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007이 아닌 진짜 스파이들의 역사
『스파이 세계사 1~3』 박동철 역자 인터뷰
이 책은 학술서와 대중서의 중간에 위치합니다. 다소 어렵기는 하지만 열성 독자라면 충분히 읽을 만합니다. 먼저 스파이들의 이야기라서 재미있고요. 그리고 역사는 미래를 보는 눈으로 살아 있다는 의미에서 유익합니다.(2021.10.12)
정보활동 3000년은 정보의 성공과 실패가 이어진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보 실패의 주요인은 바로 ‘권력자에게 진실을 말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이 책에서는 강조합니다. 절대적 신임을 받더라도 목숨이나 직을 걸고 직언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지요. ‘정보의 정치화’는 진실성과 객관성이라는 정보의 기본 가치를 훼손합니다.
스파이 활동은 어떤 정보기관보다 역사가 오래되었지만 그 구체적 실체는 좀처럼 알려져 있지 않다. 스파이 활동의 특성상 과거 경험에 관한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기에 이전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는 일 또한 다른 분야보다 어렵다. 이 책은 저명한 역사가 크리스토퍼 앤드루가 지난 3000년 동안 전 세계에서 일어났던 숨은 정보활동을 발굴하고 재구성해 낸 정보 역사서다.
『정보 분석의 혁신』 등 지난 10년간 사회과학 번역서를 10여 권 내시는 등 왕성하게 번역 활동을 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학교나 직장에 다닐 때나 퇴직한 뒤에도 주경야독이 저의 라이프 스타일입니다. 시골에서 작은 밭을 일구며 살며 번역 일은 주로 밤에 하는데요. 국제관계와 국가정보가 저의 전문 분야인데, 실무 경험과 지식을 활용해 무언가 사회에 기여한다는 의미에서 보람을 느낍니다.
『스파이 세계사』를 보면 정보(intelligence)와 첩보(information)를 구별하는데, 어떻게 다릅니까?
일반 독자들은 ‘intelligence’와 ‘information’을 모두 ‘정보’로 알고 있습니다만, 학계와 실무에서는 엄격하게 구별합니다. 단편적인 여러 ‘첩보’를 종합해 정제한 것을 ‘정보’라고 할 수 있지요. 수집된 첩보가 분석을 거쳐 정보로 생산됩니다. 여기에는 상대성이 있는데요. 가령 ‘intelligence information’(‘정보기관 첩보’라는 뜻)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학자들도 왕왕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 출처에서 ‘information’을 얻는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정보기관이 올리는 보고서도 하나의 첩보에 불과하니까요. 아무튼 ‘intelligence’는 안보와 관련된 국가 수준의 활동입니다. 그래서 문맥에 따라 ‘(국가)정보활동’이나 ‘정보기관’으로 번역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007 시리즈>나 <미션 임파서블>의 스파이와 현실 세계의 스파이 간에 싱크로율은 어느 정도라고 보십니까?
한마디로 픽션과 논픽션의 차이지요. 스파이 영화의 설정이 정보기관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연결고리가 있지만, 활약상이나 역량 면에서는 제임스 본드 한 사람이 영국의 MI6나 미국의 CIA 전체를 능가합니다. 2001년 9·11 테러가 있은 뒤에 미국은 주동자 오사마 빈 라덴을 잡으려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지요. 하지만 10만 명이 넘는 미군이 20년 넘게 고전하다가 결국 탈레반에게 패퇴하고 말았습니다. 영화라면 제임스 본드 혼자 침투해 빈 라덴을 암살하든지 납치하고 깨끗이 끝냈을 겁니다. 싱크로율? 1%도 안 된다고 봅니다.
3000년의 세계 역사에서 정보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언제였으며, 반대로 가장 최악이었던 시기는 언제였습니까?
나라별로 정보활동의 흥망성쇠를 겪은 시기가 다릅니다. 영국은 16세기 엘리자베스 1세 때 프랜시스 윌싱엄 경이 스파이 수장으로 활약하며 암호해독 등 정보활동이 크게 발흥했습니다. 그 뒤에 오랜 기간 신호정보(SIGINT) 기관이 폐쇄되었다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부활했습니다. 그때까지 영국 귀족들은 스파이 활동을 아마추어 신사들이 하는 낭만적 스포츠로 생각했습니다. 미국은 건국 시기부터 스파이 활동에 진지하게 접근했는데요.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이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것도 그의 뛰어난 정보 마인드 덕분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정보 최강대국이 되면서 냉전에서도 결국 이겼고요. 물론 나쁜 의미에서 정보가 활용된 사례도 있지요. 러시아에서 정보기관은 통치의 핵심으로 지배자를 위해 악역을 담당한 역사가 깊습니다. 러시아의 국가보안활동도 영국과 비슷한 16세기에 폭군 이반 4세 때 시작되었으며 20세기 스탈린의 공포통치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습니다.
정보기관과 권력자 간의 마찰은 불가피합니다. 권력자는 원래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보를 취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지요. 현대사회에서 정보기관과 그 수장이 가져야 할 덕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정보활동 3000년은 정보의 성공과 실패(상대측에서는 그 반대)가 이어진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보 실패의 주요인은 바로 ‘권력자에게 진실을 말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이 책에서는 강조합니다. 절대적 신임을 받더라도 목숨이나 직을 걸고 직언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지요. ‘정보의 정치화’는 진실성과 객관성이라는 정보의 기본 가치를 훼손합니다. 영원한 난제인 권력-정보 관계는 시공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미국의 정보공동체는 비교적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의회의 적절한 통제를 받는 미국의 정보공동체는 대통령의 눈치를 보지 않고 편향되지 않은(unbiased) 정보를 제공합니다. 정보기관과 그 수장이 지녀야 할 최고의 덕목은 사람에게 충성하기보다 국가와 헌법에 충성하는 독립성입니다.
오늘날에는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하는 테러의 위험이 상존합니다. 또 정치적 동기의 테러보다 종교적 동기의 테러가 더 큰 위협으로 대두하는 상황에서 과거 3000년의 정보활동을 다룬 이 책은 어떤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까?
9·11 등 종교적 동기에 의한 테러는 ‘성스러운 테러’라고 불리는데, 주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입니다. 어느 정보기관도 9·11 테러를 예측하지 못했지만, 일부 학자들은 정확히 예견했습니다. 가령 렉스 허드슨은 “알 카에다 순교자 대대에 속한 자살 폭파범들이 고성능 폭약을 실은 항공기로 백악관이나 펜타곤으로 돌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9·11 발생 2년 전에 예견했지요. 이 학자들은 장기 역사적 관점에서 통찰을 이끌어냈습니다. 프랑스혁명 전까지 테러를 정당화한 유일한 논거는 종교였습니다. 따라서 최근의 종교적 테러는 단기적 일탈이라기보다 과거의 전통으로 회귀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자 크리스토퍼 앤드루 교수는 정보 역사의 연구에 “역사적 주의력 결핍 장애”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슬람 테러리즘에 대응하려면 그 뿌리부터 이해해야 한다고 저자는 역설합니다. 과거의 실수에서 배우지 못하는 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마련이지요.
끝으로 『스파이 세계사』를 읽으실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사실 이 책은 학술서와 대중서의 중간에 위치합니다. 다소 어렵기는 하지만 열성 독자라면 충분히 읽을 만합니다. 먼저 스파이들의 이야기라서 재미있고요. 그리고 역사는 미래를 보는 눈으로 살아 있다는 의미에서 유익합니다. 전 세계 3000년의 정보 역사를 아우르는 통사로서 문헌적 가치도 크다고 봅니다.
*박동철 서울대학교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어연수원을 수료했으며, 미국 오하이오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주EU대표부 일등서기관, 이스라엘 및 파키스탄 주재 참사관을 지냈으며, 현재 정보평론연구소를 운영하며 한울엠플러스(주)의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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