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
이 말을 보거나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라면? 많은 이들이 ‘돈’을 들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본=돈’이라는 등식도 뭔가 석연찮다. 자본에는, 문맥상 여러 의미가 있을 수 있는데, 어떤 의미든 지금 시대, ‘자본’이 갖고 있는 현실적 힘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어떨까. 일상에서 쉽게 내뱉고 듣는 단어. 많은 우리는, 자본주의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면서도, 별 생각 없이 입고 벗는 잠옷 같다. 곳곳에서 자본주의를 둘러싼 담론과 논쟁도 치열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자본주의’를 잘 알고 있을까. 입에서 나오는 말만큼, 손으로 쓰는 글만큼 자본주의를 명확하게 인지해서 사용하는 것일까.
지금 인류에게 가장 절실한 질문 중의 하나다. 파이낸셜타임스(FT)가 지난 금융위기 직후 2개월 여 동안 연재한 칼럼의 제목인, ‘자본주의의 미래’. 사람들은 궁금한 것이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자본주의 파생상품(?)이 불러온 공멸적 징후는, 지금 다소 진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 그 결론은 아무도 모른다.
자본주의는, 지금 다시 소용돌이다. 자본주의 앞에 붙인 각종 수식어로 새로운 궤도 수정을 꾀하는 움직임도 있지만, 그 전에 기본부터 알아야 하지 않을까. 다만, 자본주의가 단순히 ‘화폐에 대한 욕망’을 뜻한다고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화폐욕, 금전욕은, 화폐가 발명된 이래,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나 발견됐다. 중요한 문제는, “이윤을 추구하는 방법과 태도”다.
아니, 정확하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본주의’라는 말을 쓰는 건 우습지 않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개념이 안 잡히는데, 왜 쓰냐, 고 물을 수도 있다. 좀 더 개념이 잡히도록, 시장 경제, 산업 사회 등을 쓰는 건 어떠냐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경제학자 홍기빈은 이렇게 건넨다.
“…현실적으로는 이 말을 쓸 필요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본 축적은 지구적 규모에서 엄청난 규모로, 쉬지 않고, 게다가 갈수록 더욱 기승을 부리며 벌어지고 있다.… 21세기의 시점에서 사람들이 ‘자본주의’라는 말로 지칭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렇게 우리 전 지구 인류의 앞날이 지구적 규모의 자본 축적이라는 것과 불가분으로 엮여들어 있다는 현실에 대한 우리의 자각이다.”
책세상의 ‘비타 악티바 Vita Activa(개념사)’시리즈의 스무 번째 권,
『자본주의』에 나온 말이다. 지난 10월13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쓰는, 자본주의의 첨예한 현장 중 하나인 프로야구의 굉장히 중요한 경기가 있는 날. 서울 동교동 가톨릭청년회관에서 ‘자본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자본주의』 저자 홍기빈의 특강이 있었다.
홍기빈에 의하면, 자본이라는 개념은 수수께끼며 모호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알고 있다고 착각도 한다. 굳이 알려고 하지 않고 알려고 해도 다양하고 방대한 개념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다양한 개념을 소개하고 정리한다. 이른바 ‘개념 해설서’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알리거나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안내서 혹은 실용서의 목적에 충실했다. 물론, 그렇다고 저자의 의도가 드러나지 않은 건 아니다. 자본주의를 어떻게 보고 접근했는지 등에 대한 저자의 뜻이 숨어 있다. 그것을 읽는 건 독자의 몫이다.
“그래서 좀 어이없이 들릴지 모르지만, 벌써 태어난 지 몇 백 년이 넘었고 바야흐로 전 지구를 속속들이 파고들고 있는 지구적 자본주의의 21세기 문명에서, ‘자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대답은 현재로선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만 수수께끼인 것이 아니라 자본 또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p.36)
그러니까, 이 글은 홍기빈이
『자본주의』에 쓰진 않았으나 무관하지 않은 이야기다. 책에 쓰고 싶었으나 쓰지 않았거나 쓸 수 없었던 이야기도 포함한다. 자본주의, 잠옷으로만 입지 말고 한 번 제대로 살펴보자. 어떤 재질로 만들어졌고, 디자인은 내 몸과 적절한지 등등.
홍기빈은 이 책의 의도와 구성에 대해 먼저 말을 꺼냈다.
‘자본주의’라는 말에 대한 편향
의도는 이렇다. 자본주의. 그 말을 둘러싼 지독한 편향이 있는데, 그것을 극복하고자 함. 즉,
“자본주의를 생산으로 이해하려는 편향이 있다. 신고전파 경제학, 맑스주의 경제학 공히 마찬가지다. 자본과 자본주의를 생산과정 중심으로 이해하려는 편향이야말로 자본주의가 무엇인지를 과학적이고 종합적인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라고 본다. 여기에는 또 두 개의 이분법이 있다. 첫째는 정치와 경제를 다른 것으로 놓는. 두 번째는 경제 영역을 생산과 금융의 영역으로 나누는 이분법이다. 자본주의를 정의할 때, 핵심은 ‘자본’이다.”
생산과 경제로 이해하는 자본주의, 이것은 곧 한계라는 얘기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일상에서 자본주의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사실, 그렇잖나. ‘돈밖에 모르는 더러운 세상~’ 이런 말뜻으로 (자본주의를) 많이 쓴다. 어떤 단어를 상식적으로 쓴다는 것은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세상을 이해하는 직관적 경험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자본주의는 작업장에서의 노동 착취가 아니라 성형외과, 광고판 등은 물론 야구장에 가서도 만난다. 사방에 자본주의가 작동하고 있는데, 문화가 자본주의는 아니다. 문화현상에 대한 이야기로 자본주의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지난 200년 동안 우파도 그렇고, 좌파에서도 두 가지 경향이 강했단다. 한쪽에선 생산 혹은 노동 착취 얘기만 주야장천. 그게 아니면 문화연구 등의 텍스트로만 생산됐다. 경제학자인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여기의 현장에서 자본주의는 어디에도 있지 않다고 느꼈다.
이념적 선입견 버리고 현실적 자본주의를 파악하자
그래서 홍기빈이 바라본 자본주의는 ‘권력양식’이다. 즉, 사회에서 지배가 관철되도록 사회를 조직하는 방식.
“생산에서 이런 양식이 드러나면 노동자에 대한 착취, 문화적으로는 지독한 비인간화, 물상화 등으로 나타난다.”
애매한 단어임을 전제로, 진보에 대한 이야기로도 이어진다. 그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진보세력은 산업혁명 이후 출현했다. 자본주의의 전횡으로부터 인간과 자연을 지키려고. 말인즉슨,
“자본주의에 대한 정의와 문제의식을 빼면 진보의 정체성은 없다.” 양심적 시민 혹은 양심적 자유주의 등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좌파 혹은 진보라고 할 때, 제일 중요한 문제는 자본주의를 어떻게 파악하고 자본주의의 작동에 어떻게 맞설 것이냐 하는 게 역사적으로 축적된 바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대한 정체성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으면, 진보세력은 정치적 무능력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지금 30~40년 동안 지구상 어디든 진보세력은 대후퇴를 겪었다. 68혁명 때 반짝한 이후 계속 수세에 몰려 있다. 그가 권하는 바는 그래서 이것이다.
“좌파든 우파든 이념적 선입견을 버리고 현실적 자본주의를 파악하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 책을 쓴 그의 바람이기도 하다.
그는 그래서 묻곤 한다. 비판의 목적이 아니고, 자본주의 타도나 개혁을 외치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럼, 말씀 하시는 그 자본주의가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요?” 허나, 제대로 대답을 들은 적이 없단다. 정의할 수 없는 것을 타도나 개혁하려는 얘기는 도대체 뭔가!, 라고 그는 반문한다.
“학술적으로 어마어마한 정의를 기대한 건 아니다. 맥락과 관련해 자본주의가 어떻게 관련되는지 설명해달라고 여쭤보는데, 대답을 들은 적이 없다. 어이가 없다. 그 다음 질문으로 자본이 뭐냐고 물어보면, 대답하는 분들도 있으나, 교과서적인 얘기를 한다. 다시 재차 질문해도 해결이 되는 경우를 못 봤다.”
물론, 그도 모른다고 자백(!)한다.
“최소한 뭔지도 모르는 것을 타도하거나 개혁하자는 그 말은 못하겠다. 그래서 내가 던지는 질문은 자본주의 타도든 개혁이든, 더 좋은 인간적인 자본주의로 발전하다는 분들이든,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거다.”
우파는 자본주의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흥미로운 ‘문화적 사건’도 꺼낸다. 우파 쪽에 있는 사람들이 쓰는 자본주의.
“원래 우파는 자본주의라는 말을 안 썼다. (우파)학계에서도 비과학적이라고 싫어하는데, 70년대부터 보수 이데올로그들이 이 말을 좋은 뜻으로 바꾸는 작업을 한다. 1940~50년대 미국의 한 소설가가 신자유주의 소설을 썼는데, 자본주의(캐피탈리즘)는 하나의 이상이라고 얘기한다. 이 사람이 가진 철학의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현명하고 이성적인 사람들이 탐욕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지혜롭지 않은 인간들을 도태시키는 것. 그것보다 인류에게 더 위대한 이상은 없다고 설파한다.”
70~80년대 신자유주의 흐름에 있어 드러난 독특함. 좌파의 레토릭을 우파들이 썼다. ‘시장혁명’과 같은 말이 그랬다.
“(우파들이) 자본주의라는 말을 훌륭하고 이상적인 것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모토가 있었다. 자본주의는 완벽한 이상이고, 부족한 점은 좀 더 발전시켜야 한다. 자본주의가 인류의 방향타다. 사실 어느 쪽이든 자본주의가 뭐냐, 고 물어보면 모호하기 짝이 없다. 책에서 취한 방식은, 자본주의는 다른 개념 해설서와 다를 수밖에 없는데, 권위 있는 사람들이 쓴 무엇을 봐도 우리가 일상을 사는 자본주의와는 다르다. 자본주의는 애매하고 그런 방식으로 접근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최소한, 자본주의라는 개념이 무수한 면에서 격심한 논쟁에 휩싸여 있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일 것이다.”(p.19)
고로, 책에 있는 자본주의의 정의 중에 논쟁에 휩싸이지 않은 것이 없단다. 그래서 그가 택한 방식은, 자본에 대해 지금까지 나온 주장 중에 유력한 꼭짓말을 잡아보자, 였다. 그래서 나온 것이 화폐, 생산, 권력.
“나는 그러한 자본의 정의 혹은 이미지로서 크게 ‘산업’, ‘화폐’, ‘권력’이라는 세 단어를 열쇳말로 놓을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p.37)
책의 결론을 말하자면, (스포일러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이 세 가지의 종합이자 복합체로서, 자본주의를 하나의 체계로 설명할 수 있는 논리 체계와 연구조사 프로젝트가 필요하다고, 그는 맺는다.
생산-화폐-권력은 어떻게 밀착하게 됐나!
잠깐, 앞서 말한 산업, 화폐, 권력, 이 세 개가 서로 다른 것 같다고? 홍기빈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자본주의에선 동일한 세 측면이라는 것. 그러면서 다르게 느끼는 이유가,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역사적으로 기원이 다르다.”
우선 화폐. 화폐가 권력이 되는 것, 시장에 매물이 얼마나 나와 있느냐가 좌우한다. 오늘날 상품이라고 붙일 수 있는 품목만 해도 1000억 개 이상이란다.
“그야말로 돈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 11세기 유럽에 가보면, 돈이 많다고 왕이 될 수도 없었고, 돈이 많다고 아무나 남편이나 부인으로 맞이할 수 없었다. 오늘날은 아니다. 돈 있으면 권력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돈이 있다고 권력을 가진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돈이 생산과 연계돼 있었냐? 아니다. 권력의 작동이 생산에 관심을 가진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권력의 작동에 필요한 노동, 즉 피라미드나 댐 건설 등은 권력자들의 필요에 의해서였다. 그러다 권력이 생산 자체를 조직하고 지배하는 건, 500년 전 서양에서였다.
“권력이 화폐와 관계돼 있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역사적 연원은 세 가지가 다르나, 자본주의에서는 불가분으로 연결돼 있다. 가령, 자본가들이 공장 생산을 많이 하려고 한다면, 돈 벌려고 하는 거지. 벌어서 뭐하려는 걸까. 요즘은 세상이 달라졌는데, 내가 젊을 때는 10억원을 쓸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지금은 그렇게 안 보지만. 돈 지랄 하지 않고 10억원을 쓰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웃음) 그런데, 자본가들이 몇 천억, 몇 조원을 버는 이유는 뭘까. 권력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생각해보란다. 1000억원이 넘는 돈. 가장 보통의 사람들에게 1000억원은 돈이 아니다. 곧, 권력이다.
“다른 이름을 붙이는 건 무의미하다. 자본주의에서는 1000억원, 1조원 기업은 그 권력을 갖고 무엇을 하나. 또 공장을 짓거나 인수합병해서 덩치를 키운다. 권력을 얻고 또 생산하고. 이 과정에서 생산, 화폐, 권력이 모습을 보인다.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를 비교했을 때 본질적인 차이는 이거다.”
삼각편대다. 생산-화폐-권력.
“이 세 가지가 연결돼서 하나로 유착된 상태, 그게 근대 자본주의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게 내가 가진 자본주의에 대한 관점이다.”
그렇다면, 리카도나 맑스는 왜 생산에만 집착했을까. 천재였던 두 사람, 왜 그런 것을 놓쳤을까. 이유가 있다. 홍기빈의 설명이다.
“19세기 중반은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굉장히 독특한 시기다. 『자본론』원고는 1851년에 시작해서 끝낸 것이 1862년이었다. 1850년대는 생산을 조직하는 게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주식회사가 기업의 주된 형태도 아니었고, 자본시장도 등장하지 않았다. 주식시장이 있었지만, 모든 회사의 주식이 거래된 것도 아니요, 주식시장은 투기꾼들의 장이었다.
주식시장, 주식회사도 없었다. 자본이 금융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파악도 안 됐다. 국가권력은 경제에 대한 개입을 하지 않는 아주 특수한 상태. “맑스가 딱 그때 살면서 연구를 한 거다. 화폐나 국가권력에 대한 중요성을 몰랐던 것은 아니나, 그는 자본주의를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착취에서 파생되는 현상으로 파악했다. 맑스도 그랬고, 리카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생산력에 의해 벌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지.”
답은 간단하다. 굉장히 독특한 시대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이후 나온 학자들은? 맑스와 같은 이유로 하나에만 치우쳤다. 생산, 화폐, 권력 중 하나가 노골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때가 있었고, 어느 하나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였다.
“그러나 20세기 들면서 생산, 화폐, 권력이 굉장히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연결된 상태가 된다.”
이 사람을 기억하라, 루이스 멈포드
홍기빈은 한 사람과 책을 권했다.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 그리고 『기계의 신화(The Myth of the Machine)』. 그에 의하면, 루이스 멈포드는 고졸 출신으로 건축사, 도시연구 등을 했다. 대학교수를 하라고 하면, 짜증을 낸 사람이란다.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지식인 중의 한명이다. 그의 책은 기계와 기술에 대해 고민을 집대성했는데, 읽다보면 ‘신선하다’에서 ‘소름이 끼치고 충격 받아 새 됐다’는 생각이 들 정도란다.
왜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루이스 멈포드에 의하면, 최초의 기계는 ‘사회’였다. 우리가 쓰는 물질 기계는 진짜 기계가 아니라는 거다. 우리가 쓰는 물질 기계는 사회라는 기계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것이고 했다. 이게 핵심이다. 기계로서의 사회가 사라졌다가 르네상스부터 살아나서 20세기 들어 고대와 다르게 완벽하게 재생됐다. 베트남전, 파시즘의 등장 등을 이것으로 설명한다. 새가 된 이유가, 빠져나갈 도리가 있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하여튼 읽어보라. 괴롭다.”
사회가 기계다? 좀 더 자세히 들어보자. 홍기빈에 의하면 그것은 은유도, 비유도 아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기술사의 정의에 의하면, 기계는 이런저런 재료를 묶고 단일한 동력으로 엮어서 단일한 목적이나 효과 하에 일사불란하게 작동시키는 것이다.
그는 피라미드를 만든 이집트를 생각해보잔다.
“무서운 거다. 엄한 피라미드를 쌓기 위해서 우선 길을 닦아야 한다. 돌이 널린 것도 아니고, 리비아 등에서 가져왔을 텐데, 당시엔 결정적으로 바퀴가 없었다. 그러니까, 장비라는 것 자체가 거의 없었다. 그걸 몽땅 맨파워로 때웠다는 거지. 그들이 집채만한 돌덩이를 옮긴 거다. 10년, 연 인원 200만 명을 동원했다. 분명한 것은 노동력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갔다. 생각해봐라. 그 길을 닦는데만 10년이 걸렸다. 피라미드 그 자체보다 몇 백, 몇 천배 더 신기한 것은 피라미드를 만든 사회조직이 아니겠는가. 인원을 동원하는 것부터 먹이는 문제, 관리 조직까지…”
피라미드를 완성한 것은 결국 기계의 결합이다. 군사기계, 관료기계, 노동기계. 대략 이 세 가지가 합쳐졌을 때 가능한 것이 피라미드다.
“이것은 그냥 기계가 아니고 메가 머신, 거대 기계다. 거대 기계가 최초로 나타난 것이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 등의 고대 제국이었다고 보는 거다.”
하지만 멈포드의 설명에 의하면, 고대 기계는 무너진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람이 기계가 아니기 때문! 나사 부품처럼 행동할 것을 강요하나, 인간의 창조성과 자주성이 이를 차단했다.
멈포드는 사람의 지적능력은 기술과 예술로 구성돼 있다는 이론을 폈다.
“기계가 계속되다보면 사람이 사람처럼 안 보인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사조가 일어난다. 기원전 500년부터 예수 탄생까지를 봐라. 예수, 석가, 조로아스터, 마호메트 등 성인들이 떼거리로 나타난다. 지구상 거대한 종교사상을 이루는 성인들이 기원전 500~기원후 500년에 도처에서 우후죽순 튀어나왔다. 더 재밌는 건, 그들의 메시지가 똑같다. 인간이란 무엇이냐, 인간이란 누구냐. 멈포드는 이렇게 봤다. 인간이란 누구냐, 는 물음이 거대 기계의 작동을 힘들게 한다고 봤다.”
그는 왜 갑자기 이 얘길 했을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자본주의 정치경제학은 화폐(금융)-생산-권력을 하나로 통합시켜서 바라봐야 한다. 예전에 내 지도교수가 말해준 건데, 현대 자본주의는 거대 기계의 틀로 봐야한다고 얘기했다. 내가 번역한 『권력 자본론』에도 잘 나와있다. 여기에서 내가 알량하게 발전시키고 덧붙인 것은, 관료기계, 생산기계, 군사기계, 이 세 가지를 각각 금융체제, 대기업, 군사/관료조직(국가기구)으로 바꾼 거다.”
자본주의 역사발전을 바라보는 시선
자본주의를 제대로 읽기 위해 홍기빈은 권한다. 이 세 개의 기계가 형성되는 역사를 보라.
우선, 국가기구. 서양에서 근대국가는 16세기 정도부터 틀이 만들어진다. 계기는 전쟁이었다. 16세기 초 유럽 정치단위는 200개였으나 16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50개로 줄었다. 전쟁에서 패하면서 먹혔다. 여기서 알 수 있다.
“전쟁 기술을 익히지 않으면 안 되고, 조직 전체를 가장 효율적인 전쟁기계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됐다. 실질적으로 기계적으로 인간을 조직한 거다.”
이어 생산기계, 즉 대기업. 완전경쟁시장? 그건 이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실질적으로 생산과 소비를 조직한 것은 몇 개의 대기업이다. 시장의 40% 정도는 몇 개의 대기업이 조직하고 있다. 19세기 말 이후로 그렇다. 기업 안의 노동과정을 보라. 기계화로 설명하는 것, 무리가 아니다. <모던 타임즈>만 봐도 딱 나온다. 생산뿐 아니라 소비도 기계가 됐다. 그게 더 무섭다.”
소비가 기계? 그건 광고 등에 의한 조작을 말한다. 홍기빈의 표현에 의하면, ‘현대사회 최악의 코미디’. “나만의 개성을 찾을 거야…”라며 광고한다. 곰곰이 따져보라. 그것이 나만의 개성일까. 기업은 그렇게 나만의 개성을 찾는 사람을 데이터베이스화해서 마케팅 자료로 삼을 뿐이다. 개성은 없다.
“나만의 개성을 소비에서 찾겠다는 건, 술 먹어서 목이 마른데 다시 술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다. 소비도 지극히 기계화돼 있다. 요즘 유행하는 음악은 들을 수가 없다. 시끄러워서가 아니고 단조로워서. 이 소비가 기계화 돼 있는 것을 주도하는 것이 대기업이다.”
마지막으로 금융체제. 금융을 돈을 계산하는 기계적인 과정으로 생각한다면, 전혀 아니다.
“금융의 핵심은 계산할 수 없는 것을 계산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가령, 삼성전자 주식이 얼마인지, 조직에 써 있나? 아니다. 액면가로 써 있는데, 그게 가격은 아니잖나. 어떻게 알아내야 하나. 세상에 거의 모든 것들에 가격을 매기기 위해 연구하고 조사하는 기계가, 금용체제다. 금융이 기계적인 체제로 형성된 것은 1864년 영란은행이 만들어지고 20세기 들어와서다.”
20세기가 야만의 세기라지만, 정말 무서운 일은,
“옛날 고대의 기계들이 하나로 합쳐진 것처럼 세 개의 기계가 하나로 합쳐졌다.” 20세기 들어와 세 기계의 사이즈가 너무 커져서 합쳐지지 않으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합체를 위한 최초의 시도가 파시즘이었다.
“파시즘 체제의 정치경제구조를 보면, 소련 공산주의와 크게 구별하기 힘들다. 파시즘을 보면 세 기계를 하나의 유기체로 통합해서 서로의 작동을 나머지 2개와 긴밀하게 연계시켜서 작동하는 실험을 한다. 현대 자본주의의 진정한 시작은 파시즘, 1930년대라고 본다. 생산-화폐-권력이 불가분하게 완전히 결합되는 건, 세 개의 기계가 합쳐져서 그렇다.”
그렇다면, 묻고 싶을 것이다. 최근 심심찮게 나오는 지점이다. 자본주의를 극복한다는 것을 무엇일까. 홍기빈의 말은 이렇다.
“맑스주의 전략에서는 자본주의를 구조물로 보고 타도해야 한다는 메타포를 쓴다. 내가 보기엔 물론, 잠정적인 것이다. 세 가지가 역사에서 있었고, 각자 차지하는 역할이 있다. 자기네들끼리 결합해서 무시무시한 권력으로 변하는 폐해를 막기 위해서는 세 가지 결합을 해체하는 것이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 그것이 홍기빈이 던진 과제이자 화두다. 고민하고 일상에서 실천하라. 시대를, 세상을, 나를 고민한다면, 일상의 자본주의를 벗어던지는 일부터. 쥐 같은 놈 욕한다고 끝낼 것이 아니라, 그보다 근본적인 것에 접근하기.
가령, 지금 프랑스에서는 10대들이 자본주의 반대를 외치며 거리를 점령하고 있다. 그들의 인식은 좀 더 근본적이다. 문제의 핵심에 금융체제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프랑스 대통령 사르코지 반대 혹은 퇴진보다 은행에서 계좌를 빼버리자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노동을 소외시킨 것이 금융체제였고, 자신들의 미래가 이들에 의해 지배되지 않도록, 삼각편대의 해체를 요구하는 것이다.
본질을 고민하고, 행동하고 요구하는 것. 자본주의의 미래? 세계 최대 휴대전화 업체인 노키아의 회장 요르마 올릴라 회장은 FT와의 인터뷰에서 그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
“세계화로 인한 지나친 개방에 맞선 정부의 강력한 국민보호 프로그램과 평등한 교육 시스템을 특징으로 하는 게 노르딕(북유럽) 자본주의다. 오늘날 정책 결정자들이 이런 길을 따르기를 희망한다.”
맞다, 틀리다를 얘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생산-화폐-권력이 만들어놓은 감옥에 계속 갇혀 있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자본주의, 일상에서의 고민이 필요하다. 인간이 누구냐. 인간이 무엇이냐.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묻고 답하다
세계 거부들이 기부를 함으로써 자본주의의 대안을 만들고자 하는 행동이 있다. 이것이 지금의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까. 박애 자본주의, 창조적 자본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우선 전체적인 그림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이 기부를 많이 하는데, 나한테 기부를 하면 인정한다. (웃음) 무슨 말이냐면, 그 양반들이 기부한 재단이 있을 텐데, 거버넌스에 대한 그들의 발언권이 없나. 난 그런 얘기는 못 들었다. 기부하려면 완전히 남의 돈이 돼야 한다. 어떤 재단에 기부한 뒤, 그 재단의 거버넌스에 상당한 결정권을 쥐면, 그게 무슨 기부인가. 이건 록펠러 가문의 고전적인 투자방식인데, 록펠러 후손들이 공식적으로 알거지냐. 아니다. 별의별 재단을 가지고 있다.
버핏이나 게이츠가 거버넌스에 참여하는 게 없나. 전혀 무관한 상태의 기부인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공식적으로 무관하다해도 의심할 것이다. 그러니 나한테 기부하라는 거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거든. 물론 기부하는 사람을 사기꾼이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어쨌든 자본주의 앞에 수식어가 붙어서 본질적인 것이 바뀌었는지 생각해보라.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방식은 많다. 폭력이 가장 저차원의 것이고, 그 다음이 굶기는 것이고, 생각을 바꾸는 것이 고차원적인 방식이다. 수익의 흐름이나 본질을 바꾸는 수식어가 붙는 걸 반대하거나 쓸데없는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착한 자본주의 좋다. 야수 자본주의보다는 낫잖나. (웃음) 폄하하는 건 아닌데, 본질적인 변화인가를 볼 때, 앞서 말한 삼각형의 틀을 놓고 볼 때 진짜 바뀐 것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화폐, 생산, 권력 세 개가 똘똘 뭉쳐있는데, 이를 풀 수 있는 실마리나 단초 같은 게 있다면.
“대공황이 발생했을 때, 미국 대도시의 모든 생산기계가 멈췄다. 왜냐면, 금융기계의 명령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다. 채산성이 안 나온다 싶으니, 공장주들이 공장을 닫았다. 그 당시였는데, 1932년 스웨덴의 사민당 구호가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주고 사회적 생산을 회복하자’였다. 필요하다면 공장을 운영하고, 금융시스템의 계산방식에 따른 이윤이나 채산성 때문에 공장이 멈춘 거라면, 회계방식을 달리 하자는 것이었다. 공장(가동)을 금융체제의 회계방식에 따르지 말고, 국가 재정을 풀어 생산하라고 한 거지. 공장 소유주의 장부로 봤을 때, 채산성이 맞지 않으면 말이다.
화폐, 생산, 권력이 엮여서 사회가 볼모로 잡히고 고통을 받으면, 원래 사회가 할 역할로 돌리는 것이다. 국가가 지닌 재정회계에 근거해 기업을 돌릴 수 있다. 공기업이 그렇게 나온 거다. 따로 떨어져서 돌리는 게 다른 게 아니다. 1930년대에 현실적으로 대응한 방식을 반추한 거다.
파시즘이 창궐할 때, 파시즘 국가들은 기업을 두들겨 패서 공장을 뺐었다. 운영권을 국가가 가져가서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곳으로 바꿨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국가가 전쟁을 그만두고 싶어도 군산복합체가 움직여 전쟁을 계속하도록 만든다. 그럼 어떻게 되겠나. 1960년대 미국은 록히드 앞에서 데모를 했어야 했다, 그런 얘기다. 각각의 조직들이 원래 사회에서 차지한 위치로 돌려보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