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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인'이 된 어느 문학청년의 책 읽기와 삶

은이후니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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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기를 통해서 들리는 은이후니 님의 목소리는 이렇게 고운 시를 쓰는 분답게 낫낫했다. 은이후니 님은 아내가 아끼는 상추밭을 점령해 버린 달팽이들을 죽일 수 없어서 밤마다 불침번을 서며 멀리 옮겨놓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던 분이다.

아침 거미는 죽이지 않는단다

커다란 거미를
부엌 바닥에서 조심스럽게 집어 올리며
어머니는 무서워하는 내게 말씀하셨다

너무 어릴 때 죽어서
젯밥 한 번 얻어먹지 못한
영혼들이
밥 냄새를 맡고 찾아온 게지

그릇에 달라붙어 있는 밥알 하나를 떼어
거미의 발에 안겨주고는
어머니는 부엌 들창을 열어
바깥으로 거미를 놓아주었다

자, 이제 가거라
잘 대접해서 보내야 다시는 오지 않는단다

그래도 가끔씩 찾아오던 거미들이
정말 보이지 않게 된 것은
새로 지은 아파트로 이사하고 나서부터였다

나는 징그러운 거미가 사라져 기뻐했지만
어머니는 어쩐지 근심스러운 얼굴이었고

오랜 세월 지나
바다 건너 낯선 땅
어린 딸이 손가락질하는 부엌 바닥에서
나는 다시 거미 한 마리를 본다

아침 거미는 죽이지 않는단다
왜냐하면……

커다란 거미를
부엌 바닥에서 조심스럽게 집어 올리며
무서워하는 딸에게 말해주다가

문득 솟아나는 눈물에
나는 채 말을 맺지 못하고 서 있고

내 손바닥 안의 어머니는
밥알 하나 달라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아침 거미는 죽이지 않는다-거미 우화 4」


수화기를 통해서 들리는 은이후니 님의 목소리는 이렇게 고운 시를 쓰는 분답게 낫낫했다. 은이후니 님은 아내가 아끼는 상추밭을 점령해 버린 달팽이들을 죽일 수 없어서 밤마다 불침번을 서며 멀리 옮겨놓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던 분이다.( KBS TV ‘TV 동화 행복한 세상’ 2004. 8.17일 방영) 그런 감수성으로 아침거미 한 마리에서 길어 올린 그리움이 바스라지게 건조한 우리네 일상에 습기를 내주고 있다.

다양한 등단형식에 하나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신춘문예라는 등단형식을 가진 우리나라에서 그 문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에게 작가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에 대해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대학 시절 동인 활동을 하면서 시 부문 대학 문학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는 은이후니 님은 아직 스스로 목표했던 신춘문예 등단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먼 이국 땅 뉴질랜드에서 모국어로 길어 올리는 시어들은 거미 한 마리, 달팽이 한 마리 함부로 하지 못하는 그의 고운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나 읽는 이로 하여금 잔잔한 감동을 느끼게 해준다. 그런 시를 계속 쓰고 있는 그가 시인이 아니라고 할 사람은 과연 어디 있을까?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시절 우리들은 누구나 한번쯤 문학청년이 된다. 일기장 귀퉁이에 시를 쓰고, 짝사랑 이성에게 편지를 쓰면서 언어를 조탁한다. 하지만 이런 행위들은 곧 더 즐거운 대체물들을 만나면서 잊혀지고 만다. 은이후니 님처럼 끈덕지게 부여잡고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열다섯 살 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장문의 독서 감상문을 썼던 소년은 곧 매혹적인 반항에 눈을 뜬다. 삶의 부조리와 반항의 철학에 관해 까뮈보다 선명하게 보여준 작가가 또 있을까. 마음속으로는 ‘예’를 하더라도 겉으로는 ‘아니요’를 해야 성이 찰 것만 같은 십대 후반의 예민한 소년에게 햇볕 때문에 피스톨을 당긴 뫼르쏘는 강렬한 햇볕만큼이나 깊게 각인 되었다. 하지만 은이후니님에게 있어 까뮈가 의미를 가지는 진정한 이유는 바로 장그르니에를 알게 해준데 있다. 까뮈의 스승으로 알게 된 장그르니에의 『섬』은 서정적이면서 아름다운 문체로 열일곱 살의 은이후니 님에게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매력에 눈을 뜨게 해줬다고 한다. 『섬』에 등장하는 고양이 물루의 이야기와, 간장병으로 죽어간 백정의 이야기, 그리고 쟝그르니에가 어린시절에 체험한 無의 인상에 대한 이야기 들은 조숙한 소년 은이후니 님이 삶에 깃들인 죽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이미 스스로에 대해 말하기를 “느낌은 멀리 있고, 분별은 가까운 나이”라고 생각하는 은이후니 님은 느낌이 가까운 청소년시기에 꼭 읽어 볼만한 책이라고 권하고 있다.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막연한 호기심을 가졌지만, 무엇보다 경제적 독립이 필요했던 은이후니 님은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막상 대학 생활을 시작하자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가 실망스러웠고, 무엇보다 깊숙이 감추어둔 씨앗 하나가 자꾸만 땅을 비집고 올라오겠다고 성화를 부렸다. 꼭꼭 다져두고 감추어 두고 싶었던 그리움은 우연찮게 접한 신대철 시인의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를 접하는 순간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남들은 본격적으로 취업 공부를 시작해야 할 시기인 대학교 삼학년에 은이후니 님은 글쓰기 좋아하는 지인들을 규합해 <목비>라는 동인을 만들었다. 목비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에 가장 찬란한 보석인 아내를 만났다. 이미 오래 전부터 시를 쓰고 있던 아내를 통해 시의 기본을 배웠고, 더불어 사랑까지 얻었으니 아무래도 은이후니 님과 시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아닌가 싶다. 신대철 시인의 『무인도를 위하여』는 제목과 달리 산을 노래하고 있다. 산에 관해 이보다 더 풍요롭게 이야기 하는 시를 본적 없다고 말하는 은이후니 님의 서평 속에서 그가 왜 상추밭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달팽이들을 죽이지 못했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산속의 오랑캐꽃 하나 노루발 풀 하나 그냥 지나치지 못하던 신대철 시인을 사모하여 지금도 나무 위 아스라한 높이에 지어진 까치집을 보면 발을 멈춘다는 그가 어떻게 혼자만 좋겠다고 살충제를 쓸 수 있었겠는가. 이 시절 문학청년 은이후니 님은 신대철 시인 이외에도 소설가 오정희, 최수철, 이인성 그리고 시운동 동인의 이문재, 기형도 등의 작가들 작품에 몰입해 있었다고 한다.

소설가 김연수는 『사랑이라니, 선영아』에서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하고 묻는다. 닭튀김은 예나 지금이나 좋아하면서 사랑은 변한다니 사랑이 닭튀김만도 못한 거냐고 억지를 부리지만 사랑은 변한다. 그리고 책에 관한 사랑도 변한다. 이십대까지는 문학 서적 위주로만 읽던 은이후니 님의 독서편력도 삼십대로 접어들면서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내면으로만 향해있던 눈이 밖을 향하기 시작했다. 십여 년 동안 계속된 직장생활 속에서 나름대로 한계상황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교사였던 아내 또한 바닥에 떨어진 교권 때문에 교직에 심각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마침 이때 밀레니엄을 맞아 해가 제일 먼저 뜨는 나라 뉴질랜드로 떠난 여행은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눈을 뜨게 만들어 주었다. 기회는 잡는 자에게 생기는 것이다. 은이후니 님은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이 없었다면 아마도 그렇게 쉽게 기회를 잡을 수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항상 깨어 있으면서 자기 스스로의 눈으로 진실을 바라보라고’ 격려하는 소로우의 충고는 삶에 있어서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대한 은이후니 님의 질문에 답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글을 잘 쓰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과 글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뉴질랜드로의 이민을 결심했던 당시의 정황을 설명하는 은이후니 님의 말속에는 소로우의 자주적인 삶을 강조하는 철학이 짙게 배어 있었다.

숲 속에 있으면 나무만 보이지 숲은 보지 못하는 법이다. 밖으로 나가야 숲을 볼 수 있으니 머나먼 이국땅 뉴질랜드로 떠나보고 나서야 은이후님도 우리나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뭐니 뭐니 해도 다양성의 말살이다. 독일의 교육 플랜을 그대로 적용했던 일본의 강점기 영향으로 우리나라 교육은 지독하게 일방적이고 주입식이다. 이런 제도 안에서 다양성은 거추장스런 장애물에 불과하다. 다민족 이민국가로 가보고 나서야 이런 우리의 문제점을 깨닫고 공부를 시작한 은이후니 님이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으로 에드워드 홀을 꼽고 있다. 『침묵의 언어』, 『숨겨진 차원』, 『문화를 넘어서』등을 통해 다양성과 생명, 자연과 평등에 대한 깊은 사유를 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이웃으로 유럽에서 온 사람, 아시아에서 온 사람을 두고 있다보면 아무래도 그들 문화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관계 맺기가 쉽지가 않아요. 에드워드 홀을 통해 문화의 차이에 대한 기본을 이해하고 난 후에는 서양 문화사에 관련된 책, 정수일 씨의 『이슬람 문명』등을 열심히 찾아 읽었지요.”

이렇게 은이후니 님이 뉴질랜드 생활에서 이웃을 이해하기 위해 다양성의 코드로 책을 읽었다면 이웃에게 자신의 나라 한국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책을 읽었을까?

“국립국어연구원에서 쓴 『우리문화 길라잡이』라는 책이 있어요. 영문판으로도 나와 있기 때문에 선물용으로도 좋고, 의식주 세시풍속 등에 대해 자세하게 나와 있거든요. 제가 숙지해서 외국사람들에게 우리 문화에 대해 설명하는데 유용하게 쓰였어요.”

현재 우리나라에서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목적은 자식교육이다. 그렇지만 사실 외국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부모와 쉽게 적응하는 자녀들 간에 소통문제는 그리 녹녹한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부모가 자녀의 독서에 관여가 가능할까? 은이후니 님도 이제 열다섯 살인 딸아이의 아버지다. 이민자로서 자녀의 독서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은이후니 님은 어려움을 토로했다.

“우리부부는 외국에서도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책을 읽을 수밖에 없는 형편인데 동윤이는 어느 시점부터 한글로 된 책을 읽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더라고요. 동윤이 나이에 저는 『데미안』을 읽었는데, 동윤이는 주로 로맨스 소설만 읽습니다. 얼마 전에 『폭풍의 언덕』을 같이 읽었는데 주인공들이 왜 그렇게 파괴적인 사랑에 매달리는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더군요.”

동윤이를 이야기하는 은이후니 님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든다. 하기야 열다섯은 어느 나라에서도 함부로 책 읽기에 관여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닐 것이다. 평소에 은이후니 님의 책 읽는 모습 하나면 동윤이에게 충분한 가르침이 되는 것 아닐까 싶다.

“이십대에는 문학 서적 위주로만 책을 읽었습니다. 그 때는 내안에 들끓고 있는 많은 생각들 때문에 시선을 밖으로 돌릴 여유가 없었지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차 세상살이에서의 내 몫을 생각하게 되고 그러니까 책읽기에도 변화가 오더군요.”

자신의 책 이력을 되돌아 본 은이후니 님의 변이다. 은이후님의 책 읽기의 방향은 잔잔한 수면에 던져진 돌멩이가 파문을 일으키듯 점점 넓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 있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작은 생명 하나도 모두 소중하게 여기는 그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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