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종 작가 “책을 고르는 기준, 친구를 고르는 것과 같다”
낯선 이야기를 따라가 보고 싶고, 스스로 이야기의 길을 내고 싶다
서재에 이름을 붙인다면, ‘박제의 방’. 어릴 적 오현종 작가가 살던 한옥에는 아버지의 서가로 벽면을 가득 채운 골방이 있었다. 역사책, 헤르만 헤세 전집, 한국단편소설전집, 단테의 『신곡』 등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서가 위에는 박제한 매와 독수리 등이 6-7마리 올려 있었다. 박제한 새들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것들이었다고 전해 들었다고 한다. 작가에게 이미 죽은 새들의 눈과 발톱, 그 강렬한 이미지는 어른이 된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어린 시절의 책들은 언제나 누런 서류 봉투와 함께 추억됩니다. 제가 한글을 읽기 시작했던 때부터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버지는 퇴근길에 서류 봉투를 들고 대문 안으로 들어서곤 하셨어요. 아버지의 직장이 혜화동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혜화동 로터리에 있는 ‘동양서림’에서 책을 사가지고 오셨지요. 샘터사의 《엄마랑 아기랑》같은 어린이 잡지부터 《소년중앙》 《보물섬》 같은 월간 잡지들까지. 그래서 매달 20일 즈음이면 마루에서 아버지의 퇴근을 기다리다가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아버지의 손부터 확인했어요. 떠올려 보면, 아버지에게서 책 말고 다른 물건을 선물로 받아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생일 날도 어린이날도 책뿐이었지요. 아버지의 손을 잡아본 기억도 없고요. 아버지의 손과 제 손 사이에는 늘 봉투 안에 든 책이 있었습니다. 오가는 대화도 없이 오로지 차갑고 딱딱한 책이요.”
“소설가가 되고 나서는 그런 상상을 해보기도 했어요. 만약에 서류 봉투 안에 들어 있었던 게 책이 아니었다면. 프라모빌이나 스케치북이었다면. 그랬더라도 나는 소설가가 되었을까, 라는 상상 말이죠. 유년기의 책은 장난감이자 친구이자 또 다른 무엇이었지만, 저는 글을 특별히 잘 쓰는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작가가 되고 나서 다른 이들에게서 학창시절 학교 대표로 백일장에 자주 나갔다던가 고등학교 때부터 소설을 썼다던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었지요. 우리나라에 고교생을 대상으로 하는 백일장 같은 게 있는 줄도 몰랐거든요. 글을 써서 받은 상은 등단할 때의 신인상이 처음이었어요. 제가 학교 대표로 나가 본 건 백일장이 아니라 미술대회, 수학경시대회 그런 것들이었었죠. 초등학교 때는 과학어린이로 상을 받기도 했으니 그 상이 제대로 주어진 거라면 저는 컴퓨터전문가나 물리학자가 되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스무 살 무렵의 저는 누구보다 책을 좋아하면서도 책에 대한 지나친 경외감 탓에 책을 쓰는 인생을 꿈꾸지 못했어요. 대학도 문학과 무관한 사회복지학과로 진학했고, 처음 단편소설을 완성한 건 26살 때였지요. 어릴 적부터 난 작가가 아니면 안 되겠어, 라는 자기확신을 가지고 달려온 사람이 아니라 그런지 인생에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는 사람들, 매사에 늦된 사람들에게 애정이 있어요. 소설도 다음 페이지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작품이 더 매력적이지 않나요? 저는 낯선 이야기를 따라가 보고 싶고, 저 스스로 이야기의 길을 내고 싶습니다.”
좋은 책이라면, 모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작가에게 영감을 준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한 권의 책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까닭 중 하나이다. 오현종 작가는 기존의 책, 혹은 영화를 ‘다시 쓰기’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져왔고, 관심의 연장에 있는 작품들을 여럿 발표했다.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은 영화 007시리즈를 패러디한 소설이었고, 『사과의 맛』 에 수록된 단편 「상추, 라푼젤」 「헨젤과 그레텔의 집」, 그리고 인어 연작2편은 동화를 다시 쓰기 한 소설이었다. 그밖에 직접적인 영감을 준 책으로는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 을 들 수 있다. 같은 제목의 단편 「창백한 푸른 점」의 출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현종 작가가 최근 출간한 『달고 차가운』 이 범죄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소설이라면, 다음으로 준비하고 있는 작품은 무협장르를 차용한 소설이다. 『옛날옛적에 자객의 칼날은』 이란 경장편을 수정하고 있는 작가는 요즘, 피터 루이스의 『닌자 이야기』, 전형준 선생님의 『무협소설의 문화적 의미』 등을 다시 한번 훑어보고 있다. “책 안에 적혀 있는 글자 외에는 모두가 필요치 않은 주석이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더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 이해 받고 싶은 욕망과 싸우곤 합니다. 오늘 그 욕망에 져서 내일 지우게 될 주석을 덧붙인다면, 이런 말을 하게 될 것 같아요. 이런 방식으로만 이해하고 이해 받을 수 있는 사랑도 있다는 걸 이야기해보고 싶었노라고. 당신들은 그것이 결코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겠지만요.”
책을 고르는 기준은 친구를 고르는 기준과 비슷하다. “다른 사람들이 다들 입을 모아 좋은 사람이다, 사귈 만한 인간이다, 라고 하는 말은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오현종 작가. 직관, 첫인상 같은 것들이 관계의 시작을 좌우하듯이, 익숙한 사람보다 낯선 사람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처럼 책도 내가 잘 모르는 소재, 스타일에 끌린다.
서재에 이름을 붙인다면, ‘박제의 방’. 어릴 적 오현종 작가가 살던 한옥에는 아버지의 서가로 벽면을 가득 채운 골방이 있었다. 역사책, 헤르만 헤세 전집, 한국단편소설전집, 단테의 『신곡』 등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서가 위에는 박제한 매와 독수리 등이 6-7마리 올려 있었다. 박제한 새들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것들이었다고 전해 들었다고 한다. 작가에게 이미 죽은 새들의 눈과 발톱, 그 강렬한 이미지는 어른이 된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집을 헐고 같은 공간에 새 집을 지은 뒤로는 아버지의 골방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어요. 이제는 제가 작업을 하는 방만이 존재하지요. 제 서재에는 세로쓰기로 인쇄된 낡은 책들도 꽂혀 있지 않고, 서가 위에서 소녀를 내려다보는 박제들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제 서재는 여전히 박제들의 방인지 몰라요. 새가 아닌 다른 것들을 박제하고 있는 방이요. 오가와 요코의 소설 『약지의 표본』 을 읽은 독자에겐 이 얘기가 조금 더 선명하게 다가갈 듯 한데요, 요코의 소설 속에는 ‘새의 뼈’라든가 ‘악보’ 라든가 하는 것들을 표본으로 만드는 남자가 등장하거든요. 보이는 것, 혹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 전부 표본으로 만드는 그의 작업을 저는 소설 쓰기에 대한 일종의 은유로 보았어요. 저도 제 서재에 틀어박혀 역시 표본, 박제를 만드는 작업을 행하고 있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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