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昭顯), 조선 16대 왕 인조의 맏아들로 1625년 세자로 책봉되었다. 병자호란 때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하자 동생 봉림대군과 볼모로 청나라에 끌려갔다. 청에서 다양한 세계를 경험했던 소현세자는 조선의 발전을 꿈꾸었지만 조선으로 돌아온 지 수개월 만에 병을 얻고 34세의 나이로 결국 죽고 말았다.
“소현세자의 사인은 공식적으로 학질이지만, 실은 그가 인조 임금의 지시에 의해 살해되었을 것이라는 의혹이 공공연했다.”
오래전 조선 왕들의 독살 사건을 다룬 책을 읽고 가장 많은 의문을 가졌던 사람은 왕이 아닌 소현세자였다. 역사라고는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만든 드라마 속, 왕과 후궁들의 관계나 남인이니 소론이니 하는 당파 싸움이 역사의 전부라고 생각했기에 소현세자의 독살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는 왠지 분한(!) 마음이 들어 언젠가는 소현세자에 관한 책을 꼭 한번 읽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난 3월, 온라인 서점 배너에 ‘소현’이라는 글자가 자주 눈에 띄었다. 표지 이미지로 봐서는 궁금해 하던 그 ‘소현’이 맞는 듯했다. 책 소개를 보니 역사 관련 서적이 아니라 김인숙 작가의 역사소설이었다. 소설이라 약간의 허구가 들어 있겠지만 당연히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김인숙 작가에게 소현세자에 대한 궁금증을 들을 수 있는 기회마저 잡았다.
소현세자를 사랑한 작가 김인숙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저녁 홍대입구역 근처의 작은 카페에서
『소현』을 쓴 작가 김인숙을 만났다. 꽤 많은 수의 독자들이 참석했을 거로 생각하고 나간 자리엔 오붓하게 열 명 남짓의 독자들이 앉아 있었다. 순간, 책을 완독하지 않은 상태라 당황했지만(강연이라면 듣기만 해도 되지만 이런 소규모의 만남에는 주고받는 대화가 많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른 채로 앉아 있는 것은 조금 고역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전혀 모르는 책도 아니고 꼭 한번 알아보고 싶었던 ‘소현세자’의 이야기였으며 소현세자에 대해서는 큰 울타리에서의 사건들을 대충이라도 알고 있었기에 마음을 쓸어내렸다.
이날 참석한 독자들은 다양했지만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선생님이 많으셨고, 작가들 만남에는 늘 여성의 비율이 많은 편인데 이날은 남녀의 비율도 거의 반반이었으며 그들 모두
『소현』을 읽고 ‘소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한다는 거였다. 김인숙 작가 역시 그랬다.
“지난주에도 독자와 만남을 가졌어요. 질문 중에 ‘이런 만남의 자리가 작가에게 도움이 되는가?’라고 묻는 독자들이 있었는데 책 판매는 잘 모르겠지만 독자와 눈을 마주 보며 생생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고, 독자들 또한 나를 기억할 테니 이런 만남의 자리를 좋아한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같은 경우는 독자들이 ‘작가 김인숙’이 궁금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소현』을 읽고, ‘소현’에 대해 궁금해 하며 나온 자리인 만큼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 기대해요.” ‘작가 김인숙’이 아니라 소설
『소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 그동안 책 자체보다는 작가가 궁금한 경우가 많았기에 작가의 그 말에 호기심이 당겼다.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 갈까, 나 역시 기대가 되었다.
질문을 받기에 앞서 김인숙 작가는
『소현』을 읽은 독자나 친구들의 독후에 관한 두 가지 반응에 대해 먼저 말을 꺼냈다.
『소현』을 읽은 독자들이 보인 반응은 이랬단다. 그 첫째가 ‘어렵다’는 반응이다. 기존의 역사소설들은 흐름이 빠르고 스토리텔링 위주여서 재미있게 읽을 수가 있었으나
『소현』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 소설의 문체에 익숙해진 독자들이 읽기엔 당연히 문법 자체부터 색다른
『소현』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생각해 보니 나도 평소 읽던 소설들의 문체와는 다른 역사소설을 접하면서 문체가 익숙하지 않아 쉽게 나아가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쩔 수 없이 천천히 문장의 의미를 생각하며 정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놓치기 쉬운 글들이 많았다. 어렵긴 했어도 그런 점에 있어서는 오히려 역사소설의 묘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작가의 말처럼 스토리텔링의 전개가 아니어서 쉬운 글은 아니었다.
둘째는 ‘불친절함’이다.
“고백일 수도 있는데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스스로 감동하지 않으면 소설로 빠져 들지 못해요. 그러니까 최초의 독자는 작가 자신이며 최초의 감동 역시 작가가 제일 처음 받겠죠. 『소현』을 쓰면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현세자에 관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어요. 출생에서 죽음까지, 소설로 써 내지 않은 부분까지도 다 알게 된 거죠. 그래서 대부분의 독자들도 나처럼 다 알고 있을 거라 착각하게 된 것 같아요. 의도적인 생략과 불친절한 설명. 그런 것들이 독자들로 하여금 『소현』을 읽는 데 어려움을 겪게 할 줄은 몰랐어요. 출간 후 어렵다고 말하는 독자들의 반응을 보고서야 생소한 부분에 대해서는 독자를 위해 내가 좀 더 친절하게 설명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소설을 쓰면서 일부러 어렵게 쓰려거나 혹은 불친절하게 해 줄 의도는 없었습니다. 물론 쉽게 쓰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지만 말이죠.” 작가가 본인의 소설 주인공에게 빠지는 일은 당연하다. 그래야 그 작품에 무한한 애정이 생길 테니까. 또한 독자들도 각자의 취향이 있으므로 스토리텔링 위주의 가벼운 글을 좋아하는 독자가 있을 테고, 인간 내면의 갈등과 고민들을 심도 있게 다뤄 집중을 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든, 조금은 무거운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김인숙 작가의 ‘불친절함’은 나로서는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그렇다면
『소현』은 어떤 소설일까? 또 작가는 ‘소현’을 어느 만큼이나 사랑했기에 소설로 쓸 생각을 했을까?
“소설을 시작할 당시 역사적 사실보다는 소현세자가 느꼈을 막막함과 고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전에는 소현세자에 관해 잘 몰랐죠. 어느 정도 공부를 한 후, 이제는 소현세자에 대해 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을 때 첫 문장을 시작한 게 아니라, 소현세자가 누구인지도 모른 상태에서 같이 출발을 했다가 점점 소현세자에게 빠져 들게 된 것인데 그래서 처음과 마지막의 감정이 많이 달라 뒷부분의 「또 하나의 영웅」을 쓰면서는 혼자 울컥하기도 했어요.
역사에서 어딘가를 정복하고 거대한 것을 이룬 사람만이 영웅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이야 역사나 수업 시간에 언제든 만날 수 있지만 그런 영웅은 그저 바라만 볼 뿐이죠. 그들은 비범한 사람들이니까. 그러므로 보다 가까이에서 느끼고 우리 삶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영웅은 대단한 것을 성취한 자가 아니라, 소현세자처럼 인내하고 견디면서 자기가 꿈꾸었던 것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에요.
소현세자에게는 청에서 모진 것을 견딘 세월이 있었고 그런 까닭에 조선으로 돌아가 조선의 부국 광명을 위해 살아야 할 세자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았을 거예요. 비굴함과 모욕은 책에서 읽은 것보다 더하겠지만 그걸 버티고 견디면서 좌절하지 않았으며, 절망하고 타락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죠. 그래서 비록 왕이 되진 못했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꿈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 같은 범인들이 알아줘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소현세자를 통해 위로받는 것이 우리의 삶과 비슷하기 때문이죠. 아무리 사소하고 뒤떨어진 이야기라 하더라도……. 소현세자는 영웅인 셈이에요.”
김인숙 작가는 처음부터 소현세자에 관한 글을 쓸 생각은 아니었단다. 그의 관심은 소현이 아니라 소현세자를 볼모로 청에 데려갔던 예친왕 도르곤이었다. 한동안 중국에서 살았던 김인숙 작가는 중국 역사소설을 읽다가 예친왕 도르곤에게 빠졌다. 한데 이 도르곤이라는 인물은 훗날 청 제국을 이루는 데 공헌한 실질적인 인물이지만 황제의 자리까지 오르지 못했다. 죽은 후에 황제 칭호를 받지만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한 인물로, 살아 있을 때는 물론이며 죽어서도 굉장히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병자호란 때 조선을 친 적장이며 소현세자와 같은 나이로 소현을 볼모로 청에 데려간 인물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걸 알고 난 후에 예친왕 도르곤에서 소현세자에게로 관심이 옮겨 갔다고 했다. 같은 나이, 패전국의 왕자, 더구나 볼모로 청에 잡혀간 소현세자는 예친왕 도르곤보다 훨씬 더 깊은 외로움을 견뎠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과정을 거친 후에
『소현』을 쓰게 되었단다.
영웅이 등장하지 않는 역사소설, 『소현』
『소현』을 쓸 때 받은 가장 많은 질문은 ‘왜 역사소설을 쓰려고 하느냐?’라는 거였다. 하지만 김인숙 작가는 역사소설을 쓰기 위해 소현세자를 끌어들인 게 아니라, 소현세자에 관해 알고 싶어 소현세자를 데려와 글을 쓴 것인데 그게 역사소설이 된 것이라 했다.
『소현』은 장장 5년이라는 제법 긴 시간 동안 집필한 소설이다. 그 기간 동안
『소현』만 쓴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 일 년 반 정도는 집중해서
『소현』만 썼단다. 쓴 것을 다시 보고 또 보고 작가의 말마저 멋있게 써 보려고 과장도 했지만 진심을 다해서 쓴 작품이기에 쓰는 동안 행복했단다.
“역사소설이란 게 써 보지 않은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자료를 찾는 순간부터 작가에겐 공부나 마찬가지예요. 하나를 알면 그 하나에 대해서 잘난 척을 하고 싶고 또 너무 아는 척을 하면 안 되니까 지우게 되는 작업을 반복하다 보니 소현세자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죠. 많은 분들이 『소현』의 마지막 부분에 대해 아쉬워하는데, 나 역시 그랬어요. 그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고 더 쓰고 싶었죠. 대하소설이 쉬운 것은 아니겠지만 농담처럼 ‘대하소설을 써야겠다, 한 권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말도 한 적이 있었어요.”
소현세자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궁금했던 점은 ‘과연 소현세자가 왕에 올랐다면 조선이 바뀌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런 궁금증은 소현세자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궁금할 문제였다. 진짜 독살을 당했을까? 또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조선이 과연 변화했을까? 김인숙 작가는 이런 질문에 답변하는 것은 애매모호하고 위험하다고 했지만 개인적 사견을 말했다.
“그 당시 청나라는 지금의 미국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세계의 중심인 셈이죠. 청은 굉장히 열린 나라였으며 그런 나라에 살면서 소현세자가 경험한 문화적인 것들은, 처음엔 아니었겠지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소현세자가 받아들인 가장 선진적이고 건강한 문물들이었을 거예요. 대부분 개국 과정에 있는 나라가 다 그렇듯이 청나라 역시 부정부패가 없고, 근검하며 규율이 꽉 짜인 과정에 있었던 거죠. 만약 소현세자가 조선에 있었다면 그런 과정들을 경험할 수 없었겠죠. 모든 건강한 문물과 과학적인 발전, 민주주의 체제를 경험하고 보았기 때문에 열린 사고를 가지고, 꿈을 꾸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그 꿈을 펼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 부호가 많아요. 그 당시 조선은 군주 세력이 큰 나라가 아니었기에 군주가 독단적으로 행동할 수 없었으며 특히 인조의 경우 인조반정으로 임금이 되었으므로 훨씬 더 군주의 세력이 약한 시기였어요. 그런 상태인데 적국에 있다가 돌아온 소현세자에게 흔히 말하는 ‘자기 라인’이 있을 리는 만무하죠. 그래서 소현세자가 굉장한 꿈과 이상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와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하더라도 부딪혀야 할 일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까닭에 시도는 했겠지만 성공할 때까지는 만만치 않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역사소설의 재미 속으로 빠져 들다
이 책의 전작처럼 느껴지는 김훈 선생의
『남한산성』이 있다. 은근히 비교가 되고 연장선처럼 여겨지는 부분에 대해 김인숙 작가는 김훈 선생이 다행스럽게 소현세자에 대해 별 이야기를 안 써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만약 김훈 선생이 소현세자에 대해 많이 쓰셨다면 김인숙 작가는
『소현』을 쓸 엄두도 내지 못했을 거란다.
“김훈 선생의 『남한산성』은 영웅적인 인물이 안 나오고도 역사소설을 쓸 수 있다는 사실과 패전의 역사도 소설로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어요. 또 그 구조가 굉장히 매혹적이어서 작가로서의 질투와 함께 그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연장선처럼 느껴진 것은 그런 것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소현세자를 이야기할 때면 도저히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아버지 인조이다. 인조는 정말 비정한 아버지다. 사실로 밝혀진 바는 없으나 후세의 모든 사람들이 추정하고 있으니 그 비정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도대체 권력이 무엇이고 왕의 자리가 얼마나 좋았으면 아들을 독살할 수 있었을까? 볼모로 잡혀간 아들이 가엾지는 않았을까? 좀 더 따뜻하게 안아 줄 수는 없었을까? 나로서도 인조에 대한 이미지는 좋지 않다. 그렇다면 김인숙 작가가 생각하는 인조는 어떤 사람일까?
“인조의 인간적 평가는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한 사람이 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는 자아 자체가 무의미해요. 정치적 자아만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왕권이 강한 군주라면 자아의 영향을 받았겠지만 인조는 그렇지 못했어요. 그 시기의 인조는 겉으로 표출하지 못하는 왕의 자리에서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개인적인 사견으로는 독살을 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랬다면 그건 정말 굉장히 슬픈 일이죠.”
의외로 역사는 재미있다. 깊이 알수록 그 재미는 더하는 것 같다. 비록 책을 읽을 때만 역사의 궁금증에 두 눈을 반짝거리다가, 책을 덮어 버리면 잊어버리기를 반복하지만 그렇게라도 하나씩 알게 되는 역사에 관한 진실은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하다. 그러므로 작가로서 역사의 인물에 관심을 가지고 소설 작업을 한다는 것은 독자로 하여금 지적인 즐거움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상상력만 있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 소설이겠지만 그 상상력만으로는 누구도 쓸 수 없는 글이 바로 역사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소현세자에게 빠져 우리에게 소현세자 내면의 고민과 갈등을 알게 해 준 김인숙 작가는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
『소현』을 읽고 소현세자에 관해 좀 더 깊은 이야길 나누고 싶어 하는 독자들의 궁금증을 많이 해소해 주는 기회를 주었다.
그렇게 아무리 이야길 해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소현세자에 관한 이야기는 시간이 다 되어 아쉽게도 그 자리를 마감해야 했는데, 나름 그날의 분위기를 참석하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 열심히 적었지만 지면상 겨우 반 정도밖에 하질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이날 참석한 독자들과 작가는 소현세자에 관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모였지만 소현세자를 제대로 알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또 다른 역사가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소현』을 읽고 나니 소현세자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겠으나 그를 둘러싼 정치적, 외교적 배경과 궁금증은 더해진 것 같다. 고로 이 기회로 역사 공부를 한번 해보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비운의 세자, 소현은 우리 역사에 있어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을 남겨 준 유일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