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얼마 전, 한 ‘유부남’ 친구, 부부 싸움을 했더란다. 녀석은 ‘총각’인 내게 넋두리 아닌 넋두리를 늘어놓고. 이번 건은 격했던지, 순한 이 녀석도 평소 않던 언사까지 해댄다. “말 많고 성가시고 사사건건 간섭하고, 쯧.” 이런 넋두리를 해대는 유부남 친구를 위해 총각 친구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만히 들어주는 것. 그리고 마무리는 이렇다. “그래, 너는 결혼하지 마라.”
대개가 그렇다. 많은 결혼한 친구들과 선후배는 종종 내게, 술자리가 됐든 넋두리가 됐든, 이런 말을 툭툭 던진다. 심지어 어떤 친구는 거나하게 취해설랑 “너는 우리의 희망이다. 절대 결혼하지 마라.”는 폭탄발언까지. 허걱! 맷집이라도 없었으면 어쩔 뻔 했나. 아마도 나는 결혼하면 죽는 줄 알았을 거다.
그러나 그들은 내 앞에서 수시로 두 얼굴이다. “결혼 언제 하냐?”고, “국수는 언제 먹여줄 거냐?”고 묻고는 언제 그랬나 싶게 결혼하지 말란다. 물론 여기엔 여자 남자 따로 없다. 사람이 다소 많은 어떤 모임에선 한 명씩 돌아가며 묻는다. 나의 결혼을. 아, 내 결혼이 이렇게도 인류의 지대한 관심사였나. 감격스럽다. 그런 반면, 짜증난다. 지들이 뭔데 나보고 결혼해라, 하지 마라, 그러는 거지? 왜 그들은 타인의 결혼 여부를 놓고 감 놔라 배 놔라하는 걸까. 그것 말고도 세상엔 재미난 일이 많은데, 쯧.
#2.
“얼른 결혼해서 안정돼야죠.” 들을수록 이상한 말이다. 결혼하지 않으면 불안정, 결혼하면 안정이라는 이야기인데, 나는 당최 ‘결혼=안정’이라는 세간의 통념을 이해 못하겠다. 결혼하지 않았다손, 나를 비롯한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은 그리 불안정하지 않다. 불안정해 보인다손, 그것이 결혼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 결혼한 사람 중에도 내가 보기엔 불안정해 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삶의 안정 여부를 평가하는 잣대에 ‘결혼’은 절대적이지 않다. 미미한 하나의 옵션이 될 순 있어도. 그 안정이라는 말, 아마도 결혼중개업소에서 퍼뜨리는 강력한 상술 중의 하나다. 돈 받아서 회사가 안정되고 싶거든.
이 말,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한다.” 이 말로 결혼은 한 번쯤 해볼 만하다고 설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 맞받아친다. “해서 후회할 결혼이라면 하고 싶지 않아”라고. 내 비록 결혼 않고 살겠다는 독신주의자는 아니지만 인륜지대사니 신성한 결혼이니 온갖 미사여구를 다 갖다대는 경사인데, 후회할 거라면 꼭 해야 하는 거야? 진짜, 결혼은 미친 짓 아니야?
또 이 말, “아이 언제 낳아 어느 세월에 다 키울래?” 그러면서 친절히 계산해 준다. 삼십 대 중반의 지금 나이에 결혼해서 애를 낳아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성인이 될 때까지. 그러면서 그때의 내 나이까지. 고맙다, 내 삶에 대해 온갖 걱정을 다 해줘서. 하지만 내 속마음은 이렇다. ‘별 걱정 다 한다. 남의 애까지.’ 무자식으로 살든 입양을 하든 애를 낳든 그것이 대체 뭔 상관? 더구나 국가적으로도 애가 필요하니까 결혼을 꼭 하란다. 애국자 나셨다. 언제부터 그리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셨나. 참, 결혼해야 애를 낳나. 결혼하지 않고도 애 낳을 수 있다는 상상은 안 해보셨나. 애한테 그게 무슨 못할 짓이냐고? 거듭 말하지만 “너나 잘 하세요~ 쯧.”
나, 결못남!
이렇게 말하고 보면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비혼주의자가 아니다. 말하자면 ‘결혼 못하는 남자(결못남)’지. 안 하는지 못 하는지, 나는 전자라고 우겨대지만 후자라고 여기는 자들도 있다. 그러니까 “나는 결혼 안 해!”라고 당차게 밀고 나갈 용기도 없고, ‘결혼, 하면 하고 아니면 말지.’라고 생각하는 회색분자에 가깝다. ‘지금’ 결혼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지, 나중이라고 똑같으란 법은 아닌 게지. 다만 등 떠밀려 결혼하는 건 끔찍하게 싫고, 완전 결혼하고픈 상대가 나타났는데 결혼제도 편입 여부를 놓고 고민하는 일도 싫다. 핏줄이나 혈연을 이어야겠다는 가문 수호 의지도 없고, 혈연에 기초하지 않은 가족도 가능하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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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이런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나로선 즐거운 일.
『언니들, 집을 나가다』(언니네트워크 엮음/에쎄 펴냄) 출간 기념 큰언니 변영주 감독(
<낮은 목소리> 3부작,
<밀애> 등)과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 보기. 행사의 제목하야 ‘결혼을 믿지 마세요!’. 책, 인물, 영화, 행사 다 좋아. 책을 보면서 부제(‘가족 밖에서 꿈꾸는 새로운 삶 스물여덟 가지’)부터 솔깃하더니 서두에서 훅~ 갔다. 마음에 들었다는 얘기다.
“결혼 밖에서 본 삶이 그다지 행복하지도, 섹시하지도, 외로움의 끝도 아니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결혼하지 않았다고 무조건 불행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요. 그것을 알면서도 결혼하지 않은 다른 누군가의 삶을 ‘위기’로 몰아넣고 규정하는 것은 실은 자신의 삶이 모래성과도 같음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사회가 보장하는 결혼의 수많은 혜택과 경제적인 이점에도 불구하고 정작 위기에 처한 것은 결혼이니까요.”(pp.7~8)그리고 나 역시, 거칠지만 나의 고민과 비슷한 맥락의 어떤 것. (물론, 나는 여성주의자가 아니다.)
“지금의 결혼 제도가 여러 가지 면에서 남성에게 유리한 것이라면, 내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나는 그 남성 기득권의 최고 정점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면 그 구조 안에서 나의 (여성) 동반자는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난 나의 동반자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의 동반자에게 불리한 제도,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불이익을 받게 되는 그 구조에서 나만 편하게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물론 내가 노력하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난 자신 있게 ‘저항’하며 살 자신이 없다. 결혼 제도는 압도적으로 달콤하고 압도적으로 강고한 것이기 때문에”(pp.113~114)<안토니아스 라인>, 여성주의 커뮤니티의 온화함
<안토니아스 라인>을 ‘다시’ 봤다. 1990년대 중반이었던가. 여성주의자들에게 크게 환대를 받았던 이 영화. 명성 자자하던 이 영화를 스크린에서 처음 본 것은 지난 5월이었다. 뭐랄까. 약간 감동 먹었다. 여성주의 커뮤니티의 온화함이 넉넉하게 스며들었다. 다시 본 영화는 여전했고, 이번에는 탄생과 죽음에 집중하면서 영화와 마주했다.
안토니아의 엄마에서부터 5대에 걸친 남자 없는 가계도. 그들은 결혼으로 대표되는 세상의 율법 혹은 속박에서 자유롭다.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스스로 고민하고 사유한다. 후대로 내려올수록 그들은 좀더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꾸린다. 선대에서 어떻게 하라고 강요하는 것 따위는 없다. 변영주 감독은 이 책과 이 영화가
“(개인이) 어떤 것을 욕망하고, 길을 걸어갈 것인가 하는 접점이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그들의 관계도다. 남자가 물론 등장하나 대부분의 남자는 권위적이고 그악한 남성성과는 거리가 멀다. 일부 마을 남자는 권위적이며 악하나 대부분은 순응하며 연약하다. 혹은 답답하거나 소극적이기도 한. 사실 이 여성주의 공동체에서 남자는 그저 동반자 이상의 그 무엇이 아니다. 자신의 아들들에게 엄마가 필요하다며 안토니아에게 청혼을 하는 한 남자에게 안토니아는 이렇게 대답한다. “난 아들 따위는 필요 없어요. 남편? 남편이 왜 필요하죠? 가끔 여자가 못하는 일을 도와주세요. 신선한 달걀과 우유나 채소와 빵을 드리죠.”
멋지다. 바스도 그렇다고 스토커 짓을 하거나 악하게 굴지 않는다. 아들들과 꾸준히 안토니아의 집에 드나들며 남편보다는 ‘동반자’로 함께 살아간다. 뭐랄까. 물들고 번질 수 있는 관계. 말하자면, 책에도 이런 글귀가 나오지만.
“한 잔의 차를 마시면 당신은 이방인이다. 두 잔의 차를 마시면 당신은 손님이다. 그리고 세 잔의 차를 함께 마시면 당신은 가족이다.”(
『세 잔의 차』)
분명 환상 혹은 비현실적인 이야기지만 그래도 이런 공동체라면 몸담아 보고 싶다. 남편 아닌 동반자로서, 결혼 아닌 연대자로서. 그들은 각자 다르지만 서로에게 번지면서 각자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피를 나누지 않아도 그들을 ‘가족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다.
변영주 감독, 영화와 책을 이야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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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도서출판 에쎄 | |
그리고 이어진 큰언니 변영주 감독과의 대화. 오랜만에 20세기의 영화를 본다며, 자신이 만든 영화도 아니고 자신이 쓴 책도 아닌 자리에 소비자인 ‘방이동 B모 양’의 자격으로 왔다는 그는 예의 달변으로 좌중을 휘어잡았다. 이 영화의 역사적 의미를 잠깐 설명했다.
“여성 영화제가 없던 시절, 당대의 여성 영화는 <터미네이터 2>였다. (웃음) 당시 우리나라 여성들이 납치를 많이 당하던 시절이었는데, 이 영화에서 린다 해밀턴이 정신병원에서 격투기하면서 탈출하는 장면에선 박수가 쏟아졌다. (웃음) 어쨌든 <안토니아스 라인>의 감독 마린 고리스는 20세기, 1990년대 많은 이들로 하여금 여성 영화제를 만들게 했던 감독이다. 이런 건 검색해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말했다. (웃음)”사실 변 감독은 이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단다.
“감독이 존재하지 않는 자리라 편안한데, (웃음) 그래도 온 집안이 섹스하는 소리로 가득 찬 그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고 좋아한다. 이렇게 필름으로 된 영화를 보고 이야기하는 방식도 오래된, 꼭 박완서 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이었다.”그렇다면
『언니들, 집을 나가다』는 어떻게 봤을까.
“읽기 전엔 되게 재미없을 줄 알았다. 과거 IF의 책들처럼. 처음 열 페이지를 읽으면 다음 삼십 페이지가 예상되는 그런 책. 폄하가 아니라 내 영화도 그렇잖나. (웃음) 가만 보면, 성인이 돼도 유아스럽고 유치하고 촌스러운 이유는 혼자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집에 안 가고 모텔을 가고, 빨리 끝내는 것 아니냐. (웃음) 이 책은 독립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여성들에겐 많은 준비가 필요하고 생각할 것을 만들어 주는 올해 최고의 자기계발서가 아닐까 싶다. 남성 친구들도 재밌게 읽을거리가 많고, 자신의 블로그에 끼적거리듯 써서 되게 재밌다.”나도 남자로서, 되게 재밌게 봤다. 흥미진진하면서도 피가 되고 살이 될 법한 이야기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굳이 비혼이라는 말에 얽매일 필요 없이, 성인이라면 특히 독립을 꾀하는 이들에겐 안성맞춤인 이야기. 가족으로부터, 세상의 통념으로부터, 몸의 독립과 함께 심정적 독립을 원하는 이들을 위한 다양한 방식들. 아니, 그보다 좀더 세상을 재미나게 살 수 있는 방법들.
독립,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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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도서출판 에쎄 | |
그렇다면 변 감독의 독립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나는 뻔한 독립을 했다. 영화 일을 하면서 식구들과 사는 시간대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다른 식구들은 9시 뉴스를 보다가 잠들고 새벽 5시에 일어나는데, 나는 새벽 5시에 집에 들어왔다. (웃음)”물론 독립에는 철저한 준비와 시행착오를 겪어도 이를 넘을 수 있는 지혜와 체력이 필요했다.
“2년 정도 버틸 수 있는 알바 자리가 있는가를 따져야 하고, 할 줄 아는 가사 노동과 해야 할 가사 노동을 따져보는 한편, 전세 계약법, 동사무소와 친해지는 방법, 건강을 지킬 수 있는 방법 등을 알아야 한다. 나는 6개월 동안 준비했고 알바 자리를 3개로 늘렸다. 그때 강남의 웨딩비디오 전문가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올 정도였다. (웃음) 요리와 가사 노동을 익히며 옥탑방에서 (독립 생활을) 시작했고, 그 후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지금 PD와 함께 살고 있는데, 돈 벌면 각자 살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 준비하는 작품이 중요하다. (웃음) 내가 분리수거하는 것에 상당히 민감한 편인데, 얼마 전엔 두 시간 동안 아파트촌의 분리수거를 했다. 누가 이걸 봤는지 그저께는 부녀회장 제의가 오더라. 처음으로 권력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웃음)”독립은 로망이 아니다. 철저한 현실이다. 결혼과 마찬가지로.
“진심으로 사는 건 멋지지 않다. 멋진 인생은 없다. 사는 거고 살아남는 거다. 결혼해서 아이 둘을 학원 보내는 거랑 혼자 사는 거랑 크게 다른 게 없다. 어느 삶이 더 우아하거나 그렇지 않은 것도 없다. 독립한다고 특별한 건 없다는 얘기다. 이 책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삶을 미화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 영화감독이 되는 게 아니라 시간을 버티다보니 그렇게 됐듯, 누구나 마찬가지다. 다만 이 책에 아쉬운 거라면 ‘저렴하게 유기농 식품 1인분을 살 수 있는 방법’, 이런 게 없더라. (웃음)”나이 들어 혼자 늙는 것이 싫다고? 옆에 누군가 없는 것이 무섭다고? 그렇기 때문에 결혼한다면 그것도 웃긴 거다. 혼자만 나이 먹지 않는다. 세월이 당신에게만 들이닥치지는 않는다. 지금 당신 곁에 있는 친구들과 늙어서도 교감할 수 있고, 또 다른 친구들이 생길 수도 있다. 감히 말하지만, 혼자 있는 외로움보다 둘 혹은 여럿이 함께 있을 때의 외로움이 더 사무치는 법이다.
또 어쩌면, 독립은 이런 것.
“독립성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살아갈 능력이 아니라, 도움을 주고받으면서도 자기 자신일 수 있는 유연함, 폐 끼치면서도 자존감을 잃지 않을 수 있는 힘, 타인이 폐를 끼쳐올 때 그것을 관계의 기회로 생각할 수 있는 개방성일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타인이 도움을 주고받을 가치가 있진 않기 때문에, 사람 보는 눈은 좀 길러야 한다. 사람 보는 눈이 없다면 뒤통수라도 단련해야 할 테고. 실수했을 때, 상처받았을 때,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 때 진가를 발휘하는 게 바로 맷집 아니던가.”(pp.229~230)누구에게나 지불해야 할 ‘게임 값’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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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도서출판 에쎄 | |
“대안 가족을 꾸릴 수 있고, 생활협동조합과 같은 네트워크를 만들 수도 있지 않나. 영화에서도 보면, 혼자 늙는 사람은 없다. 물론 혼자 늙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아니면 가족을 만들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2~3년 전부터 입에 달고 사는 소린데, 모든 것에는 ‘게임 값’을 치르게 돼있다. 결혼하거나 비혼이거나, 이성애든 동성애든 무엇이든, 자신이 결심한 길을 걷는 순간 게임 값을 지불하게 된다고 생각한다.”게임 값. 모든 선택에는 기회비용이 따르고, 굳이 경제적으로 따지지 않더라도 우리가 감수해야 할 무엇. 그것은 혼자이거나 대안 가족이거나 결혼을 하는 어떤 경우에라도 따른다.
“영화에 나오는 대안 가족이 멋있게 보이지만 그건 농촌이라서 그렇다. 자급자족이 가능한. 도시에서는 나눠야 할 것이 있고, 그렇게 쉽지 않다. 주변에서도 실패한 대안 가족을 많이 봤다.”중요한 것은, 그 게임 값을 지불하면서 살아남는 것이다. 그는 어청수 전 경찰청장이 올림픽공원을 산책하며 여론 수렴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 자신도 같은 동네에 살고 있으니까 그를 놀려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5~6일을 새벽같이 공원에 나가 잠복(?)을 했다. 결국 타깃을 만나지 못했으나 그는 어느 순간 울컥했단다. 20년 전만 해도 시멘트로만 이뤄졌던 군사 공원이 지금 토끼, 꿩, 숲 등으로 이뤄져 있는 광경 앞에. 그때 느꼈단다. ‘살아내고 버텨내면 좋은 꼴을 볼 수 있구나.’
“영화를 보면서도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꾸역꾸역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게 얼마나 의미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아, 어청수는 어떻게 했냐고? 그냥 용서했단다.
그가 존경한다는 친구 어머니의 얘기도 꺼냈다. 황혼 이혼을 하셨는데 생계가 불안정한 상태였단다.
“그 연세에도 구청에서 주는 일을 하셨다. 한 달에 30~40만 원으로 버티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자유를 얻은 대신 게임 값을 치르신 거다. 그것에 대해 불평하고 위자료나 이혼을 괜히 했다는 등의 얘기는 일절 없으시다. 훌륭한 어른이라고 생각한다.”게임 값을 치르면서도 버티고 견디는 것. 그리하여 좋은 꼴을 보는 것. 어쩌면 독립은 그런 것이다. 비혼 역시 마찬가지. 다양한 상상이 가능한 삶, 다양한 방식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삶이라면 모두에게 좋지 아니한가. 쿠바의 한 농민에게 물었다. “왜 체 게바라를 좋아하세요?” 그는 말했다. “혁명 때문이죠. 모두에게 이로운 혁명!” 모두에게 이로운 상상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상상을 가두리양식장에 가두고 산다.
변 감독은 권한다.
“어떤 통치자를 싫어한다고 세상이 안 바뀐다. 우리가 만들고 싶은 세상이 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오늘 영화를 보면서, 증오하는 힘이 얼마나 후진 힘인가 하는 것도 새삼 느꼈다. 내가 불행하다고 핑계대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고로 살아남은 당신이야말로 바로 예술품이다. 시간을 참고 버틴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법이니까.
“고마 해라, 마이 뭇다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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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도서출판 에쎄 | |
시간은 그렇게 갔다. 물론 이 수다를 ‘결혼하지 말자’는 선언이나 구호로 읽거나 보는 건 오독한 것이다. 책이 말하듯, 삶은 다양한 선택지와 설렘으로 가득하고, 누군가에겐 ‘삶의 지도에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돌아보게 하는 고마운 힘. 그래,
“비혼은 나의 힘.”(p.118) 어쩌면 세간의 통념과 다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진지하게 삶을 고민하고 성찰하며, 남보다 덜 가지기를 택한 비혼이기 때문이다.”(p.59)고로 이런 책, 많이 나와야 한다. 그동안 아주 오랜 세월 ‘결혼하는 것이 선이자 옳음’이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지금 우리는 결혼을 의심한다. 굳이 사회학적으로 자본이 요구한 제도가 결혼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현실에서 결혼(제도)은 이미 금이 갔고, 그것을 목도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치우침에서 벗어나기. 너무 많이 치우쳤으니까 이제는 균형을 차츰 잡아나가야 할 때. “고마 해라, 마이 뭇다 아이가.” 마음 같아서는 책에 나온 여성들에게 커피 한 잔씩 대접하고 싶다. 멋있어서. 매력적이어서. 그래도 결혼은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당신, 혼자 중얼거리시라. 남 걱정 한답시고 오지랖 자랑하지 마시고.
아, 참. 나는 요즘 K본부에서 방영하고 있는 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가 완전 좋다. 혼자 히죽거리면서 본다. 감정이입일까,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일까. 지진희, 완전 웃겨. 훅~ 간다. 후속으로 <결혼 못하는 여자>도 나왔으면 좋겠다. 초딩적 발상?
참, 그 ‘유부남’ 친구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잘 산다. 또 언제 그런 말 할지는 모르지만. 역시 결혼은, 미쳐야 하는 짓이다. 제 정신으로 어찌 그러나. 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