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할 여지없이, 봄이 내렸다. 더할 나위 없이, 당신도 함께 내린다면야 더 좋겠지만, 그건 잠시 묻어두자. 지금은 봄의 지저귐에 귀 기울일 때다. 물론 좀 과잉이다 싶게, 후끈 달아오른 감도 없진 않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지금은, 봄이다. 설마 당신, 컴퓨터 앞에 코 박고, ‘오로지 일!’만을 사수한답시고 디지털 사막에서 허우적대는 건 아니겠지?
아마도 당신은 봄을 만끽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얀 속살을 드러내 목련의 야릇함과 물오른 초록이 흥건한 버드나무의 살랑거림, 그리고 바람에 살랑거리는 벚꽃과 분홍빛의 알싸한 유혹적 자태를 드러낸 철쭉의 향연.
그렇다. 일찍이 괴테 선생 가라사대.
신선한 공기, 빛나는 태양
맑은 물, 그리고
친구들의 사랑
이것만 있거든 낙심하지 마라.
하지만 알다시피, 대부분의 도시 생활은 괴테 선생의 이런 속삭임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그도 그랬다. 숲생태전문가 김용규. 그는 한때 도시에서 한 모험 기업의 CEO(최고경영자)였다. 대부분의 사람이 선망하는 자리였지만, 그는 맞지 않는 옷 같았다. 더구나 도시와 자본의 욕망을 뒤치다꺼리하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결단을 내렸다. 더 이상 그 뒤치다꺼리를 하지 않겠다며 CEO 자리를 내던졌다. 허섭한 욕망이여, 안녕~
그리고선 숲으로, 농촌으로, 발걸음을 뗐다.
『숲에게 길을 묻다』(김용규 지음/비아북 펴냄)는 그래서 나왔다. 그는, 더 이상 도시와 자본의 욕망에 부대껴야 하는 CEO가 아니다. 숲생태전문가이자 농부. 그러니까, 당시 이런 것. “바이 바이 바이 정든 도시여 굿바이/너를 두고 나 돌아간다…♩ 논 갈고 밭가는 나의 진짜 집으로 나 돌아간다/도시여 안녕♪ 촛불 하나 밝히는 나의 진짜 집으로 나 돌아간다/도시여 안녕~♬”(조영남, 「도시여 안녕」)
지난 13일 경희궁의 낮. 녹음은 짙음을 더해가고 있었고, 햇살은 따사롭다 못해 따가웠다. 도시의 비슷비슷한 얼굴들 틈에서 산속 사람의 포스를 지닌 한 사람. 모처럼 충북 괴산의 오두막에서 서울 나들이에 나선 그를 만났다. 영락없는 산사람이었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는, 일종의 표식이자 징표였다. ‘더 이상 이 도시가,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살지 않겠어.’라며 숲과 합궁하기로 결정하면서 길렀던 머리. 단정하게 매만졌을 CEO의 헤어스타일은 과거일 뿐. 그는 이미 그렇게 숲의 일부가 돼 있는 듯했다.
그리하여, 아래는 숲생태전문가이자 농부, 김용규와 나눈 숲의 대화다. 9가지 열쇳말로 본 그의 이야기. 어쩌면 당신과 나, 우리의 마음 어느 한구석에 둥지를 튼 어떤 희망과 소망, 용기의 속삭임.
나를 만나는, ‘숲’
우선, 숲으로 향하기로 마음먹은 출사표를 보자.
“나는 이제 나답게 살 것이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인가? 그것은 돈이나 출세 때문에 비굴해짐이 없는, 자존과 자립으로 가득한 삶. 나의 편리를 도모하고자 타인의 이익을 빼앗지 않는, 죄짓지 않는 삶. 숨 막히는 도심에 갇힌, 자연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 놓고 채울 수 있는 고삐 풀린 삶. 모색하고 싶으면 싶은 대로, 그만두고 싶으면 싶은 대로, 그렇게 가슴이 시키는 대로 창조의 자유를 벅차게 누리는 삶. 그리하여, 마침내 마음이 두어 뼘 더 자유롭고 평화로워지는 삶. 이 모든 것으로 조금 더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삶. 내가 나답게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삶이다.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삶이다.”(p.174)
나이 마흔 살. ‘도시여, 안녕’을 고하기로 마침내 마음먹었다. 2년을 준비했다. 혼자서도 숲을 공부했고 1년여는 집중적으로 숲생태전문가 양성 과정과 필드강사 등을 거쳤다. 살 곳을 찾기 위해 1년여 강원도를 헤집으며 돌아다녔다. 한 군데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자금 마련 등으로 아쉽게 사흘 차이로 놓쳤다. 그리고 결정된 곳이 충북 괴산. 우리 기술로 지은 수력발전소가 있는 괴산댐 주변이었다.
숲에 들어가기로 결정하기 전, 6개월 동안 산 구석구석을 누볐다. 새벽, 한낮, 저녁, 비 등등 각기 다른 조건과 환경의 모습에서. 산에게 묻고 또 물었다. “나를 받아주시겠습니까?” 답이 당장에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죽나무가 말을 건넸다. “나를 베지 마라.” 귀가 번쩍 뜨였다. 두 번째로 숲과 교감한 경험. 그러니까, 숲의 조건부 승낙이었다. ‘나를 받아주겠다는 거구나. 베겠다는 내 마음을 질책하는 것이구나.’ 일단 저지르고 보자, 더 필요하면 배워보자, 의 마음이었다.
아 참, 첫 번째 교감은 국립광릉수목원에서였다. 전나무길이었는데, 누워서 20여 분을 있으면서 무아지경을 경험했다. 온 세상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나도 없고, 세상도 없는 첫 경험. 지금도 그런 경험은 어려울 정도로 놀랍고 신비로운 것이었다.
“숲에 기대어 사는 삶을 시작하면서부터 숲은 나에게 스승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내게 필요했던 것은 다만 더 나은 삶을 위한 기술과 기교를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p.39)
직장과 도시 ‘탈출’
도시에 사는 모험 기업의 CEO. 힘겹고 스트레스도 많았다. 오십견까지 올 정도였다. 학교 졸업 후 유학을 생각하고 유학비를 벌기 위해 들어간 것이 회사였는데, 어떡하다보니 모험 기업의 CEO까지 오른 터였다. 그러면서 꿈도 잊고 회사에 짓눌려 있었다. 더구나 기러기 아빠.
유일하게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길은 주말마다 가는 산이었다. MTB를 타고 오르내렸다. 힘들어서 찾기 시작한 그곳에서 생명력을 느끼고 문제의식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 나무는 왜 이렇게 휘었을까?’ ‘이 나무는 어떻게 바위틈에서 자라는 걸까?’ 신기했다. 그렇게 숲의 생명들이 주변과 관계를 맺고 자기를 실현하는 모습에 점점 빠져들었다. 식물 이름과 같은 분류학보다 생명 그 자체가 주는 신비와 생태에 매혹됐다.
그러면서 마음의 소리를 듣고 느꼈다. 산에 있으면 행복하고, 좋았다. 숲의 생명도 보게 됐고 산의 몸짓과 바람결 등이 뭔가를 말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래, 나 아닌 옷을 입고 살고 있었구나. 가야겠다, 도시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 절로 생겼다.
여느 도시의 우리들처럼 그에게도 도시는 이랬다.
“도시는 도무지 휴식을 모르게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빈한하면 빈한한 대로 고달프고, 풍요로우면 풍요로운 대로 고달프기 쉬운 곳이 그곳이었습니다. 오늘날 도시에서 우리의 삶은 쉼표를 만들기가 참 어렵습니다.”(p.180)
그런데 아내를 설득해야 했다. 구본형 선생은 이런 말을 건넸다. “아내를 설득할 수 없는 꿈은 꿈이 아니다.” 설득과 회유. 협박 아닌 협박(?)까지 섞어가면서 그야말로 강온양면정책. ‘사오정’과 같은 직장 정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따져보면 나름의 ‘카드’였다. “요즘은 45세에 떠나는 사람이 많아졌어. 나도 얼마 남지 않았잖아. 이건 무능이 아닌 사회구조야. 그러니까 지금 숲에 가면, 나중에 나랑 손잡고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숲도 보고 근시안적 행복이 아닌 롱런의 행복을 누릴 수 있어.”
쉽지 않았지만, 도시형 여성이었던 아내도 차츰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내는 나름 위험을 분산할 수 있는 방안으로 양평을 제안했다. 집 지을 땅을 사서 조직에서 쫓아내면 그때는 거기에서 살아보자고. 양평이 일종의 중간 거점이 됐다. 땅을 놀리느니 농사를 짓자고 했다. 고추와 고구마 등 농사를 지었다. 희한하게도 아내가 일을 더 잘했다.
친구들도 일부 규합했으나, 그들은 이내 포기했다. 기름값이 많이 든다며. 그때 알았다. 기름 값은 농사와 치환되지 않는구나. 그러면서 확실히 알았다. ‘자기가 땀 흘린 만큼 생명과 애정이 싹트는구나. 이건 돈으로 치환되는 것이 아니구나.’
“학교나 학원, 혹은 유명하다는 전략 강좌 따위에서는 ‘나’답게 살 수 있는 어떠한 지혜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곳에는 삶을 조금 더 편하게 다룰 수 있는 도구만이 있을 뿐, 나답게 나를 꽃피우며 사는 데 필요한 가르침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상치 못한 폭풍우나 가뭄, 혹은 혹한이 우리 삶을 가로지르며 끼어들 때 그동안 배웠던 도구와 기술과 지식은 무용했고, 더러 짐이기까지 했습니다.”(p.27)
즐거운 나의 오두막, ‘백오산방’
그의 숲 하루를 잠깐 들여다보자. 그는 이렇게 묘사한다.
“이곳 오두막에서 지내는 나의 하루는 철저히 해의 길이를 따릅니다. 해가 뜨면 하루의 삶이 열리고 해가 지면 하루의 삶이 닫힙니다. 그것은 마치 나무들의 하루와 같습니다. 낮은 노동과 창조의 시간이고 밤은 휴식의 시간입니다. 날이 밝으면 깨어나 숲과 들을 들러보고 끼니를 먹는 것으로 하루를 엽니다. 낮이면 곡식을 돌보거나 집을 고치거나 정리할 곳에 손길을 줍니다. 숲 속을 거닐며 수많은 생명들을 만나고 살피고 생각하고 기록하는 일도 중요한 일과입니다. 때로 땔감을 줍고 장작을 패는 일도 중요합니다. 이는, 궂은 날과 추운 날에 대한 대비이기도 하고 운동이기도 합니다. 약간의 시간을 떼어 읽고 쓰는 작업도 지속합니다.”(pp.177~179)
백오산방. 오두막 이름이다. 살 곳을 결정하기 전, 구본형 선생에게 요청했다. 가죽나무가 말을 걸어온 충북 괴산의 산에 함께 가서 봐달라고. 그런데 막상 가니, 표정이 좋지 않았다. 산세가 험한 까닭이었다. 바깥에서 보면 막혀 있고 험한 산이었다. 내부에 들어가 바깥을 봤건만, 무엇보다 나무가 말을 걸어준 곳이건만, 그 내부의 속살을 엿보지 못한 사람에겐 당연한 반응이었다. 구 선생은 차라리 괴산댐 어귀의 다른 곳을 권하기도 했다.
며칠 뒤, 전화가 왔다. 하늘에 물어보자는 구 선생의 전화. 약속을 잡고 갔더니 역술인이신 초아 서대원 선생(
『주역강의』의 저자)이 나와 계셨다. 술 한잔 걸치고 지어준 호가 백오(白烏). 흰 까마귀. 왜 하필 까마귀, 그것도 흰 까마귀인가 했다. 고구려의 시조새가 까마귀, 즉 삼족오였고, 그중에서 흰 까마귀는 상서로운 길조란다. 그리고 돌연변이. 상서롭긴 하나 무리에 섞이지 못하는 돌연변이. 자신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상서롭고 사람 시각으로 보면 외롭지만 원래 무엇이나 홀로 사는 건데, 자기 길을 뚜벅뚜벅 걸으며 하늘을 나는 자유로운 새”가 바로 백오 아니겠나.
그리고 초아 선생을 모시고 애초 눈여겨 본 그곳을 보여드렸다. 말을 건 나무를 짚으시고는 예견을 하셨다. 이곳에 둥지를 틀면 변화가 많을 것이라고. 백오산방은 그렇게 탄생했다. 마을에서도 1km 떨어져 있지만,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고라니가 일주일에 한 번씩 보이는 즐거운 나의 집.
집을 찾아 돌아다닐 때도 좋았지만, 백오산방에서 잠들고 깨어나고 일하면서 ‘정말 살아있구나.’를 느낀다. 과거에 대한 회상은 있으나 회한은 없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거의 없어 걱정으로 불면하는 밤도 없다. 나무 심는 일을 꾸준히 하면서 죽은 나뭇가지를 주워 구들방을 데우는데 그때마다 역시나 느낀다. ‘아 온전히 나는 살아있구나. 이 순간을 살아가는구나.’
소망과 교감이 있는 ‘공동체’
숲에서 새로운 희망과 빛을 찾고 싶은 사람들, 지혜를 찾고 싶은 사람들 6명이 모인 공동체가 있다. 이름 하여 ‘행복숲 공동체’. 말하자면 모험공동체다.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생각하고 있다. 도시 등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심리적 툴을 통해 진단하고 어루만지는 ‘포레스트 테라피’가 이뤄지는 행복학교 설계부터 가족 대상의 캠프, 창작공간 마련, 유기농 재배 등 다양하다. 무엇보다 도시와 농촌 간에 놓인 다리를 놓는 일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곳은 그러니까, 교육, 창작, 도농교류 배양?확대 등이 이뤄지는 공동체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연대와 관계를 통해 공동체를 다시 복원하는 일.
“생명은 오직 연대와 관계 속에서만 생명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p.108) 도시에서는 공생과 연대가 허물어지거나 쉽지 않다. 자본의 방해공작이랄까.
“사회적으로 중심에 있지 못한 사람들이 가난을 죄처럼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구조가 강화되고 확산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 ‘살아있다는 것은 성장하는 것이며, 재생산하는 것이며, 그리고 우리의 이웃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공생에 대해 연구하는 톰 웨이크퍼드의 이 말은 틀림없는 진리입니다.”(p.110)
그렇게 만들어가는 지점. 수많은 사람의 꿈과 소망이 담겨 있는, 함께 만들어 놓는 정원. 그것이 또한 꿈이요, 소망이다. 아는 사람들이 이미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책을 읽고 따뜻하고 좋았다며 작은 성의를 보이고 싶다는 기부금을 내겠다는 독자도 있었다. 그러나 불편하고 부담스러워서 차라리 나무를 심는 게 어떠시냐고 권유했다. 이번 일요일에 나무를 심기 위해 백오산방을 찾아오시기로 했다.
그렇다. 그렇게 소망을 담은 나무들이 모여, 소망을 품은 숲이 될 터. 이야기가 흐르는 숲이 될 것이다. 자연성과 생명력을 회복하면서 건강한 농산물이 도농 간에 교류되는 우리들의 공동체. 그냥 무작정 숲으로 들어간 것만은 아니다.
또한 숲 강의와 사람과 자연과의 교감 등을 통해 가능성도 엿보고 있다. 숲 학교를 사회적 기업 형태로 모색하는 것. 지금 이 시대에 소망 하나 품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너, 나가.’ ‘너, 해고야.’ 하면 쫓겨나고 방황해야 하는 공포와 불안이 지배하는 시대. 숲을 통해 배우고 기록하고 돕는 일을 통해 각자가 소망을 품는다면 사회적 문제가 조금이라도 줄고, 이 사회도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행여 소망에 참여할 수 없거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나무를 심도록 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심은 나무 한 그루가 다른 사람에게 소망을 심어줄 수 있다면, 숲이 건네 준 선물.
잃고 모색하면서 찾는, ‘길’
나답게 산다는 것. 숲에서 사는 것이 나다운 것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길을 잃어봤기 때문이다.
“나로서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길을 잃을까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생명 모두는 언제나 길을 잃음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길을 찾기 때문입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말처럼 ‘길을 잃어 보기 전에는, 다시 말해서 세상을 잃어버리기 전에는 자기 자신을 찾아내지도, 자신이 지금 서 있는 위치와 자신이 맺고 있는 무한한 관계를 깨닫지도 못하는 것’이 삶이기 때문입니다.”(p.29)
수많은 모색이 필요하다. 길을 잃어봐야 내 길이라고 느낄 수 있는 것. 징표는 그것이다. 그 일로 기쁘고 행복하고 창조로 연결될 수 있는 것, 사회에 아름답게 기여할 수 있는 것.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뚜벅뚜벅 걸어봐야 한다. 이 책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길 위에 서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길을 잃은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책의 서문)
그래서 택했던 것이다.
“그 길 위에서 더 이상 희망일 수 없는 지점에 다다랐을 때 나는 그 길을 버리고 새로운 길 위에 서기로 결심했습니다. 기업이라는 조직을 떠나기로 했고, 도시를 버리기로 했습니다. 삶의 굽이를 따라 흐르다가 까맣게 잊었던 꿈, 버려야 했던 꿈을 되살려 불러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pp.11~12)
죽을 때가 되면 누구나 삶이 별게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죽음에 대해 장기기증을 서약하면서 정리를 해 보기도 했지만, 책이 ‘나고 살고 이루고 죽는 것’을 은유처럼 제시한 것은 생명의 큰 흐름을 다루고 싶었던 까닭이기도 하다. 얼마나 큰 아파트에 살고, 어느 학교를 나오고, 어느 직장에 있는 것이 죽음 앞에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그것보다 살면서 나를 모색하면서 아름다운 변화에 기여했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가시 있지만 향기와 바람을 담은, ‘음나무’
도시 생활, 음나무처럼 가시가 많았다. 그렇지만 가시를 많이 뺀 지금도, 음나무와 스스로가 닮았다고 생각한다. 성목이 된 음나무도 큰 줄기에서는 가시가 떨어지지만, 새 가지에는 가시가 있다. 음나무는 무엇보다 향이 좋다. 그 고유의 향기가 깃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게 과하지 않은 꿈을 품고 말이다.
“우리의 꿈이 빛을 탐하는 식물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식물들에게는 과한 꿈이 없습니다. 나무와 들풀은 오로지 자신을 꽃피우려는 꿈, 그래서 어떻게든 열매를 맺는 것으로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이유를 증명하려 합니다. 나무는 숲을 모두 지배하려는 욕심을 품지 않습니다. 들풀은 제 자리가 아닌 곳을 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갖는 꿈도 그렇게 나무를 닮아서, 들풀을 닮아서 과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p.68)
숲을, 세계를 형성하는, ‘관계’
숲에 오기까지, 아니, 와서도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고 받고 있다. 서대원 선생과 구본형 선생은 물론이요, 많은 사람들이 관계 속에서 숲 생활과 일상을 짓고 있다. 책을 내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책이 나오자, 과거 같이 일했던 동료들도 홍보를 해 주고 있다. 참 고마운 사람들이다.
과거 그들과 같이 일하고 있을 때, 그런 말을 듣곤 했다. “조직에 맞지 않는 사람 같다. 왜 학교를 안 갔느냐.”고. 모험 기업을 하면서 어려움을 함께 넘나들던 이들이었다. 사업상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자신을 해고시켜달라고 말했던 사람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숲을 보러 다닐 때, 눈치 보지 않게끔 적극 밀어줬다. 그리고 여러 사람을 만났다.
다른 곳에 돈 투자한 것을 빼서 도와 준 사람. 오두막을 지을 때 밑의 마을에서 건축 프로젝트를 담당하던 흙건축연구사무소 ‘아키떼르(
www.architerre.org)’의 생태건축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혼자 짓기에 가장 유용하게, 집 방향, 창문, 지붕 등을 생태적으로 짓도록 설계를 거의 헐값에 해주기도 했다. 대신 품앗이 개념으로 대학 강의 때 생태특강을 해주는 그런 조건으로.
그렇다. 사람이 사는 도시도 하나의 숲이다.
“사람의 숲에서도 이따금 질경이나 생강나무를 닮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주류보다는 비주류의 길을 기꺼워하고, 타성을 쫓기보다는 차라리 창조적인 진화를 선택하는 사람. 타인이 닦아놓은 길을 따르기보다는 스스로 길을 내는 사람. 그 대가인 외로움과 고난과 위험을 삶의 안주로 삼을 줄 아는 사람. 육신의 고달픔을 택할지언정 영혼은 결코 꺾이지 않는 사람…… 나는 늘 그들의 삶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p.129)
자립할 수 있는, ‘농부’
농사, 농업, 농부. 세상에서 이미 저 멀리 한편으로 밀려난 이름들. 분명한 것은, 그럼에도 지금 이 엄혹한 시대에 다시 그 이름을 불러야 할 이유가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자립할 수 있으며 비굴해지지 않아도 되고, 착취당하거나 하지 않아도 되는 직업이 바로 농부다. 귀농운동본부에서 알았다. 나로 살면서 더불어 살려면 자립, 생태가 필요하고 발자국을 덜 남기는 것이 이로운 것임을. 도시가 아닌 자연에서 이루는 것이 맞다는 것을 확인했다.
조직과 도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 스스로 설 용기와 스스로 설 수 없다는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비어 있는 농촌이지만 개인들이 많이 들어와야 한다. 기업이 들어오는 것은, 반대다. 농촌이라는 영역은 빠른 것보다는 느린 것, 자주 변하는 것보다 자주 변하지 않는 것이 어울리는 법이다.
“내 내면의 깊은 곳에 닿아 있는 나다운 꿈은 사라지고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적 가치에 대한 열망만이 나를 깊숙이 좀먹었기 때문입니다. (…) 내가 정말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것, 빠른 것보다는 느린 것, 쉽게 변하는 것보다는 잘 변하지 않는 것, 크고 화려한 것보다는 작고 소박한 것, 나 하나만을 살찌우는 것보다는 모두를 살찌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사색하고 연구하기 시작하고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나는 새로운 꿈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p.68)
고마운, ‘가족’
열두 살 난 딸이 한번은 물었다. “아빠 직업을 뭐로 해야 돼?” 당시 김매고 있을 때라, ‘농부’라고 알려줬더니, 잠시 답이 없다. 어린 그 딸에게도 ‘농부’는 뭔가 망설이게 하는 직업군이었던 것이다.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 ‘숲생태전문가’라는 말이 어떠냐고 했더니, ‘작가’라고 쓰고 싶었나보다. 탈고를 하지 않은 상태라 그건 좀 그렇다고 했더니, ‘숲생태전문가’가 좋겠단다.
딸에게 아빠랑 농사짓자고 하니까, “아빠와 나는 꿈이 다르”단다. 농촌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 나중에 영국을 가고 싶어 하는 딸은
『해리포터』의 창조주, ‘조앤 K. 롤링’이 자주 갔다는 커피하우스를 꼭 가보고 싶단다.
무엇보다 책이 좀 팔리면 일본을 가고 싶다. 아내를 위로하고 싶은 것도 있다. 마침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다. 이 책이 그렇게, 지금 거닐고 있는 길이 사막의 길이 아닌 생명의 길이라는 첫 번째 증명이길 희망한다. 일본의 숲도 거닐어 보고 싶다. 일본 숲은 자연 치유에 대한 이야기도 많고 유기농이 발달해 있다.
물론 여전히 숲과 더 많은 이야기와 교감을 해야 한다. 이미 8년 전에 전원으로 돌아간 큰형님은 아직 농부가 덜 됐다며 종종 나무라신다. 서울에 오기 전에도 형님 집에서 품앗이를 하고 왔다. 휴대폰도 통하지 않는 형님 집을 보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숲사람이 어차피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지 않겠나.
다음 책? 겨울 농사하는 셈치고 책을 짓고 싶다. 겨울에 산속 생활을 하다보면 게을러질 수 있는데 스스로를 정리하는 개념으로 조금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그런 책. 이곳 생활을 통해 생명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움직이고 모색하는지를 벤치마킹하면서 탐색하는. 가제는 ‘숲에서 듣는 희망의 노래’. 물론 언제 나올 수 있을지는 모른다. 우리 삶이 왜 생태적으로 살아야 하는지, 좀더 자연스럽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담을 것이다.
그리고 아동용 책도 짓고 싶다. 딸을 위해서, 딸과 함께 짓고 싶다. 딸이 글 쓰고 읽는 일을 좋아한다. 딸과 이메일을 주고받는데, 책도 그렇게 딸과 함께 공유하는 방식으로 쓰고 싶다. 딸 또래의 아이들에게 자연과 숲에 대해 친근감과 호기심을 갖게 하고 꿈을 자극하는 그런 책. 숲은 그렇게 가족과 함께 꾸는 꿈이다. 당신의 소망과 꿈은, 안녕하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