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를 구하다⑧] 김주영, “다시 태어나도 소설 쓸 것, 언제나 현역작가이고 싶다” -『잘가요 엄마』
“내 모든 억울함의 이유였던 어머니, 100퍼센트 진실된 이야기”
올해로 등단 40주년. 이제까지 쓴 장편소설이 몇십 권인지 알지 못한다는 김주영 소설가(73)에게 『잘가요, 엄마』는 각별한 작품이었다. 『객주』, 『천둥소리』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홍어』 『아라리 난장』 『빈집』 등 수많은 소설을 써 오는 동안 작가의 마음 한 켠에는 늘 다 풀어놓지 못한 어머니 이야기가 있었다.
꼭 한번 얘기해야 했던, 어머니
“이 짧은 장편소설을 쓰는데요. 일 년 반이 걸렸어요. 그만큼 갈등했다는 얘기죠. 하지만 결국은 잘한 얘기다. 나 자신이 감옥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이었어요.”
올해로 등단 40주년. 이제까지 쓴 장편소설이 몇십 권인지 알지 못한다는 김주영 소설가(73)에게 『잘가요, 엄마』는 각별한 작품이었다. 『객주』, 『천둥소리』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홍어』 『아라리 난장』 『빈집』 등 수많은 소설을 써 오는 동안 작가의 마음 한 켠에는 늘 다 풀어놓지 못한 어머니 이야기가 있었다.
“전작들은 모두 어머니를 중심에 놓고 썼으면서도 정작 내 어머니가 아닌 다른 어머니처럼, 상식적인 선에서 볼 수 있는 어머니 이야기를 많이 썼죠. 중심에 들어가지 못하고 빙빙 돌려 이야기한다는 게 늘 꺼림칙했고, 언젠가는 써야겠다고 마음먹고도 많이 주저했어요. 쓰면서도 좀체 끝을 못 내서 인터넷 연재라는 형식을 빌려서라도 겨우 끝을 냈어요.”
어머니. 한때는 세상 전부였고, 때론 원망으로 그리움으로 얼룩지는 이름. 김주영 작가에게도 그랬다. ‘누더기 같은 가정사’ 중심에 어머니가 있었다. 가난은 이루 말할 것도 없고, ‘소름 끼칠 정도로 과부하가 걸린 노동’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재가한 일은 소년 김주영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가난한 친정 살림 때문에 유력자 집안에 넘겨졌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떠난 후,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돈푼깨나 있다는 남자와 함께 살게 되지만, 두 남자 모두 어머니가 일할 때마다 굽힌 허리를 펴주진 못했다. 그런 어머니가 2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는 부음을 알리지도 않고, 조용히 장례를 치렀다.
“억울함 뒤에는 늘 어머니가 있었어요”
쓰시는 데 특별한 에피소드 없었나요?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글자를 모르는 날품팔이로 살다 일생을 마감하셨어요. 무허가 장례식장에서 시신을 태웠어요. 조문객 하나 없이 간첩처럼 숨어서 말이죠.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욕을 먹는 것보다도 어머니에게 누가 될까 많이 갈등하고 고민했어요. 어머니와 저는 다른 모자처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잠깐 같이 살다가 새 아버지가 들어오면서 어머니와 멀어지기 시작했죠. 돌아가실 때까지 정신적으로 괴리되어 있었습니다. 어머니 생애와 연결된 나 자신의 삶이 평탄하지 않았고, 가난에 허덕였고,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받은 상처는 깊어서 심지어 어머니를 저주까지 했으니까요.
어머니는 자식의 출세에 걸림돌이 되지 않겠느냐 싶어서 나를 일부러 가까이하지 않았고, 나는 유교 사상이 짙게 깔린 집안 분위기에서 재가한 어머니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어머니를 찾지 않았어요. 어머니의 실체를 그대로 드러내서 돌아가신 누가 되진 않을지. 그런 고민을 하느라 소설을 쓰는데 오래 걸렸습니다. 내가 40대, 50대만 됐어도 누더기 같은 가족사를 쓰지 못했을 겁니다. 내가 70이 넘고 산전수전 다 겪었기 때문에 참회하는 기분으로,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기분으로 소설을 썼습니다.”
탈고하고 나서는 후련했나요?
“그동안 어머니 얘기가 가슴 속에 꽉 차있어서 다른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오지 못했어요. 다시 소설을 쓰려면 가슴 속에 빈방이 있어야 에너지를 채울 텐데, 자꾸 어머니 얘기를 숨기느라 그 여지가 없었죠. 그래서 쓰고 난 뒤에 정말 후련했고,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는 방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의 성공 여부에 관계없이, 잘한 일이구나 싶어요.”
소년이 훔친 돈으로 사탕을 사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많은 사탕을 주죠. 처음으로 가진 내 것이었는데, 그 부피를 감당하지 못해 사탕이 손 밖으로, 옷 밖으로 줄줄 새어나가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처음으로 가진 ‘내 것’, ‘내 것’이라고 하면 눈물 나는 것. 선생님께는 무엇이었나요?
“최초로 내 것으로 생각한 게 그 사탕 봉지입니다. 꼭 그 사건에서 비롯된 일은 아니겠지만, 항상 많은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젊은 시절, 혈기 왕성하던 때 신문 연재소설을 많이 썼어요. 그 돈을 집에다 가져다 주지 않았습니다. 전부 가난한 문인들에게 밥 사주고, 술값 내는 데에 썼습니다. 여전히 그래요. 인색하지 않게 씁니다. 내 거라는 인식이 확실하게 없는 것 같아요.”
지금 ‘선생님 것’이라고 한다면 뭐가 떠오르세요?
“두 가지가 있어요. 우산과 가방. 제가 어릴 때,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책가방이 없이 보자기에 책을 싸서 다녔어요. 비가 많이 왔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가질 수 있는 우산이 없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길거리에 걸어가다 쇼윈도에 좋은 우산이 있으면, 대번 사버립니다.(웃음) 백화점에 갔는데 새로운 가방을 발견하면 다 삽니다.(웃음) 집에 못 가지고 가니까 사무실 곳곳에 처박아 놔요. 가져가면 면박 듣기 때문에. 50여 개 되는 우산은 다 나눠주고, 가방도 많이 나눠줬어요.
집에 손님이 오면 보통 무슨 음식을 좋아하느냐고 묻잖아요. 저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 내가 먹고 싶었던 음식을 차립니다. 그 사람들이 먹든 안 먹든 상관없이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놔야 직성이 풀리는 거죠. 책가방 없이 학교 다니고 가난하게 살았던, 너무나 먹고 싶었던 음식이 많았던 시절에 대한 보상심리가 아닐까 싶어요.”
글쓰기라는 게 예나 지금이나 돈 버는 일이라기보다 배고프기 쉬운 일에 가까운데요. 배고프고 외로웠던 소년에게 글쓰기는 무엇을 주었나요?
“제가 어렸을 때 열등생이었어요. 머리도 나빴지만 공부할 수 있는 여건도 갖춰지지 않았죠. 중학교까지 겨우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되니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스스로 고민하게 되었어요. 나에게도 장래가 많이 남아있는데 뭘 하면서 살아갈까?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도대체 뭔가? 수학도 못해. 그림도 못 그려. 잘하는 게 없지만, 글 쓰는 게 참 좋다. 그 일에는 내가 익숙해져 있다. 나를 가장 편안하게 해주는 일이 글쓰기였습니다.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완전히 외톨이였습니다. 누구도 놀아주지 않았어요 나도 따라다니지 않았고요. 외롭게 사는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글 쓰는 일 아니겠어요? 교과서를 베끼기도 하고, 뭔지 모르면서 계속 썼던 거죠. 내가 외로워진 원인에는 어머니도 있었죠. 그 어머니 덕에 내가 글을 쓰게 된 거죠. 그걸 뒤늦게 알게 됐어요.
난 다시 태어나도 글을 쓸 거에요. 소설이 잘 팔리든 안 팔리든 상관없어요. 내 모든 열정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이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요. 오늘도 점심을 냉면집에 갔는데, 은행장을 하셨다는 분이 인사를 해요. 그 사람이 내 밥값을 다 내고 갔어요. 사소한 거지만, 난 그런 분들에게 대접 받은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글을 쓰지 않았다면 그분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글을 쓰면 계속 배가 고프고 계속 외로울 수도 있는데, 그런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나요?
“내가 이게 익숙하고, 내 열심을 여기다 쏟아 부을 수 있겠다 싶었죠. 이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고, 내 열정을 부을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하는 거죠. 내가 될까? 이런 시시한 것에 열정을 바쳐서 될까? 내가 할 일이 많을 텐데, 이런 데 집착해도 될까? 의심하고 이러면 아무것도 못하죠.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점심때 짜장면을 먹을까 우동을 먹을까? 6, 7천 원짜리 점심 먹는데도 상당한 고민하지 않습니까? 고민은 그 정도 하면 됐죠.(웃음)”
글을 써야겠다고 딱 마음을 먹었을 때, 어떤 글을 썼는지 혹시 기억나나요?
“고등학교 때 시를 썼어요. 대구에서 학교에 다녔는데, 그 신문 학생 시단에 동시 비슷한 걸 써냈어요. 대게 보면 골목길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였어요.”
『객주』의 원형이네요.(웃음) 열정으로 시작했으니까 기쁜 순간이 많았겠지만, 그중에서도 작가로서 가장 기뻤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객주라는 소설을 신문에 4년 9개월 정도 연재했는데 그걸 마쳤을 때 기뻤어요. 그건 성취감이죠. 그 후에 제가 전국의 장터를 순회했는데, 가방에 카메라와 망원경, 메모할 수 있는 수첩을 넣고 다녔어요. 맨날 엉뚱한 데 다니면서 사진도 찍고, 멀리 있는 걸 망원경으로 보고 다닐 때였는데, 그때 한참 간첩이 많이 왔다 갔다 한다던 시절이었어요. 한번은 경찰이 총 겨누고 경찰서에 끌고 가서 한 시간 반 동안 신원 조사를 받았습니다. 당시 소설을 연재하던 서울신문사 관계자가 와서 신분을 확인해줘서 풀려났는데, 그때 참 기뻤습니다.(웃음)”
상주 홍보대사, 문화예술위원회, 장날까지. 소설 쓸 때 빼고는 항상 움직이고 계시는데요.(웃음)
“며칠 전에 시간이 나서 인사동에 갔어요. 쌈짓길에 갔더니 사주 보는 곳이 있습디다. 어떤가 싶어서 봤죠.(웃음) 사주를 보니까, 평생 움직여야 살 수 있대요. 그래야 돈이 들어온다. 그 돈이 들어옴과 동시에 나간다. 너한테 고여있을 사유가 없다.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늘 듣던 얘기죠.(웃음) 역시 그렇네요. 하고 나왔지.(웃음) 내 사주가 그래요. 역마살이 있어요. 평생 움직입니다. 자꾸 움직여야 웃을 일이 많이 생기고, 젊은 사람, 낯선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낯선 사람 만나는 게 전혀 두렵지 않아요. 워낙 많이 돌아다녀서. 어떤 신분의 사람이든지 두렵지 않아요.”
사람 말고 두려워하시는 건 무엇이 있나요?
“호랑이인데, 호랑이는 지금 없으니까 괜찮습니다.(웃음)”
혹시 마감 같은 건 두렵지 않나요?
“두렵지 않습니다. 제가 소설 이외에는 글을 안 씁니다. 스트레스받거든요. 열 장을 쓰나 한 장을 쓰나 스트레스받는 건 똑같아요.”
예전의 『객주』에는 한자 말도 많고, 지금 안 쓰는 말도 있잖아요. 이번에 새로 쓰는 『객주』 10권은 문체나 단어들이 예전과 많이 바뀌겠네요.
“그래서 10권을 써 놓고, 시간 나는 대로 아홉 권을 다시 보면서, 어려운 한자 말을 고칠 작정입니다.”
10권을 쓴다는 것, 작가님께는 어떤 의미인가요?
“신문에 연재할 때, 4년 9개월 하다 보니 너무 지겨운 거에요. 그만 쓰자고 내가 제안했어요. 신문사는 계속 쓰자고 했는데, 도저히 내가 못쓰겠다고, 내가 빌어서 중단한 거거든요.(웃음) 그래서 다시 쓴다 생각하고 주인공이 죽거나 병들거나 하지 않고 어디 멀리 가는 걸로 끝을 냈어요. 나중에 한두 권 더 채워야겠다, 생각하고 송파에서 아래쪽으로 내려간다고 설정했거든요. 울진의 보부상 길을 조사해보니, 한 권 정도의 소설을 쓸 수 있는 흔적이 남아 있어서 새로 하나를 쓰기보다 붙여 쓰는 게 더 괜찮겠다 싶었어요.”
집필 시작하셨다고 들었는데, 10권은 언제쯤 볼 수 있나요?
“내년 3월, 4월쯤 나올 것 같아요. 전 한번 손댔다 하면 군소리 없이 씁니다. 나한테 그런 저력이 있구나, 스스로 확인시키기 위해서 쓰는 셈이죠.“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이시고, 계속 왕성히 창작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나요?(웃음)
“다른 사람들보다 제가 많이 움직입니다. 또 기쁜 마음으로 삽니다. 절대로 화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하고 잘 안 싸워요. 보통 저보다 나이 어린 사람들과 놀고 돌아다니고 술 먹죠. 기름진 음식도 잘 안 먹습니다. 대신 술은 멈추지 못하고요.(웃음)”
사무실 가까운데 대학교가 있어서, 대학생들도 자주 보실 텐데요. 혹시 젊은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요?
“없어요. 제가 어쩌다가 2, 3년에 한 번씩 주례를 설 때가 있어요. 등 떠밀려서 할 수 없이 주례를 서는데요. 요즘 신랑 신부를 보면, 나이가 적든 많든 간에 참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나보다 많이 배웠고, 똑똑하고, 유학도 많이들 갔다 왔죠. 그런 사람들 앞에 내가 잘난척하고, 이래라저래라 말한다는 게 우습죠. ‘이 사람은 주례를 세워놨더니 이런 소릴 하네.’ 이럴 겁니다.(웃음) 그냥 딱 이 정도 얘기만 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얘기는 딱 두 가지다. 당신보다 세상 경험이 많다는 점에 비추어 보자면, 절대로 비난하지 마라. 비난할 일이 있다면, 결혼 전에 해라. 후에는 절대 하지 마라. 여자 친구가 방귀를 뀌면, ‘넌 정말 굉장한 여자다. 어떻게 방귀에서 구린내가 안 나고 향기가 나느냐? 맘대로 뀌어라.’ 하던 사람도 결혼하면 “너 방귀 뀌려면, 친정 가서 뀌고 와” 하곤 한다. 비난은 애정을 식게 하고 두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사소한 것에 주목해라. 아무렇지도 않은 것에 주목해라. 윗집에서 보면 방바닥이 아랫집에서 보면 천장이다. 그런 사소한 것이 삶에서 큰 차이를 만든다. 이 정도 얘기를 하죠.”
문예 창작 강의 같은 건 하지 않으시나요? 제안을 많이 받으셨을 것 같은데.
“내가 뭘 안다고. 제 소설 밖에 못 쓰는 놈이 이거 써라, 저거 써라 말할 수 있습니까? 소설은 그렇게 말한다고 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타고나야 합니다. 견딜 수 있는 타고남. 그게 70퍼센트에요. 자기가 계획했던 분량의 소설을 쓸 때까지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는 것. 그게 소질입니다. 내용이 시시해도 좋아요. 그만한 분량을 쓸 때까지 내가 자리에 얼마나 앉아있었나. 그걸 보면 돼요. 그럼 내가 타고났는지 아닌지 알 수 있지요.”
나머지 30은?
“노력이죠.”
어머니라는 걸 써서 마음에 빈방을 만들었잖아요. 지금은 『객주』를 쓰고 계시지만, 최근에 생긴 관심사라면 무엇이 있을까요?
“지금까지 써왔던 『잘가요 엄마』 『빈집』 『홍어』는 가족들을 중심으로 한 얘기죠. 내가 다음에 쓸 것은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사람들 이야기. 의지와 상관없이 억압받는 사람들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긴 시간, 꾸준히 소설을 써오셨어요. 소설을 쓰면서 나이 들어가는 일, 어떻게 다가오나요?
“근력은 20대, 30대보다 딸리지만, 그런데도 소설을 이렇게 써내고 앞으로도 계획이 있다는 것에 스스로 만족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겠지만, 죽는 날까지 내 손에서 글 쓰는 것을 놓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다는 데에 스스로 자긍심이 있어요. 술이 심한데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잘 안 된다는 것.(웃음) 그게 제일 문제죠. 그 외에는 다른 걱정 같은 건 없고요. 앞으로 적어도 네 권 이상의 소설은 써야 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저는 학창시절 때, 선생님 작품을 처음 읽었는데요. 이렇게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서도 선생님의 새 작품을 계속 볼 수 있어서 독자로서도 정말 기쁩니다.
“선배들이 조로하고, 빨리 늙는 걸 봐 왔어요. 그런 걸 깨보려는 생각이 있죠. 얼마 전에 도서전 때문에 남미에 갔다가, 86살의 어떤 작가가 상을 받는 걸 봤어요. 그쪽에서 유명한 소설가인데 80 넘어서 쓴 소설이 다섯 권이나 된대요. 일 년에 한 권씩 쓴 거죠. 아주 정정하더라고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웃음)”
작가는, 누구나 가슴 한구석에 품고 살 수밖에 없는 그 이름을, 비로소 소리내어 부른다. 그것은, 작가 자신의 어머니인 동시에, 우리 시대 모든 어머니들이 살아낸 모성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길고긴 산고를 겪고, 제 젖을 물리고, 제 살을 떼어주며 우리를 키워낸 어머니. 그 촌스럽고 어리석고 못난 이름,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미운 사람’이다. 미련하고 바보 같은 엄마의 이야기는, 그래서, 대가 김주영의 단련된 손끝에서 더욱 미련하고 촌스럽게, 그래서 더욱 아프게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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