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아침을 여는 여자 황정민은 두 권의 책을 썼다. 2002년에 나온 첫 책 『젊은날을 부탁해』는 영화를 통해 자기 이야기를 풀어 놓았고, 올 가을에 나온 두 번째 책 『황정민의 P.S. 아이러브유』는 그림책과 동화책으로 자기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첫 번째 책을 쓸 때, 황정민은 미혼이었고, 통통 튀는 신세대 아나운서였다. 육 년의 세월이 흘러 그는 결혼을 했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으며, <황정민의 FM대행진>을 10년 동안 진행하면서, 대한민국의 아침을 책임지는 모닝 파트너로 사랑받고 있다.
그를 만난 건, <황정민의 FM대행진>의 10주년 기념행사가 있는 다음 날이었다. 전날의 행사 탓에 피곤해 보였다. 어쩌면 아침 방송에서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청취자들에게 나눠준 탓인지도 몰랐다. 아침의 황정민은 힘차게 날아오르는 종달새 같았는데, 오후의 만난 황정민은 어딘지 나른해 보이는 고양이 같았다.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셨는데요. 생활에 많은 변화가 있으셨을 듯합니다.
남편과 이교대 근무를 하는 기분이에요. 남편이 집에 있으면 제가 집에 없고, 남편이 자고 있을 때 저는 방송하러 나오니까. 정신적으로 편해진 것 같아요. 결혼을 하고 나서, 제가 결혼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는 걸 알았어요. 더 이상 결혼에 대해 아무도 묻지 않으니까 홀가분했어요. 이젠 아이까지 낳았으니까 쓸데없는 질문으로 스트레스 받을 일은 없겠죠.(웃음) 지금 한창 아이가 예쁘고, 아이랑 보내는 시간이 무척 행복해요. 제 아이만 귀여운 게 아니라 다른 애들도 다 예뻐 보일 정도로 모성 본능이 피크에 달해 있는 것 같아요.
태교로 동화책을 남편 분이 읽어주셨다고, 책에 쓰셨는데요.
남편을 꼬드겨서 책을 읽게 했어요. 남편도 저도 서로에게 ‘뭘 해달라’고 강요하는 스타일이 절대로 아니에요. 그런데 제가 책 읽기만큼은 꼭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여자들은 열 달 동안 아이와 함께 하면서 엄마가 될 준비를 하는데 남자들은 그렇지 못하잖아요. 아이가 태어난 순간, 덜컥 아빠가 되어 버리죠. 그런데 뱃속의 아이에게 그림책과 동화책을 읽어주면서 자연스럽게 아빠가 되는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책을 읽어주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이 내 아버지와 참 많이 닮았구나. 그래서 내가 이 사람을 좋아했구나.’ 하는 것도 깨달았고요. 뱃속에서부터 책을 읽어줬는데 아이가 책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서 좀 속상해요. 책을 읽어주면 딴짓을 해요. 아기 방에 책이 많은데, 그 책을 보는 것보다 가지고 노는 데 더 재미를 붙였어요. 가만히 앉아서 책 읽는 것을 듣는 것보다, 장난치고 밖에 나가 노는 걸 더 좋아해요. 굉장히 활동적이에요. 제가 책이나 신문을 보고 있으면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같이 놀자고 해요. 아이가 책에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꾸준히 책을 읽어주고 싶어요. 그래서 요즘에 어린이 책에 관심이 많아졌어요. 좋은 책 제목을 들으면 꼭 수첩에 메모해둬요. 추천도서 목록도 유심히 보고요.
동화책과 그림책을 읽으면서 참 행복해하는 느낌이 책에서 느껴집니다.
아기를 위해 읽었지만 동화는 어른들이 읽어도 참 좋아요. 마음이 정화되고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제가 죽음이나 이별을 참 많이 두려워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오랫동안 전 그걸 몰랐어요.
『할머니가 남긴 선물』과
『말리와 나』를 읽고 ‘아, 내가 이별을 못 견디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지요.
동화나 그림책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신적 양식이 들어 있어요. 동화를 읽으면 어린아이가 될 수 있어 좋아요.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그때 느낀 것들이 생생하게 다시 떠오르죠. 어른으로 사는 건 참 메마르고 삭막하잖아요. 인간관계 하나도 계산적이 되고, 누가 나에게 잘해주어도 ‘저 사람이 왜 나한테 잘해줄까?’ 의심부터 먼저 들죠. 어른이 되면 설명할 수 없는 악의를 참 많이 경험하잖아요. 다 내 맘 같지 않다고 생각하고 마음의 문을 쉽게 닫아버리죠. 어떤 사람의 진심을 깨닫기도 전에 외면해 버릴 때가 많아요. 자신과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애쓰지도 않지요. 삶의 무게에 짓눌려 정말 소중한 것들이 뭔지 잊어버리고, 잃어?리죠. 그런데 동화를 읽으면서 나도 몰랐던 내 안의 순수를, 깨달았던 것 같아요. ‘아, 내게도 이런 마음이 있었구나.’ 하는 걸요. 사람에 대한 애정, 신뢰, 친구가 얼마나 좋은 건지 새삼 깨달았어요.
동화를 읽으면서 ‘동화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참 행복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간결한 언어로 단순한 진리를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아요. 아이들은 참 에너지가 넘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순수함을 지킬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어떤 동화책들을 특히 재미있게 읽으셨는지 궁금한데요.
『마틸다』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고,
『좋은 엄마 학원』『나의 린드그렌 선생님』도 좋았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는
『헨쇼 선생님께』를 꼽고 싶어요.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어리다는 이유로 어른들의 사정을 잘 설명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헨쇼 선생님께』에 나오는 리 보츠의 엄마는 아이에게 왜 엄마와 아빠가 이혼을 했는지를 솔직하게 이야기해 줘요. 아이라고 얕보지 않고 진실을 이야기해주는 엄마가 참 용감하게 느껴졌어요. 이 작품은 결말까지 무척 마음에 듭니다. 작위적이지 않으면서 희망을 품게 하거든요.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황선미 선생님의
『마당을 나온 암탉』도 참 좋게 읽었습니다. 이 책은 아이를 낳기 전에 글을 써 두었는데, 출산을 하고 나니 책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어요. 그래서 다시 쓰려고 했는데, 완성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어른이 되어 동화를 읽으니까, 나도 모르게 책 속에 등장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유심히 보게 되요. 형편없는 어른들ㅡ예를 들어
『마틸다』에 나오는 마틸다의 부모ㅡ을 보면 아이의 심정에서 분노하고, 좋은 어른들ㅡ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의 ‘그러게 언니’ㅡ을 보면 ‘어른이 되어도 저런 모습을 간직할 수 있구나.’ 감탄하지요. 그리고 삶에 지친 어른들의 모습에선 왠지 부모님의 모습이 보이는 듯해서 가슴이 찡하곤 합니다.
글 쓰는 건 힘들지 않으셨나요?
읽는 건 정말 행복한데 쓰는 건 지옥이죠. 글 쓰는 건 너무 힘들어요.
전, 뭐든 너무 열심히 해요. 옆에서 보기에 딱할 정도로 열심히 해요.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아이에게 너무 집착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글쓰기에 몰두했어요.
출산 전후에 동화책을 읽고, 이 책을 위한 원고를 쓰면서 찬찬히 제 인생을 되돌아볼 수 있어 좋았고, 제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도 되새김질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그리고 알게 모르게 받은 상처도 글을 통해 치유되는 느낌이었고요. 노력의 결과가 눈에 보인다는 건 참 즐거운 일이잖아요. 이렇게 예쁜 책으로 묶여져 나온 걸 보니까 큰일이라도 한 것처럼 참 뿌듯하네요.
아이에게도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아요. 나중에, 엄마 아빠는 어떻게 연애를 했는지, 자기를 가졌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책을 읽어줬는지 세세히 알 수 있잖아요. 아이가 자란 후에 이 책을 다시 함께 읽어보고 싶어요.
<황정민의 FM대행진>이 10주년을 맞았습니다. 감회가 남다를 듯합니다.
| 아나운서 황정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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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참 소감을 많이 묻더군요. 10년이나 진행했는데 어떠냐구요. 하루하루 너무 행복하게 진행을 해서 ‘어, 벌써 10년이 된 거야?’ 하는 느낌이에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 <FM대행진>의 마이크 앞을 지키고 싶어요.
어제 10주년 기념 행사를 했는데 그냥 막 눈물이 나왔어요. 안 울려고 했는데. <FM대행진>을 진행하면서 참 많은 분들을 만났어요. 어린 학생들이 이제는 주부가 되어 방송을 듣고 있다는 사연을 받으면, ‘참 오랜 시간을 같이한 분들이 많구나.’ ‘참 많은 만남? 이별이 있었구나.’ 생각을 하죠. 요즘은 그 만남을 지속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 많이 자신을 돌아보지요. 얼마 전 신영복 선생님의
『청구회 추억』이라는 그림책을 읽었는데, 작은 인연을 소중하게 키워나간 이야기에 큰 감동을 받았어요. 저는 그러지 못할 때가 많았거든요.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어려운데, 운 좋게도 정말 좋은 분들과 인연을 나누고 있어요. 더 열심히 노력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어요. 하지만 살다 보면 참 ‘싫은’ 사람도 많이 만나게 되지요. 상대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악의를 품는 사람들도 있고요. 자기 식으로 좋아해, 상대에게 오히려 상처만을 남기는 사람들도 있지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예수님이 남기셨지만 저는 제게 악의를 가진 사람을 사랑하는 경지에 오르려면 아직 먼 것 같아요. 그저 진심으로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이에요.
<FM대행진>을 진행하는 10년 동안 달라진 점은 없는가요?
저는 별로 달라진 게 없는데 주변이 많이 달라졌어요. 언제부턴가 저보다 어린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 시작해서, <FM대행진>에서 제가 왕언니가 되었어요. 주변에 제 또래가 적지요.
조금 질문과는 다른 답인데, 저는 방송을 하면서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아요. 어제 <FM대행진> 10주년 기념 행사에서 엄정화의 ‘디스코’에 맞추어 춤을 췄어요. 세상에. 저는 그런 거 죽어도 못하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웃음)
아나운서 15년차는 프로로서 어떤 고민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방송한 지는 15년, <FM대행진>은 10년째 진행하고 있는데, 아직도 어렵고, 아직도 부족하다는 생각일 들 때가 있어요. 남편이 제가 일하면서 너무 힘들어하니까 일 그만 둬도 괜찮다고 말을 해줬어요. 근데 이 사람이 어디서 점을 보고 와서 “당신은 일을 해야 할 팔자래. 앞으로도 계속 일해.” 그래서 “악담을 해라.”라고 한 적이 있었어요.(웃음) 즐겁게 하고 있지만 힘든 점이 많아요. 가정 생활을 희생할 수밖에 없고. 아이하고도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없고요.
지금 가장 고민하는 것은 평범한 직장 엄마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아이를 키우면서 직장인으로 질적인 발전을 하는 것인데, 이 질적인 발전이 참 어려워요. 프로가 된 후의 발전은 가시적인 게 아니거든요. 목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거구요. 더 좋은 방송을 하는 건데, 그게 참 막연하고 어려워요. 매일매일 하는 방송이니까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정체되기도 쉽고, 그 편한 분위기에 젖기도 쉽고요.
나이가 먹을수록 더 막막한 느낌이 들어요. 예전엔 선배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면 되는데, 나이가 먹을수록 자기만의 길을 가야 하니까요. 굉장히 힘든 일이죠. ‘지금 잘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매일매일 청취자 여러분을 만나요. 변함없이 아침을 지키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늘 느끼는 건데, 방송은 저 혼자 짝사랑하는 남자인 것 같아요. 또, 방송은 연륜보다는 타오르는 젊음을 더 선호하잖아요. 선배 아나운서들이 이런 말씀을 하세요. ‘예전에는 그저 써준 원고를 달달 외워서 읽었는데, 이젠 진심으로 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 더 성숙한 모습으로 방송을 잘할 자신이 있는데 시켜주는 데가 없다’고요. 언젠가 방송이 저를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제 방식대로 즐겁게 방송을 하고 싶어요. 저에게 이젠 방송은 삶이 되어 버렸어요. 제 삶을 열심히 사는 게, 방송을 열심히 하는 거예요.
나이가 먹을수록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늘어간다고 합니다. 황정민 아나운서는 지금 20대의 후배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꼭 해주고 싶으신가요?
나이가 늘수록 절감하는 게, 사람에겐 한계가 분명 있어요. 그릇의 크기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죠. 노력의 가치를 부정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인생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 거 같아요. 자기 그릇 안에서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게 현명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지금 한창 자기 가능성을 모색하는 사람에게는 맥 빠지는 조언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의 저는 그렇게 느껴요. 오리가 꼭 백조가 될 필요는 없잖아요? 오리는 오리로 행복하게 살면 되죠.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많이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러지 못했거든요. 저는 밖에서 좌충우돌 부딪치면서 ‘나’를 알아 갔어요. 상처도 많이 받았고 방황도 많이 했어요. 내가 누군지 더 빨리 알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충분히 파악한 후에 뭔가를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기 색깔대로 사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자기 색깔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선 굉장히 큰 용기와 에너지가 필요해요. 힘든 길이죠. 그렇지만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선 꼭 가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