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와 인터뷰를 하면서 연기, 작품 활동 외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는 건, 실례일 법도 하다. 인터뷰 대상자인 배우 역시, 무척 쑥스러운 일이다. KBS <2012 희망로드 대장정>의 여정을 담은 에세이 『다행이야, 이제 만나서』의 출간을 앞두고 안성기를 만났다. 빼곡한 스케줄 속에서도 의미 있는 일이라면 단연코 거절하는 법이 없는 배우 안성기. 그는 알록달록한 이야기보다 진흙 속에 묻힌 이야기를 꺼내 놓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다. 근사한 표현으로 자신이 성취한 일에 대해 말을 보태는 법이 없다. 1992년에 유니세프 특별대표 임명되어 현재까지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친선대사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안성기는 올해 ‘제49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신설된 사회공헌상을 최초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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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로드 대장정’과 함께하며 소외된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바쁜 일상 속에서 고군분투하느라, 이 순간에도 지구 저편의 아이들이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 살아가곤 한다. 그러나 굶고 아프고 죽어가는 아이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적어도 그때만큼은 지구 저 먼 곳의 아이들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또 그 아이들을 돕고 희망을 전할 다른 방법이 없을지 찾아보게 될 것이 분명했다. (『다행이야, 이제 만나서』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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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아이들에게 예민해지길
“매년은 아니고 20년 동안 13개국 정도 다녀왔어요. 1년 반에 한 나라를 방문한 셈이죠. 코트디부아르는 아프리카에서 참 아름다운 도시이고 가장 잘 사는 넉넉한 곳이었는데, 내전 때문에 모든 게 망가진 나라에요. 서아프리카 적도 바로 위에 위치했는데 25시간만에 호텔에 들어갔던 게 기억납니다.”
지난해 5월, 안성기는 KBS <희망로드 대장정>을 통해 코트디부아르를 방문했다. 한때는 ‘아프리카의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신흥부국으로 떠올랐지만, 2002년 남북 간 갈등으로 시작된 내전으로 폐허가 된 코트디부아르.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생사도 모른 채 헤어진 수많은 가족들이다. 안성기는 25시간이 걸려 코트디부아르에 도착해 난민수용소가 있는 두에쿠에로 갔다. 내전으로 집을 잃은 4,500여 명의 사람들이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곳에서 천막을 치고 살고 있었다.
“사람 사는 곳이라고 말하기 힘들 정도였어요. 그동안 많은 나라를 다녀봤지만 그 중에서도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어요. 줄리아나라는 13살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전쟁 때문에 부모도 잃고 다리도 잃은 탓인지 전혀 웃지를 않더라고요. 보통 아이들은 아무리 힘들다고 하더라도 개구쟁이 같은 모습이 있는데, 줄리아나는 ‘어떻게 어린 아이가 이렇게 무표정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어요. 무엇을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고 희미한 눈빛으로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어요. 두 시간쯤 지났을까, 점심으로 싸온 샌드위치를 꺼내 주자 그제서야 눈빛을 반짝이더니 빵을 정말 순식간에 우걱우걱 먹더라고요.”
20년 동안 많은 나라의 아이들을 만나왔지만 줄리아나처럼 무뚝뚝한 아이는 처음 만났다. 아무리 못 입고 못 먹어도 아이는 아이다웠고 알고 보면 모두들 개구쟁이였다. 안성기는 줄리아나에게 미소를 되찾게 해주고 싶어, 주머니에 있던 연필을 꺼내 줄리아나의 얼굴을 스케치했다. 이내 자신의 얼굴이 궁금했는지, 스케치북을 힐끗 보던 줄리아나는 안성기가 완성작을 보여 주자, 잇몸을 드러내면서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함께 있었던 현지 NGO 직원이 줄리아나가 이렇게 환하게 웃는 건 처음 봤다고 하더라고요. 겨우 말문을 튼 줄리아나에게 무얼 하고 싶냐고 물으니, ‘집에 가고 싶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돌아갈 집이 줄리아나에게는 없었죠.”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의 설립자인 배우 신영균은 안성기가 코트디부아르로 떠나기 전, 그에게 5,000달러를 내밀며 꼭 필요한 곳에 사용해달라고 청했다. 안성기는 유니세프에 직접 기부하는 것이 나을 거라며 거절했지만, 신영균은 꼭 거듭 간청했다. 줄리아나와 헤어지는 날, 안성기는 이 돈을 현지 직원에게 전달하며 줄리아나를 위해 사용해달라고 말했다. 줄리아나는 의족을 갖게 됐다.
“유니세프를 통해 해외에 갈 때는 기부금을 전달하러 간다거나 기부물품을 주러 가는 일은 없어요. 그 지역의 어려운 상황을 직접 보고, 한국에 와서 이런 어려움이 있다는 걸 알리고 기금을 모아 유니세프 본부에 보내면, 일괄적으로 조율해서 지원을 하죠. 물론 어느 쪽에 집중해달라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특수한 경우에요.”
안성기는 타국에서 봉사활동을 할 때면 일부러 한국에서보다 많이 먹곤 한다. 스스로가 힘이 없으면 누군가에게 힘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20년 전, 에티오피아에 처음 방문했을 때 그는 몸이 부자연스러운 아이를 보고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이제 어떠한 상황에도 놀라는 법이 없다. 그의 낯섦이 아이들에게 거리감으로 느껴지면, 손을 내밀기가 어려워진다.
“매일 밤 모기한테 뜯기고 쪽잠을 자야 하니, 인간적으로는 많이 힘이 들죠. 부끄럽긴 하지만, 집의 편안함이 그립고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많이 해요. 본능이니 어쩔 수 없는 거죠. 하지만 힘들게 가더라도 개구쟁이 같은 아이들을 만나면 또 괜찮아져요. 힘듦 가운데 아이들의 밝은 모습을 보면 미래가 밝아질 것 같은 느낌도 들고요.”
스스로 조금쯤 슬픔에 무더졌을지 모른다고 말하는 안성기. 끊이지 않는 전쟁으로 정체된 나라들을 보면 ‘이렇게나 희망이 없을까’ 싶지만, 그간 아프리카에 세워진 아동보호센터, 학교들을 방문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아이들을 잊을까, 함께 찍었던 사진도 꺼내 보며 글을 남긴다. 함께했던 동료 배우 배종옥, 송일국, 고수, 양동근, 한혜진, 윤은혜, 보아와
『다행이야, 이제 만나서』를 쓴 것도 아이들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이 책의 인세 수익금 전액은 세계 어린이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쓰여질 예정이다.
“누구나 어려운 나라를 직접 가서 본다면, 우리가 얼마나 행복하게 좋은 곳에서 사는지를 알겠지만 모두가 그럴 순 없잖아요. 다만 비행기로 열 몇 시간만 가더라도 끔찍한 생활을 하고 있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 이렇게 같이 지구촌에 살고 있지만 어떤 나라의 아이들은 아직도 지옥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알게 됐으면 좋겠어요. 우리나라가 한국전쟁을 겪고 많은 나라들이 도와줬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은 인간의 도리니까요. 지난해 유니세프 기금 모금 현황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36개국 중에 4번째로 기금을 많이 보낸 나라에요. 우리 국민들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말 많은 손길을 보내주고 있고 고맙게 생각하지만, 그런 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더 많은 사람들이 『다행이야, 이제 만나서』를 통해 소중한 경험을 했으면 좋겠어요. 책을 읽는 사람들이 조금 더 아이들에게 예민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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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세프가 내게 함께 봉사활동을 하자고 했을 때, 나는 한 아이의 아빠가 된 참이었다. 병원에서 작은 아들을 품에 안는 순간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부모에게 얼마나 커다란 기쁨을 주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아프다면 부모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게 될는지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유니세프와 일하는 것을 더욱 당연하게 여겼다. 내 아이가 아프면 내가 아프듯 먼 땅의 아이가 아프다면 그 아이의 부모는 얼마나 아플 것인가. 그리고 만약 내 도움으로 그 아이가 살아남는다면, 부모는 얼마나 커다란 희망을 안고 살아가게 될까. 다시 상상해본다. 전쟁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의심하며 눈을 들었을 때, 만약 거기 나의 가족이 있다면 나는 의심을 거둘 것이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함께 집을 지을 것이다. (『다행이야, 이제 만나서』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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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작가? 영화로도 에세이 쓸 수 있어요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안성기의 스케줄표는 언제나 여백이 없다. 항상 후순위는 ‘가족’이라며 미안함 마음이 많다는 그. 올해 하반기에는 세 작품을 촬영할 계획이다. 최근에는 후배 배우 박중훈의 감독 데뷔작 <톱스타>에서 ‘국민 배우’ 안성기 역으로 특별 출연했다.
“무슨 역할이라도 출연한다고 했는데 국민 배우 역을 주더라고요(웃음). <톱스타> 주인공이 엄태웅인데, 태웅이한테 선배 배우랍시고 충고하는 장면을 찍었어요. 엄태웅은 뒤돌아서 ‘국민 배우면 다야?’라고 말해요(웃음). 8월에는 <찌라시>라는 영화를 찍어요. 조연이라서 금방 끝낼 수 있을 것 같고요. 바둑영화 <신의 한수>는 8,9월에 주로 찍을 계획이에요. 10월부터 12월에는 김훈 작가의 단편 『화장』을 원작으로 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찍고요. 키리야 카즈아키 감독의 <더 라스트 나이츠>는 촬영은 다 끝났는데, 개봉은 내년쯤에 할 것 같아요. CG가 많이 들어가서 후작업이 많다고 하네요.”
5세 때 아역배우로 시작해 올해로 연기인생 56년을 맞은 안성기. 대한민국 영화사에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된 그는 2011년, 일본 작가에 의해 평전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가 출간됐다. 임권택 감독은 안성기를 두고 “인생의 희로애락을 과장하지도 않으면서 이순을 바라보는 여태도 왕성한 생명력으로 살아 있는 배우. 그는 도사이거나 곧 신선이 될지도 모르겠다”라고 추천평을 남겼다.
“자서전 이런 거 너무 싫어서 내고 싶지 않았는데, 이미 다 준비를 하신 상태라서 거절을 할 수 없더라고요. 다행히 작가가 바라보는 시각에서 쓴 평전이라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고, 책을 보신 분들도 내용이 충실하다고 만족해 하셨어요. 아마 임권택 감독이 도사로 표현을 해주신 것은(웃음) 워낙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하다 보니까, 다시 어른이 되어서 시작했을 때도 ‘어떻게 가는 것이 좋은 길인가’에 대한 답을 알았으니까 실수가 적었던 것 같아요. 큰 실패나 실수 없이 무던하게 걸어왔지만 젊은이다운 기개가 부족했죠.”
젊은 시절, 날마다 책을 한 권씩 다독했던 안성기. 요즘은 책상에 쌓인 시나리오를 읽기만도 바쁘다. 웬만한 시나리오가 중편 소설 정도의 분량이니, 여전히 다독을 하는 셈이다. 모든 배우들의 로망은 ‘멜로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하지만, 안성기가 좋아하는 멜로의 색깔은 분명하다.
“단순하게 어떤 관계 설정에 의한 사랑 이야기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요. 다른 뚜렷한 주제가 있고 그 안에 사랑이 있는 이야기가 좋죠. 2010년 작 <페어러브>는 색다른 느낌을 주는 멜로 드라마지만 상투적인 내용이 아니라서 출연했던 작품이에요. 생각보다 좋은 시나리오를 만나는 건 굉장히 힘들어요. 1년에 한두 편 정도 ‘아 좋다’ 싶은 시나리오가 오고, 그 다음에는 ‘이 작품은 어떻게 찍힐까’ 모호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완벽한 시나리오보다는 현장에서 촬영을 하다 보면 좋은 작품이 나오는 거죠.”
최근 박중훈, 정우성, 하정우 등 많은 배우들이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고 있다. 안성기에게 감독 욕심은 없냐고 물으니, 고개를 젓는다. ‘반드시’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그는 언제까지나 ‘배우’로 살아갈 계획이라고. 그렇다면 저자로의 욕심을 없냐고 채근하자, 안성기는 현답을 내놓았다.
“책을 쓸 시간이 있다고 하면 영화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하고 싶어요. 영화로도 에세이를 쓸 수 있는 거니까요. 내가 굳이 책으로 하려는 것보다 영화로 모든 걸 표현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요.”
안성기가 지금까지 쓴 에세이는 영화뿐이 아닐 것이다. 코트디부아르에서 만난 줄리아나, 세드릭, 밤바, 에누크, 에스텔에게도 안성기 방식대로의 에세이를 선물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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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행이야, 이제 만나서
- 안성기,KBS 희망로드 대장정 제작팀 외 공저 | 중앙북스(books)
8개국으로 떠난 여덟 명의 스타가 KBS 희망로드 제작진과 해야 할 일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대로를, 과장 없이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길 위의 아이들을 만나고 돌아온 그들은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라도 계속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그래야 조금이라도 많은 아이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책에는 그들이 먼 곳에서 울고 웃었던 이야기들, 카메라에 담지 못했던 이야기까지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독자는 그들과 아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함께 아파하며 함께 행복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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