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한때 꽂혔다. 이 드라마, <외과의사 봉달희>. 대개의 의학 드라마에 화살을 꽂고야 마는 나의 취향은 둘째 치고, 의사 봉달희가 좋았던 건 의사에겐 치명적일 서투름을 넘어서는 뜨거움 때문이었다. 그녀는 뜨겁고 또 뜨거웠다. 환자 앞에서, 사람 앞에서 그랬다. 그는, 늘 자문하고 있었다. 사람의 온도 36.5도.
사람의 가슴 한가운데는
쉼 없이 펌프질을 해대는 뜨거운 심장이 있고,
사람이 온몸 구석구석에는
36.5도의 따뜻한 피가 흐른다.
심장이 멎고 피가 차가워지면
사람은 죽는다.
사람의 피가 36.5도인 이유는
적어도 그만큼은 뜨거워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만큼 뜨거운 사람인가?
- <외과의사 봉달희> 중에서
그리고 이후, 36.5도를 말하는 사람, 만났다. 책을 낸 그에게,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는 그에게, 나는 물었었다. 저자로서 책이 품고 있는 욕망의 온도는? 그러니까, 우문현답. 그는 36.5도라고 했다. 그 욕망, 인간 본연이 가진, 기본적인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두가 가진 것이며, 장애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뜨거울 수 있는 존재라고 그는 말했다. (
☞ 인터뷰 보러 가기)
지난 5월 18일. 5*18이었다. 더구나 그날은, 5*18 광주민주화 항쟁이 일어난 지 30년이 되는 날. 비가 왔고, 베르베르가 한국을 방한해 독자들과 만났고, 김연아도 뜬 날이었다. 어이없는 소식도 날아왔다. 5?18 묘역에선 「임을 위한 행진곡」이 「방아타령」으로 바뀌었고, 집권당의 돈이 마구마구 덤비는 대표께서는 5?18 30년을 향해 근조화환이 아닌 축하화환을 보낸 웃지 못할 해프닝. 이런 쿨함을 봤나. 자기들 취향(?)과 감각에 맞지 않는다고 그리 과감한 행동들을 불사하시다니. 아니면, 열폭(열등감 폭발)인가. 여하튼 정신줄 놓고 사는 높으신 분들의 정신적 장애를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는 우리들. 그런 날.
강남의 한 모임공간에서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김원영 지음|푸른숲 펴냄)의 저자 강연회가 열렸다. 36.5도 인간의 온도를 지닌 책을 펴낸 그 사람, 김원영. 가난과 질병과 장애를 지닌 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야한 이야기를 건넨, 그를 다시 만났다.
같은 책, 같은 저자, 뭐가 다를까 싶겠지만, 나는 달랐다. 이전의 그와 이날의 그는 다른 콘텐츠를 지닌, 같지만 다른 사람이었다. 그 현장과 뜨거움을 온전하게 전하기엔 나의 필력이 저렴하지만, 그래도 함께 들어봐 줬으면 좋겠다. 주체적인 자각에 의한 욕망을 원하는 당신이라면, 노예 혹은 낙타가 되기 싫은 당신이라면.
아, 낙타가 뭐냐고? 얼마 전에 읽었던 한 책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별’은 거짓이라고. 그건 우리 스스로의 생각이 아니라 세상이 우리에게 주입한 생각이라고. 정말 무지한 것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주입된 생각을 자신의 생각이라고 맹신하는 것이라고. 그건 주인이 주입해준 생각과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짐을 지고 걸어갈 뿐인 낙타 같은 자들의 것이라고.
이하, 낙타가 아닌 주인이고픈 김원영이 전하는 책과 나, 그리고 우리들.
(※ 강연 내용을 맥락에 지장 없이 약간 재구성한 부분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김원영, 나를 응시하다
나, 김원영.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를 낸 것은 새롭고 재밌는 경험이었다. 책은, 이런 독법을 제시하고 싶다. 각자 가지고 있는 틀로 텍스트 흡수하기. 아마, 이 책은 다양한 방법으로 읽힐 것이다. 어떤 분들은 장애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으로 가져가고, 어떤 분은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기도 할 것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읽히는 책이 됐으면 좋겠다.
나는 이 책을 통해, “희망의 증거가 될 생각은 없”다. ‘장애 극복’이라는 이름으로 희망을 심어주고자 하는 책과 다르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다르다. 제목에서도 그 의지는 분명하잖나.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편집자가 제시했던 제목이다. 처음에는 썩 맘에 들지 않았다. 길고 외우기도 쉽지 않았다. 줄여서 말하기도 어렵다. 차뜨? 우습잖나. 하하. 그렇지만 지금은 마음에 든다. 적절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제목을 놓고 오해가 있다. 뜨거움에 대한 오해가 그것이다. 열정이라는 단어를 쓰긴 했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일부 언론에서도 열정을 가진 20대 청년, 뜨거운 20대 청년이라고 말하고, 그런 분들도 여기에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뜻에서의 뜨거운 사람이 아니다. 가령, 한비야 씨. 뜨겁다. 열정이 있고 쉬지 않고 뭔가 배우고 도전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그렇지 않다. 외려 싱겁다. 항상 뭔가를 하지도 않고, 휴일이 되면 <신데렐라 언니>를 다운 받아서 본다.(웃음)
내가 말한 뜨거움은, 바쁘게 사는 것, 치열하게 사는 것, 열심히 자기계발하고 도전하는 것과 관계가 없다.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거다. 모든 인간은 욕망을 갖고 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욕망을 가진 뜨거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는 어떤가. 쿨함이 대세란다. 그 쿨함엔, 진짜 욕망이 없다. 시대나 사회가 강요하는 가치가 자신의 욕망인 양, 그대로 따를 뿐이다.
자기계발을 해야 한다고? 물론 뜨거울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이 가진 한계를 느끼고, 쿨함이 아닌 핫함을 얘기하고 싶었다. 자기계발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진짜 뭘 원하고 어떤 사람인지를 정면으로 응시하게 하는, 뜨거움이다.
물론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가 뭘 원하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응시하지 않는다. 나도 한때 장애를 극복한 책을 쓰고는,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당장 집에 가서 시작하십시오’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치열함은 내가 가진 문제를 회피하는 거지, 정면으로 응시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 필요한 건 뭐? 스스로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실천! 다시 말하지만, 나는 장애인이다. 그것은 중요한 자각이자 선언이다. 장애를 바라보고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내 삶에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 고민했다. 이 책은 그 고민의 결과물이다. 물론, 아직 완성된 것은 없지만, 그 실천의 하나로 이 책을 썼다.
나는 “절대로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진실이 아니라며 부정하기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힘으로 어찌해보려는 시도, 그 시도 자체를 찬양하기로 했다.(p.206)
자신의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드는 법
장애를 개인적인 것이라 일컫지만 그렇지 않다. 장애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고통이나 욕망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했고, 그것을 해결한 상태는 아니다. 지금도 그런 것들은 내 삶을 규정하고 있으며, 일정하게 내 결핍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말한 욕망은, 열정은, 뜨거움은, 이런 것이다. 내가 가진 본연을 직시하고 그것을 통해 자유로 나아가는 것.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자유가 뭐냐. 그것에 대해서도 얘기를 하고 싶다. 책에서도 쓰긴 했지만, 충분하게 쓰진 않았으니까.
커밍아웃하자면, 나는 운명론자다. 신이 있으면 좋겠지만, 있다고 믿지 않는다.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다. 신이 없다고 가정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된 것은, 우연히 서점에 들러 책을 샀고, 하필 연인과의 약속이 취소됐기 때문이다. 즉, 인과적 고의에 의해 나한테 온 것이다. 여기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도, 인과적인 결과고.
재밌지 않나. 아주 작은 것이 연결돼서 이렇게 된 것. 나는 우리 삶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다면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럼 우리의 자유는 어떻게 되는 거냐. 다 결정된 거고, 판단했다고 생각한 것조차 결과론이면, 내가 생각한 것은 뭐냐. 미궁이다.
내가 생각하는 자유란 이런 거다. 어떤 사건이 일어난 다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자유. 다시 말하면, 카드놀이 하는데, 엄마랑 싸운 카드가 나왔다. 다음 카드가 왔는데, 연인을 만나는 카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뭐냐. 무작위로 나온 카드 중에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거다. 엄마랑 싸우지 않았다면 연인을 만날 수 있었을까, 등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내 삶은 21세기까지 인류가 추구해온 혹은 한국 사회가 추구해온 자유를 향한 모든 열망의 작은 결실이다. 진작 죽었을지 모를 혹은 아무도 돌아봐주지 않는 작은 방에 버려졌을지 모를 나에게 주어진 삶의 이 거대한 기회들은 그 자체로 자유다. 그런 만큼 나는 이 자유의 육중한 무게 또한 분명하게 느낀다.(p.245)
이 책도 그렇게 쓰인 것이다. 책 내용은 실제로 다 있었던 일이지만, 당시에 그만큼 의미를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다. 사건 하나하나 실제로 일어났지만, 그걸 관통하는 이야기는 내가 만든 것이다. 그때그때 일이 있을 때마다 의미를 부여했고, 다른 의미를 찾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한 것이다.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고, 각자 이야기가 특별한 것이다.
한비야 씨가 특별한 것은, 당시 여자가 외국에 나가기가 쉽지 않을 때, 외국에 나가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든 것이다. 누군가 지금 한비야처럼 하는 것은, 하나의 스펙을 쌓는 것이다. 이미 그것은 한비야의 이야기가 됐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의미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만으론 우리만의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 수 없다는 거다.
책을 보면 많은 친구들이 나온다. 그런 친구들을 만난 것은 굉장히 우연이지만, 어찌 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걸 있어 보이게 만든 건 내가 한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내가 가진 것을 특별하게 이야기한 것이다. 나는 나만의 특별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내게 일어난 사건에 사회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그건 내가 선택하고 만들어낸 것이다.
한 서평에 이래놨더라. ‘각 장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이어진 경험들이 독특한 삶을 만들었다.’ 그걸 독특하다고 한다면, 그건 경험 이후에 내가 부여한 의미 때문이다. 사건 하나하나가 다른 이에게 일어나지 않을 특별한 것은 아니다.
『스토리가 스펙을 이긴다』는 책이 있더라. 제목만 봤는데, 그런 얘기 같다. 토익보다 자기만의 커리어 만드는 것이 취업에 도움이 되고 스펙보다 중요하다. 나는 그것에 동의한다. 다만, 하나의 이야길 스펙으로 치환한다는 건 맘에 들지 않는다.
책에도 썼지만, 로스쿨에 들어갈 때 나는 저소득층이나 장애인 전형에서 떨어졌다. 그래서 일반 전형으로 다시 지원했다. 긴 면접을 보는 기회. 대단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나는 스펙이랄 게 없었다. 학부에서 별로 알아주지 않는 기초학문을 전공했고, 영어도 못하며, 토익 점수도 없지. 그런데, 책에 쓴 것처럼, 심사위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 경험들이 있어서 공정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내 생각인데, 그게 일정 부분 점수를 받지 않았을까.
자신의 몸을 들여다보라
우리 생각과 달리, 근대사회로 오면서 장애인의 삶은 결코 더 나아지진 않았다. 농경 커뮤니티에선 나름 역할을 했던 장애인이었지만, 공장 중심의 도시에 살면서 장애인들이 소외됐고 할 일을 잃었다. 사회도 장애인을 분리시켰다. 산업화된 현대사회에서 장애인은 노동할 수 없는 몸으로 치부됐다. 이른바 잉여인간. 쓰레기로 치부됐지만, 사회의 도덕적 감정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다. 그랬기에 자신의 삶에, 자기 몸에 의미를 부여한 것은 장애인 스스로였고, 장애인 가족이었다. 그러면서 이 사람들이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획득하게 됐다.
인권을 얘기하지만, 따져보라. 인권의 근거가 있냐. 사람이 동물하고 다른 점? 인권은 전혀 근거가 없다. 종교가 있으면 몰라도, 종교 없는 사람은 인권의 근거가 없다. 심지어 장애인은 더더욱 그 근거가 없다. 애초 장애라는 운명이 있었는데,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고, 실천을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온 것이다. 그러니, 나는 책을 통해 장애를 가진 몸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그 의미, 스스로 찾은 것이기도 하지만, 이전에 많은 장애인들이 만들어온 것이다. 나는 그것을 가져 온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운명론자일 수밖에 없다. 우리 몸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최근 인류학 연구 등을 보면, 인간은 상대적이지 않다. 어느 정도 학습되지만, 상당 부분 갖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 자체로 진리인 것은 아니지만, 설득력을 갖고 있다.
그런 면에서, 장애를 가진 몸은 장애를 둘러싼 사회구성주의 시각을 증명함과 동시에 덜 매력적으로 보이기 쉽고 덜 쓸모 있게 보일 수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장애인 운동가들은 사후적으로 의미를 부여했고, 실천을 함으로써, 많은 부분이 실현되는 사회를 만들었다. 나는 그런 실천의 일부로 가담하고 싶었다. 내 몸이 운명적으로 정해진 것일 수도 있지만, 사후적으로 섹시할 수 있고,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
사실 다른 것보다 장애인의 몸은 타고나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직시하는 것은 굉장히 슬픈 일이면서 가끔씩 비관적일 수 있다. 하지만, 몸을 증명하는 것은 우리 운명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 운명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서 우리만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그러니까, 책이 모든 인간의 몸에 대해 얘기하고 장애인의 몸에 대해 얘기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신체적 매력이 사회적 지위를 좌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 건강하고 매력적인 신체를 가진 인간은 모든 것을 얻는다. 반면 그렇지 않은 인간은 아무것도 갖지 못한다.(p.188)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일부 서평에 적힌 이런 얘기다. 모르는 그들의 삶에, 세계를 알게 됐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됐다는 식의. 나는 ‘그들’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우리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우리’가 아닌 ‘그들’의 얘기로 생각했고, 어떻게 해줄 것인지로 수용한 것은 내가 서술을 잘 못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아쉽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장애와 비장애인의 몸은 그 경계가 불분명하고, 우리는 많은 공통의 주제를 갖고 있고, 다 똑같다는 것이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얘기다. 사회과학대 학생들은 사회적 의식이 강하다는 프라이드가 있어서, 소수자나 약자에 대해 신입생과 재학생이 얘기하는 시간을 갖는다. 신입생으로 가서 얘기를 듣는데, 친구랑 선배랑 이렇게 얘기하는 거다. ‘우리는 그들에게 어떻게 해줘야 합니까.’ 거기 있는 나는, ‘우리’인지 ‘그들’인지 모르겠더라. 신문 사설 등도 마찬가지다. 장애인의 날 사설을 보면 이렇게 얘기한다. 그들의 삶에 눈을 돌려야 한다. 읽고 있는 사람 중에 장애인도 있을 텐데, 장애인을 타자로 보는 시선들이 만연해 있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내 책에선 그렇게 얘기되는 게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불가피하게 ‘그들’이라고 쓴 적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우리’라는 말 안에 포함시켰다.
하고 싶은 얘기는 결국 이거다. 각자가 갖고 태어난 스스로의 몸을 직시하고 각성을 했으면 좋겠다. 그 각성이, 장애인도 그런 몸을 갖고 사는데 나도 열심히 살자는 각성이 아니다. 장애인 이야기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 모두 불완전한 몸을 갖고 있고, 불평등한 운명이지만, 그럼에도 함께 연대를 만들어가면서 각자 고유한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읽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되면 각자 고유한 이야기는 다른 사람과 만나 더욱 고유해질 수 있다.
모든 인류는 질병에 상시적으로 노출되며, 노인이 되면 결국 ‘장애’라고 공인될 정도의 몸 상태로 변화한다. 이 모든 것이 ‘비정상적인 일탈’이라고 규정되고, 제거되어야 할 상태가 된다면 인간은 자기 몸을 긍정할 순간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 우리의 몸이 사실상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장애와 질병을 소거하거나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관점이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의 협력, 몸의 특별한 운용 방식에 대한 관용과 유연한 인식이야말로 질병과 장애를 건강이라는 단어의 대척점에 서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pp.140~141)
책에 나온 혜원 누나, 한 달 전에 결혼했다. 결혼식에 갔었다. 누나는 장애와 관계없이 살던 사람이었는데, 나를 만나서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고, 실제로 우린 특별한 사이가 됐다. 혜원 누나의 결혼식에 내가 있는 풍경도 괜찮았다. 하객 중에도 내 책을 읽은 사람도 있고. 특별한 결혼식이었다. 별것 아닌 만남일 수 있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는 노력들이 우리의 삶을 이야기로 만들고, 책도 만들 수도 있고, 이런 특별한 기회도 생기게 하는 것이다. 책을 보고 장애인 문제에 대해 현실적인 감각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고, 그것을 의도하기도 했지만, 거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고 각자에게 특별한 책이 됐으면 좋겠다. 또 오늘 와 준 것도 특별한 관계가 되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
질문과 답변의 시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를 꼽으라면.
“음, 어려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어머니다. 내겐, 인생의 부채이기도 하다. 일본의 배우이자 작가인 기타노 다케시는 ‘가족은, 남들이 보지 않으면 어딘가 갖다버리고 싶은 것’이라고 했지만, 내겐 그렇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 삶에 일정한 질서를 만들어줬다. 난 무질서한 인간이데, 최소한의 질서를 잡은 것도 어머니 덕분이다. 피를 나누고 성장기를 나눈 엄마로서도 의미가 있지만, 어머니는 내가 최소한의 사회적인 삶을 살도록 만들었다.
그 다음으로 연극. 장르로서의 연극이 아니고, 나는 극적인 인간이고 싶다. 드라마틱한 삶을 살고 싶다. 여기 와서도 퍼포먼스 해야 하나, 생각도 했는데…….(웃음) 모든 드라마는 결핍이 있어야 한다. 완벽하면 드라마가 없다. 재벌도 아버지에게 버림받아야 하고.(웃음) 극적인 삶에 관심이 있다. 그런 면에서 연극을 좋아하고 연극적으로 사는 것을 좋아해서, 일종의 삶의 태도로서 (연극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일반적으로는 누구도 기회를 주지 않는 현실에서 누군가 내게 기회를 주고, 그 안에 잠재된 가능성을 연대와 창의성으로 이끌어내 새로운 삶을 창안하는 방식. 그것은 내 삶에서 기적처럼 실현된 많은 일들과 그 일을 함께 실현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p.234)
세 번째는, 내 방에 있는 책이 중요하다. 평생의 내 재산이라 생각하고 그래서 중요하다. 다른 건 잃을 게 없다. 내가 가진 게 없어서. 그렇게 세 가지를 들겠다.”
비장애인이 보기엔 가족이나 친지 중에 장애인이 없으면, 장애-비장애 나누지 않고 우리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힘들지 않나하는 생각도 든다. 비장애인이 어떤 마인드를 갖고 있으면 좋겠나.
“인식의 전환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쉽지 않은 문제다. 실천적 차원에서는 역시 장애인이 (사회에) 많이 등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라는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캠페인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정책, 교육 등 적극적인 액션이 필요하다. 한 집단에 장애인이 들어오면 한 사람이 추가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그 커뮤니티 자체가 변화를 겪게 된다. 장애인이 그렇게 사회적인 커뮤니티에 접속하는 것이 중요하고, 꼭 필요하다. 비장애인이 그걸 어떻게 하겠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그런 면에서 통합 교육이 중요하다. 통합된 공간에서 분리된 특수교육은 한계가 있다. 실천적 차원에서 필요하고, 이분법에서도 자유로워져야 한다. 장애-비장애인의 몸이 분리돼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많지만, 한쪽 팔을 잃은 사람과 저는 장애인으로 분류되지만, 어느 쪽 몸의 경험이 큰가를 생각하면 팔 없는 사람은, 비장애인에 가깝다. 신체장애와 지적장애 사이에도 갭이 크다. 몸의 경험만 놓고 보면, 장애도 스펙트럼이 넓고 장애인 간의 차이가 비장애인의 그것보다 큰 경우가 많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하나씩 신체적인 제약이 가해질 것이다. 2PM과 같은 상징화된 몸에 대해서 보고 그것에 대해서만 생각해서, 장애인의 고통을 다루는 경향이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 각자가 가진 몸을 직시해보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 경험이 장애인을 타자로 취급하는 지금의 태도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장애를 가진 아이는 따로 교육을 받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장애아들이 일반 교육 기관에서 자신의 아이와 함께 교육받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한다. 혹여 착한 내 아이가 그 아이를 돕다가 다치지는 않을까, 자기 공부를 제대로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극단적인 경우는 장애아의 행동을 따라 하지는 않을까 염려한다.(p.93)
‘장애우’라는 단어 어떻게 써야 하나.
“책에 썼다. 부록을 읽어야 한다.(웃음) ‘장애우’라는 단어 사용을 놓고 논쟁이 있는데,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장애우라는 말이 처음 도입된 의도는, ‘장애인’이라는 말에 부정적인 의미가 있으니, 친구라는 말을 넣어서 친숙한 개념으로 만들자며 90년대 초부터 도입됐다. 처음에는 그렇게 긍정적인 의미가 있었지만, 이후 비판이 나왔다.
장애우는 3인칭이다. 스스로를 지칭하는데 쓸 수가 없다. 만약, “저는 장애우입니다” 이러면 ‘저는 장애인 친구예요’라는 뜻이잖나. 그렇게 장애우라는 말이 3인칭이라서 주체적으로 지칭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비판이 있었고, 그래서 지양됐다. 다만 아직도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체적으로 장애인 담론에서는 이 말을 쓰지 않으려고 한다. 안 쓰는 편이 좋겠다. 쓰면 안 된다는 아니고 지양했으면 한다.”
게다가 나이에 따라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선배가 될 수도 있는 우리나라 문화를 생각해볼 때 여든 살 먹은 노인을 소개할 때도 ‘장애우’라는 말을 쓸 수 있을지 의문이다.(p.272)
어떤 말을 사용하든 뭐가 그리 큰 문제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우리 의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소수 집단들이 단어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성찰하고, 올바르게 사용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장애인’이 언제까지나 가장 적절한 말일 수는 없을 것이다. 고민은 계속 되어야 한다. 다만 지금 단계에서는 이것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작지만 큰 힘을 갖는 실천이다.(p.273)
책 좋아한다고 했는데, 얼마나 소장하고 있나. 최근 읽은 책 가운데 기억에 남고 추천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만 권쯤 돼야 자랑스럽게 얘기하는데…… 한 천 권은 넘는 것 같고 2천 권은 안 될 것 같다. 대부분 대학 때 읽었다. 물론 다 읽진 않았다. ‘물질로서의 책’을 좋아한다. 그런데 로스쿨의 정해진 커리큘럼에 따르다 보니, 지금은 책 읽을 시간이 별로 없다. 점점 단순화되고 있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 『욕쟁이 예수』가 좋았다. 기독교인이 쓴 책인데, 사회적 차별에 분노하지 않고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한국 기독교에 대한 비판하고 분노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 책이 내 책의 마지막에 썼던 분노나 증오에 맞닿아 있다. 그 밖에 읽은 거라면 민사소송법, 민법총칙 같은…….(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