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메이트, 서로의 목소리를 확인하다
공감은 이런 거다.
사람과 사람, 마음과 마음을 가장 강하게 끌어당기는 접착제. 상대방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나서, 씨익 미소를 띄우고 “나도 그래”라고 한마디 담담하게 붙여주면 형성되는 추임새. 순간 같이 두근두근 따뜻해지는 마음의 상호작용을 유발함. 그리고 당신을 외롭게 하지 않을 최후의 명사.
당신의 이야기에, 상황에 긍정하는 아주 작은 몸짓이 주는 온기를 느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약간의 과장을 더해, 공감이 웃으며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까지 말하고 싶다.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함께 살 수 있고, 함께 있을 때 즐거운 것이다. 아무런 교집합도 없는 사람들의 마음, 생각과 말들은 상상만해도 삭막하기 그지 없다.
문학이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것도, 이 공감의 순간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동시대에 수억 명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당신에게 “나도 그래. 당신을 이해해”라는 말을 해줄 만한 사람이 곁에 없을 때, 수억 명보다 훨씬 많은 책들이 당신에게 대신 그렇게 말해줄 수 있다. (없다면, 그것은 발견하지 못한 것뿐이다.) 그때가 바로 문학이 우리를 위로하는 순간이다. 반대로, 우리가 문학을 외롭게 할 수도 있다. 책 한 권을 다 읽고도 감흥을 느끼지 못했거나, 그 어떤 추임새로 넣어주지 않을 때 이야기는, 문학은 외롭고 고독해진다.
| 세 번째 세계작가축제가 서울 중구 문학의 집에서 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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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 환상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소울메이트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책 한 권에 견고하게 쌓은 자신의 생각과 환상을 담아둔 작가는 독자들의 소울메이트인 셈. 물론 나와 딱 들어맞는 소울메이트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낯선 저자의 책장을 넘겨보고, 한번도 서 보지 않았던 서가 앞을 기웃거린다.
5월, 여름이 오기 전 싱그러움이 만개할 무렵 서울 문학의 집에서 특별한 만남이 이뤄졌다. 세계작가축제. 멀리서 마음만 교감하던 소울메이트들이 서로의 얼굴을 맞대고 목소리를 확인하는 자리가 마련된 것. 소울메이트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 ‘환상 공감’이 올해의 주제다. 이국의 언어로 전달되는 그들의 환상은, 문학이라는 세계 공용감각 속에서 충분히 독자들과 교감할 수 있었다.
주로 진행된 행사는 작가들의 낭독회였다. 아동작가/소설가/시인 그룹으로 나뉘어 독자들과 만남을 가졌다. 낭독회 후에는 주제를 두고 작가들의 수다가 진행되었다. 채널예스가 들른 5월 10일 서울 문학의 집에서는 소설가들이 “내 작품 속의 환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차례였다. 김애란, 하들그리뮈드 헬가손, 주오디아스, 박형서, 정찬, 레나 크론을 만날 수 있었다.
“환상은 결핍에서 비롯된다”
| 『달려라 아비』의 김애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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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생, 젊은 세대 이야기를 동시대의 감각으로 전해주는 김애란 작가가
『달려라, 아비』를 들고 먼저 무대에 올랐다. 분홍색 빤스를 입고, 지구 저 반대편까지 달리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러니까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부터, 2005년 한국일보문학상으로 이 소설이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아버지는 계속 달리고 있는 셈이다. “아버지는 항상 어딘가에 계셨지만, 그곳이 여기는 아니었다.” 문학 속에서 언제나 가정의 기둥으로 언제나 건재하고, 거대하던 아버지의 그림자는 이 작품에서부터 서서히 희미해져 갔다.
김애란 작가는 ‘작가와의 수다’에서 상상력이 부재로부터 출발한다고 말했다.
“상상이라는 말의 뿌리는 코끼리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코끼리가 없었던 아시아에서는 코끼리 뼈를 보고 상상하면서 이 말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부재로부터 상상력이 왔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뼈에서 시작해서 근육을 상상하고, 코를 붙이며 뼈의 바깥으로 상상을 확장해봅니다. 또 코끼리를 온종일 쳐다보면서 다시 뼈를 상상해보는, 상상을 하기도 합니다. 저는 대게 두 번째 방법으로 소설을 쓰는데, 삶이 얼마나 황홀한가, 동시에 얼마나 견딜 수 없는가 하는 지점에서 창작이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 『레이캬비크 101』의 하들그리뮈르 헬가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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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아이슬란드의 작가인 하들그리뮈르 헬가손이 무대에 올랐다. 화가로 활동하면서 국내 및 해외에서 많은 전시회를 열었으며, 스탠드업 코미디, 정치 토론 등 다방면에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다. 그는 영화화된 자신의 소설
『레이캬비크 101』의 한 대목을 낭독했다.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오직 방 안에 놓인 TV를 통해서만 세상과 소통하는 기괴한 백수의 이야기다. 낯설고 거친 언어와 기이한 상상으로 가득 찬 그의 소설은 ‘환상 공감’이라는 주제와 썩 잘 어울린다. 그는 대사의 분위기에 맞게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폈다 반복하며 실감나게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눈을 뜨면 나는 곧바로 일어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항상 어렵기만 하다. 마치 400년 전부터 침대 속에만 누워 있었던 것 마냥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면 여섯 개의 발로 흙을 헤집는 벌레처럼 버둥거린다. 매일 아침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눈을 뜨면 얇은 커튼을 통해 밝은 빛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라디오의 디지털 알람시계 숫자가 눈에 들어온다. 문득 그 숫자는 현재 시각이 아니라 연도 표시라는 생각이 든다. 헉, 1601년이다. 앞으로도 족히 400년은 더 지나서 태어나야 할 인간이 너무 일찍 눈을 떴다. 제기랄.
헬가손의 환상은 현실에 견고하게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작품 속에 스며있는 환상에 대한 이야기에서 이 점을 강조했다.
“판타지를 리얼리즘에 녹이려고 노력합니다. 현실 속의 이야기를 전달해야 설득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리얼리즘이지만, 인물의 주머니 속에는 판타지를 넣기 위해 노력합니다. 사실 삶이 그렇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믿을 수 있게 그려야 한다’는 것이 작가의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의 주노 디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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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으로 한국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주노 디아스도 문학의 집을 찾았다. 그의 표정은 특유의 문체만큼이나 짓궂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낭독을 모두가 이해하진 못했지만, 문장에 맞는 호흡과 말투로 낭독해서 독자들은 이야기의 분위기를 충분히 전달받을 수 있었다. 해외에서 온 독자들, 번역을 해주는 이어폰을 끼고 있는 독자들은 간간히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퓰리처상 수상작인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은 도미티카계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난 오스카와 그의 누나 롤라, 어머니와 할아버지 등 삼대에 걸친 데 레온 가족의 이야기다. 작가의 분신인 화자 유니오르는 재치 있고 통쾌한 말솜씨로 독자와 평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가족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정치사와 개인사로 이어지고,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내며 감동까지 선사한다.
일년 내내 엄마와 나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떻게 좋을 수가 있겠는가? 그녀는 구시대의 도미니카 엄마였고, 나는 그런 그녀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키운 하나뿐인 딸이었으며, 그건 나를 발로 짓밟는 게 그녀의 의무라는 뜻인 것을. 나는 열네 살이었고, 손바닥만 한 것이라도 엄마와 관계없는 나만의 세상을 절망적으로 원했다. 나는 어린 시절 텔레비전에서 봤던 <빅 블루 마블>에 나오는 그런 삶을, 펜팔을 하고 학교에서 세계지도를 빌려오는 그런 삶을 원했다. 패터슨을 넘어, 가족을 넘어, 스페인어를 넘어 존재하는 삶을. 엄마가 아프게 되자마자 나는 그럴 기회를 포착했고, 이에 대해 꾸미거나 사과할 생각은 없다. 기회가 눈에 보였고, 나는 그걸 잡았다. 당신이 나처럼 자라지 않았다면 알지 못할 것이고, 알지 못하면 함부로 단죄하지 말라. 우리네 어머니들이, 곁에 있은 적이 없는 어머니들까지, 아니 특히 그런 어머니들이 우리를 얼마나 옥죄는지 당신은 알지 못한다.
주노 디아스에게 있어 언제나 가족, 가족사는 중요한 이야깃거리다. 이는 실제 가족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저녁 식사를 할 때는 3세대 이상이 식탁에 모이게 됩니다. 이때 할머니와 엄마, 저 이렇게 3세대는 마치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 같습니다. 어머니는 완전히 실증주의고, 할머니의 세계는 판타지입니다. 할머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세계를 진지하게 믿습니다. 어머니는 이런 할머니를 결코 이해할 수가 없고요. 제 소설은 이런 각 세계관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그려내려고 했습니다. 같은 밥상에 앉은 사람들의 세계가 서로에게 그림자로 드리워지지 않고, 동시적으로 병존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 「날개」의 박형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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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의 박형서 작가님도 만날 수 있었다. 주인공은 지금으로부터 170년 후의 식민지 행성에 사는 여자와 그 여자를 사랑한 거인의 이야기를 써 나간다.
아무튼 그 일과 상관없이 나는 미래를 볼 수 있다. 이제부터 내가 이야기 할 미래는 170년 후, 그러니까 제정신인 사람들은 모두 태양계 밖으로 빠져나가고 지구는 방사능과 바퀴벌레와 프리메이슨의 소굴이 된 서기 2175년도다. 인류는 지구를 보호하는 데 실패했고 그 실패를 교훈 삼아 맹렬한 속도로 우주를 더럽히는 중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나로선 알 길이 없다. 그들의 행태를 볼 수 있지만 그들의 과학을 이해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 시대 대다수의 사람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과학은 언제나 극소수만을 위한 예술인 법이다.
박형서 작가는
“환상 그 자체를 즐기는 방식이 있고, 현실이 비루하고 시시하기 때문에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저는 에둘러 말하는 방법으로 환상을 사용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정찬 작가는
“환상이란 실제와 꿈의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 같은 것”이라며,
“다리 그 자체가 문학이 아닐지, 현실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결핍 때문에 여기 없는 것을 그리워하기 마련입니다. 그 상상의 다리를 물질화, 시각화하는 일이 소설쓰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라고 말했고, 이어 레나 크론은
“판타지라고 하더라도 그 뿌리는 반드시 현실 속에 두어야 한다. 우리의 현실이 꿈 속에서도 공유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작가들은 판타지 역시 현실에서 기인해야 설득력을 갖추게 되고, 그 환상은 현실 속 결핍에서 자극 된다는 데에 동의했다.
| 이어 진행된 작가와의 수다. 왼쪽부터 정찬, 주오 디아스, 박형서, 하들그리뮈르 헬가손, 김애란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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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간 진행된 세 번째 세계작가축제에서는 작가들의 낭독회 외에도, 서울국제도서전 방문 및 사인회, 전주 한옥마을 체험 등이 함께 진행되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문학축제로 거듭나자는 기약과 함께 올해의 행사는 14일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