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타고난 천재 디자이너도 아니고 부잣집 아들로 여유롭게 공부하지도 못했다. 학창시절에는 숫기 없는 내성적인 성격에 공부도 특별하게 잘하지 못했다. 디자이너가 되어서도 남들과 잘 소통하지 못했다. 다만 나는 언제나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 노력에는 늘 행운이 따라 주었고, 행운은 사람이라는 소중한 보너스를 나에게 선물했다. (p.8)
한글 패션, 김연아의 스케이팅 의상, <무한도전> 멤버들의 패션쇼, 동그란 안경. 디자이너 이상봉을 기억하는 대중들의 시선은 무척 친근하다. 언제나 화려한 무대에서 모델들을 지휘하고 있을 것 같은 모습이지만, 이상봉은 “디자이너는 고독한 직업”이라고 말한다. 운명이 아닌 ‘우연’으로 패션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된 이상봉의 발자취를 따라가보았다.
연극배우의 꿈을 버리고 택한 패션디자이너
언제나 평범하고 조용했던 아이 이상봉. 어디를 가도 눈에 띄지 않았던 소년 이상봉은 스무 살이 되던 해, 연극의 꿈을 열병처럼 앓았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입을 여는 대신, 연필을 꺼내 글을 썼던 소년이었지만 사람들과 몸을 섞여가며 무대에 오르는 짜릿함을 알게 된 후, 그의 머릿속과 마음은 오로지 연극을 탐닉하는 일에만 집중됐다.
“한두 해가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연극에 청춘을 바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세상과 소통하지 못했는데 연극을 알게 된 후 달라진 거죠. 그런데 꿈을 향해 가기에는 현실적인 조건, 상황들이 눈에 보였어요. ‘배고픈 연극배우의 낭만’은 사치였던 거죠. 대학 때까지는 패션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어요. 문학과 미술을 좋아하긴 했지만 늘 존재감이 작은 학생이었고 옷에도 관심이 없었죠. 20대 때 꾸는 꿈과 10대의 꿈은 다르잖아요. 연극을 포기한 후 마음을 다잡기가 쉽지 않았지만 나 혼자만 꿈을 향해 달려갈 순 없었어요.”
한번 무대에 서면 그 감동 때문에 영원히 무대를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연극을 잊기 위해 차선을 택했고, 친구의 ‘먹고 살만하다’는 한 마디로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국제복장학원에 다니게 됐다. 평생 패션에 대한 관심을 한 번도 갖지 않았던 이상봉이었지만,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옷과 씨름하며 하루 종일 매달렸다. 고급 과정인 패션디자인연구원 과정이 신설되며 이상봉은 패션에 눈을 떴다.
“요즘 청소년들은 거대한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포부로 꿈을 말하잖아요. 제가 패션을 시작할 때는 그냥 수선집 정도로 생각하고 시작했어요. 직업적으로 오랫동안 일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지식이 필요하니 어렵게 학원에 들어갔죠. 학원에 다닐 적에는 하루 종일 바느질만 하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그 때만 해도 한국은 패션 불모지였지만 패션디자인연구원의 학생들과 교수들의 열정은 대단했어요. 패션디자인연구원과 고 최경자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이상봉은 없었을 거예요.”
이상봉 디자이너는 학원을 졸업하고 기성복 회사에 들어가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1985년에 브랜드를 갖게 됐다. 명동 제일백화점에 ‘이상봉 부티크’라는 이름으로 매장을 열었을 때, 이상봉은 그 때의 벅찬 마음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1990년대 초반까지 중앙디자이너클럽에서 활동하다 1993년 패션디자이너그룹인 SFAA에 가입하면서 첫 컬렉션에 참가하게 됐다. 당시 이상봉은 패션쇼 테마였던 ‘탄생’을 표현하기 위해 모델의 머리를 삭발해 하늘 천(天), 땅 지(地) 자를 새겼고, 아티스트의 퍼포먼스를 무대에 올렸다. 그 때부터 파격적인 퍼포먼스 패션쇼는 이상봉의 상징이 됐고, 1997년에 처음 참가한 파리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을 비롯해 현재까지 150회가 넘는 국내외 패션쇼를 진행했다. 이제 이상봉에게 패션쇼는 익숙한 일상이자 풍경이지만, 그는 여전히 패션쇼를 앞두고 악몽을 꾼다.
“때가 되면 컬렉션 악몽을 꿔요(웃음). 33년 동안 디자이너 길을 걸어왔지만 패션쇼는 늘 떨리는 순간이죠. 부족한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정말 많은 분들이 행운을 만들어줬기 때문이에요. 저는 늘 37살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요. 37살이 됐을 때 더 이상 나이를 먹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은퇴하기 전까지 37살로 살기로 결심했어요(웃음). 3과 7을 더한 수의 끝자리인 ‘제로’ 즉 무(無)의 상태가 좋아요. 그래서 누가 나이를 물어보면, 언제나 ‘37’이라고 답해요.”
이상봉은 지금의 성공을 말할 때, 언제나 “운이 좋았다. 좋은 사람들 덕분이었다”라고 말한다. 다만, 그의 집념과 절실했던 마음은 스스로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80년대 처음으로 파리를 갔을 때, 패션을 어떤 예술 그 이상의 것으로 여기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지금 우리나라에서 패션이 가지고 있는 위상이 파리에서는 30년 전이었던 거죠. 80년대 후반까지 세계 패션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는 여전히 비주류였지만 늘 ‘1% 가능성이 있어도 포기하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이상봉의 트레이드마크 한글패션ㆍ<무한도전> 패션쇼
디자이너 이상봉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한글패션’이다. 한글을 이용한 이상봉의 패션은 그를 대중적인 디자이너로 만드는 데 일등공신의 역할을 했다. 한글 스타일을 만들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외국에서 패션쇼를 열며, 우리나라 전통문화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된 이상봉은 어느 날, 지인인 장사익, 임옥상 선생으로부터 받은 자필편지를 보면서 한글을 패션에 응용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됐다. 결국 두 사람의 동의를 얻어 2006년 2월, 파리 컬렉션에 처음으로 ‘한글’이 들어간 패션을 선보였다. 반응은 뜨거웠다. 이상봉의 한글 패션쇼는 파리 일간지인 <르 파리지엥> 1면에 소개됐고 해외 언론의 인터뷰가 쏟아졌다. 이후 서울에서는 ‘한글, 달빛 위를 걷다’를 타이틀로 한 한글 패션 전시회를 열었다.
“한글 스태프들은 많이 반대했어요. 낯선 작업이었고 실패할 수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외국 친구들의 반응이 좋았고 용기를 얻어 무대에 세웠죠. 2006년부터 한글 작업은 계속하고 있어요. 이제 제 트레이드마크가 됐죠. 김연아, 린제이 로한, 쥘리에트 비노슈 등 세계적인 스타들에게도 한글 옷을 선물할 수 있었고요. 올해 한글날이 22년 만에 다시 법정 공휴일로 정해졌잖아요. 저에겐 더욱 큰 의미죠.”
2006년 11월, 이상봉 디자이너가 출연한 <무한도전> ‘슈퍼모델 특집’ 편도 그에게 있어 소중한 경험이자, 행운이었다. 당시 이상봉은 ‘2007년 봄/여름 서울 컬렉션’ 무대에 <무한도전> 멤버들을 세워달라는 제작진의 제안에 많이 망설였다. 멤버들과 전문 모델을 같이 무대에 올리기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면이 많았기 때문. 더욱이 디자이너에게 컬렉션은 1년 농사의 반에 해당하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봉은 ‘평균 이하 대한민국 남자들이 불가능해 보이는 영역에 도전한다’는 <무한도전>의 콘셉트가 마음에 들어 제안을 응했다.
“홍록기 씨나 구준협, 박미경 씨 등 많은 연예인들이 제 무대에 섰지만, 개그맨 분들이 단체로 오르는 건 처음이었어요. 막상 준비에 들어가 보니 좀 힘들긴 하더라고요(웃음). 키가 크면 비주얼이 좀 약하고 비주얼이 되면 키가 작고. 단연 돋보인 멤버는 유재석 씨였어요. 완벽한 몸매 라인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멤버와는 달리 두 번이나 무대에 섰죠. 한글패션의 대중화는 무도 6인방의 공이 가장 컸어요. 지금도 김태호 PD와 멤버 분들에게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상봉에게 <무한도전> 출연은 대중적인 인지도를 올려줌과 동시에 고객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꾀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이상봉은
“멤버들의 끈끈한 우정을 보면서 동료의식이 얼마나 중요한 지도 새삼 느끼게 됐다”며,
“내성적인 내가 외향적으로 바뀌게 되는 동기를 가져다 준 작업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1년을 앞서가는 디자이너, 여전히 행복하다
“디자이너들은 1년을 앞서가잖아요. 예전에는 6개월을 앞서 살았는데 이제는 한 해를 앞서 준비해요. 올해 봄에 열린 F/W 뉴욕 컬렉션이 끝나면, 내년의 봄, 여름을 어떨까, 자연스럽게 생각이 되는 거죠. 점점 트렌드는 빠르게 변하고 있어요. 디자이너는 바람처럼, 물처럼 빠르게 흔들리되 본질은 잃지 않아야죠.”
가끔은 보통 사람들과 함께 템포를 맞추고 싶진 않을까? 물으니, 이상봉은
“한 해를 앞서갈 뿐 계절은 함께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쇼를 마치고, 혼자만의 휴식을 가질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이상봉. 그는 2011년 MBC <세상의 모든 여행>을 통해 브라질 여행기를 공개하기도 했다.
“의외로 그 때 방송을 보셨다는 분들이 많으시더라고요. 평소 여행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편인데 딱히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떠나진 않아요. 좋아하는 책 몇 권 가지고 가서 독서 좀 하다가, 지루해지면 백사장으로 가서 수영도 하고. 그게 제가 제일 좋아하는 여행의 풍경입니다.”
“음악도 없이 동행자가 없이 가도 좋은 게 여행이에요. 수영복 바람으로 백사장에 누워 있다가, 또 물 속에 잠깐 들어갔다가, 그렇게 시간을 보내요. 강렬한 태양 앞에서 발가벗고 누워 있으면 멍해지다가 물 속에 들어가면 마치 블랙홀에 빠져들어간 것처럼 보이죠. 여행은 가장 행복한 힐링이고, 연극이나 뮤지컬 공연을 보는 것도 좋아해요. 외국의 벼룩시장이나 인사동을 돌아다니면서도 영감을 받고요. 여행을 가면 그 나라의 시장, 백화점, 박물관, 서점을 들여다보죠. 모든 것이 영감을 주니까요.”
이상봉은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공개했던 칼럼과 새로 쓴 글들을 모아
『이상봉의 패션 이즈 패션 Fashion is Passion』을 펴냈다. 패션을 시작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화려하지만은 않았던 지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냈다. 하지만 ‘이상봉의 자서전’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자서전이라고 말하기엔 담지 못한 이야기가 많다는 것.
“패션을 공부하는 사람들만을 위해 쓴 책은 아니에요. 이 시대의 청춘들이 꿈 때문에 고민이 참 많잖아요. 미래에 대해 방황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이상봉 같은 사람도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어요.”
청춘에 만난 첫 꿈은 포기했지만, 또 다른 꿈이 찾아왔고 지금 이상봉은 대한민국 대표 패션디자이너가 됐다. 항상 후배들에게 “끊임없이 비우고 다시 채우라”라고 말하는 그는 마음 움직이는 대로, 끝없이 변화하며 패션을 만들어가고 있다. 신인 시절, 특유의 옷차림 때문에 ‘검은 망토’로 불린 적이 있는 이상봉. 그가 창조하는 패션은 늘 변화하고 있지만, 30년 전 입었던 ‘검은 망토’는 여전히 가장 즐겨 입는 옷이다.
“이상봉 스타일은 없어요. 어디든 떠날 수 있는 바람처럼 내 스타일도 자유롭길 바랄 뿐이죠. 하지만 검은 망토만은 이상봉 스타일일지도 몰라요(웃음).”
언젠가 나는 디자이너를 은퇴하고 잃어버린 내 꿈과 나 자신을 찾아 여행을 떠날 것이다. 흔들림은 위태롭지만 흔들림 없는 삶은 권태롭다. 지난 33년간 나는 위태로운 흔들림을 즐기면서 숨가쁘게 달려왔다. 앞으로도 여전히 바쁠 것이다. 나의 도전은 아직도 완료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규정하지 않는 삶은 불안하지만 살아 있음의 또 다른 모습이기에 지금 난 행복하다.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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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봉의 패션 이즈 패션 Fashion is Passion 이상봉 저 | 민음인
한글과 조각보, 태극문양 등 가장 한국적인 소재를 디자인 재료로 사용함으로써 한국적인 것을 세계에 알리는 독보적인 디자이너 이상봉의 패션 철학과 열정, 디자이너로서의 의미 있는 경험담을 엮는 『이상봉의 패션 이즈 패션』이 출간되었다. 해외 시장 진출기와 한글과 패션의 접목, 김연아의 스케이팅 의상 제작, 탁구 국가 대표 유니폼 디자인, 「무한도전」패션쇼, 파리 컬렉션 현장 등 대중이 궁금해하는 패션 이야기가 펼쳐진다. 뿐만 아니라 시기에 따라 변화한 80년대 이후 패션과 국내외 패션계의 면면과, 오랜 경륜을 바탕으로 한 후배 디자이너들을 위한 주옥같은 조언들이 책 곳곳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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