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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서재
나의 성장, 그리고 책

“책과 기구하게 만났고 지금도 숙명처럼 기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려서는 한반에 80명 가운데 내가 가장 키도 작고 몸도 적어 이겨 먹을 친구가 하나도 없었죠. 몸으로 하는 일은 항상 꼴찌였어요. 팔씨름도 달리기도 꼴찌는 내가 도맡았죠. 그런 곳에 나가는 것이 싫어졌어요. 더구나 팀을 나누어 경기를 할 때면 나와 한 팀이 되는 것마저 꺼렸고요. 처량한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었고 체력에서 밀린 저는 그 대신 책을 보기 시작했어요. 시골이어서 책이 귀했지만 로빈손 크루소, 알리바마와 40인의 도적, 심지어 푸루타크 영웅전 같은 이야기들을 여러 아이들에게 신나게 들려줬어요. 우리가 볼 수 있는 책은 모두 일본 책밖에 없었어요. 나는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한글을 몰랐고 배운 일이 없었죠.”

“해방이 되자 안중근 열사 이야기나 을지문덕 김유신 강감찬 이순신 같은 장군 이야기를 마치 본 듯이 살을 부쳐 이야기를 했어요. 학예회에 나가 내가 안중근 역할을 하기도 했고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학교이니 연기하는 꼬마들은 누구나 변사처럼 말했어요. 누구나 이등박문이 되기를 싫어했어요. 총소리도 입으로 내야하고 넘어지면서 ‘쿵’소리도 입으로 내야 했죠. 달달달 잘 외우는 놈이 안중근이 됐어요. 덩치 큰 놈이 싫지만 이등박문이 될 수밖에 없었죠.”

불우한 때 책을 가까이 했다는 김진배. 고등학교 1학년으로 올라 간 지 한 달 만에 6.25가 터졌고 2년 동안 학교를 가지 못 했다. 학교는커녕 먹고 잘 데도 없는 처지. 18세에 전투경찰로 입대, 2년 동안 총 들고 다녔다. 그 무렵 그는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시험공부도 취직공부도 아니니까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때 읽은 책이 심훈의 『상록수』, 이기영의 『고향』, 방인근의 『마도의 향불』이다.


폐암 속에 ‘거창한’ 책 쓰기로

잡식성 독서가 언론인이자 정치인이었던 김진배에게 도움을 줬다. 그는 신문기자 시절 가끔 한직으로 밀리기도 하고 실직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책 속에 푹 빠졌다. 심지어 3년 전 폐암 수술을 받고 이곳저곳을 요양하면서 죽을 날을 정해놓고 기다리려니 사람이 너무 한심하다 싶어 철학을 바꾸었다. 책을 읽기로. 한창 책에 미칠 때는 무슨 책이든 1주일에 두어 권은 해치웠다. 그렇다고 끙끙대며 끝까지 독파하지는 않았다. 재미없거나 어려우면 언제든지 미련 없이 팽개치고 새 것을 찾아 눈을 그쪽으로 돌렸다.

“공부를 하자, 책을 쓰자, 이렇게 생각하고 거기 매달렸어요. 책이 팔리고 안 팔리고는 관심 밖이고 더구나 시류에 영합할 일도 거슬릴 일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책 읽고 책 쓰는 일이 전업이 됐죠. 이건 임무도 취미도 아니오, 이상한 괴벽이오, 중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에요. 취할 만큼 마시고 배터질 만큼 먹는 것처럼 포만감에 중독 된듯해요. 좀 주제넘은 말 같지만 황홀경이란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어요. 책은 입학이나 취업에 필수고, 성적을 유지하는 데도 필요하죠. 교양이나 취미를 위해서도 부가가치가 크다. 하지만 진짜 책의 묘미가 이런 마약 같은 중독성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어요.”




독서하는 이유, 양서의 기준, 독서 자세

“신문사의 일선 취재 기자는 순간순간마다 취재경쟁이에요. 어쩌다 특종이라도 하면 우쭐대지만 특종을 놓치면 목이 흔들리죠. 그런 속에서도 인물평이거나 가벼운 수필 류 책들, 일본의 월간 잡지나 문고판들을 가까이 했어요. 신문사 폐간으로 1년 동안 방황했고 필화사건으로 2년 남짓을 한대로 돌았고 11대국회 한번 하고 12년 만에 다시 15대 국회로 돌아오는 곤궁한 생활 속에서도 여기 저기 프리렌서로 기고하다 보니 역시 책을 통해 축적된 지식이 크게 도움됐죠. 국회 속 기록을 꼼꼼하게 보게 된 것은 뜻밖의 월척이었어요. “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기보다는 군것질 같은 것이 아닐까 싶어요. 양념이랄까 윤활유 같은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악세사리라 해도 좋아요. 자기 입맛대로 취향대로 고르면 그만이죠. 흔히 베스트셀러만 찾기도 하고 그럴 듯한 이름으로 포장하거나 유명인의 책만을 집어 들지만 책에도 과대포장은 있어요. 광고에 현혹된다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우선 앞에 머리말을 몇 장 넘겨보든 목차를 보든 중간 적당한 곳을 펴보든 맺는 말이든 몇 장 넘기다 보면 재미가 나거나 실증이 날 거예요. 돈 주고서 재미없는 책에 매달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자기가 보기에 어렵거나 갑갑한 책들은 서슴없이 놓여 있던 자리에 슬그머니 놓아야 하죠. 시력이 다르고 씹는 힘이 다르며 더구나 소화능력이 사람마다 각기 다른데 어떻게 군인들의 표준 식단처럼 이런 것을 읽으라고 권할 수 있을 것인가. 내 구미에 맞는 책을 사고 내 취향대로 읽는 것이 편해요. 자기 발에 맞는 신을 신고 자기 식대로 먹고 마시며 지기 식대로 사는 것이 편한 것처럼 말이에요.”

“5.16 전후해서 읽은 일본 작가 고미가와의 ‘인간의 조건’이나 독일 엔첼스버거의 ‘대중과 독재’일본어판은 내게 독일 같은 나라가 어떻게 독재를 가능케 했는가를 유려한 필치로 실감 있게 보여줬어요. 로버트 멀피가 쓴 ‘군인속의 외교관’을 일본어판으로 보다가 영어판을 구해 보았는데 역시 영어에 짧은 탓인지 미국 외교관이 쓴 이 책의 진짜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던 생각이 나요. 그럼에도 지금도 내 머릿속에 맴도는 구절이나 정경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 그 풍부한 인용과 칼날 같은 표현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딱딱한 의자, 가능하면 나무 의자를 책상 앞에 바짝 대고 허리를 꽂꽂하게 세우고 가슴을 활짝 펴며 머리를 쳐들수록 좋아요. 그래야만 척추가 곧아지고 눈이 똑바르게 책에 꽂힐 수 있을 거예요. 내 경우 책 읽는 자세도 나이에 따라 생활수준에 따라 크게 변해왔어요. 어려서는 배를 깔고 엎드려 읽다가 피곤하면 누워서 읽고 그러다가 지루하면 아예 벽에 기대어 쭈구리고 앉아 읽었어요. 앉은뱅이 책상이든 높은 책상이든 여기에 앉아 있다가는 우선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찬바람의 직격탄을 막아낼 길이 없아요. 온돌방은 배를 깔고 누어도 좋고 뜨끈뜨끈한 바닥이 등을 대면 그렇게 촉감이 좋을 수 없어요.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읽고 쓰는 데 지난 한 50 여 년 동안 데스크는 필수품이었죠. 하지만 요즈음 80대로 넘어오는 4-5년 동안 나는 서재 서너 군데에 가슴에 닿을 만큼 높은 탁자를 세워놓고 그 위에 책을 펼쳐놓아요. 더구나 무거운 사전류를 서가에서 빼가지고 책상 위에 옮기는 일이 만만치 않아요. 서너 개 사전을 동시에 보아야 하는 경우 팔다리의 부하가 너무 큰 것 같아 요즈음은 아예 큰 사전들을 넓은 탁자 위에 놓아 동선을 줄이고 있어요.”

그는 살면서 책을 놓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쓴 책을 읽었고, 다른 사람이 읽을 책을 썼다. 지금은 연말에 낼 예정으로 준비하고 있는 ‘두 얼굴의 헌법’ 속편과 40년 전 ‘가인 김병로’ 전기의 증보판을 내는 데 열심이다. 초대 대법원장으로서 70세 정년까지 10년 가까이 사법부의 기틀을 다져온 그에 대한 존경이 날이 갈수록 높아진다고 한다. 그에 비해 행정부의 여러 차레에 걸친 헌법 유린은 아쉽다. 앞의 책은 헌법은 우리에게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맞출 생각이고 뒤의 책은 법원은 누구보다도 먼저 법관 자신이 지켜야 한다는 것을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 보여주려 한다.


내 서재는 달팽이 토굴

“한 20 년 전에 영등포 당산동에 있는 서재 이름을 ‘열정각’이라 붙였어요. 내가 직접 써서 서각해서 서재 책상 위에 뉘어놓고 있어요. 샘물이 평 펑 솟는 집이라는 뜻이죠. 한 20년 지나니까 좀 지겨운 생각이 들어 ‘달팽이 토굴’이라고 부치고 싶어요. 누군가의 시에 이런 말이 있다고 들었어요.

“황새는 날라 가고 말은 달려가고 달팽이는 기어간다”고.

만리를 날아가든, 천리를 달려가든 오리를 기어가든 제 생긴 대로 가면 그만이지 씨가 다른 동물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는 그런 자세가 마음에 들어서에요. 도시 한복판 아파트의 10여 평 되는 방 3면을 온통 책장으로 성벽을 쌓은 서재를 ‘토굴’이라 부쳐보는 것도 멋이랄까!”

명사 소개

김진배 (193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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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작가 : 인문/사회 저자

최신작 : 두 얼굴의 헌법

그는 영원한 기자요, 평생 글쟁이다. 1959년 경향신문 수습기자를 시작으로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에서 기자, 부장, 논설위원으로 일했다. 1968년 동아일보 국회출입기자 때는 청와대 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 공화당 재정위원장 등 4인체제가 주무른 ‘정치자금의 내막’을 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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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1학년 때 읽은 ‘레미제라블’이나 ‘몬테크리스트 백작’ 그 뒤의 ‘부활’이나 ‘카라마조푸 형제’ 같은 책들(모두 일어판)은 그 웅장함에서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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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뒤에 읽은 ‘생명의 실상’이나 ‘생장의 집’ ‘반야심경’ ‘금강경’등은 나를 신비의 세계로 유혹했다.

로빈슨 크루소

대니얼 디포 저/류경희 역

초등학교 3학년 때 읽은 ‘로빈손 크루소’는 내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 무렵 ‘마미야 린소’ 라는 일본 작가가 쓴 ‘카라후도(사하린)탐험기’의 몇 구절을 졸졸 외어 꼬마 아이들이나 심지어 일본선생에게까지 아는 체 했던 기억이 난다. 자기만이 갖는 지적 소유욕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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