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편리’는 타인의 노동을 통해서 제공된다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저자 국제노동기구(ILO) 이상헌 박사 인터뷰 약자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약자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는 제목은 “그냥 불편해지자”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편리’는 타인의 노동을 통해서 제공된다는 점을 기업도 소비자도 기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노동기구(ILO)의 한국인 중 최고위직인 사무차장 정책특보로 일하는 이상헌 박사를 만났다. 이상헌 박사는 노동계의 오랜 숙원이었고 마침내 2011년 공식 채택된 “ILO 가사노동협약”의 초안을 작성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가 이번에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를 펴냈다. 그는 경제학자이지만, 문학적이고 인문학적 글쓰기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명쾌하고도 명징한 통찰들이 청명하고도 처연한 가슴의 언어로 빚어질 때, 우린 ‘지금 이곳’의 슬픔과 희망을 동시에 아우르게 된다. 제네바에서 세계 경제위기의 파고에 맞서 여러 연구를 수행하고 정책을 도출해 내면서도, 그의 시선은 언제나 고국을 향하여 있다.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ILO는 어떤 곳이며, 선생님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요?
ILO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베르사유조약을 통해 만들어진 노사정기구입니다. 1919년에 설립된 이후, 노사정 합의를 통해 200여 개에 달하는 국제노동기준을 만들어 왔습니다. 노동시간, 임금, 결사의 자유 등과 같은 가장 근본적인 노동자 권익에 대한 국제기준을 마련해서 각국이 이러한 국제기준에 맞춰 국내법이나 정책을 만들도록 하고 있습니다. ILO는 노동자의 기본권리가 보장되지 않고 관련 보호장치가 결여되어 있을 경우 사회적 경제적 불안정이 초래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국제경쟁력을 확보하려 하면 (가령 노동비용 삭감을 통한 경쟁력 확보) 세계 평화의 지속적 유지는 힘들다고 봅니다. 이는 20세기 초중반의 역사적 격동기를 겪으면서 얻은 교훈이며,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처음에는 노동시간과 임금 등에 관한 정책연구를 했고, 이를 기반으로 해서 개발도상국에 대한 정책 자문을 해왔습니다만, 최근에서는 ILO 사무차장의 정책특보로 일하고 있습니다. 여러 정책부서들의 정책견해를 조율해서 ILO의 공식 입장을 도출하여 이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것이 주요 업무이지요.
선생님의 글이 페이스북에서 인기가 상당히 많습니다. 경제학자의 글이면서도 인문학도, 또는 문학도의 글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원래 국문학을 전공하려고 했는데 경제학과를 선택한 사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찌 보면 누구나 겪게 되는 어이없는 사연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문학에 대해 관심을 키워오다가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좀 더 구체적인 진로로 생각하였어요. 조심스레 제 의사를 부모님과 선생님께 알려드렸더니 다들 흔쾌히 이해해 주셨지요. 그런데 막상 당시 수능에 해당하는 학력고사 결과가 나오고 입시원서를 쓰려고 하니 다들 돌변 하셨어요. 고시를 볼 수 있는 학과를 원하셨습니다. 딴에는 실망이 컸던 탓에 가출을 했는데, 달리 갈 때가 없어서 외가집으로 피신했어요. 물론 며칠 후 집으로 ‘끌려왔고’ 지루한 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돌파구는 없었지요. 당시 주위에 있던 대학생 한 분이 와서 “양쪽 견해를 동시에 충족할 수는 있는 학과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경제학”이라고 했어요. 그 얘기에 혹해서 경제학과에 왔는데, 막상 대학에 들어 와서 경제학 교과서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수학책 같던 교과서, 경제학은 문학에서 가장 멀리 있는 사회과학이더군요.(웃음)
영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 것도 사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짝꿍과 만나 결혼하는 바람에 결혼도 빨랐고 첫 아이도 빨리 보았습니다. 박사과정이었을 때입니다. 첫 아이에 대한 설렘도 아주 잠깐이었지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많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이런저런 곡절 끝에 태어나긴 했지만, 의사들의 전망은 비관적이었습니다. 괴로워하던 터에 당시 지도교수님께서 유학을 권하셨습니다. 번갯불에 콩 볶듯이 영국으로 유학을 갔는데, 가서 의사들에게 의견을 물으니 걱정 말라고 하더군요. 한국 의사들을 많이 나무랐습니다. 물론 영국의사들은 한 가지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시를 읽으면 다른 애들보다 감동이 떨어진다. 미안하다”고 그러더군요. 저는 “전혀 미안해할 필요 없다. 한때 문학 하려고 애써 본 나도 문학을 못했다. 시적 감동이 덜한 것인 대수냐”고 답했습니다. 딸애는 착하게 자랐습니다. 이번 책에 실린 제 프로필 그림은 제 딸이 그렸습니다. 딸의 그림을 보면서 삶이 한 바퀴 돌아서 온 느낌이었습니다. 제 책에서 가장 따뜻한 부분입니다.
2011년 6월 국제노동기구 100차 총회에서 노동계의 숙원이었던 ILO 가사노동협약(Domestic work convention)이 채택되었고, 이 협약의 초안을 이상헌 박사님이 작성하셨습니다. 이 협약의 성과와 의의는 무엇인지요?
100여 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ILO는 각종 국제노동기준을 만들어 왔지만, 가사노동 보호 문제는 큰 관심을 얻지 못했고 가사노동자는 기존의 노동기준에서 제외되어 왔습니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예상이 일반적이었지만, 5년 이상의 준비과정을 통해 마침내 협약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로써 국제노동기준의 가장 심각한 빈틈이 메워지고, 국제노동기준을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하게 된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이번에 출간하신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는 어떤 책인지요?
떠돌이 생활이 길어지면서 한글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습니다. 최근 2년 동안 떠오르는 생각이나 느낀 바를 기록하고, 더러 SNS에도 적고 주간지에도 발표했습니다. 그런 글들을 모았습니다. 한국에서 한발 떨어져 있으면서 한국을 관찰한 것들이고, 또 그러면서 내 마음에서 생겨난 생각들입니다. 일터에서 생기는 일들에 관한 감성적, 분석적, 때로는 이론적인 고찰을 담았습니다. 한국을 직접 다룬 글들도 있고 외국의 사례도 많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도 한국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는 제목은 “그냥 불편해지자”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편리’는 타인의 노동을 통해서 제공된다는 점을 기업도 소비자도 기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좀 더 거시적으로는 일시적인 경제적 불편 때문에, 또는 경제적 이익 때문에 시민의 기본적 권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땅콩 회황’부터 ‘세월호’까지 관통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유명인들의 삶의 ‘불편한 진실’도 다루어 보았습니다.
현재 한국사회, 혹은 한국경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바깥에서 바로 본다는 것은 어찌 보면 객관적이고 포괄적일 수 있겠지만 치열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장 큰 문제점”에 대해서는 답하기 힘듭니다. “가장 큰” 것을 알려면 치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국외자 입장에서 보자면 한국에서는 인간, 특히 주류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혹하고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다는 점이 아쉽고 화가 납니다. 노동하는 일상의 삶이 가혹해지는 것도 상당 부분 거기서 출발한다는 생각입니다. 흔히 약자에 대한 ‘배려’라고 하는 데, 그건 틀렸습니다. ‘배려’라는 말은 은밀한 권력관계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약자의 ‘권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유사한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경제적 불평등은 앞으로 한국경제의 족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지요.
저의 책은 국외자인 제가 ‘한국에 계속 있었으면 그랬을 법한 나’에게 하는 얘기입니다. 이런 얘기에 공감해 주신다면 ‘그랬을 법한 나’에게는 큰 위로가 될 것이고, 이 말을 털어낸 저에게는 따뜻한 아픔이 될 것입니다. 책은 썼는데 독자에게 드릴 말이 이리 궁색하니 그저 민망합니다.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 이상헌 저 | 생각의힘
일터에서 생기는 일들에 관한 감성적, 분석적, 때로는 이론적인 고찰을 담았습니다. 한국을 직접 다룬 글들도 있고 외국의 사례도 많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도 한국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는 제목은 “그냥 불편해지자”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편리’는 타인의 노동을 통해서 제공된다는 점을 기업도 소비자도 기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땅콩 회황’부터 ‘세월호’까지 관통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유명인들의 삶의 ‘불편한 진실’도 다루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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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제네바에서 세계 경제위기의 파고에 맞서 여러 연구를 수행하고 정책을 도출해 내면서도, 그의 시선은 언제나 고국을 향하여 있다. 낯선 언어들 속에서 모국어의 어감과 음률을 그리워한다. 그는 먼 이국의 땅에서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이코노미스트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은 고국을 향한 하나의 연서로 읽어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