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복 “나에게 서재란, 사회인간학 연구실”
“진정한 독서는 대학에 들어가서 시작”
정수복이 쓰는 모든 책과 모든 글의 바탕에는 저자의 체험에서 비롯된 사유와 감성, 그리고 독서를 하며 얻은 생각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어떤 책을 써야겠다는 애초의 생각은 한 순간의 영감에서 오기보다는 저자의 오랜 삶의 체험에서 온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지금 쓰고 있는 책이나 앞으로 쓸 책들에 질서와 방향을 제시하는 구절을 만나기도 하고 책의 기본 색깔과 향기를 선택하는데 도움이 되는 문장을 만나기도 한다고.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자신의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가 어떤 시간이었는지는 몇 마디로 정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날을 뒤돌아보면 나에게 유년기는 경이와 불안, 청년기는 방황과 모색, 장년기는 참여와 탐구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독서가들이 어린 시절부터 책을 많이 읽었다고 말들 하지만, 저는 초등학교 시절 교과서 이외에는 읽은 책이 거의 없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계몽사에서 나온 소년소녀 전기전집을 읽었고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백수사에서 나온 한국단편문학전집을 읽었습니다. 진정한 독서는 대학에 들어가서 시작됐습니다.”
“장년기는 사회학자이자 지식인으로 모색과 참여의 시기였는데, 연구와 집필을 위해 전공 서적을 많이 읽었습니다. 맑스의 『공산당 선언』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뒤르케임의 『자살론』 을 비롯해 지도교수였던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박영신 교수의 저서와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알랭 투렌 교수의 저서는 모두 다 읽었죠. 박사 학위를 마친 후에는 전공 분야를 넘어서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에는 새로운 생각을 담고 있거나 새로운 방식으로 쓴 독창적인 책들을 즐겨 골랐지만, 요즈음은 한 번 이상 읽을 만한 책과 오래 참고할 수 있는 책을 고릅니다. 하지만 연구과 저작을 위해서 내가 쓰고 있는 책의 주제와 관련된 책이면 무조건 사기도 합니다.”
정수복이 쓰는 모든 책과 모든 글의 바탕에는 저자의 체험에서 비롯된 사유와 감성, 그리고 독서를 하며 얻은 생각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어떤 책을 써야겠다는 애초의 생각은 한 순간의 영감에서 오기보다는 저자의 오랜 삶의 체험에서 온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지금 쓰고 있는 책이나 앞으로 쓸 책들에 질서와 방향을 제시하는 구절을 만나기도 하고 책의 기본 색깔과 향기를 선택하는데 도움이 되는 문장을 만나기도 한다고.
2009년 무렵, 파리에서 생활하며 ‘사회인간학’에 관심을 갖게 된 정수복은 자신의 서재에 이름을 붙인다면 ‘사회인간학 연구실’이 될 것이라고 했다. 사회인간학이란, 한 개인의 삶의 행로 특히 삶의 고통의 문제를 그 사람 개인-부모-조부모라는 3세대와 개인사-가족사-사회사라는 3차원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정수복은 ‘사회인간학’이라고 이름붙인 이 연구의 이론과 사례연구를 위해, 파리에서 읽었던 뱅상 드 골작(Vincent de Gauljac)의 여러 책들을 다시 읽으면서 3세대 3차원의 이야기가 나오는 소설과 전기, 자서전 등을 읽을 계획이다.
최근 『책인시공』 을 펴낸 정수복은 독자들에게 『파리의 장소들-기억과 풍경의 도시미학』 을 추천한다. 『파리를 생각한다-도시걷기의 인문학』 을 읽은 독자라면 그에 이어서 『파리의 장소들』 을 꼭 읽어볼 것을 권한다. 누군가 그에게 “그 두 권 중에 한 권만 읽어야한다면 어느 것을 읽을까요?”라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파리의 장소들』 을 추천한다고. 정수복에게 강의를 들었던 제자들에게는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당연의 세계 낯설게 보기』 를 추천한다. 정수복은 “그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따르고 있는 삶의 문법들을 다시 한 번 뒤돌아보고 지금보다 더 나은 새로운 삶의 방향을 모색하길 바란다. 『책인시공』 을 읽으면서는 각자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무엇으로 채우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그리고 모두 책 읽는 사람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피어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명사의 추천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저/이재황 역 | 문학과지성사
카프카 문학의 원점은 아버지와의 갈등관계에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이 편지를 쓰게된 시점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전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카프카의 이 보내지 못한 편지는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열쇠를 제공합니다. 이 긴 편지는 문학을 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진정한 삶을 살려는 아들과 오로지 아들의 세속적 성공만을 바라는 자수성가한 아버지 사이의 특수한 갈등을 표현하지만 그와 동시에 세상의 모든 부자관계의 보편적 차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천 도덕으로서의 정치
박영신 저 | 연세대학교출판부
체코의 반체제 극작가로서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다가 동유럽 사회주의체제 붕괴 이후 급기야 대통령으로 선출된 양심적 지식인 바츨라브 하벨의 삶과 사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진리 안에서의 삶’을 추구하는 ‘힘없는 자의 힘’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이 책은 대다수의 사람들의 눈에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원칙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특정 상황에서 역사를 바꾸는 동력이 되는가를 명료하게 보여줍니다. 눈앞의 현실을 넘어서는 초월의 의미세계와 이어져 있는 사람만이 문제가 많은 현실을 돌파할 수 있음을 알게 합니다.
지도와 영토
미셸 우엘벡 저/장소미 역 | 문학동네
저자는 자기와 같은 이름을 가진 한 예술가를 등장시켜 오늘날 프랑스 사회의 적나라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극단적인 개인주의자로서 타자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삶의 방식을 실행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한 때 영광스러웠던 프랑스 사회의 어두운 미래를 내다보게 합니다. “부는 유복함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 어린 시절부터 유복함에 단련되어 있는 사람들만을 행복하게 한다. 어려웠던 인생 초창기를 겪은 사람이 갑자기 부를 손에 쥐면, 그를 엄습하는 첫 번째 감정은 바로 공포다. 때로 잘 대처하는가 싶기도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일 뿐, 결국은 부에 완전히 잠식당하기에 이른다”와 같은 사회학적 통찰이 담긴 문장들이 군데군데 박혀있습니다.
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저/임호경 역 | 열린책들
대학에서 프랑스 현대문학을 전공하고 부르주아 사회로 편입한 딸이 노동자 출신으로 지방에서 작은 식료품상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를 읽으면서 문화적 불평등이 낳는 ‘상징적 폭력’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저자는 ‘문화자본’과 ‘아비튀스’라는 사회학적 개념을 밑에 깔고 어린 시절 그렇게 친밀한 관계를 가졌던 아버지와 더 이상 가깝게 지낼 수 없게 되는 과정을 거리를 두고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그건 아버지와 딸 사이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문화적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많은 경우 좋은 소설은 사회학 논문보다 힘이 셉니다.
둥지의 철학
박이문 저 | 소나무
팔순이 넘은 원로 철학자 박이문이 자신의 50년 철학 인생을 정리하고 종합한 노작입니다. 저자는 종교, 철학, 과학, 예술의 영역을 오가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세계관을 시적 철학이자 철학적 서사시라고 할 수 있는 ‘둥지의 철학’으로 종합했습니다. 지적으로 투명하고 정서적으로 만족스럽고 도덕적으로 선한 삶을 추구한 철학자 박이문의 무르익은 세계관과 인생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우리가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감성적으로나 지적으로 자신에게 편안한 철학적 둥지를 짓고 그것을 끊임없이 리모델링하며 사는 삶입니다. 『하나만의 선택, 풍요로운 창조』 라는 박이문 평전을 쓰기 위해 이 책을 꼼꼼히 다시 읽었습니다.
사당동 더하기 25
조은 저 | 또하나의문화
2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한 가난한 가족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책과 함께 같은 기간 동안 촬영한 영상 기록이 DVD로 첨부되어 있습니다. 4세대에 걸쳐 전개되는 가족 이야기를 추적하는 이 책은 가난이 어떻게 대물림되는가를 구체적인 현장 사례를 통해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높은 하늘 위를 날면서 내려다보는 메마른 설문조사가 아니라 발로 뛰며 땀 흘리는 밑으로부터 하는 현장연구의 전범을 제시합니다.
광장
최인훈 저 | 문학과지성사
대학교 1학년 때 이 책을 민음사 판(1973)으로 처음 읽었습니다. 이명준이라는 진지한 젊은이의 사생활과 분단 상황이 얽혀 전개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저는 제 삶을 사회 속에 넣어 생각하는 법을 배웠어요. 책을 읽은 지 얼마 후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밀스(C. W. Mills)라는 사회학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법을 ‘사회학적 상상력’이라고 부른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 후 이 책을 약 10년에 한 번 정도 다시 읽곤 합니다.
해석학
이규호 저 | 연세대학교출판부
인문학과 사회학에서 앎의 원천은 삶입니다. 저의 개인적 삶은 내가 하는 학문에 어떤 식으로든지 영향을 미칩니다. 이 책은 앎과 삶이 어떻게 이어져 있는가를 나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내가 삶이 쏘옥 빠져버린 메마른 과학적 사회학이 아니라 머리를 맑게 하면서도 마음에 감동을 주는 ‘예술로서의 사회학’을 하게 된 시발점에 이 책이 있습니다. 푸른 청춘의 시절에 읽었던 그 책은 지금은 누렇게 빛이 바랜 채 아직도 내 서가에 한 끝에 꽂혀있습니다.
꽃들에게 희망을
트리나 폴러스 저/김석희 역 | 시공사
그림이 곁들여진 짧은 이야기입니다. 책에 담겨 있는 이야기는 우리들이 사는 모습을 일순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어떤 삶이 의미 있는 삶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저는 삶의 의미가 흐려질 때 마다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습니다. 이 책을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 법정의 『영혼의 모음』 등과 함께 읽으면서 걸어야 할 삶의 방향이 분명해졌습니다.
지식인의 표상
에드워드 W. 사이드 저/최유준 역 | 마티
1994년 여름, 미국 하버드 대학 앞 서점에서 이 책을 사서 영어 원서로 읽었습니다. 1996년에 나온 이 책의 첫 한국어 번역판에 오역이 많았는데 2012년 다시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저는 이 책에서 사이드가 제시하는 것처럼 전문가가 아니라 아마추어로, 권력 추구가 아니라 권력 비판으로, 안락한 정주자가 아니라 자발적 유배자로 살아가는 참된 지식인의 삶을 살려고 애씁니다. 얼마 전 목민재단 초청으로 지식인에 대한 강연을 하기 위해 다시 읽었습니다.
아무르
미카엘 하네케 감독/장-루이 트랭티냥, 엠마누엘 리바 | 아트서비스
영화보다는 책을 더 좋아하는 편입니다. 최근 본 영화로는 프랑스 영화 <아무르>가 기억에 납니다. 서울에서 지내다보면 가끔씩 프랑스어가 듣고 싶어지고 프랑스 풍경이 그리워질 때가 있는데, 이 영화에는 파리의 오스만식 아파트 내부 풍경이 나오고 파리의 거리 풍경이 나옵니다. 그리고 쇼팽과 슈만을 비롯한 피아노곡들이 배경음악으로 잔잔하게 흐릅니다. 젊은 시절 프랑스를 동경하게 만든 <남과 여>라는 영화에 나왔던 장-루이 트랭티냥과 내가 파리에서 보고 난 뒤 일본문화에 관심을 갖게 해준 마르그리트 뒤라스 원작의 <히로시마, 내 사랑>에 여주인공으로 나왔던 엠마뉘엘 리바가 각각 남녀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나이가 들만큼 들어서 원숙해진 연기를 보인 두 배우의 삶과 그들이 연기한 노인 부부의 삶이 삶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홍상수 감독/이선균, 정은채, 김의성 | 디에스미디어
홍상수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의 영화감독입니다. 그의 영화가 나오면 빼놓지 않고 봅니다. 그의 영화가 다 비슷비슷하고 지루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제게 홍상수의 영화는 모두 다르고 하나같이 재밌습니다. 그의 영화에는 우리가 사는 일상의 삶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가 쓴 대사는 짧지만 파고드는 힘이 있고 익숙한 장소들도 그가 찍으면 낯선 장소로 변합니다. 남한산성에서 바람이 불고 깃발이 흔들리는 장면이 여러 번 반복되는데 그 때 나오는 음악이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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