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정록 "청춘을 향한 진심어린 위로"
『아직 오지 않은 나에게』 이정록 저자 인터뷰
청춘은 봄이죠. 마음에 봄 햇살과 새싹과 푸른 우물이 출렁인다면 모두 청춘 시집의 주인공인 것이죠. 아직 오지 않은 ‘참된 나’를 기다리는 사람 말이에요. (2020.12.28)
김수영문학상, 윤동주 문학대상 등을 받은 이정록 시인은 30년 넘도록 시를 써온 시인이자, 30년 넘는 세월을 청소년들과 함께하고 있는 고등학교 한문 교사다. 신작 『아직 오지 않은 나에게』는 시인이 특별히 ‘청춘 시집’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잘될 거라는 막연한 믿음 하나로 불안한 하루를 보내는 청소년과 2030 청춘들에게 보내는 진심 어린 위로와 응원을 담았기 때문이다. 시인은 ‘라떼 꼰대’처럼 청춘들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청춘을 거창하게 미화하지도 않는다. 다만 젊은 세대가 현실에서 느끼는 복잡하고 고단한 감정의 파편들을 예민하게 포착해 일상의 가벼운 언어로 펼쳐 보인다. 청춘을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보낸 선배로서, 또 그런 청춘들을 세상으로 내보내는 일을 업으로 삼은 재야의 고수답게 다정하고 명랑한 시들은 짧고 명료하되, 깊이가 있다.
『아직 오지 않은 나에게』 시집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제목에 어떤 의미를 담았는지요?
출간 막바지까지 시집 제목을 정하지 못했어요. 글도 그렇지만 책은 제목 붙이기가 더 어려운 것 같아요. 문패가 되겠다고 표지 앞에서 서성거린 제목이 많았죠. 마지막까지 문을 두드리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제목은 ‘얼룩말은 얼룩이 생명이다’, ‘별명의 탄생’, ‘가시나무는 가시가 최전선이다’, ‘꽈배기의 시간’, ‘아직 오지 않은 나에게’ 등이었죠. 어떤 제목은 예스럽고, 어떤 제목은 청춘에게 짐을 지우는 것 같았어요. 또 ‘꽈배기의 시간’이란 제목은 시참(詩讖)을 불러올 것 같았어요. 제목 때문에 화를 입거나 독자에게 불행을 건네고 싶지 않았어요.
제목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고 망설이다가 아이들의 의견을 물었어요. 고등학교 2학년 제자들이 ‘아직 오지 않은 나에게’를 뽑았어요. 반마다 70퍼센트쯤이 똑같은 제목에 손을 들고 자신들의 마음을 얹어 이야기했어요. 저는 깜짝 놀랐어요. 지금의 나보다 더 똑똑하고, 건강하고, 우람하고, 밝고, 예쁜 ‘내’가 막 오고 있다고. ‘아직 오지 않은 나’를 반갑게 마중하겠다고 손을 막 들더라고요. 어른들이 이런 막말을 할 때가 있잖아요. “넌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냐?” 청년들은 모두 답을 갖고 있었던 거죠. ‘아직 오지 않은 나’가 될 거라고. 이 제목을 떡하니 올려놓자, 다른 제목들이 머리를 긁으며 시집 구석구석으로 제자리를 찾아가더군요. 좋은 이름을 선물하게 되어 기뻐요.
청춘은 봄이죠. 마음에 봄 햇살과 새싹과 푸른 우물이 출렁인다면 모두 청춘 시집의 주인공인 것이죠. 아직 오지 않은 ‘참된 나’를 기다리는 사람 말이에요. 아직 오지 않은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환락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 사람을 미워하고 깔보는 성깔도 담고 싶었어요. ‘맑은 분노’라는 게 있잖아요.
『아직 오지 않은 나에게』를 특별히 청춘 시집이라 칭한 이유가 있을지요?
그동안 어른이 읽는 시와 어린이가 읽는 동시를 많이 썼어요. 2017년에는 『까짓것』이란 청소년시집을 낸 바 있어요. 요번에는 청소년뿐만 아니라, 꿈을 꾸는 모든 이들의 절망과 희망을 얘기하고 싶었어요. 어린이가 읽는 청춘과, 청춘이 읽는 청춘과, 어른이 읽는 청춘을 그러안고 싶었지요. 어른의 과거와 어린이의 미래와 청소년의 현재를 두루 담아내고 싶었지요. 청소년이라는 독자를 핵으로 두고 과육을 넓혀보자는 마음이 생긴 거죠. 모자란 부분은 다른 작가들이 함께해주시면 좋겠어요. 저도 열심히 잇대어 쓰고요.
‘아직 오지 않은 나’란 ‘꿈’의 다른 말이지요. 아직 오지 않았다는 면에서 꿈은 곧 절망이자 희망이죠. 요즘 청소년들은 ‘절망’이란 말 대신 ‘빡치다’는 말을 쓰죠. ‘빡침’은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의 짜증을 말하죠. 파편으로 솟구치는 절망이랄까요. 날아가던 새가 유리창에 부딪혔다고나 할까요.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몸은 바닥에 떨어지겠지요. 그런데 바꿔 생각해보면, 세상을 향해 돌진하는 자만이 빡치는 거죠. 산산조각으로 다시 산을 건축할 기회가 생기는 거죠. 땅속에 묻힌 돌을 발굴해서 주춧돌을 놓는 게 아니라, 내 이마로 깬 돌을 모아서 성을 쌓고 징검돌을 놓는 거죠.
정답을 드릴 수는 없지만, 이런 말씀을 건네고 싶어요. 내 꿈의 ‘빠’가 되자. 꿈빠순이, 꿈빠돌이가 되자. ‘청춘’은 인생 전체의 ‘땜빵’ 자리도 아니고 누군가의 ‘시다바리’도 아니죠. 스스로 청춘을 낮잡지 말아요. 청춘은 인턴(intern), 실습생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인(in)이 있어야, 턴(turn)이 있죠.
『아직 오지 않은 나에게』에 실린 58편의 시가 다 좋지만, 그 가운데서 이정록 시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 한 편을 꼽아주실 수 있을까요?
「나에게 쓰는 쪽지」를 건네고 싶어요.
우물 안 개구리가 되자
우물 안 개구리처럼 이끼를 즐기자
아무 목숨이나 잡아먹지 말자
우물 안 개구리처럼 차갑게 살자
우물 안 개구리처럼 푸른 하늘만 보자
우물 안 개구리처럼 별을 노래하자
하늘에 대고 둥근 나팔을 불자
꼭 하나, 내 우물은 내가 파자
별에게서 가장 먼 깊은 우물이 되자
그리고 옆으로 곁으로 우물을 잇대자
모든 별이 다 들어올 수 있게 한 우물만 파자
우주 안 개구리가 되자
먼저 꿈의 우물을 골라요. 남을 잡아먹지 말아요. 다른 이의 피와 고기 맛에 길들지 말아요.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살아요. 겨울 하늘처럼 별을 노래해요. 내가 판 우물이 둥근 나팔이 되어서 다른 이를 이끌어요. 신도 내려와서 덩실덩실 춤을 추게 해요. 말씀〔言〕은 하늘에 대고 나팔을 부는 모습을 그려놓은 한자(漢字)예요. 노래하는 이가 리더예요. 가장 깊은 우물이 가장 먼 별을 품어요. 그런 다음 옆으로 파요. 벗들 곁으로 다가가요. 초록 별이 다 한 우물이 되겠지요. 융합 말이에요. 세계가 하나의 꽃으로 피겠지요. 우물 안 개구리들이 우주 안 개구리로 신나게 노래하겠지요.
「별명의 탄생」 「청춘 작명소」 「봉사 시간」 같은 시를 보면 학생들의 현실에 잘 맞닿아 있는데요, 학교에서는 어떤 선생님인지요?
아이들의 세계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위치라서 그런가 봐요. 「청춘 작명소」는 여러 학교, 삼천 개가 넘는 사물함을 살펴보고 쓴 시죠. 「별명의 탄생」과 「봉사 시간」도 사실을 그대로 옮긴 시고요.
저는 그림을 좋아해서 만화가나 화가가 되겠다고 꿈꾼 적이 있어요. 고등학교 진학 때 미술장학생으로 진학할 뻔도 했지요. 그리고 아이들과 학생 연극을 십여 년 했어요. 제 시 속에는 그림이 있고 등장인물이 있고 무대가 있지요. 독자를 유료 관객으로 잘 모셔야 한다고 생각해요. 등단이나 교단도 무대에 올라갔다는 뜻이지요. 유료 관객을 감동케 하려고 노력합니다만, 주연 배우가 마음에 안 드는지, 자꾸만 자거나 딴짓하는 관객들이 많네요. 저는 끝까지 칠흑도 빛이고 침묵도 언어라고 우기면서 꿋꿋하게 지키려고 해요. “아이들아. 늙은 피에로를 잘 부탁한다!”
『아직 오지 않은 나에게』를 읽다 보니 작가님의 청춘 시절이 궁금해지더라고요. 지금 청춘들과 공통점이나 다른 점이 있을까요?
어려운 질문이군요. 예나 지금이나 청춘은 매우 짧죠. 하늘로 솟구쳐 날고 싶은데 활주로가 짧죠. 그러니까 청춘 활주로의 끄트머리는 낭떠러지죠. 나는 게 아니라 떨어지는 거죠. 떨어지면서 바닥을 칠 것 같은 공포와 솟구쳐 오르는 상승기류를 학습하죠.
문명의 발달과 첨단과학의 발달은 새로운 청춘 문화를 불러오겠지요. 인간으로서의 근원적인 갈등과 고민은 같지만, 그걸 풀어나가는 방식은 매우 다를 거라고 봐요. 열심히 엿듣고 연구해야지요. 달빛이나 신작로를 지나가는 트럭 불빛으로 바람벽에 스크린을 만들어 ‘별 헤는 밤’을 읽던 세대와 사방팔방(四方八方), 시방(十方)의 스크린으로 우주를 노니는 요즘 청년들과는 그림판 자체가 다르지요. 옛것을 본받아 새것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 방탄소년단의 노랫말과 춤을 유심히 봅니다. 우리 마당문화가 어떻게 세계의 스테이지를 만드는지 탐구하고 있습니다. 요즘 청년들에게서 질문을 찾아, 다음 세대에게 파문을 건네는 새로운 문화 양식을 배우고 싶어요.
책에 ‘히리위리’라는 웹툰 캐릭터가 그대로 들어갔는데요, 시와 굉장히 잘 어울립니다. 그림은 마음에 드시는지요?
출판사에 원고를 투고한 다음 날 연락이 왔어요. 편집자가 원고를 읽으면서 떠오른 그림 작가가 있다고 웹주소를 알려왔어요. 최보윤 작가의 ‘히리위리’ 연작 웹툰을 보면서 금세 눈치를 챘죠. ‘한 식구구나!’라고요. 그림 속에 천진난만한 악동, 소심하지만 과감한 청년 정신이 있었죠. 웹툰 작가가 시를 읽고 협업을 허락하지 않으면 어쩌지? 바빠서 일정을 쪼갤 수 없다고 하면 어쩌지? 조바심이 났죠.
시에 웹툰 그림이 자리를 잡자, 밋밋하고 쓸쓸하던 호수에 원앙이 날아와 앉고 가시연꽃이 피어났죠. 페이지를 펼칠 때마다 새가 날아오르고 물보라가 일었지요. 역동성이 생겨난 거죠. 풍경과 의미가 겹겹 회오리치는 활동사진이 된 거죠.
좋은 그림 작가를 만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준 것에 감사드려요. 시와 그림이 서로를 억압하거나 밀치지 않으면서 오순도순 잘 논다는 평을 받았어요. 더구나 모자란 시를 살지게 한다는 섭섭한 이야기도. 하하!
『아직 오지 않은 나에게』를 읽으실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작가는 독자님들의 사랑을 받고 살아가죠. 잘 살아남아서 모자란 이야기를 더 쓸 수 있도록 당근을 많이 주세요. 독자님들도 ‘아직 오지 않은 나’를 반갑게 마중하는, 복된 시간을 누리시길 바랄게요. 사랑해요. 고마워요.
*이정록 196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한문교육과 문학예술학을 공부했으며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부지런히 시와 이야기를 쓰고 있다. 1989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와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로 등단했다. 2001년 김수영문학상, 2002년 김달진문학상, 2013년 윤동주문학대상을 받았다. 주요 도서로 산문집 『시가 안 써지면 나는 시내버스를 탄다』, 시집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어머니 학교』, 『정말』, 『의자』, 『제비꽃 여인숙』,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풋사과의 주름살』,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동화책 『나무 고아원』, 『황소바람』, 『달팽이 학교』, 『대단한 단추들』, 『미술왕』, 『십 원짜리 똥탑』, 청소년시집 『까짓것』, 동시집 『지구의 맛』, 『콧구멍만 바쁘다』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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