받으면서 또 하나의 이야기를 보탠 사람들. 고독력 또한 하나 더 더할 수 있지 않았을까. 2011년에도 고민하고 걱정하고 위로할 것. 그렇게 만난 시, 「담쟁이」. 도종환 시인의, 어느 해 한 일간지가 직장인을 대상으로 설문을 했다. ‘내 인생에서 꼭 간직하고 싶은 시 한 편을 써 달라’. 가장 큰 호응을 얻었던 이 시. 위로가 필요했으리라.

도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인생의 벽을 만났을 때 이 시를 썼고, 내가 쓴 시에서 내가 위안을 받으며 어려운 시절을 지나올 수 있어서 고맙게 생각하는데, 다른 이들도 자기 생의 벽 앞에서 이 시를 읽고 힘을 얻는다니 그건 또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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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은 필사하는 해였다. 전작 『더 나은 문장을 쓰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책』에 이어 글쓰기 대가가 남긴 주옥같은 글을 실었다. 이번 편은 특히 표현력, 어휘력에 집중했다. 부록으로 문장에 품격을 더할 어휘 330을 실었으며, 사철제본으로 필사의 편리함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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