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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아비를 밝혀야만 했던 재춘

기생들은 다양한 신분의 남성들과 잠자리를 할 수 있으므로 자식을 낳게 되면 그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혀야 했다. 특히 자식의 앞길을 위해 아버지의 신분이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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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왕실 후손이거나 2품 이상의 고관이라면 자식은 천인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재춘再春은 공주의 관기였다. 조선시대 기생들은 중앙의 경기京妓와 지방기地方妓 형태로 구분되어 국가에 소속돼 있었다. 물론 소속에 따라 역할이 달랐다. 서울 관기들은 모두 장악원 소속으로 정원이 100명이었다. 장악원 기생들은 관리와의 동침보다 궁중 연회에서의 가무가 주업이었다. 기방 기생들은 대체로 수청을 맡았다. 수청은 대부분 동침을 의미했다.

육십 노인 윤효상尹孝祥이 기생 재춘과 간통했는데 재춘이 채 열 달이 되지 않아 아들 윤양尹良을 낳았다. 말하자면 팔삭동이나 구삭동이가 나온 것인데 윤효상이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며 극구 부인하는 바람에 문제가 불거졌다.

기생들은 다양한 신분의 남성들과 잠자리를 할 수 있으므로 자식을 낳게 되면 그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혀야 했다. 특히 자식의 앞길을 위해 아버지의 신분이 중요했다. 만약 왕실 후손이거나 2품 이상의 고관이라면 자식은 천인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따라서 아비가 누구인지 솔직하게 밝히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 아이는 왕실 종친의 자식”이라는 식으로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당연히 이 문제는 골치가 아팠다. 실제 종친들이 기생을 첩으로 삼는 경우가 많아 사실 여부를 정확히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윤복, <기방무사>

재춘은 자신의 아들을 윤효상의 집에서 키우고 싶었다. 여러 남자 품을 떠돌아다니다가 겨우 윤효상을 만나서 인생이 안정돼가던 참이었다. 비록 기생첩에 불과했지만 이전의 삶에 비해 더없이 행복했다. 더구나 이 집에는 남자 아이가 없었다. 아들을 낳아 장성시키면 나중에 유산까지 물려받을 수도 있었다. 재춘은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매정한 남자는 어떤 연유인지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거세게 잡아떼는 것이 아닌가. 단순히 열 달 안 되어 태어났기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재춘은 약이 올라 아이를 윤효상의 코밑에 들이대며 극구 주장했다.

결국 이 사건은 조정에서 논의되었다. 1487년(성종 18) 1월 9일 주강晝講(경연의 일종으로 특진관 이하가 오시午時에 임금을 모시고 법강法講을 행하던 일)이 끝나자 우부승지 송영宋瑛이 사간원의 계목을 가지고 성종에게 윤효상의 문제를 아뢰었다. 재춘이 낳은 아이를 윤효상의 아들로 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성종도 기본적으로 에에 뜻을 같이하면서 좀더 신중한 조사를 지시했다.

“만약 윤효상의 자식이라면 아들이 없는 그 집에서 반드시 거두어 후사를 세웠을 것이다. 더구나 달이 차지 않아 낳았으므로 아들이라고 논하기가 더욱 어렵다. 물론 간혹 여덟아홉 달 만에 아이를 낳는 경우도 있으므로 속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윤효상이 재춘에게 직접 쓴 편지에서 자기 아들을 잘 길러달라고 했다는 부분은 더 조사해야 할 것이다. 윤효상의 편지 가운데 서명한 필체가 모두 다르다는 얘기도 있으니 편지를 가져다 자세히 살펴 진실과 거짓을 밝혀라.”

이후 사간원은 한 달 가까이 이 사건을 정밀 조사했다. 드디어 2월 2일 사간원에서 사건의 내막에 대해 성종에게 보고했다.

“재춘이 관기이므로 윤효상을 위해 수절하지 않았고 여러 번 다른 사람의 첩살이를 했습니다. 그러므로 확실하게 재춘의 아이가 윤효상의 아들이라고 지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윤효상이 재춘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의 자字를 일컫기도 하였고, 혹은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글씨의 모양과 폭이 달라 제대로 밝히기가 어려웠습니다.”

재춘도 앉아만 있지는 않았다. 아이가 윤효상의 핏줄이라는 증거로 윤효상에게 받았던 토지와 노비를 관아에 보고했다. 그러나 사간원에서는 “이것은 여자에게 사랑받으려고 준 것이지 아들 때문은 아니”라며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더욱이 윤효상은 삼대독자로서 만약 진짜 그 아들이라면 윤효상의 어미 박씨가 마땅히 손자로 거두어 돌보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박씨는 두 번이나 거듭 변명하면서 자신의 손자가 아니라고 거절했다. 사간원에서는 이런 정황을 종합할 때 재춘이 낳은 아이가 윤효상의 아들이 아니라고 판단내린 것이었다.

성종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하다가 영돈령 이상에게 의논하게 했다. 대신들의 의견은 크게 셋으로 나뉘었다. 대체적인 흐름은 윤양을 윤효상의 아들로 보자는 쪽이었다. 그 외에 한명회는 판단하기 어렵다는 입장이었고, ?사신은 윤효상의 아들이 아니라는 쪽이었다.

한명회가 판단을 유보했던 이유는 윤효상이 재춘에게 노비를 나눠주는 노비분집기를 작성해 관에 신고할 때 그 증인으로 나선 사람이 옥산군玉山君 이제李蹄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누구인가?

그는 태종의 첩이 낳은 아들 근녕군謹寧君 이농李의 장자였다. 1444년(세종 26)에 정의대부正義大夫에 올라 옥산군으로 봉해졌고 1469년(예종 원년)에는 가덕대부嘉德大夫에 올랐다. 그는 산릉사山陵使가 된 지 얼마 안 되어 광릉光陵의 사초莎草가 무너져 면직당하기도 했지만, 1485년(성종 16) 특별히 흥록대부興祿大夫로 뛰어올랐는데 이때 나이가 54세였다. 바로 그 시점에서 윤효상의 증인을 섰던 것이다. 증인이 흥록대부로 그 지위가 상당했기 때문에 한명회는 서류가 거짓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한명회는 재춘의 자식을 윤효상의 아들로 보았던 것일까. 그렇게 볼 수도 없었는데 윤효상이 재춘에게 보낸 편지의 서명과 노비분집의 서명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가장 많은 의견은 윤양을 윤효상의 아들로 인정하자는 입장이었다. 심회?윤필상?윤호?이극배도 같은 생각이었다. 심회는 편지 일곱 장의 필적이 모두 같고 서명도 한 사람의 것이라면서 윤상의 신분을 변동시키지 말도록 요청했다. “그 아비가 자기 아들이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아들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물론 입으로 내뱉은 것이 아니라 기록이 그렇다는 얘기다. 이극배도 동의했다.

“자기 아들이라고 한 기록이 분명히 있습니다. 윤효상의 어미 박씨가 손자가 아니라고 여러 차례 상언한 것은 도리어 인정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아마도 사손使孫(자녀가 없이 죽은 사람의 유산을 그의 조카?종손?삼촌?사촌들 가운데서 이어받는 사람) 가운데 농간을 부리는 자가 있는 듯하니 윤효상의 아들로 결정하도록 하십시오.”

반면 재춘이 낳은 아이가 윤효상의 아들이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한 사람은 노사신이었다.

“사람들이 후사가 없어 근심하거나, 첩을 사랑하여 다른 사람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저는 윤효상과 어려서부터 같은 마을에서 자라 그 사람됨을 자세히 아는데, 그는 오로지 여색만 탐하는 자입니다. 특히 재춘은 관기로서 날마다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으므로 윤효상의 자식인지 누구의 자식인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노사신이 본 윤효상의 일생은 허랑방탕했다. 윤효상은 30여 년 전에도 문제를 일으켰다. 1454년(단종 2) 8월 17일 사용司勇이었던 그가 창녀 마가지加之를 간통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마가지가 친구였던 임효명任孝明과 이미 관계한 여자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 자체로는 거론할 일도 아니다. 마가지는 창기이기 때문이다. 사정은 좀더 복잡했다.

임효명은 당시 종3품인 군기감의 판사 직책을 맡고 있었다. 임효명도 여자를 좋아해 창녀를 군기감에 불러 풍악을 울리며 마시고 놀기를 자주했다. 뿐만 아니라 관의 비용으로 연회비를 지불해 문제를 일으킨 인물이었다. 사헌부에서 이 사실을 알고 임효명의 고신을 거두고 자세히 따져 묻도록 청했다. 이 과정에서 윤효상의 간통 사실도 드러났던 것이다. 사헌부에서는 윤효상이 문란하기 이를 데 없어 선비의 기풍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고신을 거두고 옥에 가둬 국문하도록 요청했다. 의정부에서도 마찬가지로 고신을 거두고 옥에 가두는 것이 맞겠다고 의견을 올렸다. 단종은 이를 허락했다.

그후 17년이 지나 윤효상은 또다시 불미스러운 일로 실록에 등장한다. 1471년(성종 2) 9월 20일이다. 그가 국가 기일忌日에 무엄하게도 친구인 춘산수春山守 이귀손李貴孫, 안천군安川君 권팽權彭 등과 어울려 기생을 데리고 고기 잡고 사냥한 일이 발각됐다. 이 일로 성종은 이귀손을 파직시키고, 권팽과 윤효상을 국문했다. 윤효명과 같이 놀았던 이귀손은 정종의 아들로 춘산부령春山副令을 역임한 사람인데, 그 또한 신분을 이용해 마음대로 즐기면서 살았다. 이귀손은 7년 전 창기 양대운陽臺雲과 전라도를 여행한 죄로 고신을 빼앗긴 적도 있었다.

안천군 권팽은 화천군 권공權恭의 아들이었다. 자신의 아버지는 태종의 후궁 김씨의 딸 숙근옹주淑謹翁主와 결혼해 화천군으로 봉해졌는데, 성품이 활달했다. 또한 평생 비단옷을 입는 습관이 없을 정도로 소박하게 살았다. 그의 하나 있는 아들이 권팽이었다. 권팽은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무뢰배들과 몰려다녔다. 당시 안효상은 응패두鷹牌頭였다.

한마디로 윤효상은 세력가들과 어울려다니며 눈꼴사나운 짓을 평생 해온 사람이었다. 이런 그가 16년 뒤 자신의 아들 문제로 다시 한번 조정을 뒤흔들었던 것이다.

*

성종은 노사신의 말을 따랐다. 그의 말이 가장 설득력 있어 보였다. 재춘이 길가의 관기로서 날마다 사객使客을 겪기 때문에 윤효상의 친자임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 첫번째 판단이었고, 윤효상이 아들로 거둘 수 없으니 미안한 마음에 이런저런 구차한 말로 재춘을 위로했다는 것이 그다음 판단이었다. 판결에 따라 윤효상은 마음의 짐을 덜었고 재춘은 다시 관기 신세가 되었다. 아들은 관의 노비로 기생들의 심부름을 하며 자라야 했다.

재춘은 이 공주 땅이 서러웠다. 그녀는 윤효상이 보라는 듯 아들의 성과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윤상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잊지 않게 매일매일 가르쳤다. 평생을 계집질로 허랑방탕하게 보낸 사람이지만 그래도 윤효상은 양반이었다. 아들이 자라 어딜 가더라도 양반의 자식이라는 말을 할 수 있길 바랐던 것이다. 재춘이 어미로서 할 일은 속량贖良하는 데 드는 비용을 충당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다시 위태로운 길가의 삶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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