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를 치르고 모든 일이 마무리됐을 때, D는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침대를 폐기하지 않았다. 사람을 사서 침대를 닦고 소독해 말렸다. 침대의 매트리스에는 D가 꽂았던 칼자국이 깊게 나 있었다. 그러나 칼자국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얼룩 때문이었다. B가 죽어서 3주나 누워 있었던 침대에는 선명한 얼룩이 나 있었다. 그것은 어떤 세제나 소독약으로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것은 살아 있는 B의 체액이 아니었다. 그것은 죽은 B의 몸에서 썩어 문드러져 흐른 시즙(屍汁)이었다. 침대 위에는 먹으로 그린 그림처럼, B의 몸이, 보디 프린팅되어 있었다.
D는 몇 군데의 택배 회사와 용달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침대는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게 D의 생각이었다.
- 단편 「BED」중에서
욕망, 사전을 찾아보니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 또는 그런 마음.”이라고 나온다. 인간은 누구나 욕망을 가지고 있으나 누구나 욕망을 해소하며 살지는 않는다. 다만,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갈 뿐이다. ‘그런 마음’ 가득한 사람들이 그저 마음 한구석에 그 마음을 품지 못하고 세상 끝까지 욕망을 밀어붙인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1997년 문예지 <라쁠륨>을 통해
「꿈꾸는 마리오네트」를 발표하며 등단. 2002년
「뱀장어 스튜」로 ‘이상문학상’을 받으며 세간에 알려지고, 2005년
『꽃게 무덤』으로 ‘동인문학상’까지 받으면서 한국 문단에 그 이름을 확실히 새겨놓은 작가, 권지예. 이번 신작
『퍼즐』에서 ‘그런 마음’ 가득한 인간들이 표출한 욕망의 끝을, 조금은 으스스하고 오싹한 기분이 들 정도로 보여준다. 그가 표현하고자 한 욕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홍대 ‘살롱 드 팩토리’에서 예스24와 민음사가 주최한 권지예 작가와의 만남이 있었다. 이 만남에서 권지예 작가는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퍼즐』에서 보여준 죽음보다 더한 ‘욕망’들에 대해 들려주었다.
작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거치며
길이 막혀 조금 늦게 도착한 권지예 작가는 생각보다 많이 떨린다며 말문을 열었다.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나갈지 잘 모르겠어요. 책을 읽고 온 독자도 있을 테고, 그렇지 않은 독자도 있을 테니 먼저 제 소개를 한 후에 작품이나 저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질문하면 대답하는 형식으로 하겠습니다.”
권지예 작가는 대부분의 작가들보다 늦은 나이인 30대 중반을 넘어서야 문단에 등단했다. 그것도 한국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공부하던 시절, 국내 문예지 <라쁠륨>을 통해서였다. ‘라쁠륨’이라는 이름이 주는 뉘앙스로 인해 혹자들은 프랑스 문단에서 등단한 줄 알았다고들 했다. 2002년 이상문학상을 받을 때에도 책 한 권 펴내지 않은 무명(!) 작가의 단편이 상을 받았다고 더욱 무성한 소문을 남겼다.
사실, 그가 문학에 관심을 두고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것은 오래되었다. 십 대 때부터 가진 꿈이었지만 서두르지 않았을 뿐이다. 그 이유를 들자면 고2 때 완성한 장편소설의 영향이 있었다. 그해 겨울방학에 막연히 ‘소설이나 한번 써볼까?’ 하는 억누를 수 없는 마음으로 소설을 썼었다. 나름 표현력은 있었지만 단계적인 공부를 하지 않았기에 막막했었다. 그렇다고 책을 많이 읽은 소녀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무작정 대학 노트를 사서 볼펜으로 글을 썼을 뿐이었다.
얼마 전, 오래된 짐을 정리하다가 그 대학 노트를 발견했다. 글을 읽어보니 이걸 없애야 할지, 가지고 있어야 할지 난감하더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로 등단한 지 10년이 넘은 중견 작가로서, 큰 상을 두 번이나 받은 소설가로 인정받고 있는데 만약에 그가 죽은 후 이 노트가 발견되면 ‘18살 권지예의 소설이 이 정도밖에 안 되었나?’ 다들 실망할 것 같은 유치함 때문이란다.
그 당시 그는 만화에 중독되다시피 빠져 있었다. 또한 유치하고 간지러운 로맨스에 매료되었었기에 그런 류의 소설을 쓴 거라고 했다. 지금의 연애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진부한 내용들로 가득했으며 경험 한 번 없는, 오로지 상상으로만 쓴 소설이었으므로 유치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엄연히 작가가 되었으니 습작 시절과도 같은 초창기의 작품이 얼마나 유치할 것인가. 그때 알았단다. 어떤 식으로 글을 써야 하는지 말이다. 또 대학 학보사에서 글을 써 상을 받은 적도 있기 때문에 재능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한 권지예 작가가 등단에 느긋했던 것은 박완서 선생의 영향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 학교기자 자격으로 선생을 취재한 적이 있었던 작가는 마흔 넘어 등단한 박완서 선생을 보며 ‘작가란 평생 할 수 있는 직업’이라는 걸 깨닫게 되고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단다. 아직 어렸기에 경험을 쌓아야 한다고 믿었고, 마음 한구석에는 반드시 작가가 될 거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 자신감이 단 한 번의 신춘문예조차도 응모하지 않게 했다. 그렇게 작가의 꿈은 뒤로 미룬 채, 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 영어 선생을 하며 지극히 모범적인 생활을 했다. 주부 생활에 익숙해지자 자신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을 박차고 나갈 수가 없었단다. 그러다가 프랑스로 8년간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때 그곳에서 국내 문예지 <라쁠륨>을 통해 등단했다. 그리고 한동안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공부에는 재미가 없었지만 채근하는 교수에 의해 논문 쓰기에도 바빠서였다.
하지만 권지예 작가는 프랑스에서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경험했단다. 외국에서의 막막한 생활은 여자의 일생이 과연 무엇이고, 결혼은 무엇인가 의미를 두게 했다. 또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주어진 복지부동의 세월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공부를 하다가 외로우면 글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생각해보면 힘든 시기였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인터넷의 발달이 더딘 때였기에 지금처럼 활발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프랑스 사회에 적응을 하며 살아야 했다. 또한 모국어를 버리고 불어를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한글로 소설을 쓰다 보면 사자성어조차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런 여러 가지 상황에서 절박한 마음으로 글을 쓰는 동안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단다.
2000년 귀국 후엔 이런 꿈을 꾸었다. ‘마흔에 돌아왔으니 10년 동안 열심히 글을 써서 국내에서 알아주는 작가가 되자. 그리고 쉰이 넘으면 세계로 나가자!’ 올해 권지예 작가는 한국 나이로 쉰 살이 되었다. 그 꿈을 이루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과정 중에 있다고 생각한단다. 작가는 한국에 오자마자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5개월 동안 병원생활을 해야 했다. 그때 그는 ‘은둔 작가’로서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단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 써낸
「뱀장어 스튜」가 이상문학상을 받았고, 마침내 한국 문단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로선 희생을 치를 만큼 치른 후에 나온 작품이라며 웃었다. 그 후부터였다.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한국에 와서도 한동안은 가족과 교수라는 직업, 작가로서의 생활 중에서 어떤 것이 중요한 건지 몰랐다고 한다. 하지만 뭔가를 버려야 얻는 인생이라는 걸 깨달으며 지방 교수직을 일 년 하고선 그만두었다. 연봉으로 따지자면 교수의 연봉이 훨씬 많겠으나 문학에 투자(!)하여 얻는 가치를 따지자면 교수의 연봉보다 훨씬 행복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들을 거치면서 이번 작품집
『퍼즐』에 실린 글들이 쓰였다고 했다.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
『퍼즐』은 새로운 세계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독자들은 ‘어떤 과도기일까?’ 작품 보고도 잘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주제 자체가
「꿈꾸는 마리오네트」를 쓰고 난 후에
「뱀장어 스튜」로 이상문학상을 받은 후에 불리었던 ‘불륜작가’의 그것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동안 그는 그런 타이틀에서 벗어나고자 다양한 작품 활동을 했으나
『퍼즐』에서도 비슷한 주제가 많이 회자되는 까닭에 그걸 염두에 두고 쓴 것은 아니지만 그런 말이 종종 들리기도 한단다. 욕망이라는 주제가 저절로 떠오를 만큼 이혼하여 혼자 살거나, 결혼을 하고서도 불행한 주인공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권지예 작가는 강하고 자극적인 것을 좋아한단다. 커피라면 에스프레소 같은 진액을 좋아하고, 술이라면 한 잔만 핥아 마셔도 정신이 바짝 드는 독주를 좋아한다. 목에 불이 날 것 같은 중국 술 같은 것 말이다. 그렇다 보니 소설에도 그 영향이 미친다. 해서 그의 소설을 읽은 독자들은 항상 굉장히 강하다고 한다. 마니아들이 많은 이유도 그런 까닭이다. 그의 소설을 제대로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뱀장어 스튜」와
『꽃게 무덤』을 읽었지만 그땐 그다지 느낌이 없었다. 독서의 취향도 시간이 지나면 변하는지 그땐 관심이 없던 그의 소설이 이번 소설집
『퍼즐』을 읽으면서는 그만 권지예 작가의 필력에 푹 빠지고 말았다. 첫 단편 「BED」에서부터 그랬다.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그 오싹한 느낌은 스티븐 킹을 능가할 정도였다면 좀 오버일까? 어쨌든 문학이라는 틀 안에 추리적인 요소를 집어넣어 가독성과 흥미마저 돋게 했다.
그는 소설 속의 인물과 작가로서의 인물은 다르다고 했다. 산문집을 읽어본 독자라면 소설 속 주인공과 작가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산문집은 유쾌하고 재미있으며 편안하게 읽을 수 있도록 쓰지만 소설엔 괜히 힘이 들어간다. 그런 까닭에
『퍼즐』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들은 대부분 죽느냐, 사느냐 하는 기로에 선 사람들이다.
작가는 이번 소설의 화두는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했다.
대부분 욕망은 추악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인간의 욕망을 아무것도 없는 식물적 인간으로 봤을 때, 식물 에너지가 없으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욕망을 가진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퍼즐』에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인간이라면 사랑에 대한 욕구와 그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더불어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당연한 것이다. 비난받을 일은 절대 아니다. 만약 어떤 식으로든 욕망을 이룰 수 없는 상황이라면 상처받을 사람들이 많이 나오겠지만 그 욕망을 쟁취하는 사람이 나온다면 달라진다.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욕망을 이루지 못해 고통스러워하고 소멸을 꿈꾼다. 그런 아이러니를 방어적으로 해석하면 좋겠단다. 욕망은 자기 욕망을 가진 존재가 욕망을 이기지 못했을 때 나타난다. 즉 죽음을 죽음 끝까지 밀어붙인 사람만이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죽음을 앞두고 끝까지 욕망을 소진한 사람만이 자기 삶을 절절히 느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죽음을 일종의 생생한 삶을 느끼게 하는 장치라고 생각하며 글을 썼다고 했다.
“일상생활에서 나는 내 존재를 느끼지 못하며 살았다. 내 존재의 욕망은 교통사고 후에 확인했다.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그동안 내가 너무나 편안한 일상을 보내며 행복했었구나 생각했다. 그걸 사고 전에는 모르고 살았다. 일상이 주는 행복, 그것과 너무 다르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책을 읽은 독자들이 소설 속 욕망의 주인공들을 비난하기보다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들을 생각하며 죽음 앞에 몰릴 대로 몰린 그들을 떠올리며 몰입하면 좋겠단다. 죽음과 욕망에 포커스를 두기보다는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지, 또 존재와의 관계는 무엇이며, 욕망과는 또 어떤 관계인가와 같은 것을 생각하면 좋겠다. 사람들은 모두 삶의 좌절 후 꿈을 꾼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삶에서 가장 반짝거렸을 자기 삶의 본 모습을 보는 것처럼 그런 것에 감정 이입되어 읽어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작품에 관한 몇 가지 궁금증들
작가는 주인공을 정할 때 작가의 연령층에 맞춰 글을 쓴다. 이 작품을 읽고 미혼의 독자들이 결혼하기 겁난다고 말하기도 했단다. 하지만 결혼을 하더라도 이런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른 채로 나중에 실망하는 것하곤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런 소설을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나이 있는 분들은 공감할 것이다. 또 어떤 분은 여성 심리를 어쩜 이렇게 잘 아느냐 말을 해주기도 한단다.
첫 장편인
『아름다운 지옥』을 두고 자전소설이라는 말들을 한다. 하지만 십 대까지의 이야기는 집을 배경으로 썼으나 나머지는 모두 허구다. 그런데도 독자들이 보기엔 자전적 소설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으니 당연히 성인이 된 후의 이야기도 자전적으로 알고 있다. 심지어는 출판사 직원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보통 49%가 실제이고 51%가 허구라 할지라도 나머지 삶을 모두 실제로 믿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전적 소설을 쓸 때는 고민하게 된다.
소설을 쓸 때 그는 그가 아닌 한 여자를 떠올리면서 쓴다. 작년에 쓴
『붉은 비단보』의 경우 신사임당이 모델이었다. 역사적이든 아니든 모델을 두고 글을 쓰는 일은 힘든 작업이다. 소설가로서의 상상력이 뻗어나갈 여지가 없다. 구속감마저 느낀다. 사실 신사임당의 삶이란 건 뻔하지 않은가? 그렇기에 소설에선 결론적으로 뒤집었지만 역사 왜곡이라는 비난에선 자유롭지 못하므로 모델을 두고 글을 쓰는 것은 무척 힘든 작업이라 했다. 그래서 그는 상상하며 글 쓰는 것을 더 좋아한단다. 하지만 이런 경우도 있었다.
소설을 쓰기 전에 대부분은 소설과 관련된 것들을 취재하게 된다.
『꽃게 무덤』도 그렇게 했어야 하나 그러지 못했다.
『꽃게 무덤』은 강화도에서 꽃게를 먹다가 쓰게 된 소설이다. 그 책에 석모도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꽃게를 먹다가 누군가 석모도의 함초에 관한 이야길 했다. 그는 가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얘길 듣고 가보지도 않은 석모도의 함초밭에 관한 글을 썼다. 넓고 멋지게 표현한 글이었다. 문제는 그 소설 읽은 독자가 그 느낌이 너무 좋아 석모도에 직접 가본 것이다. 가보니 글 속의 그런 함초밭은 없었다고 말했단다. 나중에야 그도 석모도 가보았다. 정말 초라했다. 아무런 느낌을 가질 수 없었고, 함초밭은 볼품없었다.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소설은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앞으론 조심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 것에 신뢰감을 잃어서는 안 되겠기에 그렇다. 그럼에도 너무 지독하게 검증하는 것은 별로란다.
소설을 쓰다 보니 언제부턴가 추리나 스릴러 같은 강한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순수작가가 장르소설을 좋아하면 격이 낮아진다는 데 대한 강박 관념이 있었다. 그래서 수필은 경쾌하게 쓰면서 소설에서만은 인생의 의미를 집어넣어야 하는 식의 강박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오래전부터 자극적이며 엽기적인 것을 좋아했지만 그런 글을 쓸 수는 없었다. 지금은 다양하게 글을 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다양한 글을 쓰고 싶다. 지금 모 계간지에 연재하는 소설도 미스터리 러브스토리다. 탐정이나 본격 추리 소설은 아니지만 문학과 추리를 접목시키는 방향으로 쓰게 되었다. 이런 생각을 몇 년 전부터 많이 하다 보니 단편에 그걸 터치하여 추리 스릴러 형식으로 쓰게 된 것 같단다.
권지예 작가는 소설이 너무 잔잔하면 싫증난다고 했다. 그는 호기심도 많은 편이다. 10년 동안 문학적인 글을 썼으니 이젠 쓰고 싶은 것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과정에서 역사물도 쓰고, 스릴러 혹은 잔혹 소설도 자연스럽게 쓰게 되었다. 나름대로 독자들은 만족하는 것 같다. 그 자신도 만족스럽다. 자연스럽게 변화되어 가는 것 같다.
그는 요즘 추리 소설을 많이 읽는다고 한다. 최근에 읽은 소설이 스콧 스미스의
『심플 플랜』이다. 진부한 주제이지만 돈을 지키기 위해 평범한 사람이 파멸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범인은 잡히지 않고 그 어둠을 평생 안고 살아간다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인간의 내면을 파헤친 소설을 좋아하고 쓸 생각이란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는 온다 리쿠와 히가시노 게이고다. 그들처럼 범죄자보다는 인간 본연의 어떤 내밀한 악과 어둠의 세계에 대해 글을 쓰고 싶단다. 그런 소설들이 더 섬뜩하고 무섭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또 한 사람의 작가를 알게 되었다. 길지 않은 시간에 한 사람의 인생을 알게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권지예 작가를 어느 정도 알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작은 장소에서 오붓하게 보낸 시간이었다. 권지예 작가는 독자들이 관심만 가져준다면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글을 쓸 것이라며 작가와 만남을 끝냈다. 한국의 온다 리쿠, 권지예 작가라면 가능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