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정은임 아나운서, 2003년 <정은임의 FM영화음악>에서 이런 멘트를 들려줬습니다.
새벽 세 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00여 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올가을에는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겠다고요.
진짜 고독한 사람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저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그렇습니다. 고 김주익 열사의 이야기입니다. 2003년 10월, 사용자의 성실한 임단협 협상을 촉구하며 45m 대형 크레인에 올라가 129일간 홀로 고공 농성을 벌이던 김주익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장. 김 열사가 스스로 목을 맸다는 소식을 듣고, 고 정은임 아나운서가 건넨 일종의 추모사였습니다. 그 외로웠던 싸움. 그럼에도 쉽게 외롭다는 투정도 않고, 그는 투쟁했고, 죽음으로 우리에게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우리는 결국 빚을 졌습니다.
노동, 잘 하고 계십니까
저는 ‘노동자’입니다.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든, 노동을 합니다. 그것을 꾸역꾸역이라고 표현하든, 룰루랄라라고 일컫든, 저는 하루하루 노동을 통해, 일용할 양식부터 일상에서 누리는 모든 것을 노동을 통해 획득합니다. 노동조합을 만들겠다고 깝치다가, 회사도 몇 차례 나와야 했던 기억도 있지만, 저는 어디에 있든 스스로가 노동자라는 의식을 떨쳐버린 적 없습니다. 제겐 그렇게 노동이, 살아가게 하는 힘이었지요. 지금도 그래서, 여전히 커피 ‘노동자’이며, 잡문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새해, 경인년이, 백호년이 왔다지만, 노동자에겐 더없이 가혹한 시절입니다. 하긴, 자본주의가 창궐한 이래, 언제 노동자에게 가혹하지 않은 때가 있었나요. 자본은, 권력은, 노동을 늘 억압하고 탄압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속성이죠. 더구나, 지금은 돈이 다른 모든 가치를 짓누른 시대. 노동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따져봅시다. 노동(자)의 피와 눈물이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 누리는 모든 것이 가능했을까요. 어떤 정치적 수사로 포장해도, 박정희의 공, 정주영의 공, 이병철의 공, 절대 아닙니다. 그들을 미화하려는 어떤 말도, 새빨간 거짓입니다. 그들은 국책 노동이나 집단 노동으로 노동자를 짐승처럼 부려 먹었을 뿐, 혹은 갖은 술수로 노동이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도록 획책했을 뿐. 그들은 노동이 일궈낸 과실은 다 싹쓸이했지요. 약간의 떡고물을 던져주면서.
거짓말이라굽쇼? 아놔~ 여기, 이 책,
『길은 복잡하지 않다』(이갑용 지음/철수와영희 펴냄)을 보세요. 이 책에는 자본의 야만과, 노동이 일궈낸 결실이 통계적, 사회학적으로 분명히 언급돼 있습니다. 특히, 1987년 민주화 투쟁에 가려졌지만, 노동자 대투쟁이 우리 삶을 어떻게 민주화시켰는지 꼼꼼히 보여줍니다.
87년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임금 체계에 큰 변화가 생겼다. 특근처럼 시간 외에 일을 해야 받을 수 있는 수당 중심에서 기본급 중심으로 바뀐다. 우리 요구가 모두 관철된 것은 아니지만, 일단 기본 생활이 될 정도로 기본급을 확보한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독재 정권에 빌붙어 노동자들을 탄압하던 자본은 87년 민주화 투쟁을 거치면서 정권이 타격을 받으니 자연히 같이 위축되었다. 무조건 받아왔던 비호를 받지 못한 것이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에 영향을 미쳤다.(p.297)
임금이 오르면, 회사가 망하는 것 아니냐고요? 천만에요. 그건 자본이 노동을 억압하기 위한 한갓 지질한 수사입니다. 우리는 이미 1987년에 그 수사의 잘못됨을 깨달았는데, 자본의 얍삽한 혓바닥에 다시 넘어가는 바람에 다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1987년부터 1990년까지 물가는 폭락이나 폭등 없이 명목상 한 자리수 상승률이었다. 노동자들은 늘 하던 대로 제품을 생산했지만, 노동 강도는 낮아졌다. 출퇴근 시간, 차등 지급 등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파업 후 임금이 적게는 3년 치에서 많게는 10년 수준까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계속 오르니 노동자들이 오히려 회사를 걱정하게 된다. (…) 그런데 회사는 오히려 흑자를 발표한다. 노동자들은 그제야 자본, 특히 재벌이 어떻게 자신의 부를 축적해왔는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 자본은 자신을 희생해서 우리의 임금을 지급한 게 아니라 엄청나게 착취해서 쌓아두었던 초과 이윤 가운데 자신들이 위험하지 않을 만큼만 조금만 내놓았던 것뿐이다.(pp.299~300)
다시 노동입니다. 민주주의를 되찾고 싶다면, 우리는 노동이라는 가치를 다시 끄집어내야 합니다. 지배계급이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는 ‘경제’는 거짓부렁입니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구호로 인민들의 마음에 파고든 작자가, ‘실용’이나 ‘서민’이라는 알맹이 없는 수사로 인민을 현혹하는 주술엔 속지 마세요. 진짜 경제(학)는, 이런 겁니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이라면 먼저 쓰러져가는 빈민가를 돌아보아야 한다.”(앨프리드 마셜, 영국 경제학자) “경제학의 목표가 많은 사람을 좀 더 잘 살게 하는 것이라면, 먼저 가난한 이들을 보고 마음 아파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이강국, 일본 리쓰메이칸 대학교수)
그러니까, 가난을 사회구조적 문제가 아닌 개인의 능력과 노력, 선택의 문제로 보는, (국가가) 성장하면 가난은 절로 해결된다고 믿는, 척박하고 개념 탑재 안 된 안드로메다적 경제관념은 이제 그만. 노동이야말로, 진짜 경제와 우리 삶의 민주화를 위한 근간입니다. 그 이유를 펄펄 눈이 내리던 새해 벽두인 4일, 한강 다리 위 카페에서 ‘골리앗 전사’라는 칭호를 듣는 이갑용 선생님을 만나 들었습니다.
열사 만드는 사회
글머리에 꺼냈던, 김주익 열사를 꺼내봅니다. 책에도 에필로그에 「남기고 싶은 사람들」에 ‘골리앗의 외로웠던’이라는 타이틀로 언급한 김 열사. 그가 2001년 연말경, 현대중공업 해고자 농성 현장에 찾아와 처음 만났답니다. 키가 183~184cm로 굉장히 컸던 김 열사는 선한 얼굴로 농성 중이던 노동자를 위로해줬습니다. 이후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구청장 시절, 골리앗에 올라갔다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혼자인지 몰랐는데, 목을 맸다는 소식과 함께 홀로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한진중공업 노조는 문을 닫았을 겁니다. 한진중공업은 지금 어려움 속에서도 강건하게 싸우고 있는데, 그게 다 그가 이뤄낸 공이 워낙 크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그때 그렇게 놔두는 게 아니었는데. 아쉽고 안타까워요. 참 순한 사람이었는데……. 대우정밀의 조수원이도 하필이면, 93년에 얼굴을 보고 2년 후에 목을 매달고. 만났던 다음날 잡혀갔으면 군대 가서 죽진 않았을 텐데……. 조수원이도 되게 순해 보이고 착해 빠졌어요. 유달리 그런 친구들이 더 착해 보이는데…….”
순하고 착했던 그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회. 70년대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이 사회의 부박함은 열사를 만들었습니다. 자본과 권력의 야합으로. 회사?정권?언론, 삼각편대의 일사불란한 노동 탄압이 불러온 결과죠. 이 선생님은 정부는 당연히 중립적이고 정의의 편이라는 수십 년 환상이 노동운동을 하면서 깨졌다고 하십니다. 97년 대선 때도 마찬가지. 어떤 야당도 노동자 편이 아니었으며,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만이 만능으로 통하는 사회에서 누가 권력을 잡든 지배 집단은 노동자를 탄압할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들, 삼각편대는 자유와 평등과 연대를 향한 개인의 열망을 억압하는, 그야말로 수구적 신성동맹! 이 선생님은 이권과 권력에 따라 움직이는 그들의 끈적끈적한 연대(?)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속자는 구속자고 조합원의 이익을 누가 책임질 것이냐. 협상을 해야 한다, 회사가 살아야 노동자도 산다, 국민 여론이 좋지 않다, 이 상태면 해외 수주가 두려워 회사에 위기가 닥친다. 많이 들어본 말 같지 않은가? 이익, 협상, 국민 여론, 위기……. 이 땅에 노조가 생긴 후로 수십 년 동안 투쟁할 때마다 등장한 단어들이다.(p.110)
노동을 사회적 의제로
그러면 노동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대를 꾸준히 탄압하고 빨아먹어야 커지는 그들이 변할 것을 기대하지 말고, 우리가 변해야 합니다. 정당들도 의제를 바꿔야 합니다. 노동자를 중요시하고, 노동을 부총리급으로 급상해야 합니다. (노동부 장관이) 경제 장관처럼 얘기하면 잘라야죠. 그렇게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노동자를 위한 정치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거침없이 해야 한답니다. 물론 삼각편대들이 그 말을 하는 사람은 노출을 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각오하고 해야 합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그 정도 사고와 내용으로 싸움을 해줘야 합니다. 어느 순간, 어느 때라도 노동의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말해야 합니다.” 물론 현실이 그렇지 않기에, 이른바 ‘민주정부’ 10년 동안 노동은 점점 더 사회적 의제에서 멀어졌던 겁니다. 자연, 노동자들도 힘이 빠졌고요.
해답은 분명합니다. 노동자들의 단결?투쟁.
“누가 대통령 되어도 노동자들은 단결하고 투쟁해야 합니다. 그걸 지지하고 지원하지 않으면 안 돼요. 시민이나 단체가 지지하고 지원해야 합니다. 같은 편이라고 해놓고선 정부하고 친해지면 돌아서고. 삼각편대는 자기네들끼리 격려하는데, 우리는 대체 뭐 하는 겁니까.”
노동자들이 거리를 점거하고 시위하는 것을 두고 시민의식이 없다, 폭력 행위다라고 비판하는데 이는 오랫동안 권력을 가진 자들이 퍼뜨려온 논리에 우리 자신마저 길들어 있기 때문이다. 파업이란 노동자들이 가진 마지막 무기이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통해 맞서야 할 상대방ㅡ권력이든 자본이든ㅡ에게 어떤 타격도 입힐 수 없다면 이는 무기라고 할 수가 없다.(p.194)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그들이라고 노동자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습니다. 되레 피눈물을 뽑아내는 상황을 많이 연출했었죠. 이 선생님도 두 전직 대통령들을 몇 차례 만났습니다. 인식의 차이는 컸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민주노총 위원장 시절,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체제 극복을 위해 머리를 맞댔으나, 노동자는 안중에 없었답니다. 정리 해고가 피를 불렀고, 외국 자본이 거침없이 경제를 잠식했죠. 이 땅에 신자유주의가 확실하게 방점을 찍은 계기.
“남북문제에 물꼬를 튼 대통령이지만,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갔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여럿이 함께 만났으나 모르쇠로 일관한다는 느낌이었답니다. 공무원 노조가 충돌 지점이었습니다. 공무원 노조에 대해 나름 생각을 못 박은 노 전 대통령은 그에 대해 반기를 든 이 선생님이 못마땅했을 수도 있었겠죠. 두 전직 대통령의 특징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공통된 특징은 너무 똑똑해서인지 남의 말을 잘 안 듣고, 자기중심이 너무 강해요. 우리 얘기를 하면 끊어요. 정말 선생님이 학생 가르치듯.”
어쩌면 지난 10년, 노동자에겐 ‘배신’의 세월이었습니다. 심하게 기득권으로 기울어진 추를 조금이라도 노동자 쪽으로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했던 대통령들은 실상은 그렇질 못했습니다. 노동은 역시나 탄압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배 집단의 집요하고 철저한 노동 탄압의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이 선생님은 이 책을 썼고 기록을 남겼습니다. 어떤 교수도, 노동운동 선배도 하지 않은 혹은 못한 작업.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역사적?사회적 의의를 끌어낸 것이 이 책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우리가 (정치적) 민주화 투쟁이라고만 인식했던 것을, 이 선생님은 현장에서 체화한 것으로 우리의 의식을 새롭게 깨웁니다. 지성이 따로 없습니다.
“그 변화가 적지 않았습니다. 노동조합 몇 개 생긴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자본의 흐름이 어떻게 됐느냐가 중요합니다. 지금 자본이, 거대 자본이 공룡화되고 있는데 노조가 없으니 (노동자들은) 아무 말도 못 하잖아요. 그러니까, 노동자 투쟁이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달라고 섰어요. 우리 편이라고 했던, 지난 10년 정권떵 이 문제를 이해 못 했습니다.”
그 미친놈의 공허한 발전과 성장에 매몰된 사람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라고 사탕발림을 하는데, 대체 그게 무슨 의미죠? 진짜 우리네 살림살이가 나아졌나요? 우리, 정말 잘살고 있는 건가요. 이 선생님의 인식은 명확합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니 하는 소리는 개소리. “세계 분배 2위가 되자.” 이런 말 어떻습니까. 아니면, “한쪽만 부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고, 공평하게 분배해서 어려운 사람이 없어져가는 나라.” “세계에서 열 번째 정도 온 국민이 잘사는 나라.”
아, 생각만 해도 뿌듯하지 않나요. 이런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간다는 것. 노동이 공기처럼 쉽게 얘기되고 사회적 의제가 되는 사회. 노동부총리. 노동하기 좋은 나라(도시). 노동 친화적 나라(도시). 얼마나 듣기 좋습니까. 이 선생님이 그리는 사회, 당신은 어떤 사회를 그리고 계시나요.
노동 지성, 이갑용의 탄생
노동운동의 현장성과 비사가 사회?역사적 맥락과 함께 꼼꼼하고 생생하게 기록된 이 책,
『길은 복잡하지 않다』. 옛 기억을 머리에 잔뜩 집어넣고만 있던 이 선생님. 더 늦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기억력이 더 떨어지기 전에 기록을 남겨놓자는 생각을 품었습니다. 또 노동운동 하는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고픈 생각도 컸습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시절부터 생각했던 이 작업, 2년 전부터 본격 시작하면서 최근 이렇게 결실을 맺게 됐습니다.
책은 무엇보다 실명을 거론한 부분이 눈에 띕니다. 에둘러 가지 않습니다. 직선입니다. 고민 따윈 없었습니다. 현장성은 강화되고 책은 반짝반짝 빛납니다.
“나는 실명 비판, 실명 칭찬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칭찬은 정파를 넘어서, 평가는 혹독하게 하지 않으면 민주노총의 미래는 없다. 그래서 되도록 실명 비판을 하려고 노력했다. 많은 글을 쓰지 않았지만, 언론에 글을 쓸 때도 책임성을 높이려고 실명 비판을 했다. 개인이 아닌 공적인 행위에 대한 비판이므로 상대방이 반박을 해주면 풍부한 논쟁이 될 텐데 아쉽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실명 비판에 익숙해져야 성숙한 토론문화가 생길 것이다.”(p.346)
그럼에도 처음보다 실명은 많이 줄었답니다. 애초 배 이상이었는데, 출판사와 협의 과정에서 많이 준 거죠. 이 선생님은 실명 거론된 이들이 항의해 주길 바라는 심정입니다. 논쟁이 되기 위한 조건. 어정쩡한 타협보다 건강한 갈등이 낫다는 것, 잘 아시죠? 그럼에도 회사 쪽에서는 없는 이야기라고 하고, 민주노총의 정파 등은 사실과 다르다며 애써 외면하고 있다고 합니다. 왜일까요. 정정당당하면 맞불 붙어야죠. 혹시…… 비겁자? 겁쟁이?
책이라곤 읽지 않던 반공 청년. 이 선생님의 과거입니다. 노동운동을 하고, 감옥에 가고, 책을 읽고, 그렇게 의식은 전환을 이뤘습니다. 회사에 불만이 많았지만 노동운동에 대한 의식 정립은 미약했던 시절, 감옥에서 장기수 선생님들과 학생운동을 하던 학생들과 토론하면서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습니다. 노동자의 힘이 사회적으로 왜 중요한지, 그것이 정치권을 바꿔내고 안정된 사회로 만드는 데 어떻게 일조하는지. 노동만이 이 사회를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 되지 않을까.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던 정권은 왜 노동자의 등에 비수를 꽂았나.
강철은 그렇게 단련됩니다.
“김대중 정권이 군사독재에서도 하지 않았던 정리 해고를 왜 했는가. 우리 편이라고 했던 노무현 정권이 비정규직을 입법해서 왜 노동자를 내몰았는가. 이걸 모르면 노동운동을 한들 무슨 소용이겠어요. 책의 핵심은 그러니까, 사회에 대한 이해를 하자. 노동자들을 어떻게 대했는가가 진보의 척도라고 봅니다.”
학생운동을 했던 이들이 논리를 주입해서 운동을 시작했다면, 이 선생님은 몸으로 체화하고 습득한 것이 자연스레 운동과 만난 경우라고 할 수 있죠. 비공식 학습이나 지하 서클의 이념 교육을 받지 않고 현장에서 길어 올린 생생함. ‘진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에게 물었습니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습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견디기 힘든 구조입니다. 저는 특별하지 않아요. 여기까지 오는 데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현장의 많은 노동자들이 희생하는 사이에 대신해서 내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됐고. 내가 혼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숱한 도움과 수많은 싸움이 있었던 거죠. 민중항쟁처럼 투쟁했던 골리앗에서도, 죽자고 파업했던 민노총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만 인식하면 돼요. 외롭다고 얘기하지만, 싸움할 때는 외롭지 않아요. 싸울 때는 늘 우리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뭉쳐서 하나가 됩니다.”
아, 다시 생각했습니다. 외롭다는 말, 쉽게 꺼내선 안 되겠다고. 외롭고 의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도 않으며,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진짜 외로운 것은, 노동자가 노동자를 외면하고, 우리 사회가 노동을 소외시키는 것이 아닐까요.
골리앗 전사. 물론 혼자 싸운 것이 아니었고, 밀려 올라간 과정에서 그렇게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하지만, 골리앗은 결국 지는 쪽. 이 선생님은 이제 ‘다윗’이 되고 싶다고 하십니다.
“혼자는 힘들겠지만, 많은 다윗이 나와서 거대 자본을 꺾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골리앗을 이기고 싶은 다윗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은. 지금 그 별명을 20년 정도 가져가다 보니까, 그 당시는 내게 맞았을지 몰라도, 이젠 김주익 열사가 가져가야 할 별칭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 (자신을 희생한) 동지들 이름에 걸맞게 우리도 나름대로 변화했으면 좋겠고요.”
열망과 연대의 힘
필요한 것이 있다면, 열망과 연대입니다. 이른바 줄도 없고 백도 없던 이 선생님이 압도적 열세 예상을 뒤집고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선거를 시작할 때 믿지 않아서 자신감도 없었으나, 현장에서 노동자를 만나고 손을 잡아보면서 자신감이 붙었습니다. 열망이 끓어올랐고, 위원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당선된 직후부터 조직 내부의 관료적인 습성이나 사보타주에 맞서야 했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만.
사실, 노동운동이라고 마냥 순결하고 순정한 판이 아님을 이 선생님은 책을 통해 낱낱이 까발려주십니다. 어떤 조직은 관료화되고, 권력욕과 노회함으로 무장한 능구렁이 같은 일부 노동운동가들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물론 이것은 노동운동의 환골탈태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연대는 정파에서 비롯됨이 아니라, 개인과 노동자를 위하는 것에서 시작됨을 이 선생님은 꼬집어주십니다.
“대중조직인 민주노총은 우리가 그냥 만든 것이 아니고 피 속에 만들어졌습니다. 한 사람씩은 자본에 죽는데, 법으로 뭉칠 수 있는 권한을 준 거예요. 파업을 하라고 만들어준 거예요. 혼자서는 못하니까 뭉쳐라, 한 사람을 소중히 하라는 뜻입니다. 가장 크고 민주화된 조직이라는 민주노총은 그게 모토예요.”
하지만 민주노총, 그 모토를 배신했습니다. 최근에만 해도 한 사람이 내부에서 성폭력을 당했습니다. 제대로 된 조직이라면, 이를 원칙적으로 처리하고 당한 사람을 보호해야 합니다. 조직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한 사람의 희생을 강요했습니다. 민주노총을 살리겠다는 게 아니고 자기 정파의 조직원(가해자)을 살리겠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의 징계로 끝날 문제를 전체가 피해를 봤습니다. 원칙대로 갔어야 했습니다. 한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사람을 위해 있는 대중조직, 민주노총. 그래야 살아납니다.”
원칙을 지키고 조직 보위론자들에게 욕을 얻어먹는 게 차라리 낫다. (…) 원칙을 지키려는 노력보다 원칙을 지킨 결과적인 행위가 조직을 바꾸고, 조직을 지키는 일임을 뒤에서야 더 뼈저리게 깨달았다.(p.213)
자기반성과 성찰. 그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악행은 반복됩니다. 민주노총뿐 아니라 어느 조직이든 마찬가지. 그래서 이 선생님은 오는 21일 민주노총 9층 교육실에서 하종강 소장님(한울노동문제연구소), 한홍구 교수님(성공회대)과 함께 출판기념회 겸 토론회(☞
<이갑용, 하종강, 한홍구에게 듣는 2010년 진보의 교양 ‘자본은 노동자를 어떻게 길들이는가?’>)를 가집니다. 이 선생님, 대놓고 얘기할 생각이랍니다. 지금 활동하는 분들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해 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 연대는 상처를 딛고 더 굳건해지지 않을까요. 기대합니다.
지배 집단이 주입하는 ‘경제’는, 실은 ‘우리 주머니’도 아니고 ‘내 주머니’입니다. ‘경제를 살리자’는 말은 ‘내 주머니를 채워라’입니다. 노동자의 파업이나 집단행동에 눈살 찌푸리지 마세요. 그것은 정당한 권리 주장이며, 언제 나의 일이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이 불쑥 튀어나온다면 그것은 지배 집단이 주입한 논리일 가능성이, 백 퍼센트입니다.
“핵심은 경제논리입니다. 경제논리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성장이 아니고, 정의로운 분배입니다. 지난 10년, 좋은 점은 받아들이되, 분명한 반성을 통해 노동문제를 제대로 다뤄야 합니다. 지금의 경제 논리에 구속당하지 말고, 후세쯤 바꿀 수 있다는 장기적인 믿음도 있어야 합니다.”
물신지배와 정글 자본주의의 노예에서 빠져나가는 방법 중의 하나, 노동이 아닐까요. 단결?투쟁은 구닥다리 구호가 아니라 현재도 유효한 구호입니다. 노동법을 누더기로 만들고 초법적으로 만드는 일이 횡행하고 있지만, 노동자가 움직이기만 해도 폭력으로 매도하는 시절이지만, 길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역시나, 단결?투쟁. 타인의 고통에 무덤덤하지 않기. 그리하면, 나의 고통에 다른 사람이 손을 잡아 줄 테니까요.
다시 말하지만, 책은 노동자 대투쟁은 역사적?사회적 의의를 환기시킵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네 삶의 민주화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려줍니다.
“조그만 실천이라도 필요합니다. 붐이 일어나고 ‘맞다’는 이야기가 터져줘야 합니다. 노동자 탄압은 점점 지능화되는데, 우리는 세력도 약해지고 옛날 같진 않아요. 민주노총도 새로운 구심점이 돼야 합니다. 또 일반 노동자인 내가 써서 (책의) 반응이 크지 않은 것 같은데, 역사학자나 경제학자들이 경제 논리에 휘말릴 것이 아니라 정의롭게 분배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어요. 87년 노동자 대투쟁에 대해서도 제대로 연구해주고요. 이 책이 도움이 됐다면 말이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해줘도 좋겠습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분배를 바꿔야 성장이 따라온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건설 경기를 살려 경제를 성장시키겠다고 나랏돈 수조 원을 건설 회사에 지원하고 댐 건설과 운하 건설에 매진하는데, 1조 원이면 연봉 5,000만 원 받는 노동자 2만 명의 1년 치 월급이고, 4인 가족 132만 가구가 1년을 살 수 있는 돈이다. 이 돈이 노동자들에게 분배된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경제를 모르는 순진한 생각이라고? 그렇지 않다. 나는 1987년도에 이를 경험했다. 확보된 구매력으로 자가용을 구입하고, 생활의 질이 높아지니 문화와 여가에 대한 수요가 생겨났다. 잔업, 특근을 하지 않아도 살 수가 있으니 퇴근 후에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함께 TV를 시청하고, 영화를 보러 가고, 음악도 듣는 여유가 생겼고, 백화점 이용자가 소수 부자들에게 노동자들 일반 가정으로 확대되었다. (…) 지금 모든 아이들이 선망하는 직업인 연예인은 사실 노동자들이 구매력이 생기면서 혜택을 본 대표적인 사례다. 외모가 곧 상품인 연예인들이 TV 보급도 안 된 사회에서 어떻게 얼굴을 알리고, CF로 돈을 벌 수 있겠는가.(pp.302~303)
예전에는 독사 같았는데, 갈수록 눈물이 많아지고 감정이 풍부해지는 것 같다는 이 선생님과 얘기를 마무리할 시간, 상투적이지만 물었습니다. 새해를 맞아 인간 이갑용의 바람과 노동자 이갑용의 소원.
“개인적으로는 책이 많이 팔리고 많은 사람들이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지금 여자 가장이 집안을 움직이고 있는데, 책이 많이 팔려서 전세를 역전하고 체면이 섰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웃음) 노동운동을 해 왔던 소원이라면,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도록, 정파는 힘들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끼리라도 서로 이해하고 시작해봤으면 해요. 전국 어디라도 그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길을 묻는 당신에게
지난주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은 잘 보내주셨는지요. 저도 용산 참사역에 들렀다 오고, 시민장례위원으로 어설프게 참여했지만, 참 막막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겐 국가가 없습니다. 기업만 있습니다. 대통령도 없습니다. CEO만 있습니다. 사회적 고아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 그럼에도 이갑용 선생님은
“길은 복잡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길은 복잡하지 않다』는 어떤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그 대안까지도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김규항 선생님은 지난 연말 ‘올해의 책’으로
『길은 복잡하지 않다』를 꼽았습니다. “좋은 책은 간간히 있지만 좋은 책이면서 쉽고 재미있기까지 한 책은 얼마나 찾기 힘든가? 이갑용의 책이 바로 그렇다. 오늘 인텔리들이 모조리 ‘이명박 욕하기 장기자랑 대회’ 혹은 ‘09년식 비판적 지지’에 놀아나는 가운데, 이 ‘대학문에도 들어간 적 없는’ 노동운동가는 제 생생한 체험과 곧은 마음만으로 오늘 한국 사회의 지적, 정신적 혼란을 꿰뚫어본다. 게다가 무서울 만큼 철저한 자기성찰. 이갑용은 우리로 하여금 꼼짝없이 ‘지성이란 무엇인가’를 되새기게 한다. 선거는 다가오는데, 명박이 얼굴만 봐도 돌아버리겠고, 어째야 할지 헷갈리는가? 그렇다면 이갑용을 읽어라.”
희망을 찾고 싶은, 길을 찾고 싶은 우리. 일단 이 책 읽고 시작합시다. 노동자인 저는 올해도 노동을 하면서 삶을 꾸려나갈 겁니다. 연초 만났던 이 책과 이갑용 선생님 덕분에, 저는 좀 더 버티고 견딜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무엇보다 노동자인 당신과 연대하고 싶은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습니다. 당신이 외롭고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할 때, 내 손을 내밀겠습니다. 내가 필요할 때 당신도 손을 내밀어 주세요. 자본에 길들여지길 거부하면서, 우리 한 번 버텨봅시다.
『소금꽃나무』의 저자이자 노동자 김진숙 씨의 이 말로 갈음하지요.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두산중공업 배달호의 유서와 지역을 건너뛴 한진중공업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민주당사에서 농성을 하던 조수원과 크레인 위에서 농성을 하던 김주익의 죽음의 방식이 같은 나라. 세기를 넘어, 지역을 넘어, 업종을 넘어, 국경을 넘어 자자손손 대물림하는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린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연대는 얼마나 강고합니까?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이주 노동자를 외면한 채 우린 자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소름 끼치고, 아무리 치가 떨려도 우린 단 하루도 그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저들이 옳아서 이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연대하지 않으므로 깨지는 겁니다. 만날 우리만 죽고 천 날 우리만 패배하는 겁니다. 아무리 통곡을 하고 몸부림을 쳐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억장 무너지는 분노를,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이 억울함을 언젠가는 갚아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동지 여러분! 좀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