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인문학, 성장의 인문학>을 슬로건으로 YES24와 정독도서관 그리고 출판사 ‘창작과 비평사’, ‘21세기북스’, ‘오마이북’, ‘푸른숲’이 공동으로 우리 시대 최고의 인문학자 릴레이 강연을 준비했다. 제 1강은 역사이다. 우리나라의 대표 역사학자, 강만길 교수가 강단에 섰다. ‘나의 역사가 현대사의 출발’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목소리를 따라가 보자.
지금에 와서 뒤돌아보면 서툴기만 했지만 그래도 역사학 전공자가 된 것이 나로서는 다행이지 않은가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겪어온 ‘해방공간’ 이후의 복잡한 역사를 체험했다는 점에서, 역사학 전공자로서의 절실한 의무감 같은 것을 느끼게도 된다. 역사는 모름지기 기록에서 시작된다. 어떤 역사도 기어이 기록으로 남겨져야만 성립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모든 역사가 기록으로 남겨지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p.4)
『역사가의 시간』은 그의 자서전이다. 그러나 이 책은 곧 우리의 역사를 담고 있기도 한다.
“강연 제목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겠네요. ‘나의 역사가 현대사의 출발이다’라는 문장에서 ‘나’는 바로 여러분 각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해마시길 바란다”는 저자의 목소리가 자서전의 모두와도 닿는다.
“해방 이후의 역사는 공화주의의 역사입니다. 그 점에서 일제시대 역사와는 다르죠. 또 하나, 현대사의 문제가 있습니다. ‘한국 현대사’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남한’만의 역사이지요. ‘북한’은 따로 칭하게 됩니다. 남북을 합친 1945년 이후 역사를 같이 쓰고 싶었고 그래야만 통일이 빨리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할 때 비로소 같은 인식을 함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김대중정권부터 노무현정권까지 약 10년간 통일고문을 맡았다. 그 기간 동안 그의 노력은 각별하다.
“남북한 학자들이 만나서 회의를 여러 번 했었습니다. 당시 몇 가지 합의를 했었습니다. 첫 번째는 사전을 만들자는 것이지요. 합의에 이르러 일부 진행이 되었었죠. 두 번째는 북한에 위치한 여러 고적에 보전 시설을 만들어주는 등의 작업을 해왔다는 것입니다.” 정권이 바뀌면서 현재는 이 두 가지 모두 중단된 상황이다. 그는 이 기간 중 남북한 학자들이 서로 남북의 고적을 보고 연구할 수 있는 여건도 제공해왔다.
“당시 개성 등지에서 많은 고적을 보고 올 수 있었죠. 더 나아가 중고등학생들이 수학여행으로 그 고적들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직 당시에 많은 약속들이 살아 있긴 하다”며 노력을 그치지 않을 것임을 알렸다.
2001년부터 2008년까지 남북 역사학자 공동의 학술행사가 10회쯤 열렸던 것 같은데, 그 기회를 통해 대략 600~700명의 남쪽 인사가 북녘을 다녀왔고, 역사학자는 약 200~300명이 북녘을 다녀왔다고 생각된다. 그만큼 남북 역사학자들 사이의 친선 관계도 두터워졌고 또 쌍방의 학문적 교류도 적지 않았다고 하겠다. 다른 학문분야도 그렇지만 특히 역사학 분야에서 남북 학자들의 교류가 심화되고 역사인식상의 접근이 어느 정도 이루어져서 공동의 역사 교과서 및 개설서를 생산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완전통일을 훨씬 앞당기는 일이 될 것이다. (p.394~395)
젊은 근대 사학자들이 희망이다
“해방이 되었을 때 우리가 어떻게 대비를 했어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후 진행된 ‘중요한 회의’에 누구도 참여하지 못했죠. 냉혹한 국제 질서 사이에서 한반도에 대한 인식은 ‘패전국인 일본의 식민지’ 였습니다. 이러한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 소용이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 공부를 해야 바로 설 수 있습니다. 해방을 냉정하게 생각해야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는 젊은 근대 사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말한다. 해방 문제만을 중점으로 연구하여 학위를 받은 이들 또한 많다는 점을 거듭 말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걸었다.
“중학교 5학년 때 6.25가 터졌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죠. 그것도 전면전이 일어나리라고는. 며칠 후 대전이 함락되고 순식간에 마산이 최전방이 되었습니다. 학도의용군에 들어갔습니다. 밥을 먹을 수가 있었죠. 당시 남은 도시는 마산, 대구, 부산이었습니다. 그때 미군이 대거 들어왔습니다. 추석 즈음부터 반격이 시작되었죠. 북한군이 서울에서 사흘 머무르는 동안, 북한에서는 ‘서울에 남로당 인원이 20만 명이 되는데, 서울을 함락하면 그들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일어난 사람이 없었죠. 남쪽의 통일이란 생각을 할 즈음, 중공군이 출현하게 됩니다.”
청년 시절 한 토막이 곧, 6.25 전쟁이었다.
“전쟁 이전, 남한은 북진통일론이었습니다. 통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강했죠. 무력 통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전쟁을 겪고 나서야 평화통일론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죠.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죠. 요사이에는 소련 쪽 자료가 많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거의 다 밝혀졌죠. 6.25 전쟁에 대한 이해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 일본이 사회주의로 넘어가면 미국이 곤란해지죠. 태평양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와이와 필리핀의 식민지화도 같은 맥락이었지요. 일본을 지키기 위해 한반도의 남쪽은 미국이 차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한반도가 분단이 된 것입니다. 사회주의이니 민주주의이니 하는 이데올로기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의 문제입니다.”
그는 이런 지점을 역사학자들이 가르쳐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평화통일론’은 6.25의 교훈입니다. 54년 휴전이 되었고, 60년에 4.19가 일어납니다.” 그는 이 때 다시 ‘역사가‘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고 회고한다.
“이승만의 독재는 더러운 독재였습니다. 대구에서 고등학생, 마산에서 대학생이 일어났죠. 이것이 혁명이 되려면 주체세력이 정권을 쥐어야하는데, 다른 이들이 정권을 잡게 된 것이죠.”
“우리가 공화주의 역사를 쓸 때, 당대사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잘 쓸 수 있습니다. 정치적인 자유를 얼마나 지켰느냐, 경제 성장과 분배를 얼마나 잘 했느냐, 만민평등을 잘했느냐를 보면 됩니다. 정치, 경제 특권이 없어야 합니다. 사상, 문화적으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파이를 키우고 난 다음에 분배를 한다’고 하는데, 파이가 커지면 분배 자체를 안 하죠. 키우면서 분배를 해야 합니다.”
그는 어느 시대나 역사의 업적은 누구 한 명의 업적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당시 일구어 낸 업적이 있다면, 그 시대 사람들 모두의 업적인 것이다.
“노동자와 지식인들이 이루어낸 우리 모두의 업적”이라고 강조한 그는 이러한 점은
“왕조시대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 역사 교육의 문제”라는 것이다.
“역사는 인류사회가 추구해 마지않는 이상의 현실화 과정이다”
“6.15 공동선언 현장에 역사 선생은 나하나 뿐이었습니다. 남북을 막론하고 말이지요. 굉장한 책임을 느꼈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의 통일은 ‘협상통일’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분단될 때 처음에는 38선이 생겼고, 48년에 국가가 분단될 때만 해도 동족 의식은 있었습니다. 6.25이후, 서로 적이 되었습니다. 6.15공동 선언에서 다시 동족으로 환원시켰습니다. 통일 과정에서는 민족이 먼저 통일 되는 것이지요. 그 이후 철도, 개성공단, 금강산 등등 국토가 통일되기 시작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는
“휴전선은 이미 하나의 경계선”이 되었고 이제 국가의 통일이 남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시일이 걸려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문제는 이 단계에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며 여러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점을 강조했다.
2010년은 한반도가 다시금 ‘극동의 화약고’로 불리는 시기가 있었다. 그는 이러한 시기가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젊은 세대의 통일에 대한 이해가 약화되고 있다는 점을 아쉬워했다.
“대학교 일, 이학년 시기는 군 입대를 고려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평화통일을 하면 ‘의무복무’를 하지 않을 것이고 이 시기에 젊은이들은 경이로운 도약을 할 수 있는 이들입니다. 젊은 사람들 그들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해야합니다.”
전쟁의 가능성을 묻는 독자의 질문에 그는
“남북 모두 독자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수 없는 상황”이라고 단언한다.
“북은 생필품의 85%가 중국제입니다. 미국은 현재 세계의 경찰로서 위치와 체면을 유지하고 있지요. 베트남전과 이라크 전 이후 설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환영을 받고 있지 못하지요. 세계는 변화하고 있습니다. 역사 공부를 통해 상황을 길게 보는 안목을 키울 수 있을 것”이라며 역사 공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최근 타 분야의 학자들이 역사 관련서를 저술하는 일이 많아졌다. 역사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변질되는 것은 아닌지 한 독자의 걱정에 그는
“결국 판단은 독자의 몫”이라고 말한다.
“역사학자라고 해서 고집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다만, 일제시대의 경제사를 역사학자는 거의 하지 않아왔습니다. 경제학자들이 했죠. 역사학자는 가치를 이야기 합니다. 경제학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것이지요. ‘연간 8% 성장했다’는 말을 경제학자는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누구의 성장이고,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는 점이 문제일 수는 있겠습니다.”
이 밖에도 강만길 교수의 자서전에는 그가 그동안 쓸 수 없었던 이야기들도 있다.
“정직한 일기를 쓸 수 없었던 분단 민족사회의 역사학 전공자, 특히 근현대사 전공자는 세상의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더더욱 절실히 느껴진다. 평생 우리 근대사와 현대사를 전공하고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하며 살았으면서도 정직한 일기를 쓰지 못한 ‘변명’으로 지난날에 있었던” (p. 5) 사실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위원장으로 직을 수행하면서 쓴 일지이다. 2년여의 임기동안 기록한 이 일지는 책 말미에 실렸다. 일지와 역사가 닿아있는 풍경은 사뭇 이채롭다.
인간의 역사란 것이 모든 인간의 이상을 기어이 현실화해가는 과정임을 기득권자를 포함한 더 많은 인간들이 터득하게 될 때, 비로소 인간의 이상을 현실화해가는 방법과 과정이 한층 더 평화롭고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며, 그래서 역사라는 것이 가르쳐지고 또 배우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사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다소는 ‘미지근한’ 명제를 넘어서 좀더 적극적으로 “역사는 인류사회가 추구해 마지않는 이상의 현실화 과정이다”라는 명제를 풀어쓴 저서를 남기고 싶었고, 아직은 그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p.510)
제 1강을 성황리에 마친 이번 인문학 릴레이 특강은 1월 한 달 동안 매주 목요일 쉬지 않고 계속된다. 특강은
『원순 씨를 빌려 드립니다』박원순,
『진보집권플랜』조국,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엄기호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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