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언수 “나쁘고 싶어서 나쁜 놈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6년만에 장편 소설 『뜨거운 피』 펴내 『뜨거운 피』는 홀딩에 가까운 작품, 그러나 완벽한 화해는 없어
아버지의 세계에 들어가기 전에는 세상에 선/악, 진실/거짓, 아름다움/더러움 같은 이분법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싸워야 할 대상도 분명하고 분노해야 할 것도 분명하죠.
2002년 진주신문 가을문예공모.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2006년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부문 심사 위원 7명 만장 일치로 수상작이 된 『캐비닛』. 한 평론가는 “『캐비닛』과 더불어 한국문학은 이제 또 한 명의 괴물 같은 작가를 갖게 되었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소설가 김언수는 그렇게 화려하게 등장했다. 이후 조직적으로 벌어지는 암살을 다룬 『설계자들』과 다양한 인간상을 재치 있게 그린 소설집 『잽』을 펴낸다. 『캐비닛』으로부터 치면 10년 동안 낸 책이 3권. 3은 작가의 팬이라면 다소 아쉬울 만한 숫자다. 그래서 2016년 늦은 여름 혹은 이른 가을에 발표된 『뜨거운 피』는 반갑다. 장편소설로는 『설계자들』 이후 무려 6년 만에 나온 신작이니까.
『뜨거운 피』는 뒷골목 인생들이 부산 바다를 배경으로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등장인물의 대부분은 건달이고 조연으로 사채업자, 윤락여성, 영세 자영업자가 나온다. 주인공 희수는 구암 바다의 실질적인 리더이나, 조직 내 보스인 손영감은 구암 바다를 혈육인 도다리에게 넘기려고 구상 중이다. 구암 바다를 떠나 홀로서기를 고민하는 희수. 서슬 푸른 사시미가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오가는 주인공을 끊임없이 위협한다.
『뜨거운 피』는 거의 600쪽에 달할 만큼 장대한 이야기다. 묘사보다는 서사 위주의 작품이기에 페이지는 경쾌하게 넘어간다. 책이 독자에게 던지는 물음은 가볍지 않다. 아름답지 않은 세상을 어떻게 하면 덜 추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등장인물은 저마다 고군분투한다. 특히나 여느 정치인 못지 않게 화려한 언변을 구사하는 건달들은 적재적소에서 ‘세계의 명언’ 어디에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인생 철학을 털어 놓는데, 그들의 대화를 읽어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현실적인 작품이나 취재 없이 쓴 소설
기존에 낸 장편도 짧은 편은 아니었는데, 이번 작품은 더 길었습니다. 쓰시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지금까지 제 삶의 직접적인 경험을 녹여 소설로 쓴 적이 없었어요. 『캐비닛』은 환상 문학에 가깝고 『설계자들』은 암살자를 다룬 상상물이죠. 물론 그 소설에도 제 기억과 경험이 밑바닥에 깔려 있겠지만 날것의 질료 자체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소설은 제가 어릴 때 살던 그 바다가 소설의 공간이다 보니 할 수 없이 그 기억과 살아야 했어요. 게다가 소설은 무려 3천 매나 됩니다. 쓰는 동안 내내 제가 어릴 때 살던 그 바다와 시간을 돌아보는데, 막상 내가 그토록 멀리 떠나려 했던 이 지긋지긋한 동네가 별로 나쁘지 않은 거예요. 조금 슬프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고. 내가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건가? (웃음) 한 문장 한 문장 쓸 때마다 어릴 적 살던 그 후미진 골목들의 온도와 습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는데요. 뭐랄까, 지나간 시간과 굉장한 화해를 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이 소설은 쓰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어쩌면 영원히 쓸 수도 있겠다는 기분이 내내 들었어요.
조승식 검사 등 실제 인물도 등장하고 영도, 초장동, 아미동 같은 사실적인 공간도 많이 등장합니다. 취재의 결과물인지?
이번 소설을 내고 취재를 어떻게 했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는데, 사실 취재는 안 했어요.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 동네에 우연히 제가 살았던 거죠. 실제로 저는 소설을 쓰기 위해 취재 다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취재해서 얻은 정보가 소설적으로 크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다음에 쓸 소설의 무대가 필리핀이어서 이번 겨울은 필리핀에서 보내려고 하는데 그것 역시 정보를 얻으려고 가는 것은 아니에요. 그저 제가 쓸 소설적 공간의 공기 냄새를 맡으러 가는 거죠.
건달들 이름이 굉장히 현실적입니다.
등장인물 이름에 굉장히 예민한 편이에요. 영화나 연극처럼 배우라는 강렬한 실체가 있는 장르들과 달리 소설이 주인공에게 주는 거라고는 달랑 이름 하나랑 묘사 몇 줄 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이름에서 뭔가 풍겨 나오는 힘이 없으면 안 써요. 이름을 짓고 불러봐요. 희수, 양동, 남가주. 불러서 괜찮다 싶으면 써요. 그런 면에서 한국식 이름은 상당히 불편하죠. 구조가 일률적이잖아요. 작가 이름만 봐도 그래요. 보르헤스, 마르케스, 카프카, 바슐라르. 얼마나 근사해요. 이름만으로도 문학적 아우라가 마구 쏟아지잖아요. 그런데 김언수? 에이, 이런 이름으로 뭐가 되겠어요. (웃음)
배경이 부산인데, 작품 속 대화에서는 부산 사투리가 그리 심하진 않습니다.
저는 부산 토박이에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부산에 살았죠. 그런데 사투리를 문장으로 쓰면 읽는 저도 무슨 말인지 잘 몰라요. 부산 사투리라는 것은 성조에 영향을 많이 받는 말이어서 문장만으로는 뜻도 안 통하고 맛도 안 나는 거지요. 마치 “가가 가가?”처럼요.(그 아이가 전에 말한 그 아이냐, 혹은 그 아이가 가씨 집안 사람이더냐?) 그래서 소설에선 읽기용으로 조금 순화시켰어요. 사실 부산 사투리가 생각보다 따라 하기가 어려워요. 한국영화에 나오는 부산 사투리는 부산 사람들이 듣기엔 어딘가 조금 어색하죠. 개인적으론 <범죄와의 전쟁>에 나오는 조진웅이 가장 정확한 부산 사투리를 구사하는 것 같아요.
굳이 분류하자면 홀딩, 하지만 완전한 화해란 존재하지 않아
작품 끝에 철진이 "세상에 좋은 아버지는 없다. 아버지는 힘이 없는데 애기들은 계속 앵앵거리거든. 아버지는 좆도 힘이 하나도 없는데.(576쪽)"라고 한 말이나, 희수와 손영감, 손영감과 도다리 관계로 보아 이 소설을 '아버지'라는 단어로 읽을 수도 있을 듯합니다. 작가님은 소설집 『잽』 작가의 말에서도 아버지에 관해 쓰셨고요.
사실 아버지 상징(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은 문학에서 가장 오래되고 많이 쓰인 주제죠. 그리고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이 상징적 굴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고요. 아버지의 세계에 들어가기 전에는 세상에 선/악, 진실/거짓, 아름다움/더러움 같은 이분법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싸워야 할 대상도 분명하고 분노해야 할 것도 분명하죠. 하지만 막상 아버지의 세계에 들어가면 이 세상의 난삽함과 더러움이 얼마나 복잡하고 슬프게 얽혀 있는지를 깨닫고 당황하게 되죠. 『뜨거운 피』의 손영감이 “나쁘고 싶어서 나쁜 놈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라고 하는 말이 그런 뜻이겠죠. 미움도, 배신도, 분노도, 복수도 저마다 모두 슬프고 나름의 사연이 있어서 쉽게 단죄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그런 맥락에서라면 이 소설은 아버지의 세계로 진입하는 하나의 성장 소설로 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게 제 소설의 주제는 아닐 거예요. 저는 웬만하면 소설에 주제나 교훈 같은 것을 넣으려고 하지 않거든요.
등장 인물은 건달인데, 오가는 대화 질은 높습니다. 이렇게 건달들이 언변이 화려한가, 라고 느낄 정도로요.
그런가요? 제 주위에 건달들은 다 저렇게 말을 잘하던데요? 오히려 말만 너무 얄밉게 잘 해서 귀싸대기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때가 많아요. (웃음) 그런데 어딜 가나 웃기고 맛깔스럽게 말 잘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 건 학력, 교육, 독서 뭐 이런 거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냥 타고 나는 것 같아요.
독자 중에서 '시발 정신(305쪽)'을 인상적인 구절로 꼽는 사람이 많은데요. 혹시 이건 누가 한 말인지 밝혀주실 수 있나요?
천명관 형이 한 말이에요. 언젠가 명관이 형이 무언가에 화가 나서 “그 새낀 시발 정신이 없어! 이 거친 세상을 이겨내려면 상대방한테 배 까고 매달리고 똥꼬 핥아주는 시발 정신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는 거야.” 하면서 저에게 퍼붓고 있었는데 그때 번득 하고 뭔가가 떠올랐죠. 그래서 제가 명관 형의 말을 끊고 “형 그거 내 소설에 써도 돼?” 하고 물어요. 명관 형이 어이없어 하면서 “너는 형이 인생에 대한 진지한 분노를 토로하고 있구만 뚱딴지같이 소설 이야기냐. 뭐 쓰든가 말든가.” 뭐 그렇게 나온 구절이랍니다.
링이건 세상이건 안전한 공간은 단 한 군데도 없지. 그래서 잽이 중요한 거야. 툭툭, 잽을 날려 네가 밀어낸 공간만큼만 안전해지는 거지. 거기가 싸움의 시작이야. (중략) “홀딩이라는 좋은 기술도 있지. 좋든 싫든 무작정 상대를 끌어안는 거야. 끌어안으면 아무리 미워도 못 때리니까. 너도 못 때리고 그놈도 못 때리고 아무도 못 때리지.” (25~26쪽, 소설집 『잽』)
주제 의식을 안 넣는다곤 하셨지만, 소설집 『잽』이랑 연관 지어 질문드리겠습니다. 이 작품은 잽을 날리는 작품인가요, 홀딩하는 작품인가요.
굳이 나눠야 한다면 홀딩에 가깝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런 종류의 완전한 화해라는 것은 우리 삶에 존재하지 않는 거죠. 인간은 또 금세 불만이 생기고 삐뚤어지고 그래서 다시 잽을 날리고, 내가 날리니까 상대방도 날리고 이리저리 얻어터지다 아프니까 할 수 없이 또 홀딩하고 뭐 그런 바보 같은 짓거리를 계속 하다가 늙어가는 거죠. 그리고 그런 바보 같은 삶이 소설이고요.
인간은 외로운 존재, 규정하면 새로운 면 볼 수 없어
두꺼운 분량에 걸맞게 다양한 인물이 나옵니다. 특히 애착 가는 인물이 있다면.
저는 제 소설의 모든 인물들에게 저마다 독특한 애정이 있어요. 소설 속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미우나 고우나 모두 작가의 분신들이죠. 예를 들어 우리가 누군가를 이유 없이 미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과 몹시 닮아서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누군가를 이유 없이 좋아하고 있다면 그것도 자신과 닮아서죠. 자기가 사랑하는 자아, 미워하는 자아, 부끄러워하는 자아, 경멸하는 자아, 오만한 자아, 염치없는 자아 등등의 자아가 서로 뒤엉켜서 소설 속의 수많은 인물들이 나오는 거지요. 그러니까 작가와 닮지 않은 캐릭터는 소설 속에 없는 셈이죠. 『카발라』라는 책에는 이런 말이 있어요. ‘세상에 완전한 선인이 있다면 그는 타인으로부터 어떠한 악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내 눈에 보인 타인의 결점은 사실상 나의 결점이에요. 다른 사람의 욕망이 불편하고 짜증이 나는 건 내 안 어딘가에 동일한 욕망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 제가 소설 속 인물에서 발견한 모든 결점과 악은 사실상 저의 내면에 있는 결점과 악인 셈이에요. 그럼에도, 이 질문의 취지에 걸맞게 특히 애착이 가는 인물을 하나만 꼽으라면 만리장 호텔의 웨이터 ‘하나마나’ 같아요. 뭐랄까. 저랑 쏙 닮은 캐릭터거든요. “제발 그놈에 하나마나한 소리 좀 하지 마요.” 제가 아내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이에요. (웃음)
희수는 멋진 인물입니다. 침착하면서 다른 사람을 챙기고, 업무적으로도 유능하고요.
저랑 전혀 안 닮았어요. (웃음) 희수는 아마 제가 되고 싶은 사람이겠죠. 저희 어머니는 차분한 사람을 좋아했어요. 아들이 진중하고 과묵한 사람이 되길 바랐어요. 하지만 저는 성격이 원체 나대고 촐랑거려서 그런 묵직한 인물과는 애당초 거리가 멀었죠. 그런데 소설을 쓰다 보면 나한테는 전혀 없었다고 생각했던 희수 같은 자아를 만나기도 해요. 소설은 골방에 들어가서 혼자 쓰는 작업이고 장편은 몇 년씩 시간이 걸리기도 하니까요. 만날 사람이 없어서 할 수 없이 과묵하고 진중한 시절을 보내기도 하는 거죠. 그래서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 속에서 뜻밖에 자아를 만나고, 놀라고 당황하고 악수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자기도 몰랐던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는 것은 모든 예술의 공통적인 특징이죠. 독서라는 행위도 마찬가지고요.
『캐비닛』은 다양한 인간을 묘사하면서 인간에 관해 질문을 던진 작품이었고, 소설집 『잽』에도 개성 있는 인물이 많이 나옵니다. 작가님 주변에 특별한 사람이 많은 편인가요.
전혀요. 다들 평범하고 착한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저는 그 평범한 사람들을 보면서 캐릭터를 만들어요. 동네 슈퍼 아저씨를 보면서 새끼손가락에 은행나무가 자라는 문방구 사내를 만들고, 또 제 아내는 잠이 엄청 많은데 잠든 아내를 보며 ‘대체 인간이 어떻게 열 시간씩 잠을 잘까?“ 의아해 하다가 6개월씩 동면에 빠지는 토포러를 만드는 뭐 그런 식이죠. 그런데 곰곰이 살펴보면 세상에 평범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요. 자세히 살펴보면 사람들은 저마다 모두 신비로울 정도로 다양하고 특별해요. 대부분 자세히 안 보죠. 우리는 너무나 쉽게 사람들을 범주화해서 어떤 틀 속에 집어넣어버려요. “응 걔? 강남에 살고, 아버지는 회계사야, 얼마 전까진 BMW 탔는데 요즘은 아우디 타고 다닌다나 봐.” 뭐 이런 식이죠.
우리가 그 사람을 간단하게 규정해버리면 그때부터 그 사람으로부터 어떤 새로움도 찾아낼 수 없어요. 끝없는 오해와 편견뿐이죠. 저희 집에 11살 된 늙은 고양이가 있어요. 11년이나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데도 보고 있는 나는 늘 그 고양이가 새롭고 신비로워요. 매일 이 늙은 고양이로부터 엄청난 발견을 하는 느낌이이에요. 사람도 그렇죠. 우리가 오만, 편견, 기대 같은 것을 접고 멍 때리듯 사람을 바라보면 30년 된 친구와 만날 똑같은 술집에 앉아서 술을 마셔도 우리 집 고양이처럼 늘 새롭고 신비로운 거죠.
외로움이라는 단어는 김언수 문학에서 핵심어 같습니다. 『뜨거운 피』의 주인공 희수나 『설계자들』의 주인공 래생도 고독한 존재잖아요.
제 소설 속의 주인공만 외로운 게 아니고, 제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 처절하게 외로워요. 나이가 들수록 더 외로워지고, 더더욱 외로워지죠. 저는 외로움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해요. 외로움은 이 우주에 나 혼자 떨어져 있고 나 혼자 상처받고 있다는 오해, 아무도 자기를 이해할 수 없다는 고립감과 절망감에서 시작되죠. 그래서 예술은 소통하고 악수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믿음. 당신과 나는 이 우주의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별의 성분으로 만들어져 있고, 서로 엉켜서 같이 살고 있다는 생각의 공유죠. 그런 맥락에서 저는 트위터나, 페이스북이 가짜 소통이라고 생각해요. 마음의 문은 꽉 닫아둔 채 표피만 떠들어대는 가짜 소통이죠. 어느 조사를 보니까 SNS에 집착할수록 더 외로움을 느낀다고 나와 있더라고요.
『뜨거운 피』의 배경인 영도는 실재합니다. 구암은 가상의 공간이고요. 영도는 작가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내신 곳이기도 한데요.
네, 영도에서도 살았고 그 건너편 송도, 감천, 남부민, 아미동 이런 곳에서도 살았죠.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까지 다 거기서 다녔고. 지금처럼 아이들이 학원을 다니던 때가 아니어서 친구들이랑 하루 종일 그 많은 골목들을 정신 없이 돌아다니며 놀았어요. 열입곱 살 때 첫사랑을 만났는데 그때 돈도 없고 마땅히 갈 곳이 없어서 계속 그 거리를 돌아다녔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전문대도 못 들어가서 빈둥거릴 때, 하도 할 일이 없어서 또 그 한심한 거리를 돌아다녔죠. 생각해보니 아주 지긋지긋한 곳이군요. (웃음)
고등학교 때는 시를 쓰려고 하다가 포기하고 소설을 쓰셨다는데, 아직 시를 향한 동경이 남아 있나요?
네, 남아 있죠. 열읿곱 살부터 스물입곱 살까지 시를 썼어요. 그 시절처럼 뭘 열심히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이런 젠장, 저는 시에 재능이 없는 거예요. 죽었다 깨어나도 소월, 서정주, 이성복 같은 시인이 될 수 없는 거죠. 스물일곱 살 때 5월인가?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다가 문득 그 사실을 명징하게 알게 됐어요. 나는 시의 정점에 다다를 수 없는 인간이라는 걸. 그런데 그 사실이 생각보다 슬프진 않았어요. 멍하니 있다가 책을 내려놓고 도서관에서 나왔어요. 그 후론 시를 쓰지 않았어요.
소설은 어땠나요?
소설은 장난처럼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 장난질이 무척 재미 있었어요. 뭔가 저한테 잘 맞는 옷을 뒤늦게 찾아 입은 느낌이랄까. 시는 고작 낱말 몇 개 혹은 문장 몇 줄을 놓고 몇 달이나 끙끙대는데 소설은 하룻밤에 원고지 수십 장씩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무척 신나고 즐거웠어요. 그래서 그 시절의 글쓰기는 소설을 쓴다기보다 뭔가 미친 듯이 키보드를 두드리기 위한 작업 같았어요. 시야 뭘 미친 듯이 두드리고 싶어도 글자가 몇 자 없다 보니.(웃음)
『뜨거운 피』에서 마지막에 수록된 작가의 글이 인상적이었다는 평이 많습니다. 이 작품 외에도 김언수 작품에서는 '작가의 말'에 독자를 울릴 뭔가가 항상 있었습니다. '작가의 말'을 쓸 때 염두에 두는 원칙, 요령이 있다면.
이번 책부터는 작가의 말을 안 쓰려고 했어요. 작가의 말이란 게 별로 필요 없는 군더더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편집장이 “뭔 소리에요, 김언수는 소설보다 작가의 말이 낫다는 독자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하더라고요. 소설보다 작가의 말이 낫다는 게, 이게 칭찬인지 욕인지. (웃음) 어쨌든 작가의 말을 쓸 때 요령이나 원칙 같은 것은 없어요. 그런데 작가의 말을 쓸 때는 이상하게 시 쓰던 시절로 돌아간 느낌을 받긴 해요. 시인이 못 되고 소설가가 된 시인 지망생의 슬픈 발악?
김언수에게 소설가란, 그리고 문학이란
『캐비닛』 작가의 말에서 “소설가란 농부, 어부, 막노동꾼처럼 자신의 가족을 위해 신성한 밥벌이를 하는 성실한 사람들에 비해 세 수 아래”라고 이야기하셨는데요.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생각해보면 작가라는 건 아주 웃긴 직업이에요. 짬뽕을 못 만들면서 짬뽕에 관한 글을 쓰고, 못 하나 제대로 못 박으면서 목수의 삶에 대해 떠들어대야 하는 직업이죠. 냉정하게 말해 작가는 그저 구경꾼에 불과합니다. 르클레지오도 노벨상 수상소감문에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즉 작가는 오로지 배고픈 자들을 위해 글을 쓰고자 하는데, 정작 먹을 것이 충분한 자들만 그 책을 읽고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깨달을 여유가 있다는 패러독스, 그리고 문학이란 지배계급의 사치이며, 문학이 대다수 사람과는 무관한 사고와 이미지로 살찌고 있다는 것, 그것이 작가가 겪는 불편함의 기원이라고 말했지요. 르클레지오는 작가가 이 불편한 진실로부터 결코 도망가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거기가 바로 글쓰기의 시작이라고.
그러니까 작가가 농부, 어부, 막노동꾼들보다 세 수쯤 아래에 있다는 건 작가라는 직업이 가져야 할 도덕성과 포지션에 대한 이야기에요. 작가는 글쓰기의 본질이 부끄러움이고 또한 사치라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동시에 자신의 글쓰기를 진실로 욕망해야 하고, 그 욕망 속에서 어떤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믿음을 혼자서 지켜내야 하죠. 그러니 작가는 이 둘 사이에서 위태롭게 갈등하는 존재입니다. 바로 이 지점을 무시하고 작가가 오만과 건방을 떨어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글쓰기라는 것은 정말이지 무가치의 나락으로 하염없이 추락하는 거죠.
독자와 만나는 자리라든가 산문을 쓰는 활동은 거의 안 하고 소설 집필에만 전념하십니다.
집필 활동에만 전념이라고 하시니까, 갑자기 제가 엄청 치열하게 살고 있는 착각이 드는데요? (웃음) 서른여섯 살부터 전업 작가 길을 걷기 시작했어요. 그 전에는 이것저것 잡일을 했고요. 그때는 직장에서 휴가를 받으면 신나서 집으로 뛰어갔어요. 사람들은 어디 좋은 데 놀러 가는 줄 알았겠지만 사실 골방에 처박혀 소설을 썼어요. 휴가 때 제일 설레는 일이 아무에게도 간섭 받지 않고 소설을 쓰는 일이었던 거죠. 막상 전업 작가가 되니까 웃기게도 소설이 재미가 없는 거예요. 한 4~5년 정도는 재미없는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고통스러웠어요. 마감이 밀려오는데 미친 듯이 컴퓨터 카드게임이나 밤새도록 하고, 글 좀 쓰다가 소주 마시고. 자신을 격렬히 미워하면서, 내가 왜 그토록 즐거워했던 소설 쓰기를 이런 지옥으로 만들었을까? 갸우뚱거리면서 또 술 마시고. 대체로 오전 10시쯤에 부스스한 머리로 동네 슈퍼에 소주를 사러 갔는데 슈퍼 아줌마가 제 모습이 어찌나 한심하고 답답했는지 저한테 화를 막 내더라고요. “당신 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 직장도 안 나가고 만날 술이나 퍼 마시고. 다들 열심히 사는데 남자가 왜 그래요?” 제가 사는 동네에는 조선소 단지여서 대낮에 저처럼 빈둥거리거나 술 처마시는 남자가 거의 없거든요.
그래서 그 슈퍼 아줌마에게 뭐라고 하셨나요?
죄송합니다. 뭐 그랬죠. (웃음) 그때쯤에 왜 나의 소설 쓰기가 왜 지옥으로 변했는지 알게 됐어요. 어릴 때는 소설에 바라는 것 없이 그냥 썼는데 전업 작가가 되고 나니까 소설을 써서 생활비도 벌어야 하고, 책도 많이 팔아서 빚도 갚아야 하고, 기왕이면 이름도 날리면 좋고 뭐 기타 등등 바라는 게 많아진 거죠. 뭐랄까 곁가지들에 홀려서 중심을 놓쳤다고나 할까. 퇴계 이황 선생이 경(敬)에 설명하면서 이런 말을 했어요. ‘밥을 먹을 땐 밥만 먹어라. 그리고 옷을 입을 땐 옷만 입어라.’ 그 일을 가장 즐겁게 최선을 다해 잘 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그 자체에 공경을 다해야 해요. 거기에 다른 목적이나 대가를 끼워 넣으면 갑자기 모든 것이 하찮아지고 지겨워지고 노동이 되고 결국 지옥이 되는 거죠. 그게 사실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無爲)의 개념이죠. 사람들은 무위가 무슨 정신적이고 신선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무위는 매우 생산적이고 실용적인 개념 같아요. 그래서 저는 삶을 좀 단순하게 만들려고 노력 중이에요. 밥 먹을 때 밥에 집중하고 소설 쓸 때는 소설에 집중할 수 있도록요.
『설계자들』이 프랑스추리문학대상 후보에 올랐잖아요.
네, 후보에는 올랐는데 떨어졌죠. (웃음) 아직 제 소설 공부는 세계적인 작가들과 어깨를 겨룰 만한 수준이 아니에요. 올해에는 칠레 작가가 받았는데 다들 자기 나라에서는 엄청 유명한 작가들이에요. 저야 뭐 우리나라에서도 별로 안 유명하잖아요. 안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괜히 출판사에서 광고지에 문구를 넣어서, 잠시 기대했네요. 저랑 친한 형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어요. “그럴 리가 없잖아.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것을.” (웃음)
안 유명하다고 하셨지만, 독자 후기를 보면 김언수 작가의 작품을 읽은 독자는 다른 작품을 계속 찾게 하는 매력이 있는 듯합니다. 김언수의 작품을 하나도 읽지 않은 독자는 있지만, 김언수의 작품을 단 하나만 읽은 독자는 없잖아요.
제가 그렇게 인기 있는 작가면 저 남해바다 시골에서 그것도 임대 아파트에 살고 있겠어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것을. ‘그럴 리가 없잖아.’ 이거 은근히 입에 착착 붙는데요. 이걸로 단편 소설을 하나 써야겠어요. (웃음) 하지만 제 소설의 독자들이 오래도록 단골로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어요. 그러려면 저에게 굉장한 항심이 있어야 되겠죠. 50년 된 떡볶이집도 고추장 바꾸면 금세 단골 떨어져나가니까요.
『설계자들』과 『뜨거운 피』까지 하드보일드한 작품을 발표하셨습니다. 다음 작품도 하드보일드한 작품일까요.
다음 소설은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라는 소설이에요. 『설계자들』이나 『뜨거운 피』 같은 하드보일드 계열은 아니고요. 굳이 분류하자면 로맨틱 코미디? (웃음)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는 지금까지 세 번이나 썼는데 다 실패했어요. 보통 장편을 쓰고 실패하면 혼자 침통해하다가 결국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른 걸 쓰는데 이상하게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는 꼭 끝장을 보고 싶다는 오기를 불러일으키네요. 그리고 다음 소설은 필리핀과 한국의 납치회사를 다룬 『바디BODY』라는 소설이고 그 다음 소설은 헤밍웨이와 한국전쟁을 다룬 소설이에요. 지금까지는 소설을 띄엄띄엄 냈는데 앞으로는 1년에 한 권 정도로 좀 촘촘하게 낼 수 있지 않을까, 일단 결심은 하고 있습니다.
연극, 영화, 드라마 등등 이야기에는 여러 형식이 있는데 그 중에서 소설이 가장 좋습니까?
네, 소설이 가장 좋아요. 소설은 영화처럼 엄청난 자본과 인력과 장비를 필요로 하지 않아요. 수없이 많은 이해관계들 때문에 간섭 받지도 제약 받지도 않죠. 소설은 최소한의 노동력(작가)으로 무한하고도 값싼 언어라는 질료를 사용하여 이야기의 완전체에 도달할 수 있는 완벽한 장르죠. 그리고 그 완전체는 독자가 독서라는 고통스럽고 숭고한 행위를 해줄 때에만 가능합니다. 소설의 언어는 영화처럼 편안하게 이미지와 사운드를 주지 않습니다. 독서는 독자가 한 문장 한 문장 읽어가며 스스로 이미지를 창조하고 언어에 영혼을 불러 넣어야 즐길 수 있는 고통스러운 행위죠. 그래서 작가, 언어, 독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긴밀한 소통과 이야기 메커니즘은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자유롭고 무한하고 싸고 심지어 시공간을 초월하기도 하죠.
그리고 독자는 작가의 언어를 읽고 상상하다가 다시 작가가 됩니다. 독서가 상상력의 근육을 키워낸다는 것! 이것이 소설의 소비자는 소설의 생산자로 선순환 되는데 영화의 소비자가 영화의 생산자가 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영화는 상상할 필요도 없이 이미지가 너무 편안하게 흡수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소설을 이야기의 코어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인류의 문화가 만들어낸 이야기 체계의 결정체죠. 단지 우리 문단이 혹은 우리 문화가 주류니 비주류니 순수니 장르니 정통이니 이단이니 이런 소모적이고 쓸데없는 힘싸움이나 하면서 이토록 우아하고 자유롭고 풍성한 소설이라는 장르를 위축시키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뜨거운 피김언수 저 | 문학동네
마흔 살 건달의 짠내 나는 인생 이야기. 인생에도 사계가 있다면 마흔 살은 여름에 해당될 터, 그 뜨겁고 강렬한 날들의 기록이 부산 앞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한국형 누아르의 쌉싸름하면서도 찐득한 맛이 살아 있으며, 두려울 것 없던 건달이 겪게 되는 정서적 절망감이 사실적이면서도 흡인력 있게 담긴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