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공부할 때 영화와 음악에 빠져 있었을 뿐이에요
팝 칼럼니스트, 연애 컨설턴트, 그리고 최근에는 영화 프로그램의 MC까지, 다재다능한 이 남자. 김태훈이 자신의 진솔한 이야기를 영화와 음악으로 풀어냈다. 『김태훈의 랜덤 워크』, 규칙도 제한도 없이 자유롭게 한 발 한 발 자신의 영역을 넓혀나가는 그의 삶의 흔적이 담겼다.
“지나간 연인에게 자신이 어떤 남자였을지 궁금해하고, 늦은 밤 애니매이션 DVD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남자. 커트 코베인의 죽음 앞에 청춘을 흘려보내고 어덜트 라이프에 지칠 때면 만화방으로 숨어든다. 영화와 팝이라면 무박 8일 종일 떠들어대도 모자라다”라고 책날개에 적혀 있는 자기소개는 편집자가 쓴 것이지만, 그리 틀린 말은 아니란다.
그 자기소개는 이렇게 끝난다.
“도무지 한마디로 정의내리기 어려운 일관성 없는 삶을 솔직하고 자유롭게 즐기고 있다.” 김태훈의 이야기나 행보가 지루하지 않은 것은 이러한 점 때문일 테다. 어쨌거나 나 역시 글을 보거나 TV에서 김태훈의 목소리를 접할 때, 한번은 솔깃 귀를 기울이고 보니까 말이다.
상상마당에서 열리는 6월의 북살롱의 주인공은 김태훈, (이번에는) 저자다. 영화와 음악이라면 무박 8일을 종일 떠들 수 있다고 했지만, 아쉽게도 이 자리는 고작 한 시간 반쯤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다. 김태훈 저자는 이야기의 고갱이를 모으고 압축해서 이 자리에 섰다. 30분 정도, 그의 성장 과정을 빠르게 스킵했다.
“무슨 간증하는 시간 같네요?”라며 재치 있는 입담 덕에 독자들은 연방 웃음을 터뜨렸다.
지우개를 훔치다가 전학을 간 사연, 에로영화 전문가로서의 위치, 정학만 2번 맞았던 고등학교 시절, B-boy 1세대 이야기 등으로 포복절도할 사연만 꼽아 맛깔 나게 전달했다. 그러니까 몇 가지 사건들을 통해 본 김태훈의 어린 시절, 지금과 마찬가지로 자기만의 랜덤 워크를 해오셨구나 알 수 있었다. 공부엔 관심 없는 학생이었으나, 남들 공부할 때 김태훈 역시 그만큼 열심히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 다녔다.
“남들 공부할 때 영화와 음악에 빠져 있었을 뿐이에요. 학생이 공부를 포기하면 시간이 아주 많이 남아요.”
그렇게 열심히 취해 듣던 음악으로 밥을 버는 직업을 가졌고, 자신의 연애 체험뿐 아니라, 연애 박사 친구들을 가까이 두며 그때 나눈 진지한 이야기들로 연애 컨설턴트를 하고, 에로영화, 예술영화 장르 불문하고 심취하여 접한 영화 덕분에, 영화 프로그램 MC도 맡고 있는 게 아닌가. 랜덤으로 뿌려둔 씨앗을 결국 그만큼 랜덤하게 수확할 수 있었던 셈.
랜덤 워커, 그렇게 여기까지 와 있다
| 다재다능한 김태훈, 그의 솔직유쾌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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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살려고 했다. 세상 사람들의 사는 방식 따윈 관심 없이, 내 맘대로 살려고 했다. 오디오가 자기 멋대로 트랙의 순서를 바꿔버리듯, 랜덤 워커로서 살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여기까지 와 있다.
『김태훈의 랜덤 워크』는 영화주간지 <무비위크>에 연재했던 글을 다시 쓰고 묶어 낸 책이다.
“이 책은 영화와 음악으로 쓴 일기다. 폼 나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살고 싶고, 아름다운 음악처럼 삶을 노래하고 싶은 철딱서니 없는 마흔 두 살 남자의 지난 기록들이다”라는 저자의 말을 보면,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짐작할 수 있을 테다. 그답게 발랄하고 솔직한 이야기들이 재치 있게 표현되어 있다. 김태훈 저자는 무엇보다
“‘랜덤 워크’라는 제목으로 끝까지 싸웠다”고 고백했다.
“제멋대로 산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도 있기 때문에 과연 ‘랜덤 워크’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느냐”는 것. 그러니까 ‘랜덤 워크’는 단순히 책 제목이 아니라, 그가 보내온 과거의 시간에 붙이는 제목이나 마찬가지일 테니 말이다. ‘음, 인생이란 게 그렇죠. 어쩔 수 없는 일은 누구에게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인 거죠’라고 속마음으로 대꾸하면서, ‘랜덤 워크’라는 제목이 그리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이 책의 사용법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다.
“영화 평론가가 아니라서 영화 비평은 의미가 없다고 봤다. 일상 속에서 영화와 음악을 어떻게 접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독자가 호기심을 가지고 이 책에 나온 영화나 음악을 접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겠다.” 그리고 이어진 시간, 자기소개, 책 소개 후에 준비된 하이라이트, 랜덤 워크로 걸어온 그의 삶의 셋 리스트! ‘내 인생의 영화, 음악 BEST 5’를 준비했다. 슬라이드를 통해 준비한 영화, 음반 목록, 마주 앉은 독자들이 부지런히 메모하는 걸 보니, 그의 바람은 이미 이루어진 셈. 충분히 족하겠다. 게다가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아래 목록 중 한두 개쯤은 메모해 두실 테니 말이다.
내 인생의 영화 5
| 영화는 슬라이드의 사진을 통해서, 음악은 한 곡 한 곡 직접 들어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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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사블랑카> / 마이클 커티즈
“교과서적인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잉그리트 버그만이 화장하지 않고 등장해 유명해진 영화. 그만큼 그녀는 예뻤고, 한편으로는 흑백 영화의 수혜자이기도 한 셈. 파트너였던 험프리 보가트의 연기는 남자의 고독과 쓸쓸함, 회한을 표현하는 데만큼은 최고다. 여러 가지의 가치를 원형의 구성에 맞추면서도 그것들을 창의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는 영화라, 주말 명화에 나올 때마다 나를 옆자리에 앉혀서 얘기를 들려주시기도 했다.”
2. <바더 마인호프> / 울리히 에델
“1967년 정부의 베트남 정책에 반대하는 혁명단체를 그렸다. 20년 전쯤에 나왔다면 당시 대학생들이 필수 관람했을 것 같은 영화. 필요 이상의 애정도 없이, 냉혹한 비판도 없이 당시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기록영화처럼 담아냈다. 무엇보다 시대정신에 놀랐다. 상황이 변해버린 걸까? 지금 상황과 맞물려 생각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다. 게다가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통해, 아버지 세대에도 청춘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
3. <빅 피쉬> / 팀 버튼
“팀 버튼은 말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영화가 꿈이라면, 내 영화는 악몽이 될 것이다’라고. 그런 팀 버튼의 가장 밝고, 긍정적인 영화다. 영화 보고 많이 울었다. 영화 주인공의 아버지처럼, 당대의 구라였던 우리 아버지가 생각나서 뜬금없이 전화도 걸고, 친한 척도 하게 만든 영화다. 앞서간 아버지 세대에 대한 애정을 갖게 해줬고, ‘이야기’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4. <토니 타키타니> / 이치카와 준
“영화 속 정서들이 인상적이었다. 엄청난 사건보다는 소소한 일상이 정서적으로 엮여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정말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조용한 영화는 많은 질문을 던진다. 마치 흑백 카메라로 찍은 사진 같은 느낌이 든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한번씩 보게 되는 영화다.”
5. <하하하> / 홍상수
“홍상수는 잔혹한 방법으로 인간의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 때문에 보고 나면 불쾌해지는 영화도 있지만, <하하하>는 유쾌하게 인간의 본 모습을 발견케 해주는 영화였다. 두 남자가 산행에서 내려와 술을 한잔씩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는데, 이것 역시 삶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영화다. 무언가를 향유한다는 것은 이야기를 하는 순간에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
내 인생의 음악 5
1. 비틀즈 / 앨범 <Abbey Road> / 곡 「Because」
“비틀즈의 앨범 <애비로드>에 실린 음악들은 취향에 따라 어떤 곡이든 명곡이 될 수 있다. 전문가의 자존심이 있어서, 남들이 안 고르는 노래를 골랐다.(웃음)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이 LP 음반을 미국에서 주문해서 사셨다더라.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아버지가 나를 낳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싶다.”
2. 류이치 사카모토/ 앨범 <Furyo>(OST) / 곡 「Merry Christmas Mr. Laurence」
“일본의 음악 시장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단 한 명, 일본에 부러운 음악가가 있다면 이 사람, 류이치 사카모토다. 작곡가가 성형수술을 하고, 영화 출연도 하고, 마돈나와 친구이기도 하다. 보사노바에 전위음악까지 뻗어가는 음악 스펙트럼이 방대하다. 모든 분야에서 천재성을 빛낸다. 한 인간이 가진 호기심이 이렇게 많은 장르에서 빛을 발할 수 있는 경우도 드물다.”
3. 마크 알몬드 / 앨범 <Other Peoples Rooms> / 곡 「Vividi's song」
“존 마크와 자니 알몬드의 만남은 팝 역사상 가장 완벽한 듀오의 탄생이다. 마력적인 존 마크의 음성과 자니 아몬드의 혼 악기들은 멋진 풍경화, 날카로운 보도 사진을 보는 듯하다. 아름다운 멜로디는 날카로운 사유를 함께 담고 있다. ‘우리들의 사랑은 여름 같아요’라는 가사가 마치 여름 날 사랑에 빠질 것만 같은 근거 없는 낙관을 가져다준다.”
4. 조니 미첼 / 앨범 <Blue> / 곡 「River」
“캐나다의 싱어송라이터, 조니 미첼. 팝 음악에서 단 한 명의 아티스트만을 골라내야 한다면, 그 근거가 무엇이든 조니 미첼은 첫 번째 인물이다. 그의 음악은 삶을 은유하는 동화이자, 씁쓸한 문학이다. 우리가 음악을 듣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그녀의 음반을 추천한다.”
5. 에미넴 / 앨범 <8mile>(OST) / 곡 「8mile」
“2000년대는 힙합의 시대였다. 그 당시 음반사 직원이었던 나는 힙합을 듣지 않고는 직업을 유지해나가기 어려울 정도였다. 대개 힙합이 시끄럽다는 사람이 많은데, 이 노래를 들어보면, 왜 젊은 친구들이 힙합을 듣는지 알 수 있다. 꿈은 높지만 인생은 시궁창이라는 백인 래퍼의 강렬한 외침은 힙합이 지닌 모든 것을 들려준다.”
김태훈에게 묻는다. 랜덤 워크, 이대로 쭈욱?
| 질의응답 후에 다정한(!) 팬사인회가 이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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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많은 이야기들을 해주시는데 그 방대한 지식은 어떻게 기억하는가?
“정말 이 세상에는 나보다 많이 알고 많이 보고, 많이 배운 사람이 많다.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이는 게 두렵다. 다만 무엇인가 좋아하는 것만큼은 외우고 배우는 것과는 다른 것 같다. 학창 시절 때 암기 과목에는 상당히 약했지만, 나 역시 이런 것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기억할 수 있는 것 같다.”
이제까지 여러 장르, 다양한 세계를 마음껏 누려왔다. 앞으로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45세가 되는 때를 중간 점검 기간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제 막 학사를 졸업했으니 대학원 공부를 시작할 계획이다. 요즘에는 사진을 배우고 있다 중간 점검의 때가 오기 전까지는 지금처럼 살고 싶다.”
봉준호, 김기덕, 홍상수 작품 가운데 하나의 영화를 볼 수 있다면 누구의 영화를 선택하겠나?
“봉준호 감독의 작품을 선택하고 싶다. 이전의 영화와 다음 영화 사이에 변화 폭이 상당히 크기 때문이다. 비슷한 것보다는 새로운 경험을 추구한다.”
라디오 DJ를 다시 해볼 의향이 있나?
“음악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 DJ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이 나의 꿈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누군가 제의를 한다면 바로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