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현 “찰스 슐츠는 ‘퍼펙트 앨라이’”
『친애하는 슐츠 씨』
슐츠는 엘라이(ally)였던 것 같아요. 소수자가 아니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동의할 수 있고, 내 생각이 틀렸으면 고칠 수 있고, 그쪽에서 원하는 변화에 힘을 보탤 수 있는 거죠. (2024.07.05)
1968년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한 후, 『피너츠』의 작가 찰스 슐츠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친애하는 슐츠 씨께”로 시작되는 편지의 발신인은 해리엇 글릭먼. 세 아이의 부모이자 교사인 그는 『피너츠』에 흑인 아이 캐릭터를 등장시키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매스미디어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무척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슐츠는 직접 쓴 답장에서 “저는 해결책을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흑인 이웃들을 내려다보는 태도로 보일 것 같아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것. 글릭먼은 행간에 숨은 슐츠의 의도와 고민을 읽었다. 그래서 자신의 친구들-흑인이고 부모인 친구들이 슐츠에게 편지를 보내도록 독려했다. 몇 달 후, 슐츠는 글릭먼에게 다시 보낸 편지에서 흑인 아이 캐릭터 ‘프랭클린 암스트롱’의 탄생을 알렸다.
『친애하는 슐츠 씨』의 부제는 ‘오래된 편견을 넘어선 사람들’이다. 여성이라서, 흑인이라서, 동성애자라서, 동양인이라서... 숱한 이유들로 차별과 배제와 억압을 견뎌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얼마나 많은 차별이 무지에서 비롯되는지’ 이야기한다. 동시에 ‘그럼에도 세상에 맞선 사람들’을 조명한다. 여성은 뛸 수 없었던 보스톤 마라톤 대회의 ‘첫 공식 여성 완주자’가 된 캐서린 스위처, 미국장애인법(ADA)를 이끌어낸 장애인 운동가 주디 휴먼,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임을 선언한 체조선수 시몬 바일스와 테니스선수 오사카 나오미 등 편견에 균열을 내고 작은 변화를 만들어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박상현 저자는 다양한 일간지와 뉴미디어에 칼럼을 연재했고, 2021년부터 구독 기반 온라인 매거진 <오터레터>을 발행하고 있다. 문화, 테크, 정치 분야의 이슈들을 소개하면서 그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배경과 맥락을 짚어주는 까닭에 <오터레터>는 다수의 유료 구독자를 확보한 ‘성공한 유료 구독 매거진’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오터레터>에서 발행된 글들 가운데 일부가 『친애하는 슐츠 씨』에 담겼습니다. 주로 사회 변화와 관련된 글들인데요. 왜 이런 주제의 글들만 모으셨어요?
<오터레터>에서 다루는 주제가 많은데 테크, 정치 관련한 것들은 시의성 때문에 이미 지나간 뉴스가 돼서, 더 깊은 주제가 있지 않으면 단행본으로 나오기에는 적절해 보이지 않았어요. 사회 변화라는 주제를 뽑으려고 애를 쓴 건 아닌데, 문화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사회 변화 이야기가 많이 나온 것 같아요. 요즘 문화 이야기를 하면서 사회 변화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디즈니 작품에 흑인 공주가 등장한 것도 문화 이야기이지만 사회 변화 이야기인 것처럼요. 그런 이야기에 사람들이 반응을 많이 하더라고요. 3년 전에 <오터레터>를 처음 시작할 때는 이것저것 다뤘는데, 아무래도 사람들의 반응이 많이 오는 쪽으로 주제가 모아지잖아요. 그러다 보니 어느덧 사회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됐어요.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그리고 저도 관심이 있으니까 더 찾아보게 되고요.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데, 한국인 구독자들이 좋아하고 공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국과 오버랩 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책에 실린 멜라니의 이야기를 <오터레터>에 소개했을 때도 한국에 계신 분들이 연락을 주셨어요. 한국에도 그런 일이 있다고요.
멜라니 이야기(「세상의 모든 멜라니들」)는 빈부 격차와 교육 격차의 악순환을 보여주는 사례였죠.
네, 그런 이야기들이 오버랩 되었던 거죠. 출판사에서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김형보 대표님이 ‘이 이야기가 한국 사람들한테 필요합니다’ 하고 저를 설득하셨어요.
<오터레터>를 발행하면서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신 글들이 있겠죠. 그 사이에 공통점이 있나요?
있었어요. 그게 소재는 아닌 것 같아요. 저도 사건을 살펴보다가 깨달았는데요. 틀에 박히지 않은 이야기들은 의외로 보편적인 이야기일 때가 많아요. 역설적으로 들릴 텐데, 이런 사연이 있었어요. 노래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인데 성전환 수술을 하고 남성 호르몬이 많아지면서 목소리가 바뀐 거예요. 노래가 자기 인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정체성도 자기 인생이잖아요. 노래와 정체성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되는 상황이 된 거예요. 이런 ‘노래를 좋아하는 트랜스젠더가 겪어야 될 일’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해보는 건 아니지만, 그 사연을 읽다 보면 보편적인 인간으로서의 고민 같은 게 다가오는 거예요. 일과 정체성의 사이에서의 고민은 다들 하잖아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특이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나도 그렇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흔히 듣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개성이 있고 궁극적으로는 누구나 그 이야기를 생각하게 되는, 그야말로 승화되는 이야기죠. 제가 제일 찾고 있는 이야기가 그거예요.
『친애하는 슐츠 씨』에는 젠더, 인종, 가난, 장애를 주제로 한 글들이 다수 실려 있고, 작가님은 권리를 침해 받는 이들의 편에 서서 모든 글을 쓰셨어요. 이런 시각은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사회학을 공부하고 그 다음에 미술사를 공부했어요. 사회학을 공부하니까 그래도 또래 중에서는 진보적인 생각을 갖게 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단순히 정치적인 진보 말고 사회적 진보 있잖아요. 예를 들면, 저희가 대학생일 때만 해도 ‘에이즈 환자가 다른 학생과 같이 공부하는 걸 허용해야 되느냐’는 논쟁이 있었어요. 그때는 에이즈가 타액을 통해서 아니면 모기를 매개로 전파되는 게 아니라 성관계에 의해서 전파된다는 게 밝혀진 상황이었는데 ‘그래도, 싫은데?’라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었어요. 사회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다수가 불편하면 소수의 이익을 희생해도 된다는 식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아니었어요.
미술사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영향을 받기도 하셨나요?
현대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젠더 이론에 대해서도 많이 배우게 됐어요. 2000년대 초에 제가 박사과정에 있을 때 ‘게이 레즈비언 아트’ 같은 세미나가 있었는데, 저는 그때 처음으로 게이가 자신의 성소수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그걸 아트로 보여주면서 설명해주는 걸 본 거예요. 당시에는 문화적인 충격이 있었어요. 그런데 서로 친구가 되니까 이야기를 더 듣게 되고, 이야기를 들으니까 제가 갖고 있는 잘못된 것들을 고치게 되고, 마음이 통하니까 저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더라고요. 거리가 가까우면 배우게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얼마나 가까우냐에 따라서 이해의 폭이 달라지는 거죠. 내 주변에 다양한 사람들이 많으면 내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그러면 편견이 사라진다고 생각해요. 결국 살기 좋은 세상은 다양한 세상이라고 생각하고요.
유학 시절부터 미국에서 지내셨죠? 작가님은 미국 사회의 주류라고 할 만한 ‘엘리트 백인’의 시각을 답습하지 않은 것 같아요.
한국은 모든 사람들이 똑똑한 편이에요. 평균적으로 똑똑한 것 같아요. 그런데 미국에는 엄청나게 무지한 사람부터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들까지 다 있어요. 엘리트의 지적 수준은 굉장히 높아서, 이 사람들이 내놓는 담론이 어마어마해요. 예를 들어서, 지금 미국이 멕시코 접경으로 들어오는 불법 이민자들 문제로 시끄럽잖아요. 하루에 몇 천 명, 때로는 만 명 이상이 들어와요. 그런데 미국의 법은 ‘난 난민이야’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그 사람에게 난민으로서의 권리가 부여돼요. ‘당신은 비자가 없으니까 들어오지 못한다’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난민 신청을 하겠다고 말하면 다 (미국으로) 받아들여야 돼요. 민주당의 입장은 ‘법이 그런데 어떡해, 다 받아야지’라는 거예요. 우리 같으면 ‘상식적으로 그건 좀 너무하잖아’라고 할 수도 있는데 미국에서는 ‘상식? 뭐가 상식인데?’ 하고 다 따져보는 거예요. 그 사람들의 진보적인 수준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인 거죠. 말씀하신 대로 미국 사회의 주류 시각이 분명히 있지만, 그게 사실은 상당히 엘리티즘(elitism)적인 시각이기도 하거든요. 그 사람들의 시각이 다 옳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굉장히 뛰어난 논의들이 많이 있어요. 미국은 백인들 위주로 돌아가는 사회가 맞아요. 하지만 그 백인들이 갖고 있는 지적인 깊이가 깊고 스펙트럼이 다양해서 어디에서보다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핀 황’과 ‘아이샤 라스코’가 떠오르네요. 두 사람은 각각 중국인, 흑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지 않고 미국 방송에서 리포터와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다고 하셨죠.
한국식으로 이야기하면 KBS 라디오에서 앵커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건데, 그런 경우가 있나요? 아직도 안 되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왜 안 되는지를 아무도 이야기 안 하죠. 미국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왜 안 돼? 흑인 억양으로 방송하면 안 된다는 법이 없어?’ 이러는 거죠. ‘그런 법은 없지’ 그러면 그냥 흑인 억양으로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중앙방송사에서 전라도 억양, 충청도 억양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요. 당연한데 던지지 않는 질문들이 있는 거죠. 미국은 그런 질문을 던지는 나라인 거예요. 미국은 제가 태어난 나라가 아니지만 그런 좋은 시각은 흡수할 수 있었어요.
책 제목 후보에 ‘아주 오래된 습관’이 있었다고요. 그런데 왜 지금의 제목으로 정하셨어요?
‘아주 오래된 습관’을 제목으로 하려고 오랫동안 갖고 있었는데요. 저는 편집자 분들의 말을 들어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웃음) 편집자 분들이야말로 도서 시장을 제일 잘 알고 계신 분들이고 저는 잘 아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 분들의 말을 들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또 다른 이유는, 강태영 편집자님과 대화를 하다가 ‘아주 오래된 습관이라는 제목은 변화하는 모습 이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아주 오래된 습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 뒤에 그것과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그래서 다른 제목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친애하는 슐츠 씨 어때요?’ 했더니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눈에 띄는 제목이기도 하고, 오래된 습관을 고치는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
찰스 슐츠의 일화 두 개를 소개하셨어요. 첫 번째는, 테니스선수 빌리 진 킹과의 만남을 계기로 슐츠가 <피너츠>의 여성 인물들을 ‘운동 잘하고 좋아하는 캐릭터’로 그렸다는 이야기고요. 두 번째는 흑인 아이 캐릭터 ‘프랭클린 암스트롱’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인데요. 이때는 해리엇 글릭먼이라는 시민의 조언을 받아들였죠. 슐츠는 열려 있는 사람이었을까요?
저도 그게 궁금해서 슐츠의 인터뷰를 찾아봤어요. 참고했던 자료들 중에 오래된 인터뷰가 있었는데, 슐츠는 우울증을 앓은 적도 있고 굉장히 예민하고 예술가적인 자질이 있었더라고요. 약자들의 문제에 되게 민감했고, 안테나가 잘 발달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사람이라면 1960~70년대 미국 사회의 명백한(obvious) 차별들이 눈에 안 보일 수가 없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책에도 썼듯이 슐츠의 아내는 인터뷰에서 ‘내 남편의 역할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여성들이 싸웠기 때문에 변화가 가능했던 것이지, 남성들이 준 선물이 아니다’라고 했죠. 맞는 말이죠. 제가 봤을 때 슐츠는 엘라이(ally)였던 것 같아요. 앨라이는 번역하면 자기 편, 동료, 동지 같은 의미인데, 번역하기 힘들어서 그냥 ‘앨라이’라고 쓰더라고요. 예를 들어 소수자가 아니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동의할 수 있고, 내 생각이 틀렸으면 고칠 수 있고, 그쪽에서 원하는 변화에 힘을 보탤 수 있는 거죠. 내가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나에게 요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힘을 보태는 자세인데, 굉장히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그런 면에서 슐츠는 퍼펙트한 앨라이였던 것 같아요.
해리엇 글릭먼은 <피너츠>에 흑인 아이 캐릭터를 넣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하는데요. 슐츠는 “저는 해결책을 모르겠습니다”라고 답장을 보냅니다. ‘그건 어렵습니다’도 아니고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도 아니에요. 아주 탁월한 대답을 한 거죠.
결론적으로 보면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이지만, 제가 생각할 때는 ‘모르겠다’는 말속에 ‘나를 이해시켜 달라’ ‘내 마음을 바꿔 달라’라는 마음이 살짝 들어가 있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정말 귀한 말인 것 같아요. 모르겠다는 말은 되게 겸손한 말인 것 같고, 사람들이 이 표현을 많이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부탁을 받거나 의견을 들었을 때 ‘너 그거 틀렸어’라고 말하는 건 내 의견이 굳혀졌고 바꿀 생각이 없다는 이야기잖아요. 그걸 기반으로 가치판단을 하는 거고요. 슐츠는 그러지 않고 ‘답을 모르겠다’고 한 거고, 글릭먼은 그걸 눈치 채고 틈을 파고든 거죠. (웃음) 흑인 이웃의 사연을 슐츠가 들을 수 있게 하잖아요. 개인적인 목소리를 집어넣으면 굉장히 파워가 생긴다는 걸 미국 사람들이 잘 아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의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힘이 있거든요. 글릭먼이 사용한 게 그런 거라고 봐요. ‘내 옆에 있는 흑인 학부모의 이야기가 이렇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게 마음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고, 실제로 그 생각이 맞았던 거죠.
글릭먼과 그의 이웃이 ‘무모한 일’을 했다고 볼 수도 있죠. 요구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0에 가깝잖아요.
그렇죠. 미국 최고의 만화가한테 어떤 캐릭터를 넣어달라고 부탁하는 건데.
그럼에도 ‘말하기’를 선택했다는 점이 또 대단하죠.
시도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 시도한 사람들이니까요.
『친애하는 슐츠 씨』의 인물들이 다 그렇습니다.
네. 안 될 일이라고 해도 그건 상관없는 거죠. 예를 들어 이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데이비드 케이 같은 사람은 (자신이 의도대로) 안 됐잖아요. 그래도 내가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 거죠. 이 일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될 가능성’이라는 게 자기의 시도를 막지 않는 거예요. 우리나라처럼 효율적인(efficient) 걸 좋아하는 곳에서는 ‘확률이 적어? 그러면 다른 걸 해야지’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면에서 미국 사람들은 좀 무모한 데가 있어요. 예를 들어서 주디 휴먼 같은 사람도, 지금은 미국장애인법(ADA)가 있으니까 그 사람이 훌륭한 루트를 거쳐 온 것 같지만,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그때로 가서 보면 ‘안 될 일’을 한 거거든요. 그런데 미국에는 무모해 보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그냥 놔두는 분위기가 있어요. 과도하게 영웅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요. ‘저 사람은 저걸 해야 되는 사람이야. 그럼 해야지, 뭐’ ‘안 될 것 같지만 하겠다면 하는 거지, 뭐’ 그렇게 생각해요. 물론 욕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그런데 그렇게 해서 결국 세상을 바꿔버리는 거죠. 실제로 주디 휴먼 때문에 세상이 바뀌었거든요.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장애인 이동권) 운동을 했는데, 주디 휴먼이 막판에 정말 미친 듯이 푸시를 했거든요.
주디 휴먼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운동가가 있을 수 있나!’ 놀라웠어요. 굉장한 에너지를 갖고 있고, 조직력과 리더십에 대해서 거의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이거든요.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크립 캠프 : 장애는 없다>를 보면 주디 휴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요. 저 에너지는 정말 재능이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타고난 에너지가 그 사람의 재능인 것 같아요. 제가 비슷한 분을 알고 있어요. 무의(‘장애를 무의미하게’)의 홍윤희 이사장님이에요. 장애인 이동권 운동을 하시는데, 저와는 트레바리에서 만난 친구예요. 그 분을 만나보면 에너지가 넘쳐요. 저는 그런 분들은 배터리가 크다고 생각해요. 뭘 해도 그렇게 열성적으로 하거든요. <크립 캠프>를 보면서도 ‘맞아, 배터리가 큰 사람들이 있지’ 하고 생각했어요. 그건 재능이라고 생각해요. 주디 휴먼 이전에도 장애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런 사람이 그 시점에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게 미국이 바뀐 이유죠. 저는 홍윤희 님 같은 분, 김원영 변호사님 같은 분이 지금 우리나라에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그 분들이 얼마나 국보 같은 존재들인지 사람들이 아직 인식을 못하고 있는 거예요. 언젠가는 할 거라고 생각해요. 주디 휴먼 때문에 미국이 바뀌었거든요. 지금 미국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숨을 쉴 수 있게 만들어준 거예요.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준다는 건 정말 엄청난 일이죠.
홍윤희 이사장님은 이 책의 추천사도 쓰셨죠.
네, ‘인위적인 노력 없이는 차별이 없어지지 않음’을 말씀하셨는데요. 뭐든지 인위적으로 해야지, 자연스럽게 바뀌지는 않죠. 그게 싫다는 사람들이 백래시를 하고 왜 자연스럽게 안 하냐고 하는데, 인위적으로 했기 때문에 지하철에 에스컬레이터가 생긴 거고 인위적으로 했기 때문에 안전문이 생긴 거고 인위적으로 했으니까 저상버스라도 도입이 된 거죠. 다 인위적이죠. 약육강식의 방식으로 살면 그게 가장 이기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상태겠죠.
주디 휴먼에 대해 쓰신 글의 제목은 「세상을 바꾼 여름 캠프」입니다. 왜 여름 캠프에 주목하셨어요?
미국의 비장애인들한테는 여름 캠프가 일종의 통과의례거든요. 그런데 주디 휴먼과 같은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장애인들이 갈 수 있는 캠프가 없었어요. 그런데 처음으로 그런 캠프가 열린 거예요. ‘캠프 제네드’라고. 그래서 ‘이런 캠프가 있어?’ 하면서 그 일대의 장애인들이 몰려든 거죠. 주디 휴먼이 그 캠프에 갔다가 나중에는 캠프 지도교사까지 해요. 캠프에 모인 사람들의 장애가 다양하기 때문에 필요가 다 다른데 그걸 맞춰주면서 조직하고 이끌었어요. 나중에 세월이 지나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위를 할 때, 그때 캠프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와요. 주디 휴먼을 도우러 또 모인 거죠. 회고록을 보면 ‘그때 자신들이 다시 캠프에 온 것 같았다’고 해요. 캠프에서처럼 주디 휴먼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휠체어 타고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묻고 다 챙겼다는 거예요. 그때 다른 지역의 시위대는 지쳐서 떠나는데 (주디 휴먼이 있었던) 샌프란시스코 시위대만 버텼다고 해요. 그때 주디 휴먼이 했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내게 해야 된다’는 거였어요. 사람들이 있게 하려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줘야 된다고. 그래서 골고루 발언권을 주고 이야기하게 했어요. 그런 것들을 보면 주디 휴먼이 사람에 대해서 참 파악을 잘하고 있고, 추진력과 리더십까지 갖추고 있었던 거죠. 주디 휴먼의 어머니가 그렇게 교육을 시켰고요.
슐츠는 흑인 캐릭터 ‘프랭클린 암스트롱’을 탄생시키기까지 긴 시간 고민했습니다. 그 결과 아주 섬세하게 그려냈어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존재, 세계에 다가갈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슐츠가 ‘저는 답을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은 솔직한 답이었고, 자신의 무지에 대한 인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게 아니라, 단순하게 흑인 캐릭터를 넣는 게 적절한 답인지 잘 모르겠다는 거였죠.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존재, 문제를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그냥 답을 회피하기 위해 그런 답을 하는 것은 다른데, 슐츠는 솔직한 심정이었던 것을 보입니다. 저는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문제에 성급한 답을 내놓기보다 이렇게 솔직하게 현재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 문제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 답에 도달할 가능성을 열어두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빠른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문제도 있지만, 손쉬운 해결책이 가장 좋은 답이 아닐 때가 많고, 오히려 장기적으로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슐츠가 나중에 내놓은 결과물을 보면 그가 무지를 인정한 후에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탐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죠.
한 인터뷰에서 ‘글을 써서 돈 벌 방법은 없을까라는 고민을 10년 전부터 했다’고 말씀하셨어요. 같은 고민을 하는 많은 이들이 <오터레터>의 성공 비결을 궁금해 할 텐데요. ‘성공적인 유료 구독 미디어’를 만들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오터레터>도 아직 실험 중이고 부족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이렇게 하면 된다’라고 말씀드리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있어요. 이미 공짜로 쉽게 접할 수 있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으로는 유료화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정보라도 잘 다듬고 정리해서 전달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 콘텐츠의 유료화보다는 많은 독자를 모아 도달 범위를 넓히는 광고 모델을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공짜로 볼 수 있는 정보를 단순히 잘 정리하는 것만으로 지갑을 열려 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와 생각의 방향은 비슷하고, 폭(지평)은 넓은 매체를 원합니다. 자기와 비슷한 사고를 하는데 아는 것의 폭도 자기와 같은 사람은 독자 자신이죠. 그럼 굳이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동의하지만 사고의 폭을 넓혀줄 콘텐츠를 좋아한다는 게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오터레터>는 2~3일 간격으로 발행되는데요. 이렇게 빠른 속도에 맞춰서 글의 주제를 정하고 자료를 조사하고 또 쓰시는 게 어떻게 가능한가요?
그게 가능한 이유는 제가 다른 매체의 글을 소개하는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워낙 흥미로운 글을 많이 읽다 보니 그걸 소개하고 싶어서 <오터레터>를 운영하게 되었죠. 빨리 소개하고 싶을 때는 고스란히 번역해서 소개할 때도 많습니다. 물론 영어로 된 원문의 소스와 링크를 함께 소개하지만, 그래도 가급적으로 전재(轉載)에 가까운 번역은 지양하려고 해요. 그대로 번역한다고 사회, 문화적 맥락을 넘어서 잘 전달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제 견해와 설명의 양을 많이 넣으려 합니다. 물론 시간이 더 걸리는 작업이 되겠죠.
이번 책의 독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저는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이 50년 전과 50년 후로 가상의 시간 여행을 해보시기를 권합니다. 50년 전인 1974년, 세상에 얼마나 많은 편견과 차별이 있었는지를 생각해보고, 이번에는 2074년으로 가서 우리가 사는 2024년을 바라보는 생각 실험입니다. 그때를 사는 사람들이 2024년에는 편견과 차별이 없었다고 생각할까요? 절대 아니겠죠. 그렇다면 2074년 사람들이 2024년을 생각하며 ‘그때는 정말 많은 편견과 차별이 있었지’라고 생각할 것들을 지금 찾아보는 겁니다. 그게 우리가 고쳐야 할 것들이니까요.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작업에 동참하면 우리가 살고 싶은 미래는 더 빨리 올 수 있습니다. 단순히 기술 문명의 발달만으로 미래가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 정체되거나 퇴보하고 기술 문명만 발달한 세상을 우리는 디스토피아라고 부릅니다.
* 박상현
지식교양 스토리텔러. 뉴미디어 스타트업 엑설러레이터 기업 메디아티에서 널위한문화예술, 뉴닉, 어피티, 긱블 등에 투자하면서 새로운 뉴스 모델을 실험했다. 일간지와 다양한 뉴미디어에 칼럼을 연재해왔고, 2021년부터 '세상을 보는 누군가의 시선을 읽는 데 돈을 지불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구독 기반 매체 '오터레터'를 시작했다. 문화, 테크, 정치 분야의 이제 막 떠오르는 이슈들을 소개하고, 이슈들 사이를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선을 알려주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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