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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 세상의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노래 - 곽재구

『곽재구의 예술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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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시인에게 인터뷰를 부탁하러 전화를 했을 때, 그는 한사코 인터뷰를 사양했다. 이번에 나온 『곽재구의 예술기행』이 1999년에 나온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을 다시 엮어낸 것이라 별로 할 말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곽재구 시인에게 인터뷰를 부탁하러 전화를 했을 때, 그는 한사코 인터뷰를 사양했다. 이번에 나온 『곽재구의 예술기행』이 1999년에 나온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을 다시 엮어낸 것이라 별로 할 말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몇 년 전 서울지역 대학생 문학 연합에서 주최한 강연회에서 그를 만났다는 인연까지 꺼내면서 꼭 뵙고 싶다고 하자, 결국 그는 마지못해 허락했다. 어찌되었든 전남 순천으로 가는 기차를 탄 기분은 좋기만 했다. 그가 뭐라 하던 그가 쓴 시는 많은 이들의 가슴을 적시지 않았던가. 어느 낯선 시모임 자리에서 그의 시 「사평역에서」를 깊은 목소리로 암송하는 한 남자를 본 이후, 나는 그의 시들 중 몇 편을 사랑하게 되었다. 자신의 시가 아늑한 새벽 공기 속으로 퍼져나가는 소리를 시인은 들은 적이 있었을까?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기분으로 나는 그를 만나러 가고 있었다. 기차는 퍼붓는 빗속을 뚫고 오래된 기억 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시를 좀더 힘들고 고통스럽게 쓰고 싶다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있는 그의 연구실에서 내심 걱정 반, 기대 반으로 그를 기다렸다. 그는 끝까지 어지간하면 인터뷰를 안 했으면 한다는 의중을 내비췄었다. 또한 사진 촬영은 이미 단호하게 거절한 상태였다. 이번에 다시 묶여 나온 『곽재구의 예술기행』의 저자 사진이 『곽재구의 포구기행』에 나온 사진과 같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매우 조심스러운 걱정이 앞섰던 마음은 시인이 내미는 굵고 따스한 손을 잡는 순간 사라졌다.

“제 생각에는 원래 시인이 열심히 시를 쓰고 열심히 산다면 2년에 하나씩은 시집을 내야거든요. 긴장이 떨어지지 않는 시집을 2년에 한 번 씩은 내야 하는데, 첨에 다섯 번째 시집까지는 그렇게 냈어요. 근데 그 뒤로는 그냥 먹고 사는데 치여 가지고, 시 써가지고는 살 수가 없으니까, 산문도 쓰고, 동화도 쓰고, 하다보니 좋은 시를 못 쓰게 됐어요. 또 내 마음에 남는 시들도 못 쓰게 되고, 많이 부끄럽죠. 그래서 인터뷰 같은 걸 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거예요. 작가는 좋은 글을 썼을 때 에너지가 나오거든요. 아 내가 썼구나, 하고……. 세상에 대해서 자기 발언도 생기고 그러는데……. 좋은 시를 쓰지 못하고 그냥 시인이라 불리면서 이렇게 머물고 있으니까 마음이 아프죠. 그래서 인터뷰나 이런 거를 잘 생각할 수가 없어요.”

그는 내년쯤에 낼 새로운 시집을 준비를 하고 있다. 그가 첫 시집을 낼 때가 1983년 5월이었다. 『사평역에서』가 나온 지가 올해가 이십 년째인 셈이다. 그래서 그는 시집을 하나 준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가 젊은 시절 제일 영향을 많이 받았고 제일 좋아했던 시인이 타고르였다. 타고르의 시들을 읽으면서 그는 많은 위안을 받았다. 첫 시집 이후 이십년이 지나면서 그는 자신을 시의 길로 인도한 타고르 시인에게 시집을 하나 써서 주고 싶은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 겨울에 인도 여행을 했어요. 타고르의 흔적들을 찾아다녔어요. 근데 여행하면서 몇 가지 미진한 부분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번 여름에 또 인도를 갔어요. 인도도 우리처럼 식민지를 경험했지만 삶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우리보다 훨씬 근원적이에요. 신, 자연, 운명 이런 것만 따지면 우리나라보다 삶의 근원성을 더 지니고 있는 거죠.”

인도를 여행하면서 그는 스물 살 때, 인생이 고통스럽고 힘들 때, 자신에게 많은 위안을 준 타고르의 시를 다시금 읽어 보았다. 그러면서 인도의 역사와 민중의 삶 속에서 타고르가 왜 그런 시를 썼을까 하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냥 내가 타고르 한 사람에게 바치는 시집을 내는 것 보다는 더 보편적인 고통이라든지. 억압, 위로, 제 자신의 모순에 대한 위로까지 포함한 것을 쓰고 싶었어요. 그래서 인도 여행을 하면서 타고르에게 주고 싶은 시들을 시집 한 권 분량이 될 정도로 썼지만, 타고르에게 바치는 시집은 유보 시켰어요.”

그는 인도를 여행하는 동안 거의 매일, 때로는 하루에 두세 편 씩 시를 썼다면서 습작노트를 보여주었다. 습작노트에 쓴 시만 해도 60편이란다. 그런데 그는 그 시들을 읽다가 문득 조금 더 힘들게 작업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8월 말까지 원고를 넘겨준다 했는데, 내년 봄에나 보완을 해서 내야할 거 같아. 좀더 힘들고 고통스럽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아주 따뜻하게 누워있는 바다를 닮은 산문을 쓰고 싶다
인터뷰를 시작한 지 삼십 분쯤 지났을까. 그는 갑자기 바다를 보면서 이야기를 더 나누자는 말을 했다. 그를 따라 나서면서 이번에는 질문을 미리 준비하지 않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물어보기로 한 것이, 어떤 형식에 맞춰 넥타이로 꽉 졸라맨 듯한 인터뷰를 하지 않기로 한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나를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여전히 비는 마구 퍼붓고 있었지만, 그가 운전하는 차는 바다를 향해 가고 있었다. 아마 그의 『포구기행』에 나오는 멋진 바닷가의 노을은 볼 수 없으리라. 하지만 대신 따스하게 누워있는 와온(臥溫) 포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대학교 선생 자리에 들어온 게 2001년이에요. 그전에는 그냥 원고 써서 인세와 원고료로 생활해야 하니까. 사실 시 써서는 먹고 못살잖아요. 그래서 먹고 사는 방편으로 기행문도 쓰고, 산문도 쓰고, 동화도 쓰고 하다가 『포구기행』으로 묶어내게 된 거죠.”

먹고 사는 방편이라 하지만, 그가 말하는 밥벌이가 단순한 돈벌이는 아님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글은 돈보다도 밥보다도 술보다도, 더 돈이고 더 밥이고 더 술이라는 말과 함께, 생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쓰는 글은 글이 아니라는 지론을 밝힌다.

“나는 글을 쓰면서 생활이 힘들거나 그러지는 않았어. 이게 세상이 나에게 준 선물이거든요. 시를 쓰는 동안에는 시 쓰면 모든 게 다 해결 됐어요. 첫 시집을 1983년도에 냈지만은 첫 시집을 내면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 주었어요. 그래서 저는 제 시를 한 번 씩이라도 읽고, 책을 산 독자들에게나, 우리나라에 대해서나 아주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는 자신이 정말 운 좋게 오월시 동인에 들어갔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한국 역사가 주는 선물이라면서, 역사 속에 들어가 함께 생각을 하다 보니까 ‘나’를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나갈 수 있는 문학적 지향점이 마련된 것인데, 그런 점에서 그는 한국 역사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가 운전하는 차는 태풍이 비껴간 논을 지나 어느 한적한 바닷가에 우리를 인도해 주었다.

“여기가 마을 이름이 와온(臥溫)이라는 데에요. 와자는 누울 와자고, 온자는 따뜻할 온 자예요. 그래서 아주 따뜻하게 누워있는 바다인데, 갯벌이 너무너무 좋고, 진짜 아름다운 노을이 나라 안에서 노을을 보는 3대 명소 중에 하나로 꼽힐 정도예요. 비가 온 뒤에 개이면서 하늘에 구름이 남아있을 때가 노을 보기에 제일 좋은 때에요.”

그가 『포구기행』에 담은 사진들은 모두 아주 오래된 니콘 FM2 수동식 카메라와 표준렌즈 하나로 다 찍은 것이라 한다. 무려 15년 이상 쓴 카메라는 어느새 그의 몸의 일부처럼 되어서 딱 대상을 향하는 순간, 바로 전자동으로 초점이 맞춰진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포구기행』을 쓰게 된 배경을 말해준다. “해남에 가면 땅끝이란 데가 있어. 땅 끝 마을에 오는 사람들은 국토순례를 하는 사람들이 오기도 하지만, 땅 끝,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곳까지 가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어. 그리고 내 인생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바닥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땅끝에 많이 와. 더 이상 내가 갈 곳이 없다는 절망감에서 땅끝을 찾는 거지.”

그는 모든 포구들을 다 땅끝으로 여긴다. 땅끝에 오면 포구가 있고, 거기서부터 또 새로운 길들이, 시간들이 시작된다. 그는 포구에 오면 길이 끝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또 배들은 떠나고, 포구에 앉아서 바도 소리를 듣다보면 자신이 지나온 길들이 길이 끝나는 곳, 너머로 보이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깜깜한 포구 주위로 불들이 하나 둘 들어오는 걸 보고 있으면 지나간 시간들도 다 생각나고……. 그래서 내가 봤을 때 사람들이 여행에서 힘을 얻기에 제일 좋은 장소가 포구인 거 같아요. 파도 소리를 듣고, 소금 냄새도 맡고, 갯벌도 보고, 지나온 시간들도 생각하고, 마을의 불빛들도 보면서 저기 사는 사람들, 꿈들, 좌절들, 또 떠나가는 배, 항구로 들어오는 배. 이런 것들이 조용하면서도 에너지들로 가득 가득 차있는 거야.”

그렇게 포구를 돌아다니는 중에 와온이라는 마을은 그에게 특히 많은 힘을 주었다. 그러면서 하나씩 포구에 대한 글을 썼는데 그게 책이 된 것이다. 힘들고 마음이 쓸쓸한 사람들이 포구에 와서 파도 소리 듣고, 자기 시간도 돌이켜 보면서, 뭔가 자유를 얻길 바라는 마음이 그의 『포구기행』 속에 담겨 있다.

그의 유별난 포구 사랑이 시 속에 나타나지 않을까 싶어 던진 질문에 그는 포구기행 쓰면서 여행한 포구와 여정들이 아직 시에는 영향을 주지 않고 있다고 답한다. 하지만 시의 어떤 질료가 될 편안함, 파도소리나 그에게 위안이 되는 것들이 궁극적으로 그가 쓸 시에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 한다.

또한 그는 시 쓰기와 더불어 진행될 산문쓰기를 통해서 평범하고 보편적인 삶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아름다운 질서를 자신의 산문 속에 불러 일으켰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예전에 그가 섬진강에 작업실을 마련했을 때는 봄에 섬진강 강가에 피는 꽃을 모두 자신의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 강에 피는 꽃을 제일 좋아하니까 그 강에 피는 꽃이나 물살이나 물소리를 자신만큼 유심히 보고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섬진강을 자신이 제일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는데, 학교 들어온 다음부터는 그도 섬진강을 좋아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섬진강을 떠나온 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것이 많이 힘들고 괴롭다고 한다. 여인도 아니고, 가족도 아닌, 강과 꽃과 헤어진 게 몇 년이 지나도록 힘들고 괴롭다니, 그는 역시 시인이었다.

하지만 순천대학교에 와서 와온을 알 도움이게 되고, 포구에 대한 생각을 키우게 된 데에는 학교에서 시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한 것이 많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에게 힘을 주고 싶을 때 포구를 간다. 가서 책도 읽고, 갯벌을 걷고, 갈매기 울음소리도 듣고, 그러면 힘들이 다시 난단다. 아 살아가야겠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단다. 그래서 그는 포구를 길이 끝나는 곳이 아니라 새롭게 시작되는 곳으로 여긴다. 포구 주위를 둘러싼 갯벌도 폐기물들이 와서 썩는 게 아니라, 다시 재생되는 곳이라 한다. “갯벌이 이미 죽은 것들조차 다 살려주는 거예요.”

이미 죽은 것조차 살려주는 갯벌. 어쩌면 그가 쓰는 모든 글 역시 그 갯벌과 따스한 포구을 닮아있는 것이 아닐까. 늦은 심야버스를 타고 새벽에 도착한 서울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에 빗방울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왠지 파도소리처럼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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