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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문학캠프] 비, 사람 그리고 문학이 어우러진 남도 기행

황석영, 은희경과 함께 한 문학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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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대표 작가 1위로 뽑힌 황석영, 차세대 우리 작가 1위에 선정된 은희경이 독자 200여 명과 함께했다. 참가자 모두 낮에는 날것 그대로의 자연 향에, 밤에는 웅숭깊은 문학 향에 취해서 2박 3일을 보냈다.

8월 12일부터 14일까지 3일간, 전라남도는 때 아닌 ‘문학의 향기’로 물들었다. 향(香)의 근원은 ‘2007 YES24 문학 캠프’. 바로 YES24가 주최한 ‘제4회 네티즌 추천 한국의 대표작가 - 노벨문학상 후보를 추천하세요’의 후속 행사였다. 우리 시대 대표 작가 1위로 뽑힌 황석영, 차세대 우리 작가 1위에 선정된 은희경이 독자 200여 명과 함께했다. 참가자 모두 낮에는 날것 그대로의 자연 향에, 밤에는 웅숭깊은 문학 향에 취해서 2박 3일을 보냈다.


천 년 고찰과 동백나무에 감춰진 이야기

아침부터 잔뜩 찌푸렸던 하늘이 기어이 비를 쏟아냈다. 우산을 들어야 하는 번거로움에도, 선운사를 찾은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다. 그렇다. 비는 결코 방해물이 아니었다. 경치에 풍미를 더해준, 고마운 존재였다는 표현이 옳겠다. 물기를 머금은 산과 사찰은 여느 때보다 더욱 운치 있고 청아했다.

비에 젖은 선운사

천 년 고찰 선운사는 김제의 금산사와 더불어 전라북도 내 조계종의 2대 본사다. 1,400여 년에 달하는 오랜 역사와 빼어난 자연경관, 다양한 불교 문화재 덕분에 참배와 관광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선운사 동백꽃의 고아한 자태는 많은 이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본디 동백나무는 스님들이 수양하는 절에는 키우지 않는 나무라는 사실이다. 문화재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요염함을 상징하는 동백꽃의 양기에 파계승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단다. 선운사는 생계를 위해 이례적으로 동백나무를 심어 나무에서 나는 동백기름을 팔아 절을 운영했다고 한다.

선운사 뒤에 우거진 동백나무숲

평안한 정경 이면에 숨은 사연이 절절하다. 살아남고자 금단(?)의 식물을 키웠던 스님들. 흔히, 선운사 동백꽃은 필 때보다 질 때가 더 서럽도록 아름답다는데, 그 연유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목숨은 질기고, 삶은 험난하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동백꽃의 처연함을 노래한 송창식의 ‘선운사’가 계속 입가를 맴돌았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 바람 불어 설운 날에 말이에요 /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

두 번째 답사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고창 고인돌군

‘얼씨구~’ ‘좋다’ 추임새 자아낸 국악 공연

첫날 밤, 강연에 앞서 전라남도 국립국악단이 축하무대를 마련했다. 가야금병창, 전통무용, 사물놀이 등 흥겨운 공연에 ‘얼씨구’ ‘좋다’ ‘지화자’ 같은 추임새가 연방 터져 나왔다. 무엇보다 김옥란 수석단원의 진도아리랑 기교 전수가 백미였다. 카리스마 넘치는 그녀의 열강에 다들 ‘쪽팔림’을 무릅쓰고, 목청이 터져라 아리랑을 불러 젖혔다.

국악단의 공연은 둘째 날 밤에도 이어졌다. 이날은 부채춤의 화려한 춤사위가 객석을 사로잡았다. 서양음악을 접목한 국악가요는 귀를 즐겁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틀 내내 신명 나는 우리 가락으로 행사에 활기를 불어넣어준 단원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전한다.

첫날 공연 中 가야금병창

진도아리랑을 열창하는 독자들

둘째 날 공연 中 사물놀이 ‘세계로 미래로’

첫날 밤, 은희경 작가와의 만남

은희경은 후배 작가 백가흠과 윤성희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든든한 지원군 덕분인지 그녀는 시종일관 밝고 경쾌하게 웃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애정 어린 시선, 유쾌한 농담, 허심탄회한 대화가 오갔다.



 

백가흠의 사회로 진행된 강연회는 신작 소설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됐다. “많은 분이 이번 작품이 전작들과 많이 달라졌다고 이야기하시는데, 뭐가 달라졌는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늘 새로운 것을 쓰려고 해요. 왜냐하면 삶이 늘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죠. 지금 이 순간, 즉 당대에 대한 저의 해석을 소설로 쓰기 때문에 (작품마다)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봐요.”

표제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죽음을 앞둔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잘 보이려고 다이어트를 감행하는 30대 직장 남성의 이야기다. 제목은 릴케의 시 ‘두이노의 비가’에서 따왔다. “‘두이노의 비가’ 중에 ‘우리가 그토록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라는 문구가 있어요. 무엇을 원할수록 그것의 가치에 승복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작품 속 주인공은 아버지를 부정하고 싶어 하면서도 그에 대한 열망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을 얻는 데서 자유롭지 못해요. 바로 이 점 때문에 그 구절이 소설과 맞게 느껴졌어요.”

작품을 낭독하는 은희경 작가와 경청하는 후배 작가들

몇 가지 질문과 답이 더 오가고, 낭독의 시간이 다가왔다. 은희경은 단편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을 차분히 읽어 내려갔다. 낮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가 연회장 구석구석을 빠짐없이 메웠다. 독자들은 숨을 죽이고 경청했다. 이따금 숨소리, 발소리가 불청객처럼 끼어들었다가 작가의 육성에 묻혀 이내 사라졌다.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은 은희경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제가 2년 정도 한국을 떠났던 적이 있어요. 다른 사회에서 살다가 돌아왔더니 그 사이에 너무나 많은 게 바뀌었더라고요. 굉장한 열등감을 느꼈어요. 한국 사람은 무척 유능하고 나만 적응 못 하는 것 같았죠. 소설도 못 쓰고, 사람 만나기도 두렵고, 무력감에 빠졌어요.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은 이런 시기를 거친 다음에 어렵게 말문 떼듯이 쓴 소설이에요. 그때 제가 겪었던 무력감, 약간의 우울함 그리고 삶에 대한 긍정과 의지도 담겨 있죠. 저로서는 오랜 침묵을 깨게 해줘서 고맙고 소중한 작품입니다.”

낭독에 몰입한 독자들

여자로서,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

누구에게나 가족은 때론 ‘힘’이고, 때론 ‘짐’이다. 작가도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은희경에게 가족은 소설의 모티브가 돼주는 ‘힘’이자, 글을 쓸 땐 벗어나고픈 ‘짐’이다. 특히, 결혼한 여자 작가에게 가족은 자신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가족이 제 소설의 모티브로 아주 많이 나와요. 특히 남편. 왜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냐면, 온갖 소설 속에는 악역이 있?아요. 그 모든 악역을 남편의 캐릭터로 설정해요. 다른 사람 등장시키면 항의가 들어오거든요.(웃음) 그래도 괜찮은 게 제가 제일 많이 관찰하는 인물이 바로 남편이니까요.”

“일과 가정, 두 가지 모두를 잘할 수는 없어요. 결혼했다면 가족은 희생이 되는 거고요. 작가들은 글 쓸 땐 히스테릭해지고, 안 쓸 땐 이기적이에요. 자기 작품 생각밖에 없거든요. 평범한 가정생활을 해야 한다면 작가는 좋은 작품을 쓸 수 없어요. 즉, 좋은 가정을 이끌면서 좋은 작가가 되기란 불가능한 일이에요.”

독자의 질문에 답하는 은희경 작가

삶의 우선순위를 소설에 두다 보니, 가사는 다소 서투를 터. 이때 작가라는 직업이 ‘면죄부’가 되어준다. “하기 싫은 일을 안 하고 살 수는 없죠. 다만, 잘하는 일이 있다면 조금 면제받을 수는 있어요. 가령 제가 가정에서 다른 주부처럼 해내지 못하는 부분을 소설 쓰는 일 덕분에 이해받을 수 있죠. 어떤 글을 보니까 작가로서의 조건이 ‘재능, 성실, 자유’라고 하던데, 지금 이야기랑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하기 싫은 일은 안 할 자유, 그런 것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갖는 게 작가로서의 특권이라고 생각해요.”

작품을 향한 작가의 열정과 집념은 때론 무서울 정도로 맹목적이다. 은희경은 집중적으로 글을 쓸 시기엔 오직 집필에만 몰두한다. 식사를 할 때도 자신이 무엇을 먹는지 인식하지 못할 정도다. 한 번 가동된 두뇌는 쉽사리 꺼지지 않아서, 술을 마셔야만 잠을 잘 수 있다. 극도로 예민해지는 시기지만, 그래도 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하다. 집필 전 단계의 괴로움에 비하면 말이다. “집필 전에, 책을 많이 주문하고 읽고 생각나는 걸 메모하고 할 때는 고통스러워요. 문을 막 두드리는데 절대 안 열리는 막막한 느낌이에요. 이 소설은 못 쓸 것 같다는 기분도 들고요. 그러다가 막상 쓰기 시작하면 뭔가 휘둘리듯이 써지죠.”


작가의 과제는 언어 극복

블로그와 설문지를 통해 미리 받은 독자의 질문은 한결같이 날카롭고 매서웠다. 공통점은 모두 작가와 작품을 향한 애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 이에 대해 은희경은 흡족함을 감추지 않았다. 특히 번역 투 문장을 사용한 이유를 묻는 말에는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

“문학이야말로 보수적인 장르예요. 음악, 미술은 형식 변화가 가능하죠. 하지만 말은 다른 말로 바꿀 수 없어요. 누구나 쓰는 그 말을 가지고 전혀 새로운 걸 보여줘야 하죠. 그래서 작가들은 늘 어떻게 해야 이 소설에 어울리는 독특한 문법, 독특한 어휘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해요. 저 같은 경우, 1969년이 배경인 『새의 선물』을 쓸 때는 판소리 사설 조를 사용했어요. 그리고 신작처럼 도회적인 내용을 쓸 때는 번역 투 문장을 통해 도시적이고 모던한 이미지를 부여했죠. 이런 걸 발견해주는 독자가 고마워요.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소설집의 두드러진 점 중 하나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대부분 영문 이니셜이라는 점이다. P, K, B 등 별다른 뜻이 없어 보이는 글자. 하지만 작가가 부여한 의미는 심오하고 치밀했다.

“이니셜에도 각각 의미가 있어요. 예를 들어, K는 저한테는 카프카 작품 『성』의 주인공을 연상시켜요. 도달하지 못하는 것을 찾아 헤매는 막막함을 상징하는 인물이죠. 그래서 실험적 자아일 때 K라 이름 붙이는 걸 좋아해요. 또 「날씨와 생활」의 소녀 B는 프랑스 소설 『벨라비의 환상』에서 따왔어요. 거기서 ‘벨라비’는 자기 머릿속에 벌레가 있다고 믿는데 다들 환상이라고 해요. 그런데 마지막에 그의 머리를 자르는 순간, 실제로 벌레가 떨어지죠. 남들이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세계에도, 알 수 없는 불안과 해석할 수 없는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어요. 여기서 받은 인상을 소녀 B로 그대로 가져온 거죠. B라는 이니셜이 낯설어서 다른 걸로 바꾸려고 해도 안 되더라고요. 제겐 B가 더 이상 이니셜이 아니라 독특한 이름이 돼버렸던 거죠. 또한, 다른 단편에 등장하는 P선배의 경우도, P의 값을 구하라는 수학 논제에서 가져왔어요. 늘 인생의 값을 구하려고 하는 이 사람의 태도와 연관지은 거죠.”

강연회는 은희경이 작가 지망생에게 건네는 조언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작가는 내가 할 말이 뭔지, 세상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야 해요. 쓸 말이 있을 때 좋은 소설이 나오는 거죠. 자기 관점이 없는 소설은 아무도 읽지 않아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매끈하게 정리해놓는다고 해서 소설이 아니거든요. 자기의 관점을 드러내야 소설이에요. 세상의 수많은 관점에 하나의 관점을 보태는 것이 소설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용산 전망대에서 일렁이는 갈대밭을 바라보다

전날의 여독이 미처 풀리지 않은 둘째 날 아침, 순천만 갈대밭을 찾았다. 김승옥의 『무진기행』 속 배경이 된 장소다. 직접 보니, 작가가 주인공의 고향으로 이곳을 설정한 까닭을 짐작하고도 남겠다. 바람을 따라 일렁이는 갈대밭이 그야말로 장관이다. 제아무리 목석이라도 마음이 동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경치다.

50만 평에 달하는 순천만 갈대밭

용산 전망대에 오르니, 광활한 갈대밭이 한눈에 들어온다. 적(赤)과 녹(綠)의 조화를 확인하는 순간, 한 폭의 수채화가 완성된다. 붉은 칠면초, 초록 갈대, 회색 뻘밭이 이루는 색상 대비가 환상이다.

한 줌의 바람에도 갈대가 흔들리고, 보는 이의 마음도 함께 흔들린다. 일상의 긴장을 던져버리고 느슨해질 수 있는 여유, 여행지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닐까.

용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갈대밭

두 번째 답사지는 낙안읍성 민속마을. 지금도 108세대가 실제로 생활하고 있는 전통마을이다. 전통과 현대, 어제와 오늘이 조우하는 공간에서 이루어진 선배 황석영과 후배 은희경의 만남은 더욱 각별해 보였다.

운주사에서 독자들과 함께한 황석영, 은희경 작가

한국 문학의 대들보로 손색이 없는 두 작가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방문한 이날의 마지막 관광지는 화순 운주사였다. 절 자체는 소박하지만, 야산 꼭대기에 누운 남녀 와불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처연하게 늘어선 불상도 사람들의 눈길을 붙잡아 두었다. 볼품없고 못나서 더욱 정이 가는 절. 황석영의 『장길산』이 이곳을 배경으로 했다는 정보가 더해지면, 대견해지기까지 하다.


둘째 날 밤, 황석영 작가와의 만남

등장은 친근했다. “반갑습니다.” 큰 소리로 인사하는 작가의 모습은 이웃 할아버지처럼 푸근했다. ‘청중이 2,30명만 돼도 가슴 툭 터놓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할 텐데 사람이 너무 많아 아쉽다’는 너스레도 정겨웠다.

하지만 강연이 시작된 후 황석영은 ‘돌변’했다. 작가는 거침이 없었다. 일말의 주저함 없이 소신을 강하게 피력했다. 따끔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그의 욕설과 호통, 일갈과 조언으로 점철된 2시간 내내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대가(大家)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상념 앞에서 나의 편협한 사고와 얕은 지식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전날에 이어 또다시 사회를 맡은 작가 백가흠 역시 대선배 앞에서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했다.

거침없는 강연을 펼친 작가 황석영

신작 『바리데기』는 단순히 ‘바리데기’ 설화를 차용하는 데서 그친 작품이 아니다. 황석영은 신화와 현실의 접점을 찾아냄으로써, 당대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진단했다. 소설은 중국과 대양을 건너 런던에 정착한 탈북소녀 ‘바리’의 여정을 따라간다. “이주를 하는 이유가 뭐예요? 자기가 살던 데가 힘들어지고, 그러니까 다른 살 곳을 찾아서 가는 것이죠. 현대는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언어를 지닌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사는데,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야 평화를 이룰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21세기의 특징을 ‘이동’과 ‘조화’라고 봅니다. 이 소설은 노동 이주와 이로 인해 빚어진 여러 가지 갈등을 이야기합니다. 동시에 21세기 초반, 가장 큰 이슈가 돼버린 무슬림과 서방 세계와의 갈등도 그리고 있죠. 먼 나라 이야기라고 여겼는데, 책이 나오자마자 불행하게 아프간 납치 사태가 일어나서 ‘이렇게 격동하는 지옥 같은 세계사적 현실 속에 우리도 굳게 연결돼 있구나’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신화와 현실을 접목한 또 한 가지 이유는 시의 대표적 특성인 상징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다. “혹자는 신화 세계와 현실 세계의 접점을 마련한 것 때문에 리얼리티가 떨어지지 않느냐 이야기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현실적 이야기를 설화나 신화랑 접촉시키니까 메타포, 즉 상징성이 생기는 거야. 그러니까 독자가 일일이 받아먹지 않아도, 시 읽듯이 읽으면 각자의 이미지가 형성된다는 좋은 점이 있죠. 이 책을 읽으신 분들이 생명수의 비밀이 뭐냐고 묻는데, 숨은그림찾기라고 답해요. 왜나면 저는 여러분에게 메타포만 던진 것이고, 각자가 자신이 가진 이미지대로 이 세계를 재구축하고 재구성해나가면 되는 거거든요.”

이 같은 형식을 작가는 시적 서사라고 설명했다. 시적 서사는 경장편이라고도 불리는 새로운 서사 양식이다. 사실 황석영은 그간 문학적 형식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모시켜 왔다. 『오래된 정원』은 형식을 실험한 첫 번째 작품. 1인칭, 2인칭, 3인칭 시점을 자유롭게 넘나드는가 하면 서한문, 독백 등 다양한 장르를 등장시켰다. 이후 『심청, 연꽃의 길』을 거쳐 최근 『바리데기』에서 또 한 번 형식의 변화를 꾀한 것이다.

“시는 이미지와 이미지를 연결해 새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죠. 이 역할과 소설이 가지고 있는 서사의 서술적 디테일을 결합한 게, 시적 서사예요. 다시 말해, 영상적인 세계입니다. 카메라 렌즈는 앵글 안에 들어온 사물만 보여주죠? 이처럼 소설에서도 모든 사물이 아니라, 작가가 선택한 사물 몇 가지만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이 서로 부딪쳐서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게 돼요. 미셸 투르니에, 르 끌레지오, 마르케스 등 제 연배의 외국 작가들이 지난 10여 년 동안 전부 이런 글쓰기를 하고 있어요. 저는 당분간 시적 서사와 지난 세기의 서술 방법을 왔다 갔다 할 것 같습니다. 시적 서사라는 양식이 굉장히 맘에 들어요.”


흘려들어서는 안 될, 대가의 뼈 있는 지적

황석영은 사회를 향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온 작가다. 이번 강연회에서 역시 문학뿐 아니라, 사회 문제, 통일 등 다양한 영역에 대해 평소 지녀온 소신을 밝혔다. 특히 자신을 ‘세계시민’이라고 지칭한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제가 요즘 밖에 나가서 외국 청중들과 만나면, 저를 세계시민이라고 소개하거든요. 간혹 현지 교포들이 ‘당신은 민족작가인데 어떻게 세계시민이야?’ 묻기도 합니다. 그러면 제가 뭐라고 하냐면, ‘한반도와 나의 문제를 세계 사람들과 공유하겠다는 뜻이다’라고 말하죠. 이건 르 끌레지오가 했던 말을 제가 빌려 쓰는 건데, 작가는 국경이나 민족, 국가에 구애받지 않는 존재예요. 단, 작가에게도 조국은 있어요. 그게 뭐냐, 모국어예요. 그러니까 ‘제 조국은 한국어입니다. 한국어를 조국으로 두고 있는 저는, 저와 제 공동체로 만난 사람들의 삶의 문제를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겠으니까, 이제부터 저는 세계시민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죠."

남성 중심 사회, 가부장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우리 연배의 남자들, 죄가 너무 많아요. 저는 혜택 받은 장남이었습니다. 누나들은 음식 찌꺼기를 먹을 때, 저는 아버지랑 겸상을 했어요. 결혼해서는 가부장적이었고요. 한나 아렌트 같은 여성 사상가들이 ‘남성적 억압과 갈등이 근대를 이루어냈다’라고 이야기할 때, 깊이 반성하죠.”

황석영이 1989년 방북했다는 것, 그리고 그 때문에 망명생활을 하다가 93년 귀국 후 수감됐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도 작가는 여전히 북을 향해, 애정과 연민의 안테나를 세우고 있다. 굶어 죽는 북한 주민을 이야기하며, 언성은 점점 높아졌고 얼굴은 점점 붉어졌다. “북한에서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300만이 굶어 죽었어요. 풍요의 대한민국 바로 이 근처에서! 우리나라에서 음식 쓰레기가 15조 원이 된 지 10년이 지났어요. 그 돈이면 북한동포를 유사 식량으로 5년 정도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쌀 조금 실어서 주려고 하면, 퍼준다고 난리를 치는 거야. 같이 먹고살아야 할 것 아니야? 요만큼 주면서 뭐 그렇게 말들이 많은지… 같이 먹고살자고요.”


인간 황석영의 변화 양상

사람은 살아가면서 변화의 계기와 맞닥뜨린다. 단 한 번의 우연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하고 여러 가지 상황을 겪으며 차츰차츰 변하기도 한다. 황석영은 후자에 가깝다. 그는 ‘살면서 몇 가지 단계의 변화를 거쳐왔다’고 털어놓았다.

첫 번째 변화는 베트남을 다녀온 뒤 일어났다. 그전만 해도 황석영은 자기 내면이라든가 탐미적인 것, 자기 주변 문제에 침잠하고 있었다. 전쟁을 겪고,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기자 ‘사회적 의식’을 갖게 됐다. 베트남전의 의미, 분단된 우리나라의 사정, 이런 것들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정성 들여 사인하는 작가

그리고 80년대. 작가는 두 가지 사건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80년대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죠. 이때,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이 군부의 이동을 허락하고, 광주의 학살을 용납해주었던 주한미군사령부였어요. 실체는 미국이죠. 당시 ‘누가 또 하나의 나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또한 85년도에 제3세계문학제에 초청을 받아서 생애 처음으로 유럽에 나가게 됐어요. 거기서 수많은 망명자를 만나면서 북을 발견하게 되죠. ‘아, 북이 남이 아니고, 타자가 아니고 또 다른 나의 모습이구나’ 깨달았어요. 이렇게 이념과 북을 발견한 것이 두 번째 변화입니다.”

첫 번째, 두 번째 변화가 큰 틀에서 이루어진 데 비해, 세 번째 변화는 문학으로 그 폭이 좁혀졌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현장을 목격했을 때의 일이다. “무너진 장벽 사이로 청춘남녀들이 모여들어서 서로 안고 노래 부르고 말이지. 샴페인을 따서 서로 주고받고 마시고, 어깨동무하고. 사람들이 광장을 꽉 채웠는데 모두 웃고 있었어요. 그때 저는 개인의 아름다움, 아름다운 개인을 발견합니다. 그러면서 세계가 변할 것이다. 생각, 산문, 발상도 변해야 한다고 느끼게 되죠.”

마지막 변화는 수감 중 찾아왔다. “출옥 후 저의 왕성한 작품 활동을 두고 주위 친구들이 그럽니다. ‘황석영을 봐라. 한국 교도 행정의 일대 승리다’라고.(웃음) 5년 동안 독방 생활하면서 일상, 그것도 치열한 일상을 발견하게 됐어요. 저에게 또 다른 소설적 세계를 열어줬죠. ‘세계와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남북의 분단체제 여기에 잡혀서는 안 된다. 통시적으로, 전체적으로 봐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동아시아로, 동아시아에서 세계로’란 화두 가지고 지난 7,8년간 씨름을 했습니다. 그 결과가 실험적으론 『바리데기』인데, 앞으로 여기서 더 확대돼 나가리라고 봅니다.”


한국 문학의 위기? 지금이야말로 중흥기!

한국 문학의 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거론되고 있다. 혹자는 독자 탓이라고 하고, 혹자는 작가 탓, 혹자는 출판사 탓이라고 한다. 대개의 결론은 ‘한국 문학이 죽어가고 있으며, 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로 맺어진다. 이 같은 상황에서 황석영이 내놓은 ‘한국 문학 부흥론’은 짜릿할 정도로 통쾌했다.

“동아시아에서 우리나라 문학이 최고예요. 이렇게 힘 있고, 이렇게 다양한 서사를 가지고 있는 문학인데 끝났다니? 어디서 끝나? 올해 보세요. 기자들이 히트 치려고 한국 문학 끝났다고 온갖 소문을 제조했지만, 그게 무슨 소리냐고! 1월부터 12월까지 (출간이) 쫙 깔렸어요. 원로부터 신예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나오는 거야. 이런 나라가 어디 있어요? 우리는 독자가 아직 살아 있고, 쓸 서사가 살아 있고, 작가들이 맹렬히 활동하고 있는 그런 나라입니다. 저는 2007년을 한국 문학 중흥기라고 보고 있어요. 벌써 내년 되면 정권 바뀌고, 남북관계도 새롭게 전개되겠죠. 그러면 문학은 또 새로운 경지로 갈 겁니다. 저는 몸 관리해서 글 열심히 쓸 기운을 여축해야지 그러고 있습니다.”

한국 문학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데는, 일본과 중국 문학의 문제점 진단이 바탕으로 깔려 있다. “오엔 겐자부로랑 나랑 80년대에 만났는데, 그가 나한테 하는 말이 ‘나는 네 활력이 부럽다’고, ‘한국의 다이내믹한, 변화무쌍한 역사가 부럽다’고 해요. 겐자부로는 아들이 정박아인데, 그 때문에 부부 사이에 위기가 여러 번 있었어요. 그 마음고생으로 창작적 긴장을 유지해왔다는 거예요. 그때 나는 우리 문학이 얼마나 힘 있는 문학인가, 깨달았어요. 정말 여러분도 한국 문학의 가치를 알아야 해요. 중국 현대문학? 저는 노신 이후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검열이 점점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모옌이 세계적인 작가라고 하는데, 모옌이 그까짓 것? 그거 말이야. 그저 민속적인 세계예요. 정치색은 다 빠지고. 아니면 새마을 소설이야. 북한 소설보다 약간 풀린 새마을 소설.”

물론 한국 문학에도 몇 가지 극복해야 할 사항은 있다. 작가는 베스트셀러 줄 세우기, 현실과 멀어지는 서사, 문학의 가치 저평가 등을 문제점으로 짚어냈다.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줄 세우기 하죠? 그러면 (백가흠을 가리키며) 이런 사람들이 안 나와. 소비의 홍수 속에서 가능성 있는 신인들이 별똥별처럼 사라지는 거예요. 저는 아무리 그래도 브랜드가 있으니까 잘 안 죽을 거야. 하지만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의 가치를 섞어버린 건 문제에요. 예를 들어, 귀여니랑 황석영을 한 목록에 묶어놓는 것.”

“문학이 현실과 멀어지는 논의를 내세움으로써, 자기 기능을 스스로 떨어뜨렸어요. 독자들이 자신이 겪는 현실이 안 나오는데 소설을 왜 읽어, 안 읽지.”

“서구에서는 문학이 그 사회 교양의 척도거든요. 문화의 중심이라는 말이에요. 모든 시험이 독후감으로 치러져요. 그런데 이놈의 나라는 어떻게 된 게 정치인들이 지들끼리 싸우다가 상대방이 거짓말하면 소설 쓰지 말래. 그러고 어린 네티즌들도 이걸 배워서 상대방이 허튼소리 하면 소설 쓰네, 이래. 이게 되겠습니까.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게 누구야. 도대체!”

문학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작가, 명실 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이지만, 황석영은 글 쓰는 일을 ‘특별시’하는 것을 경계했다. “글을 어떻게 쓰느냐. 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죠. 글의 대부분은 궁둥이가 쓰는 거예요. 앉아야 쓸 거 아냐! 글 쓰는 것의 8,90%는 노동이에요. 별거 아니야. (몇몇 작가들이) 하늘에서 영감을 받고, 신이 장풍을 내려서 쓰는 것처럼 개똥폼을 잡는데 (그게) 아니에요. 여러분과 똑같이, 노동이에요. 여러분 출근해서 타자치고… 똑같은 거야. 글 쓰다가 코딱지도 후비고, 배고프면 자장면 시켜서 먹고, 이러고 쓰는 것. 노동이에요. 다만, 물질의 표층에 깊이가 생기죠. 노동하는 동안에. 그 깊이야말로 물질이 정신으로 변화하는 순간이에요.”

강연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문학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은, 노(老) 작가에게 보내는 존경과 감사의 인사였다.


마지막 답사지, 드디어 비가 그치다

드디어 마지막 날, 소쇄원과 내소사를 차례로 방문했다. 소쇄원에선 맹렬한 기세로 쏟아지던 비가, 내소사에 도착했을 땐 그쳤다. 화창한 날씨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경치를 보니, ‘진작 이러면 좋았을걸’ 하늘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비 덕분에 더욱 촉촉한 여행이 됐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담양 소쇄원. 잠시 비를 피해서…

답사 3일 내내 비가 내렸다. 잠시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온 햇빛이 땅속에 스민 물기를 거두어가면, 이를 보충이라도 하려는 듯 이내 빗줄기가 쏟아졌다. 땅은 이전보다 질퍽해졌다. 발이 푹푹 빠졌다. 그래도 좋았다. 수많은 웅덩이를 피하느라 느려진 걸음 덕에 천천히 더 많은 것을 음미할 수 있었으니까.

내소사로 향하는 아름드리 전나무숲길

많은 분의 노고 덕에 편안히, 그리고 무사히 캠프를 마칠 수 있었다. YES24 직원 분들, 웹투어 가이드 분들, 문화재해설사 분들, 버스 운전기사 분들, 그리고 독자들을 위해 귀한 시간을 기꺼이 내준 황석영. 은희경 작가님. 이외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의 땀이 이번 답사를 치러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하고 싶다.

캠프 참가자 단체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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