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다’보다 더욱 진한 말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 내 목을 내어주고 싶었다. 하얀 눈 위에 떨어지는 빨간 내 피를 바라볼 수 있었으면 했다. 무엇보다 한 번도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 못 했던 ‘열두 살’이 되고 싶었다. 내가 아는, 가장 유명한 열두 살은 케빈(<케빈은 열두 살>)밖이었는데, 이젠 바뀌었다. 케빈 대신 들어선 그 이름은, 오스칼(카레 헤데브란트)와 이엘리(리나 레안데르손)가 됐다.
그렇다. <렛미인>. 스웨덴에서 날아온 이상한 뱀파이어 영화. 기존의 뱀파이어 영화의 관습에서 떨어진, 아름답고 슬픈 영화. 이 영화, 눈이 ‘펑펑’이 아닌 ‘펄펄’ 내린다고 감식한 이동진 기자는 리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12살 8개월 9일’이라고 자신의 나이를 못 박는 소년과 ‘한 12살쯤’이라고 살아온 세월을 얼버무리는 소녀의 사랑은 그렇게 시간과 존재의 벽을 넘어선다. 혹은 어린 인간과 여린 뱀파이어의 사랑은 상대의 입술에 핏자국을 남기거나 유리창에 희미한 손자국을 남기며 희미해져 간다.”
<렛미인>, 당신을 매혹시킬 어떤 사랑의 풍경
이 영화, 애초 원작이 있었다. 독일, 영국 등의 유럽 12개국에 번역된 스웨덴 작가 욘 린퀴비스트(John Ajvide Lindqvists)의 베스트셀러 『Lat Den Ratte Komma In(Let the Right One In)』. 이 제목은, ‘들어가도 되니?’, ‘들어가게 해 줘.’라고 허락을 구하는 뱀파이어의 언어를 일컫는다고 한다. 과연, 영화에서 이엘리는 “들어가도 되니?”라며, 초대를 원한다. 나는 그것을 단순히 집에 들어가는 것만을 뜻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인간의 초대 없이 들어가지 못하는 이엘리의 그 하소연은, 우리가 이뤄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과 뱀파이어의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었다. 오스칼의 머뭇거림으로 이엘리는 피를 흘리는 장면에서 나는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오스칼은 이내 이엘리를 안아준다. 슬프도록 아름다웠던 장면.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관습에서 벗어난 두 사람의 관계는, 그것 자체로 신선하고 우리네가 맺고 있는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뱀파이어의 피를 타고난, 이엘리는 소수이며 약자였고,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상상 속에서만 자신의 복수를 하는 오스칼 역시 마찬가지다. 두 사람의 연대 혹은 사랑에서 나는 어떤 소수자의 연대를 경험했다면 오버일까. 내 마음을 아스라하게 했던 것은, 쾌락이 아닌 살아남기 위해 피를 빨아야만 하는 생계형 뱀파이어, 이엘리의 존재였다. 특히 먹잇감(오스칼)을 앞에 놓고서도 침을 꿀꺽 삼키며, 꾹꾹 자신의 본성을 눌러대는 그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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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뱀파이어의 존재로 인한 공포가 지배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분명히 사랑. 열두 살이라고 무시하지 마라. 사랑은 못내, 그렇게 불쑥 다가온다. 외려 그들은 섹시하기까지 하다. 새벽녘, 창문을 열고 오스칼의 방에 찾아온 이엘리가 오스칼의 뒤에서 안아줄 때, 나는 그만 훅~ 하고 침을 꼴깍 삼켜야 했다. 어떤 성인들의 것보다 섹시하였기에.
한편으로 최근 한국어로 번역된 소설 『렛미인』은 좀더 깊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적 각색이 빛나는 부분이기도 하고, 영화에서 불분명했던 부분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역할도 한다. 이엘리의 아버지 느낌을 주는 하칸이 그렇고, 이엘리나 오스칼 아버지의 섹슈얼리티 등에서도 그렇다. (그러니까, 알고 싶다면 책을 읽으면 된다!)
지난 4일 서울 이화여대에 위치한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한국어판 책 출간 기념으로 <렛미인>을 다시 만나는 행사가 열렸다. ‘이동진과 함께하는 <렛미인> 특별 상영회’. 처음이건, 아니건, <렛미인>을 보고 훅~ ?던 사람들이 있었고, ‘내 귀에 캔디’ 이동진 기자(이동진닷컴, //blog.naver.com/lifeisntcool)와 나눈 대화의 시간. 아직, 보지 못했다고? 그렇다면, 일단 보고 나서 이야기하자. 책이든 영화든. 경고하자면, 훅~ 갈지 모른다. 조심하시라.
이동진 기자에게 묻고 싶고 듣고 싶은 <렛미인>
<렛미인>에 대해, ‘피와 눈물의 연금술’이라는 평을 남겼는데.
표현은 짜내서 나오기보다 머리에 떠오르는 경우다. 소설(원작)과 이 영화의 가장 다른 점이 잎을 떨어뜨린 겨울의 문장이다. 소설은 시적이라기보다 단아한 산문이다. 영화에서 가장 좋은 건, 다시 봐도 느끼는 게, 영화의 리듬이 정말 좋다. 좋은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 그래서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숏과 숏, 신과 신이 모이는 게 연금술 같다. 피와 눈물을 재료 삼아 만든 연금술 같은 영화다.
이 영화의 미덕과 문학의 장점은 뭔가.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었는데.
처음 영화를 보고 나서 영역으로 된 것을 읽을까 하다가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국어로 된) 책이 나와서 추천사를 썼다. 내용적으로 영화에 수많은 함의가 있겠지만, 사랑 얘기로 봤다. 소설은 사랑 얘기도 많지만 성장소설의 성격이 강하다. 그런 면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영화가 특히 좋았던 것은, 동화와 호러를 접목하는 방식이 좋았다. 대개 이 두 가지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의외로 잘 맞는다.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도 호러라고 생각하는데, 슬픈 감성이 있잖나. 그림형제 우화 등의 원전을 보면 끔직하다. 동화 세계도 따져보면 끔직한 게 많다. 살인, 식인 등의 모티브도 많고. 『헨젤과 그레텔』, 『빨간 모자』 등을 봐도 알 수 있잖나. 어린이 개념이 확립된 것이 200~300년 전, 즉 근대 이전이다. 그때는 어린이를 작은 어른으로 봤다. 순수하고 악을 가려준다는 관념 자체가 근대적 산물이다. 그런 점에서 호러와 동화는 잘 맞는다. 영화에서도 (오스칼이 이엘리를) 초대해 주지 않자, (이엘리가) 피를 흘리는 장면은 무섭기도 하면서 외로움이 느껴지지 않나. 그런 게 이 영화에서 잘 묘사돼 있다.
소설은 어떻게 봤나.
소설은 되게 재밌게 봤다. 기괴한 상상력이 있고, 책을 읽게 만드는 문체의 힘이 있다. 이런 뱀파이어 소설은 없었다. 영화를 먼저 본 사람에게 좋은 것은 (영화 속에 나온) 암시적인 표현을 다 알려준다는 점이다. 가령, 오스칼의 아버지가 동성애자인 것이 감은 잡히지만, 정확하게 알려주진 않지만, 소설에서는 이를 알려준다.
감독이 원작의 섹슈얼리티를 잘 발라냈다고 본다. 또 원작에서 중요한 캐릭터가 영화에선 나오질 않는데, 책에서 제일 재밌는 것 중의 하나는 호칸이라는 캐릭터다. 책에서는 선생이고 소년성애증 환자다. 공중화장실에서 12살 소년을 사기도 하고. 그런데 이 캐릭터가 선생이라는 점 때문에 그것을 억제하고자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갈구하는 입체적인 면이 있다.
이엘리도 소설에는 이전 이름이 엘리아스이고 남자임을 알려준다. 영화에서도 (이를 암시하는 장면이) 짧게 나오나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책은 이야기 고리를 속 시원히 열어주는 측면이 있다. 물론, 90%는 속이 시원하고 10% 정도는 ‘몰랐으면 좋았을걸.’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웃음) 어쨌든, 소설은 소설대로 좋고, 영화는 영화대로 좋다. 감독이 각색을 참 잘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가방에 들어가 있는 이엘리가 모르스 부호를 치는데, 어떤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소설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기차에 올라타는 장면에서 끝난다. 그런 면에서 아주 영화적인 각색이다. 모르스 부호는 스페인어로 PUSS인데, ‘가벼운 키스’라는 뜻이다. 아주 앙큼하다. 조그만 놈들이.(웃음) (이걸 보고 써 먹는 분들도 많을 것 같다) 그걸 써 먹는 분들은 많을 것 같지 않다. 열다섯 밑으로 써야지. 늙수그레한 사람들이 쓰면 닭살이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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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이 있다면.
첫째는, 안데르센의 동화인데, 어릴 때 집에 계몽사 전집이 있었다. 『하이얀 눈의 여왕』이라고. 안데르센 동화가 물론 대부분 유명했지만, 이건 상대적으로 그리 유명하지 않은 동화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본 순간, 그 동화를 본 느낌이 확 떠올랐다. 내용은 다르다. 동화는 『나니아 연대기』랑 차라리 더 비슷한데, 이상하게 생각이 났다. 이 영화에 대한 리뷰에서 ‘하이얀 눈의 나라에서…’라고 썼는데, 사실 어법이 틀렸지 않나. ‘하이얀’이 아니고 ‘하얀’이 돼야 하는데. 어릴 때, 본 『하이얀 눈의 여왕』 때문에 그렇게 썼다.
둘째, 지금은 공포영화를 무서워하지 않는데, 어릴 때는 무서워했다. <전설의 고향>이 특히 무서웠는데, 어느 해 겨울, 초등학교 4~5학년 때인가, 제목이 <설녀>라고 있었다. 귀신인데 사람을 해치고 그랬다. 그렇게 무서웠다. 이걸 보면서 <설녀>가 생각났다.
셋째, 이 영화의 첫 장면을 가장 좋아한다. 어두운 밤하늘에 먼지처럼 날리는 눈. 그러다 오스칼이 나오게 되지. 보통 눈 올 때 소리가 나지 않잖나. 김광균의 시 「설야」에 보면, ‘멀리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는 구절이 나온다. 어릴 때도 (이 구절이) 에로틱하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에서 눈이 올 때 의태어로 ‘펑펑’이나 ‘펄펄’을 쓰잖나. 이 영화에선 절대 ‘펑펑’이 아니고 ‘펄펄’이라고 생각했다. 어감 차이가 대단히 크고, 펄펄은 왠지 서러운 느낌이 든다. 그래서 영화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 눈 내림의 광경이 가장 좋았다. 리뷰의 첫 머리에서 눈이 펑펑이 아닌 펄펄 내린다고 쓴 이유가 그것이다.
리뷰를 쓸 때, 한 번 보고 쓰는데, 메모를 하나. 그리고 본인이 쓴 것에 확신을 하나.
확신은 없다. 다만 영화에서 설득된 내 감정이 있을 뿐이다. 어떤 영화에 매혹당하거나 싫을 때, 곱씹어보는 방식으로 리뷰를 쓴다. 사후에 생각하는 거지. 감정은 리얼하지만, 진실은 확률로만 존재한다. 65%, 87%의 진실은 있어도, 100%의 진실은 없다고 본다.
리뷰를 쓸 때, 일단 메모를 한다. 평생 버릇 같은 거고. 어둠속에서 다른 사람보다 메모를 세게 한다. 화면을 보면서 써서 못 알아보는 경우도 있고, 볼펜이 다 돼서 긁은 흔적만 남은 경우도 있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지금까지 영화를 대략 5,000~8,000편을 본 것 같다. 영화도 그 정도 보면 모든 영화의 패턴이나 언어가 보인다. 아주 잘 본 영화는 숏이나 신의 구성도 생각이 나고. 일반인들은 이런 것까지는 기억을 잘 못하지만, 직업적으로 훈련이 돼 있으면 이도 가능하다. 나도 모르는 새, 단련이 된 것 같다. 그래서 한 번 보고도 리뷰를 쓸 수 있는 것 같다.
영화를 꽤 많이 봤는데, 10편 중 몇 편 정도나 감동을 받나.
사실 안 좋은 영화가 좋은 영화보다 많다. 직업적 후각도 있는데, 후질 것 같은 감이 들면 핑계를 대고 안 간다. 일부러 일을 만드는 거지.(웃음) 내 별점이 후하다고 얘기를 많이 하시는데, 그건 별점이 좋지 않을 것 같은 영화는 안 보기 때문이다.
사실 직업적 매너리즘이 없다고는 얘기 못한다. 그렇지만 영화를 봐서 행복한 경우도 많다. 최근 <걸어도 걸어도>와 같은 영화들. 휴가를 가면 영화를 한 편도 안 본다. 비행기를 타도 기내 영화는 기를 쓰고 보지 않는다. 악착같이 자거나 책을 본다. (웃음) 휴가 때 영화를 안 봐서 행복하다. 1년에 51주는 영화를 보는데, 한 주만큼은 영화의 신도 용서해주지 않겠는가.(웃음)
다른 영화에서도 <렛미인>과 같은 풍경을 볼 수 있는지.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북구 영화의 성장 영화가 참 좋다. <개 같은 내 인생>이나 <정복자 펠레> 같은 영화들. 특히 <정복자 펠레>에서 떠날 때의 눈 장면이나 부감이 참 좋다. 북구 영화에서 비 냄새나 나거나 습하고 우울한데, 스코틀랜드나 아이슬랜드 영화도 그렇다. 프레드릭 토드 프레드릭슨 감독(아일랜드)의 영화를 보면 이런 느낌들이 난다.
영화 속 장소를 찾아가는 책도 냈는데, 스웨덴에도 관심이 있나.
작년까지 4년간 여행을 갔다. 올해는 제반 여건상 시리즈를 안 하고 있다. 하지 않기로 한 건 아니고 이런저런 사정이 생겼다. 제일 안타까운 게, <렛미인>과 <더 폴>이다. 시리즈를 계속했다면 꼭 갔을 거다. 11월에 책이 한 권 나올 예정인데, 이것도 여행 책이다.
영화는 블라케베리를 배경으로 하지만, 실제 거기서 찍지 않았다. 설정 샷만 찍고, 루엘라라고 스웨덴 북쪽에서 찍었다. 소설가 출생지가 블라케베리인데, 영화 배경에 맞는 곳을 찾다보니 루엘라에서 찍은 거다. <카사블랑카>도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찍은 것이 아니고, LA에서 찍었다. 극 중 장소를 어디라고 말해놓고 실제 찍는 곳이 다른 것도 비일비재하다. 시리즈를 다시 하게 된다면 루엘라에 꼭 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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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칼이 참 착해 보이고, 도덕적인 아이 같은데, 어떻게 흡혈귀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파워 오브 러브’ 아니겠나. (웃음) 영화를 볼 때, 사랑하는 감정을 이엘리에게 이입했다. 사랑도 처음에는 인간 본성을 따라가잖나. 그런데 다음 단계로 고양될 때는, 본성을 배반하는 방식으로 넘어간다. 이엘리가 피를 보고 핥아먹는 것을 보고, 이엘리가 피를 갈구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흡혈귀인데도, 오스칼이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이 본성을 배반하는 것 아니겠나. 영화에 숭고한 측면이 있다면 그것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 먹잇감(오스칼)이 있는데도 이를 악물고 참는 장면이 나오지 않나. 이엘리도 본성을 배반한 것이다.
끝난 뒤, 밤이 깊게 내려앉았다. 뱀파이어와 나눈 사랑에 매혹된 밤. 이엘리를 만날 수 있다면, 내 피를 빨려도 좋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소녀나 여자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당장 기차표를 끊을 수도 있고, 가방을 준비할 수도 있다. 열두 살(들)에게 보고 들은 사랑이 꽤나 인상 깊었나보다. 간절하게, 두려움 없이. 사랑은 그런 거다. 너에게 들어가고 싶은 것. 그리하여 다시 한번, 간절하게 두려움 없이, “들어가게 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