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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너비 토크]솔직한 나를 만나다 - 『에펠탑의 핑크리본』 배우리

‘실패에 대해 미리 걱정하기보다는 닥치면 할 수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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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지만 사건을 겪은 장소가 ‘파리’이고, 그 큰일이라는 게 ‘유방암’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책은 한국에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현재 진행형인 이야기다.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문화와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건축물을 보노라면 황홀해진다. 재래시장에 가득 쌓아 놓은 열대과일과 활기찬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특히 여행을 통해 새로운 나를 만나는 재미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낯선 땅에 서면, 그동안 도덕과 규범에 갇혀 있던 또 다른 내가 불쑥 튀어나온다. 새로운 나는 뻔뻔하고 당당해 썩 마음에 든다. 새로운 나는 네팔왕국 안나푸르나를 오를 때에는 남자 장정을 이기는 강철 체력을 선보였으며,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의 허물어진 석상 앞에서 만난 프랑스 중년 부부와는 ‘불어’로 다정한 안부 인사를 주고받기도 했다. 불어라니! 고백건대 내 불어 실력은 고등학생 때 제2외국어로 배운 것이 전부라서, 종잇장같이 얄팍하기만 하다. 중국인을 만나서는 그간 <영웅본색> <포청천>을 비롯해 각종 무협드라마로 익혀 뒀던 몇 마디를 나름 북경어, 광둥어 버전을 달리해 주절댔으니! 한국에서는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짓거리’다.

그래서 아쉽다. 시간 부족으로, 물론 대부분은 금전 부족으로 충분한 여행을 즐기지 못했다. 12박 13일, 혹은 5박 6일 일정을 뒤로하고 다시 찾아올 것이란 기약 없는 약속을 남기고 돌아올 뿐이다. 그런 나였기에, 『에펠탑의 핑크 리본』 저자 강연회에서 만난 저자의 한마디는 꽤나 큰 충격이었다.

“나의 일상이 있는 곳에, 더 이상 설렘은 없다”


동글동글한 비행기와 귀여운 에펠탑이 그려진 책을 들고, 홍대 앞 소극장을 찾았다. 음향기구로 반쯤 차 있고, 남은 자리에 30개 의자가 빼곡히 놓인 그곳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작가를 기다렸다. 그녀에 대한 정보는 YES24 홈페이지에서 강연회 관련해서 본 몇 줄뿐. 아무런 정보 없이 새로운 작가를 만나는 순수한 즐거움을 한껏 즐길 참이었다. 심장에서 시작된 떨림은 손끝까지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검고 풍성한 라인의 옷을 입은 작가는 박수를 받으며 입장했다. 그리고 쑥스러운 듯,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으니,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진행하고 싶다고 했다. 조심스럽게 관객석 이곳저곳에서 손을 들었다.

“젊은 나이에 암이라는 진단을 받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처음 암 진단 받았을 때 기분이 어땠나요?” 허걱. 암이라니. 머릿속을 휘저어보니 저자 소개란에 유방암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처음부터 너무 센 거 아니야? 조신하고 예의바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작가의 대답은 길지 않았다. “너무 급작스럽게 닥쳐서 슬펐다기보다는, 씩씩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오히려 치료 이후가 더 힘들어서 글을 쓰며 정리했던 것 같아요”

“프랑스 유학 초반 준비는 어땠나요?” 30대 중반을 갓 넘긴 듯한 여성이 질문했다. 그 여성의 얼굴에는 ‘지금 일이 너무 힘들고, 변화를 주고 싶어 유학을 가려고 하는데 국가를 알아보고 있는 중이에요. 프랑스는 어떤가요?’라고 쓰여 있는 것 같았다. 왠지 대형 학원에서 주최하는 고교입시 설명회에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질문에 대한 답변 끝에 나온 작가의 몇 마디가 내 마음을 쳤다. “나의 일상이 있는 곳에는 더 이상의 설렘이 없다. 단지 무엇을 하고,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있느냐에 따라서 의미를 가지는 것.”

실패에 대한 걱정은 그만, ‘아님 말고’ 정신으로!


화려한 런웨이를 동경하는 사람이 많다. TV나 영화에서 비춰지는 모습만 보고 나라에 대한 편견을 평생 간직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다. 프랑스 파리는 무엇보다도 문화?예술 분야의 변함없는 1번지이다.

배우리 작가는 대학 3학년 때 별 준비 없이 프랑스 유학을 결정했다. 그녀의 말을 따르면 “배낭여행 당시의 느낌이 좋고, 새로운 언어를 배울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다고. 그러나 영어를 썩 잘했기에 금방 언어에 적응할 수 있다고 믿었던 자만심이 철저하게 부서졌다. 신문과 잡지를 닥치는 대로 읽고, 받아쓰기와 친구들의 도움으로 프랑스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그녀가 고백하는 프랑스어 실력이라는 게, 본토 파리지엔들도 문서 감수를 요청할 정도로 정확했다고 하니, 담담한 말에 담겨 있는 피나는 노력이 얼핏 보였다.

막연하게 ‘영화 공부한 멋진 여성’을 동경하며 떠난 프랑스에서 벌써 13년, 꿋꿋하게 살아온 작가. 패션계에 관심도 없진 않았지만 10년째 통신원을 한다는 배우리. 현지 사람들을 제치고 <아멜리에>를 제작한 유명 영화사에 입사한 그녀. 기회비용을 골치 아프게 따지고, 실패에 대해 미리 걱정하기보다는 닥치면 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배우리 작가. 그녀의 ‘아님 말고!’ 힘의 결정체는 유방암 극복이었다.

나 자신에 솔직한 삶을 살자


오른쪽 가슴에 어설픈 화학 사과향이 나는 샤워젤을 묻히던 내 손에 묵직한 무언가가 느껴진 것은 소소한 일상을 즐기던 그 봄의 끝자락 5월 말이었다. 탁구공만 한 뭔가가 만져진다. 재빨리 왼쪽 가슴을 더듬어봤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왠지 왼쪽에도 마찬가지로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자리해 있다면 이 오른쪽 탁구공은 평범한 유방 조직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왼쪽 가슴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상.하.다.(pp.15~16)

『에펠탑의 핑크 리본』 앞 몇 줄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책의 대부분은 유방암 투병기에 할애했다. 우연히 가슴 위 멍울을 발견하고 찾은 병원에서 암 확진을 받고,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거쳐 유방암을 극복한 여성의 이야기. 한국 여성의 암 발병 1위는 유방암이고, 완치율은 높다. 한국 유방암 환자의 평균 연령은 40대 후반이지만, 20~30대 젊은 여성의 비율이 25%를 차지한다고 하니, 가족과 떨어져 외국에서 홀로 치료를 받은 경험 정도가 조금 색다를 수 있겠다.

프랑스는 완벽한 의료시스템을 자랑한다. 파리의 대형 영화사에서 일하고 있던 작가의 모든 암 치료 비용을 국가에서 지원했다. 항암치료로 밀어버린 머리카락을 대신할 가발까지도 지원한다. 작가 스스로도 거리 한복판에서 지나가는 파리지엔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 했다. 암 확진부터 치료의 모든 과정을 작가는 담담하게 적어나간다. 너무 씩씩해서 나도 그녀가 철의 여인이라 믿을 뻔했다. 마지막 몇 페이지를 넘기기 전까지는.

다시 건강해지고 남자친구와 헤어진 그녀는 조금 우울했다. 그런데 어느 누구와 시간을 보내도 허전했다. 그 마음을 달래기 위해 쓰기 시작한 일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어질러진 집안 같은 머릿속도 조금씩 정리가 됐다. 그리고 자신이 쓴 일기를 찬찬히 읽어보던 어느 날 밤. 그녀는 발견했다. 일기 속에 담긴 자신의 모습조차 ‘남들 앞에 당당하려 했던’ 스스로의 파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만을 위해 쓴 일기에서조차, 상처 위에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인 것이 슬펐다. 젊은 나이에 유방암이라는 죽음의 가능성을 만나고, 직장과 남자친구를 떠나보내며 배우리의 인생은 나침반을 잃은 탐험 대원과 같아졌다. 어디쯤 서 있는지, 그리고 인생이 어디로 흘러갈 지 감도 잡지 못한 상태에서 그녀는 여전히 본인에게 긍정적인 마인드를 무의식 중에 강요하고 있었다. 한번 실컷 울어도 될 텐데…… 이 씩씩한 여인은 멋진 스카프를 가발 위에 두른 채 언제나 웃고 있었다.


내 안의 상처들은 모조리 모른 척하면서 괜찮다고 말만 하다 보면 그냥 사라지는 것인 줄 알았다. 치료가 끝나면 한 번도 슬퍼 본 적 없는 듯이 행복한 웃음만 날리며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행복한 미래 속에 내가 이 유방암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남들의 단점이 뭔지를 궁금해하는 과정은 존재하지 않았다.(p.255)

글을 쓰면서 반창고를 살살 떼어내고 상처를 살폈다는 그녀. 스스로를 위해 실컷 울고 웃어주고 나서야 일상 속에 들어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또 ‘담담하게’ 말한다. 배우리 작가는 강한 사람이다. 조기 폐경과 가슴 절제 가능성, 어찌 보면 여자로선 가장 견디기 힘든 병을 치료할 때는 하루하루 당당하게 버텼다. 가끔 친구들의 ‘괜찮아’라는 위로에 울컥하고, 거울에 비치는 민머리에 마음이 아팠지만 꿋꿋하게 견뎠다. 가여운 자신을 인정하면 모든 것이 무너질까봐. 걷잡을 수도 없이 마음이 거센 파도에 휩쓸릴까 봐, 살짝 반창고로 상처를 덮었다. 그리고 치료가 끝난 후. 다시 건강해진 모습으로 반창고를 살살 떼어냈다. 치료 순간순간의 마음의 상처에 호호 입김을 불었다. 그리고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다시 건강을 되찾았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시 한 편이 떠오른다.

손을 베었다
붉은 피가 오래 참았다는 듯
세상의 푸른 동맥 속으로 뚝뚝 흘러내렸다
잘되었다
며칠 그 상처와 놀겠다
일회용 밴드를 묶다 다시 풀고 상처를 혀로 쓰다듬고
딱지를 떼어 다시 덧나게 하고
군것질하듯 야금야금 상처를 화나게 하겠다
- 신달자, 「열애」 중에서


나는 엄살이 심한 편이다. 엄마 손에 이끌려 예방접종하러 보건소에 가서는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한 시간 동안 울고 발버둥을 쳐야 기진맥진해서는 주사를 맞을 수 있었다. 신종플루가 유행일 땐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열이 심한 것 같아 득달같이 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체온계에 뜬 36.0도라는 평소보다 낮은 숫자에 묵묵히 사무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이기에 끔찍한 굵기의 주삿바늘이라든지, 화학약품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생각만으로도 온 몸에 소름이 돋아날 만큼 아프고 괴롭다.

책에 작가의 사인을 받는데, ‘건강하세요’ 단어 위에 강조점이 찍혀있다. 강연회가 끝날 무렵 배우리 작가가 몇 번이나 반복한 게 건강검진 꼭 받으라는 말이었다. 건강검진이 어려우면 자가진단이라도 해서, 몸의 이상을 늦지 말고 발견해달라고 그녀는 관객을 향해 ‘부탁을 했다’.

『에펠탑의 핑크 리본』을 다 읽고, 알 수 없는 간질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덮는데 표지가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표지에 그려진 에펠탑과 귀여운 비행기는 그대로였다. 그런데 제목 밑에 작은 글자가 붙어있었다. ‘Cancer in Paris.’ 영어를 워낙 싫어하지만, 눈이 알아서 자기 검열을 해버릴 줄은 몰랐다. 정말 책을 손에 놓지 않은 며칠 동안 그 단어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책을 다 읽은 지금은 그런 실수 따위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파리 유학이나 암이 중요한 게 아니니까. 너무나도 솔직해서 술 한잔 같이 하고 싶은 배우리 작가, 그녀 마음의 성장은 책을 읽는 즐거움을 줬다. 다시 말하지만 사건을 겪은 장소가 ‘파리’이고, 그 큰일이라는 게 ‘유방암’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책은 한국에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현재 진행형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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