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종옥 “배우라고 배우, 그러니까 배우”
<월간 채널예스> 11월호 커버 스토리
책을 쓰면서 내가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닐까, 고민되더라고요.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상황도 있고 또 현실도 있으니까요. 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걱정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년 전 니체의 말이 생각나요. “누가 나한테 해주길 바라지 말아라. 네 삶은 네 삶이고 네가 개척하는 일이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말. 배우의 삶을 이야기할 때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이제야 책을 썼어요?”라고 물을 만큼, 배종옥은 책과 친한 배우다. 오래전부터 책을 쓰자는 제안을 받았지만 그는 귓등으로 흘렸다. 잘못하면 자랑과 변명이 될까 봐, 책 무더기 속 먼지가 될까봐 머뭇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권을 보탠 건, 고민에서 배움으로 이어진 삶을 기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내 일기를 엿보기로 예정됐다면 솔직함이 덜할 수 있다. 붙이고 싶은 수식어가 많아지고 덜어내고 싶은 실수가 생각난다. 그럴 때마다 배종옥은 ‘진짜 쿨한 것’을 생각했다. 결론은 “나 자신을 제대로 알자, 표현하자”였다.
배종옥은 이상주의자도 현실주의자도 아닌 듯했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어쩌면 지혜로운 협상가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에서 복잡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고, 주어진 시간을 알뜰하게 잘 쓰고 싶다”고 말하는 배종옥. 『배우는 삶 배우의 삶』은 그에게 꼭 어울리는 첫 책이다. 고민해서, 공부해서, 행복하다는 그와 무척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눴다.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말속에 작은 밑줄을 그었다.
보여줘야 알아요
제목을 보고 딱 어울린다 생각했어요.
후배들과 밥 먹는 자리에서 책 이야기가 나왔는데, 연극계에서 자주 하는 말이라고 하더라고요. “배우가 배우라고 배우야.”(웃음). 책에도 계속 배운다는 내용이 이어지니까요.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배우가 자신의 삶을 직접 쓴 에세이는 흔치 않아요. 더욱이 근래에는 거의 없었고요.
수필은 많이 못 본 것 같아요. 리빙과 관련된 책은 많이 쓰는 것 같은데 배우 이야기는 잘 못 봤어요.
집필하느라 무척 고생하셨다고요.
책이 못 나오는 줄 알았어요. 제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내 생각을 글로 표현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봄부터 시작했는데 굉장히 힘들었어요. 사실 글쓰기도 배우는 거잖아요. 너무 버거웠지만 그래도 써놓았던 원고가 좀 있었어요. 인터뷰를 구술식으로 좀 풀고 그간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단락을 만들어갔어요. 마지막 교정을 볼 때는 정말 멀미가 나더라고요. 영화제 때문에 지방에 가 있는데 최종본을 넘겨야 한다고 해서, 휴대폰으로 교정을 봤어요. 작은 화면으로 글자를 보려니 머리에 쥐가 나더라고요. 편집자가 많이 고생했어요.
책에 대한 첫인상이 참 단정하고 소박하다는 느낌이었어요. 배우 배종옥 하면 과감하고 솔직한 느낌이 드는데 말이에요.
사실 전 내성적이에요. 어릴 때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조용한 성격인데 배우를 했으니 얼마나 많이 부딪혔겠어요. 배우라는 세계가 너무 어색했죠. 지금도 완벽히 자유롭진 못해요. 시상식 같은 행사에 가면 피하고 싶은 순간도 많고요. 즐기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저 같은 배우도 많아요. 작품을 통해 대중에게 어필한 면과 실제 성격이 다른 거죠. 물론 작품을 통해 전하는 이미지도 제 한 부분일 테고요.
사진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대부분 글로 채우셨어요.
사진은 보려고만 하면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잖아요. 그것보다 제가 살아온 길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그런데 대장간에 칼이 없다고, 배우인데 갖고 있는 사진이 별로 없어요. 이것도 찾느라 정말 고생했어요. 이제 곧 겨울인데 그래도 책 덕분에 계절을 잘 보냈다 싶어요. 결과물을 보니까 그런 느낌이 들어요. 제가 얼마 전에 <복면가왕>에 출연했잖아요. 긴장돼서 밤에 잠도 못 자고 정말 고통스러웠는데 그 단계를 넘으니 좋더라고요. 도전할 때는 정말 피하고 싶고, 이 어려운 삶을 왜 선택해야 할까 끊임없이 반문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하는 삶은 멋있는 것 같아요. 그래야 변화도 있는 거니까요. 노력하지 않으면 맨날 그 삶이 그 삶이니까요.
<복면가왕> 출연은 정말 의외였어요.
출연을 생각한 건 배우로서 제 이미지를 좀 바꾸고 싶었어요. 드라마나 영화에서 너무 강렬하고 진지한 역할만 하다 보니까 밝고 경쾌한 캐릭터는 제안이 안 오는 거예요. 인터뷰할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했지만, 다들 몰라요. 보여줘야 하는구나, 말로 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죠.
프롤로그가 인상적이었어요. ‘쿨하다’는 말을 정의하셨는데 흥미롭더라고요. 평소 ‘쿨하다’는 말을 자주 들으시죠?
종종 들어요. 스태프들한테 많이 듣는데 좀 궁금해요. 저에겐 당연한 행동인데 사람들이 쿨하다고 하니까요. 그럴 때마다 “그럼 너희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라고 물어요. 예를 들어 사람에겐 누구나 한계가 있잖아요. “왜 너는 내 기대치 만큼 못해?”라고 말할 수 없어요. 스스로 어떤 선을 정해서 상대에게 굳이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발전하기를 원할 때는 조언을 해줄 수 있어요. 하지만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냥 그대로 존중해야 해요.
뒤끝이 없는 편인가요?
어떤 부분에서는 있을 거예요. 다만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서는 말해요. 말하면 뒤끝이 좀 없어지니까요.(웃음) 사람이 어떻게 뒤끝이 없을 수 있겠어요. <굿바이 솔로> ‘영숙’의 말도 있잖아요. “진짜 쿨할 수 없다는 걸 아는 게 진짜 쿨한 거야”라고요.
말해놓고 후회하는 경우도 많지 않으세요?
물론이에요. 하지만 금세 잊는 편이에요.
공부는 일상이지 특이한 삶이 아니에요.
1985년에 방송 활동을 시작하셨으니 벌써 30여 년이 지났어요. 작품을 선택할 때는 ‘작품 속 질문’이 분명한지를 살피신다고요. 이렇게 말하는 배우가 흔치 않아요.
생각이 달라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느낀다 한들 말해본 적이 없어서가 아닐까요. 어떻게 표현할지는 모르는 거죠. 배우들끼리 있을 때 작품 이야기를 참 많이 해요. 좀 변했으면 좋겠다, 좀 다른 시나리오가 왔으면 좋겠다고 다들 말하죠. 그런데 배우는 짜인 각본대로 말하는 사람이잖아요. 제작발표회나 대중과 대면할 때, 해야 할 말은 있어도 표현하는 걸 어려워해요. 어떤 식이라도 생각을 말로 정확히 표현하는 방법을 좀 배워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인간에 대한, 사랑에 대한, 가족에 대한 치열한 질문과 대답 같은 것? 저는 처절하게 부딪치면서 아프면서 찾게 되는 것들을 표현하고 싶어요.
오랫동안 대학에서 연기를 가르치셨잖아요. 제자들에게도 많이 이야기하셨겠어요.
휴식기에 작품을 공부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배우는 공백기를 갖는 일을 너무 힘들어해요. 자신이 잊힐 거라는 불안감이 너무 큰 거에요. 쉬는 시간을 잘 활용하는 일이 배우로 잘 성장하는 길인 걸 잘 몰라요. 진짜 배우를 꿈꾼다면 배우에게 필요한 공부를 하라고 말해요.
잠깐 공부하는 사람은 많아요. 공부의 의미는 다양할 수 있고요. 중요한 건 꾸준하냐인데, 책을 보니 하루도 공부를 안 하는 날이 없으신 것 같아요.
사람들이 간혹 물어요. 당신은 타고난 배우가 아니냐. 전혀요. 그렇지 않아요. 심지어 매니저까지도 “선배, 왜 힘들어해? 그냥 하면 되지” 하고 말하는데, 그렇게 쉽지 않아요. 저도 항상 준비하고 고민해서 하는 연기예요. 공부를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제가 배우를 하고 있을까요? 쉽게 장담할 수 없어요. 종종 본성으로 연기를 훌륭하게 하는 친구들을 봐요. 연습할 때는 작품을 영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데 카메라에 불이 들어오면 너무 잘해요. 그럴 때마다 묻죠. “너 정말 이해했어?” 대답은 그냥 하는 거래요.(웃음) 배우마다 이렇게 달라요. 본성이 발달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끊임없이 노력해야 이뤄내는 사람이 있잖아요.
성향의 문제도 있지 않을까요? 내 것으로 완전히 소화해야 행동이 가능한 사람도 있잖아요.
맞아요. 저는 이해하지 못하면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아요. 성격적인 것도 있을 거예요. 자꾸 제가 공부하는 이유죠. 배종옥이 연기하는 방식이기도 하고요. 저에게 공부는 일상이지 특이한 삶이 아니에요.
한 작가가 이런 말을 했어요. “내 안의 성장을 느끼면 나이 드는 일이 두렵지 않다.”
맞아요. 그래요. 정체된다면 불안할 것 같아요.
배우라면 인정욕구가 강할 수밖에 없어요. 늘 평가받아야 하는 입장이잖아요. 그것도 너무 많은 사람에게요. 배우 생활 30년 정도가 되면 어느 정도 초월하게 되는지 궁금해요.
초월은 불가능하지만, 어느 정도 수용하고 거절하고 선택하게 되는 것 같아요. 스스로 계속 물어봐요. 너 이 길 갈 거냐고요. 현실적인 태도도 분명 필요하지만 너무 타협하는 건 싫어요. 그렇다고 무조건 타협하지 않겠다는 입장도 좋지 않아요. 적당한 타협이 필요한데, 그것도 고민하면서 답을 찾을 수밖에 없어요.
지나치게 타협하는 동료나 후배를 볼 땐 어떠신가요?
그것도 그 배우의 색깔이니까, 제가 함부로 말할 순 없어요.
발문을 노희경 작가가 썼어요. “우리는 멋지고 통쾌한 관계다.” 책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절친이자 동료시잖아요. 단정한 배우의 글을읽다가 후루룩 단숨에 쓴 듯한 작가의 글을 읽으니, 느낌이 달라 재밌더라고요.
고맙더라고요. 참 바쁜 친구인데 저를 위해 글을 써주니 고마웠어요. 노희경 씨는 제 연기 인생을 거의 같이 한 느낌이에요. 운명이지 않을까 싶어요. 마음공부도 봉사도 같이 했으니까요. 작품을 넘어 친구로서 많은 시간을 함께했어요.
드라마 <거짓말>, <바보 같은 사랑>에서 함께 작업하신 후, ‘노희경의 페르소나’라는 이름을 갖게 되셨어요.
날 믿어주는 작가가 있다는 건 큰 힘이 되니까 고마운 일이에요. 하지만 때론 부담이 되기도 해요. 사람들은 노희경 작가가 새 작품에 들어가면 “이번에도 같이 하냐?”고 물으니까요.
내가 생각하는 만큼 ‘난 멋진 사람이 아니야’
책이 네 개 장으로 구성됐는데, 3장에서는 ‘배우의 배우 이야기’를 다뤘어요. 좋아하는 배우 메릴 스트립, 제프리 러시부터 연기 선배 이순재, 나문희, 윤여정까지. 흥미롭게 읽었어요.
제가 아이디어를 냈어요. 연기 이야기를 해야겠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풀까, 고민하다가 내가 좋아하는 배우 이야기를 하면 좋을 것 같았어요. 그 속에서 내가 생각하는 연기, 지향점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었죠. 책으로 엮이고 보니 잘한 것 같아요.
선배 배우를 딱 세 명만 꼽으셨어요. 고민은 없으셨나요?
없었어요. 이순재 선생님은 독보적이고 나문희 선생님과는 작품을 정말 많이 했어요. 윤여정 선생님과는 작품을 많이 하진 않았지만, 제게 노희경 작가를 소개해줬어요. 선생님께 연기 교육도 많이 받았고요. 쓰면서 정말 좋았어요. 내게 이런 기억이 있었구나 싶은, 새삼스러운 이야기도 생각났고요. 나문희 선생님은 그렇게 연기를 잘하시는데, <내가 사는 이유>에서 바보 역할을 맡았을 때 연기가 잘 안 된다고 울먹이시며 연습실을 뛰쳐나가기도 했어요. 평소엔 말씀이 없는 편이지만 작품 얘기를 할 때면 이것저것 속을 풀어내세요. 일상과 일을 나누지 않는 분이시죠. 평상시에 하는 행동이며 생각이 그대로 연기에 나온다고 말씀하세요. 윤여정 선생님은 좋고 싫은 게 분명하시고 “혼으로 하는 연기가 싫다”고 하시죠. 흐트러지지 않는 분이에요.
나문희, 윤여정 선생님은 얼마 전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 함께 출연하셨어요. 노년을 그렸다는 것만으로도 특별하게 다가온 작품이었는데요.
드라마가 방송하는 날이면 그 시간만을 기다릴 정도였어요.(웃음) 내 미래의 삶도 생각했고요. 최근에 윤여정 선생님이 출연한 영화 <죽여주는 여자>도 봤는데 노년이 참 슬프더라고요. 이제는 나도 노년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후회하지 않고 외롭지 않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구체적인 계획도 필요할 것 같고요.
노년엔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많이들 말씀하시더라고요.
전 책 읽어주는 할머니가 되고 싶었어요. 장자끄 상뻬의 작품이었나요? 잼 만들어주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나요. 나는 배우였으니까, 동화책을 읽어주는 할머니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뉴스를 보니 이미 직업이 되었더라고요. 약간의 교육을 받으면 유아원에서 책을 읽어줄 수 있다고요. 어머, 내가 나중에 하고 싶은일이었는데 벌써 생겼구나 했어요. 요즘 할머니들은 정말 짱짱하시잖아요. 나이가 들면 아이들을 더 예뻐하고요. 70세쯤 지날 때, 책 읽어주는 할머니가 되면 어떨까 싶어요.
오랫동안 마음 수행의 일환으로 108배를 하셨잖아요. 지금도 매일 108배를 하고 계시나요?
매일 해요. 안 하면 불안해요. 아침에 그거라도 해야지 워낙 정신없는 세상이잖아요. 내 마음을 추스르지 않으면 작은 일에도 마음이 흔들리니까요. 법륜 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매일 세수하는 것처럼, 마음도 닦아야 한다, 기도의 목적은 복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 상황을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라고요. 마음 닦기, 기도하기는 내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에요.
마음공부를 하신 지도 벌써 10년이나 되셨어요.
그렇게 됐네요. 방송 계통에서 일하는 사람 여섯 명이 모여 ‘길벗’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100일 만 하자고 시작한 게 지금까지 왔어요. 마음공부를 하면서 많이 울었어요. “내가 옳다는 착각을 내려놓겠습니다”를 되뇌면서 매일 절하는 시간이 고통스러웠죠. 너무 여려서 닿기만 해도 벗겨질 것 같던 속살이 마음공부를 하면서 단단해졌어요. 내가 생각하는 만큼 ‘난 멋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후, 오히려 편해졌어요. 누구나 자신과 화해해야 해요. 그래야 평화가 찾아와요.
교수 생활은 왜 접으셨어요?
더 늦기 전에 작품을 더 해야겠다고 생각해서요. 덜 쭈글쭈글한 얼굴로 연기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요.
제자들에게는 무척 엄격한 교수였다고 들었습니다.
‘1분이라도 늦으면 지각, 결석 불가, 과제는 필수’가 제 원칙이었어요. 엄격함을 가르치고 싶었어요. 배우가 자유로운 사고를 가져야 하는 건 분명하지만, 자유로움만 갖고 있으면 배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학교에선 학교에서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 있어요. 기성 배우들이 하지 못하는 부분이죠. 학생들이 그때를 온전히 즐겼으면 좋겠어요.
작업 현장을 좋아하게 되면 제대로 된 배우라고 하셨어요. 지금 현장에는 많은 후배들이 있잖아요. 선배로서 어떠세요?
40대 때까진 좀 힘들었어요. 왜 이렇게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후배들이 있었죠. 그런데 나이가 드니까 그로부터 자유로워졌어요. 후배들이 먼저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요. 종종 이낙훈 선생님이 생각나는데요. 대본 연습을 할 때 배우들이 연출, 작가 선생님한테 막 혼나잖아요. “너 그게 아니야”라는 말도 자주 오가는데 이낙훈 선생님은 항상 다 끝나고 난 뒤, 아무도 듣지 않게 “종옥아, 이 대목에선 이렇게 하는 게 좋지”라고 살짝 말씀해주고 가셨어요. 너무 감사했죠. 저도 후배들한테 이야기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대놓고 하지 않아요. 둘이 있을 때, 걔가 들을 마음이 있을 때, 배우고 싶다고 물어올 때만 말해요.
딸에게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으세요?
네가 하고 싶은 거 해, 선택해도 후회하지 않는 일을 하라고 해요.
자율성을 주는 것도 좋지만 어느 정도 인생 선배로서, 부모로서 제안도 해야 할 텐데요.
하죠, 물론. 누구보다 그 아이를 오래 지켜본 사람이 저잖아요. “내가 볼 때, 네 성향은 이런데 네가 만족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라”고 하면, 알아서 잘 결정하더라고요.
20대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은 없으세요?
저도 부족했고 참 어려운 일인데요. 책 읽는 습관을 길렀으면 좋겠어요. 사실 저도 어릴 때, 책 읽으라는 말을 무척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또 행동으로 옮겨지냐, 그렇지 않더라고요. 자기가 좋아서 읽는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건 도움이 많이 돼요. 어떤 직업을 갖더라도요. 하지만 지적인 잘난 척을 하기 위해 책을 읽는 건, 소용이 없어요. 저는 책을 꺼내면 금세 푹 빠져 읽어요. 하지만 덮으면 잊어요. 눈에 바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이 과정에서 분명 책을 통해 느끼는 바가 있어요.
심지어 다음에 태어나도 배우를 하고 싶어요
나를 바꾼 책이 있나요?
30대 중반이었을 거예요. 인생의 경계에 서있는 때 랄프 왈도 에머슨의 『자연』을 읽었어요. 그때 제게 참 위안이 됐던 글귀가 있어요. 우리가 어떤 진리를 추구할 때, 계속 책을 읽거나 사색을 하다 보면 심오한 아름다움을 보게 된다는 것, 그 심오한 아름다움은 내가 만든 게 아니라 이미 거기에 있었다는 것, 하지만 우리는 거기 원래 있었던 걸 모르고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글이었어요. 배우로서의 내 위치를 고민하던 때였는데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뭔지가 어렴풋하게 보였어요. 제게는 고민에 대한 연대기 같은 작품이에요.
요즘 읽고 계시는 책도 궁금해요.
얼마 전 『먼 나라 이웃나라』 프랑스 편을 봤는데 재밌었어요. 이어서 중국 편을 읽을까 생각해요. 얼마 전까지 중국어를 공부했거든요. 중국어를 공부하니 중국이라는 나라가 또 궁금해져요. 60세까지 영어와 중국어를 떼는 게 목표예요. 나이가 드니까 뭔가 외워야 하더라고요. 외우는 공부에는 외국어가 최고잖아요. 함께 중국어를 공부하던 친구들이 좀 아파서 잠시 멈췄는데 다시 해야죠.
근래 보신 영화 중에 배우로서 욕심 나는 작품이 있었나요?
책을 쓰면서 나는 일반적이지 않다는 걸 더 느꼈어요. 배우로서 빠져드는 작품을 보면 크게 대중성이 있지 않아요. 이번에 우연히 소개받아서 본 영화가 있어요. <버드맨>인데 우리나라에선 아마 작년에 개봉했던 것 같아요. 톱스타였다가 잊힌 배우가 주인공인데, 우리 배우의 삶이 느껴지더라고요. 비평가에게 술 먹고 대드는 모습부터, 참 치열하게 본 작품이에요. 전 이런 작품에 심취하는 편이에요.
“끝까지 배우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만약 모든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요. 그래도 배우를 선택하실까요?
네, 배우를 하고 싶어요. 심지어 다음에 태어나도 배우를 하고 싶어요. 다만 지금 알고 있는 걸 다 안 상태로 배우 생활을 시작하고 싶어요.(웃음)
타고나지 않아서, 그래서 더 노력해서 얻는 것들이 있어 행복하신가요?
행복해요. 예전에는 타고난 배우들이 그렇게 부러웠지만 지금은 나일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이 좋아요. 저는 스스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개척했으니까요. 하나님이 사람에게 모든 걸 주지 않는다고 하잖아요. 예전의 저는 작품 섭외가 오면 몰입해야 한다는 생각이 무척 강했어요. 작품을 하고 있으면 지인들도 안 만날 정도였으니까요. 지금은 그때처럼 저를 몰아붙이진 않지만, 작품에 집중하는 시간 만큼은 확보하려고 해요. 올해로 제 연기 생활이 32년이래요. 그런데 불과 1, 2년 전에 ‘이제야 연기를 좀 알겠다’ 싶었어요. 이제 좀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있으시다면요?
엄마가 된 일이요. 딸이 친구 같아요. 딸이 제 옆에 있다는 게 너무 소중하고 감사해요. 만약 딸이 없었다면 내 삶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싶어요. 잘 자라줘서 고맙고요. 젊은 부모들이 자식을 친구처럼 키웠으면 좋겠어요. 딸이 어릴 때부터 제 일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해줬어요. 내 감정이나 하는 작품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지금도 말이 잘 통해요.
아마도 배우의 삶이 궁금한 독자들이 이 책을 보겠죠? 어떤 생각을 하면서 읽으면 좋을까요?
글쎄요. 책을 쓰면서 내가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닐까, 고민되더라고요.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상황도 있고 또 현실도 있으니까요. 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걱정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년전 니체의 말이 생각나요. “누가 나한테 해주길 바라지 말아라. 네 삶은 네 삶이고 네가 개척하는 일이다.”
배우는 삶 배우의 삶배종옥 저 | 마음산책
『배우는 삶 배우의 삶』은 배종옥의 인생 분투기이자 배우 고민기라고 할 수 있다. 신인 시절 연기를 못해 항의 편지를 받고, 연기를 그만두고 무엇을 할까 궁리하던 그녀가 자신만의 길을 찾고 주변에 휘둘리지 않으며 하나의 세계를 갖게 되기까지의 여정이자, 끝까지 ‘배우는 배우이기를’ 원하는 한 배우의 진솔한 고백이다.
관련태그: 배종옥, 월간 채널예스, 배우는 삶 배우의 삶, 배우
eumji01@naver.com
<배종옥> 저11,700원(10% + 5%)
“배우라고 배우인 걸까” 배우 배종옥이 전작으로 써내려간 인생 분투기 우리가 아는 그 배종옥. 「도시인」「여자의 방」을 통해 도도한 도시 여성 캐릭터를 만들었고 ‘노희경의 페르소나’라는 이름의 시작을 알렸던 드라마 「거짓말」을 통해 마니아 드라마의 출현을 예고했으며 이후 노희경 작가의 「바보 같은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