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행紅杏은 뜨거운 여자였다. 사랑을 표현할 줄 알았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정해진 지역을 벗어나 먼 곳까지 찾아갈 정도로 에너지가 넘친 여자였다. 홍행은 원래 송림부정松林副正 이효창李孝昌의 기생첩이었다. 이효창은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아들로 활을 잘 쏘기로 유명했다.
아름답고 적극적인 홍행은 많은 남자의 눈길을 받았다. 이효창의 그늘에 머물기에는 그녀의 미모가 너무 반짝거렸다. 1479년(성종 10) 7월 어떤 남자가 홍행을 탐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효창의 친척인 청풍군淸風君 이원李源이 이효창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홍행과 간통을 저지른 것이다. 이 때문에 종부시에서 이원에게 죄줄 것을 청했고 성종은 이원을 파직시켰다. 이원은 정희왕후의 친조카였는데 단번에 파직시킨 걸로 봐서는 평소 그의 행동이 굉장히 잡스러웠던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3년 뒤 이원은 조정에 또다시 풍파를 일으켰다. 기생 홍행을 사이에 두고 길거리에서 김칭金과 대판 싸운 것이다. 홍행은 당시 김칭의 첩이었다. 싸우는 과정에서 김칭이 이원의 왼손을 깨물어 큰 상처를 냈다. 홍행이 남편을 보호하느라 이원을 껴안아 붙든 사이 김칭이 공격에 성공한 것이다. 이원은 한 번 정을 통한 여자가 이렇게 사나운가 싶은 게 마음이 괴로웠다. 하지만 그건 어이없는 착각이었다. 홍행은 그에게 강간당하고 소박까지 맞은 과거를 생각하며 이원을 증오하고 있었다.
이원은 왕실의 사람이고 김칭은 부평부사를 지낸 사람이다. 고관대작들이 일반 평민이 다 쳐다보는 길거리에서 서로 치고받고 싸웠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조정은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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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행의 두번째 남편 김칭은 유명한 난봉꾼이었다. 아니 ‘카사노바’에 가까운 행적을 보였다. 그는 기생과 놀기를 좋아했고 시정인들과 어울려 내기 바둑과 장기를 뒀으며, 친구나 친척의 첩에 이르기까지 미색美色이 흐르는 여자가 있으면 백 가지 계책을 써서 도둑질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며느리의 친정아버지인 윤훈尹壎의 첩과 간통하기도 했다. 윤훈이 이를 미워해 딸을 도로 데려왔는데 그 딸이 다시 김칭의 집으로 돌아가버리자 윤훈은 노하여 다시는 딸을 보지 않았다.
김칭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아주 높았다. 『어우야담』을 보면 그의 연애 행각과 관련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소개된다.
서울의 한 권번券番에 속한 기생들이 어느 날 특별한 파티를 열기로 했다. 각자 애인을 불러서 술을 거나하게 먹자는 것. 너도나도 생각해둔 사람에게 초대하는 편지를 은밀하게 써서 보냈다. 드디어 당일 저녁 술집에 한두 사람씩 한량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때 대문에 허름한 차림의 선비가 들어서자 기생 십수 명이 버선발로 반기며 쫓아나갔다. 선비를 애인으로 초대한 기생들이었다. 그 허름한 이가 바로 김칭이었다. 그날 술자리에 참가한 사람이 김칭에게 비결이 뭐냐고 묻자 그는 “종처럼 구시오”라고 한마디 던졌다고 한다.
아무튼 김칭은 이러한 수완으로 평양까지 진출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평양의 그 많은 기생 중에서 자신의 형이 평소에 아끼고 사랑하던 기생을 간통하고 말았다. 그의 여자 밝힘증은 때와 장소,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성격도 매우 괴팍하고 잔인했다. 1464년(세조 10) 4월 가부장假部將
(나라에 의식이 있을 때 임시로 임명하던 군대의 부장)직을 수행할 때는 부하들을 엄하게 다룬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하루는 김칭이 습의군사習儀軍士를 점검하고 있었다. 그날 훈련 중에 군사 한 사람이 대오를 잃었다. 김칭은 고함을 치며 그의 갓을 빼앗고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군인의 자격이 있네 없네 하며 호되게 기합을 줬다. 그날 저녁 김칭이 기생을 불러다가 집에서 술을 마시는데, 희롱당한 군인이 찾아와 항의했다. 화가 난 김칭은 몽둥이로 그의 어깨를 때려 뼈를 으스러뜨렸다.
1470년(성종 1) 9월 김칭이 부평부사로 발령 나자 사간원 정언 박사동朴思東이 바른말을 한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부평은 땅이 넓고 인구가 많은데, 지금 농사를 실패한 실정입니다. 김칭이 폐단을 일으켜 백성들의 피해가 더 커질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애초부터 그의 관직 자리는 뇌물을 써서 얻어낸 불순한 것이었다. 조정의 끄나풀로부터 인사 발령이 곧 날 것 같다는 언질을 받자 김칭은 이미 부임한 것처럼 집안사람들에게 떠벌리고 다녔다. 임금의 재가가 나기 전에 그러했으니 이는 큰 죄에 해당했다. 대간이 그 실상을 조사해 김칭의 죄가 참대시
(참형을 할 때 가벼운 죄는 춘분에서 추분까지 만물이 생장하는 시기를 피해 형을 집행했다. 하지만 십악대죄十惡大罪 등 중죄이면 참부?시斬不待時라 하여 이에 구애받지 않고 집행했다)에 해당한다고 아뢰었다. 그가 얼마나 미움을 받았는지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하지만 성종은 김칭을 파직시키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지었다.
1480년 7월에는 희대의 섹스 스캔들인 ‘어을우동’ 사건에 연루되었다. 어을우동과 간통한 방산수가 ‘왜 나만 잡아넣느냐’며 그녀와 정을 통한 이들의 명단을 작성했는데 여기에 김칭의 이름도 올라와 있었다. 그는 또다시 의금부에 붙들려갔다. 하지만 성종은 명단에 포함된 인물이 실로 엄청남을 보고 “이 사건은 방산수의 무고에서 나온 것으로 국문할 수 없다”며 그를 풀어줬다. 김칭은 늘 운이 좋았다.
그로부터 2년 뒤 김칭이 기생 홍행을 찾아온 또 다른 난봉꾼 이원과 길거리에서 몸싸움을 벌인 것이다. 꾼들이 적수를 알아본 대격돌이었다. 1482년(성종 13) 1월 4일 아침 신하들이 정사를 아뢰는 자리에서 대사헌 김승경이 이 문제를 꺼냈다. 김승경은 김칭을 구속하고 종부시로 하여금 이원을 국문케 하도록 청했다. 성종은 허락했다. 보름 뒤 명은 받은 의금부에서 김칭을 조사해 아뢰었다.
“김칭이 청풍군 이원에게 상처를 준 죄는 장 100대와 도 3년에 해당하고 고신을 모두 추탈해야 합니다. 또한 홍행이 김칭을 돕기 위해 이원의 허리를 안은 죄는 장 80대에 해당합니다.”
성종은 “홍행의 죄는 정상과 율이 서로 맞지 아니하니 의논해 아뢰라” 하였다. 성종의 명에 도승지 이길보李吉甫 등은 이미 홍행을 심문해서 파악한 것이라고 아뢰었다. 성종은 그게 사실이라면 오히려 홍행에게 더 강한 벌을 줄 것을 요구했다.
“문제의 원인은 홍행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전일에 이미 강상을 어지럽혔는데 지금 또 이러니 종중從重(두 가지 이상의 죄가 드러났을 때 가장 무거운 죄를 좇아서 처벌하는 것)으로 논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성종이 강상을 거론했기 때문에 대신들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모두 좋다고 아뢰었다. 이때 우승지 이세좌李世佐가 “만약 시추時推(갇혀 있는 죄인을 신문함)로써 종중해 논한다면 정상과 율이 서로 어긋나니, 의금부로 하여금 다시 취조케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허락하니 의금부에서 홍행을 다시 국문한 다음 보고했다.
“기생 홍행은 김칭이 상해를 입을까 두려워 청풍군 이원의 허리를 안아서 옷까지 찢어지게 했습니다. 그 죄는 장 90대와 도 2년 반에 옷을 벗고 받는 형장[去衣受刑]에 해당합니다. 나머지 죄는 속바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의금부 수사에서 ‘옷이 찢어졌다’는 죄목이 추가되었다. 성종은 의금부의 보고대로 처리하도록 했다.
한편 청풍군 이원은 이미 예전에 이효창의 첩으로 있던 홍행을 강간해 파직당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홍행을 다시 간통하기 위해 밤중에 그녀의 집에 갔다가 남편인 김칭과 큰길 가운데서 머리채를 붙잡고 서로 싸웠다. 성종은 이 죄도 물어 이원의 직첩을 거두고 외방에 부처하게 했다.
그런데 3월 26일 의금부에서 이미 귀양보낸 김칭의 문제를 다시 거론했다. 이번에는 신하들이 끈질겨서가 아니라 홍행이 그사이에 사건을 또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홍행은 아마 김칭을 정말 사랑했던 모양이다. 자신 때문에 쫓겨난 김칭을 만나러 바리바리 유배지까지 찾아간 것이다. 결국 이 문제로 홍행은 또다시 의금부에 불려갔다. 의금부에서는 홍행에게 곤장을 때릴 때 홑옷을 입도록 요청했다. 법을 어긴 죄는 있지만 그래도 정이 깊은 여자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성종은 그대로 시행하라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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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흘러갔다. 기생은 누군가에 평생 속할 수가 없다. 그들의 팔자였다. 일시적으로 권력자와 몇 년 같이 지내는 경우도 있고, 몇 달을 동거하기도 했다. 하지만 해로할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 사랑이라는 명분을 따라 늘 움직이는 꽃이었다. 사랑은 풍족할 때도 있지만 차가운 돌로 변할 때도 많았다.
| 조선 시대 여인상을 보여주는 그림 김준근, <썅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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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행은 계속 사랑을 찾아다녔다. 1487년(성종 18) 7월 20일 홍행에게 다가온 또 한 명의 남자가 있었다. 바로 전 사평 현준玄俊이었다. 현준은 어머니 삼년상이 끝나기 전에 홍행의 집에 하룻밤 머물렀다. 현준은 용렬한 인물이었다. 홍문?에서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관료들을 골라내 ‘살생부’를 만들어 임금에게 제출한 일이 있었는데 현준은 “무능한” 사람으로 명단에 올라 있었다. 사평은 조선시대 장례원掌隷院에 소속된 정6품 관직으로 노비의 부적簿籍과 노비 관계의 소송을 해결하는 직책이다. 지저분한 고소 고발 사건이 많고 도망간 노비들을 잡으러 다니는 등 일이 험했다. 여기에 은밀한 뒷거래도 많은 곳이었다. 현준은 힘없는 사람들을 협박해서 뇌물을 많이 받아 챙겼다. 정부의 대대적인 물갈이 인사에 그의 이름이 포함된 것은 당연했다.
홍행은 눈쌀을 찌푸렸다. 어째 이런 못나고 찝찝한 인간이 향불이 꺼지기도 전에 음욕을 품고 날 괴롭힌단 말인가. 홍행은 남세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를 거부할 수도 없었다. 현준이 비록 용렬하고 무능했지만 음험한 구석이 있어 알게 모르게 피해를 본 사람이 많았다. 홍행은 딱 한 번이라는 마음으로 그를 받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 일이 왕의 귀에 들어갔다. 하지만 성종에게 보고된 내용은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기생 홍행의 아들이 사헌부 대사헌 김승경의 아들이라는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홍행이 대사헌의 아들을 낳았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는 예전에 홍행을 두고 김칭과 이원이 벌인 싸움을 왕과 논의했던 사람인데 말이다. 사건은 의외로 복잡했다. 사실 김승경은 최근 홍행에 눈독을 들여왔고, 어느새 긴 밤을 보내는 사이로 발전해 있었다. 홍행의 미모는 세월이 흘러 완숙미를 더해 깐깐한 사헌부의 총책임자를 유혹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둘 사이에 현준이라는 자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현준이 다녀간 후 홍행이 김승경에게 현준의 주책없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대노한 김승경이 노비를 보내 현준을 집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그는 현준을 다그쳤다.
“네가 홍행과 잤다는데, 이미 내가 그 집에 출입하고 있음을 몰랐단 말이냐?”
여기서 현준이 말을 잘못했다. 그의 입에서는 “대감께서 그리 은밀하게 다녀 가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겁없이 상전을 비꼰 것이다. 자신이야 시정잡배라 해도 명색이 헌부에 계시는 분이 기생을 첩으로 들이지도 않으면서 독차지하려 하심은 무슨 마음이냐는 것이었다. 예민한 김승경이 이 말에 상처를 받아 현준을 상중에 여자와 잤다는 이유로 잡아들여 심하게 추핵했고, 이 과정에서 현준의 아내 이씨가 홍행이 낳은 아이가 김승경의 자손이라고 상언을 함으로써 그간의 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뜻밖의 공격을 당한 김승경은 ‘이런 죽일 년이……’ 하고 속으로 욕을 해댔지만 왕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했다.
“신이 홍행의 집을 왕래하면서 유숙한 일은 있사오나 제 집에 데려와 같이 살았던 것은 아니며, 이미 버린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또한 홍행이 낳은 자식을 제 자식으로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현준이 죄를 덜기 위해 저를 끌어들이니 억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간악하게 모함하고자 한 것을 엄하게 다스려주길 청합니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의 이야기는 달랐다. 현준이 비록 상중에 홍행에게 가서 하룻밤을 잤지만, 이는 탈상 즈음한 일인데 이에 대해 죄주자고 청하는 김승경의 행동이 넘친다고 본 것이다. 대신들은 대사헌의 행동에 사사로움이 개입됐다고 주장했다.
성종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며 이 사건을 사간원으로 넘겨서 조사하라고 명했다.
“이 일을 간원諫院에 이첩하라. 내가 이씨의 상언을 보니 홍행의 아들 검충檢忠을 김승경의 아들이라 하였는데 어찌 근거 없이 그렇게 말했겠는가? 이씨가 만약 사실이 아닌 일을 가지고 상언하였다면 이 또한 죄가 있는 것이다. 먼저 검충을 낳게 한 아비를 분별하여 판단하게 하라.”
홍행은 또 조사실로 붙들려 갔다. 아들을 분별하는 일이니 어미로서 홍행의 진술을 확보해야 했던 것이다. 홍행은 처음에는 아이의 아버지가 김승경이라 했다가 이간李墾이라고 번복했다. 그러다가 다시 김승경이 아버지인 것 같다고 털어놓는 등 왔다갔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관아 문서에서 김승경이 아들 검충을 거둔다는 것을 입안한 내용의 문서가 발견됐다. 거기엔 김승경의 친필사인[署押]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두 달 뒤인 9월 18일 정언 유인종柳麟種은 검충의 부자관계는 1484년(성종 15)에 작성된 이 문서와 홍행과 가까운 이웃의 말로 분명히 드러났다고 보고했다. 김승경이 검충의 아비임이 확실한데, 요지는 그가 계속 숨기고 사실을 말하지 않으므로 매질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종은 “이미 실정이 드러났으니 그만두라”면서 실소를 금치 못했다.
다시 두 달이 지난 11월 13일 사간원에서 홍행이 말을 번복한 것을 조사한 결과가 나왔다.
“기생 홍행이 아들 검충의 아비를 처음에는 김승경이라 하고 중간에는 이간으로 바꿨다가 마지막에는 또 김승경이라 하였습니다. 또 1484년의 초안草案에도 검충의 아비를 김승경이라 하였으니 마땅히 김승경의 아들로 논정해야 합니다.”
홍행은 이웃들에게도 아들을 김승경의 아이로 소개했다. 김검충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김승경이 조정에서 궁지에 몰리자 파직될 것을 우려해 아비를 이간으로 바꾼 것이다. 하지만 말 바꾸기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문서가 발견되면 거짓말이 들통날 것이고, 미래가 더 막막해질 것인지라 또 말을 번복한 것이다.
성종은 김승경과 홍행의 문제를 영돈녕 이상과 의정부에 의논하게 했다. 여기서는 심회가 “창기는 남편을 자주 바꾸므로 김승경이 스스로 아들이라 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본인이 인정하지 않는 마당에 초안만 가지고 논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윤필상?노사신은 “홍행으로서는 아들의 아비로 높은 관직자를 칭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지난번 조사 서류를 가지고 논의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라고 지적했다. 손순효孫舜孝는 “홍행은 김승경과 관계를 가질 때 동시에 이간과도 관계를 가졌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결국 아비는 정확히 가려지지 않았다. 홍행만 동시에 두 남자와 간통한 기생으로 낙인 찍혔다. 홍행이 김승경을 최종적으로 지목하긴 했지만 이는 과학적으로 맞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간과는 월경을 하기 전에 관계를 맺었지만 김승경과는 월경을 하자마자 관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홍행은 문제가 불거지기 전부터 애초에 김승경을 속여먹은 것으로 보인다. 조사 과정에서 밝혀진 내용일 테니 김승경이 이를 듣고 극구 부인한 것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월경 전후라는 것도 과학적 근거로 채택되기는 힘든 것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검충의 아비를 정하는 것은 어려우니 내버려두라”는 왕의 말과 함께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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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행은 붉은 살구꽃이다. 옛날에는 술집 앞에 살구나무를 심을 정도로 살구꽃은 술과 기생의 상징이었다. 쟁쟁한 권력자들이 거쳐간 홍행의 삶은 기생으로 보자면 분명 역사에 남을 만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삶에 만족했을까. 비 내리는 사월 살구꽃이 피어나기가 무섭게 쓸쓸히 떨어져 내리는 장면이 떠오른다. 양반들은 기생을 말을 알아듣는 꽃[解語花]이라 했다. 한번 보고 즐거우면 그뿐이었다. 지는 꽃을 아쉬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생들의 꽃은 언제나 주인을 기다렸다. 언약했던 님이 떠나가면 지는 게 아니었다. 언제 겨울이 왔냐는 듯 다시 피어났다. 홍행은 결국 홀몸으로 늙어갔다. 봐주는 이도 없는데 계속 꽃을 피워올렸다. 꽃의 고단함이 여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