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를 구하다⑦]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했을까요? 꼼꼼히 읽으면 비밀(!)이 보인다 - 김민웅『동화 독법』
왜 마법이 풀렸는데도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는 그대로였을까?
『동화독법』의 저자 김민웅 교수님은 여기저기에 질문을 꽂아 이야기가 품고 있는 무궁무진한 생각거리를 거둬 올립니다. 교수님은 “재해석이 아니라, 원작을 꼼꼼히 읽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동화 속에서 삶의 통찰을, 인문학적 사유를, 나에게 필요한 고민과 힌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야기에, 텍스트에 당신이 먼저 말을 건다면 말이에요.
정말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동화들이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을 줄이야. 깜짝 놀랐어요. 동화를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고 싶더라고요.
“잘 알려진 동화는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도 하지만, 그 안에 매우 많은, 좋은 비밀들이 있어요. 인문학 얘기를 많이 하는데, 인문학의 문턱이 보통 대중들에게 높은 것 같아. 동화나 민담은 그 문턱을 낮추면서도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좋은 소재에요. 재해석이 아니라, 이미 이야기 안에 있는 것들을 발견하는 거죠.”
동화를 읽고 나면 그런 아쉬움이 항상 있잖아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정말 그럴까? 그러면 다 잘 된 건가?
“우리가 아는 동화는 이렇죠. 미운 오리 새끼? 백조가 됐대. 신데렐라? 왕자를 만나서 잘 살았더래. 끝. 정말 끝인가요? 사람들이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모르는 게 많아요.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가 되겠다는 열망을 안고 시련을 극복하는 게 아니라, 삶에 좌절해서 자살하려는 순간, 물 위에 비친 자기 얼굴이 백조라는 걸 깨닫죠. 어떤 의미일까? 왜 마법이 풀렸는데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는 그대로였을까? 왕자는 왜 신데렐라를 찾을 때, 얼굴을 봐 놓고서도 유리 구두에 발이 맞는 사람만 찾아다닌 걸까?”
미운 오리 새끼는 물위에 비친 모습을 통해 자기가 누군지 알게 됩니다. 자기성찰의 순간이 그렇게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성찰은 정신의 든든한 힘줄을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부디 겉모습만 백조가 되려 하지 말고 어떤 내면을 지닌 백조가 되려는지, 그런 백조가 되면 이 세상은 얼마나 더, 함께, 행복해지는지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p.55 <미운 오리 새끼의 자존감 회복을 위하여> 중) | ||
<미운 오리 새끼>는 내 안에 백조를 찾으란 얘긴 줄 알았어요. 오리일 때는 삶의 의미를 전혀 찾지 못하다가, 남들처럼 백조가 되니 행복해진 미운 오리 새끼는, 어쩌면 계속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다. 또 자살하고 싶은 순간이 오겠구나 싶더라고요.
“<미운 오리 새끼>는 알고 보니 백조였다는, 출생의 비밀이 담겨 있는 이야기죠. 역경을 이기고 백조가 됐어요. 자기만 행복해지면 끝인가? 백조가 되기까지 고통받고 푸대접받은 현실이 존재하는데. 지금도 여전히 푸대접받는 오리가 있는지 차별받는 오리가 있는지 성찰할 수 있어야 의식이 성장했다고 할 수 있죠. 이 이야기 속에서 원래 오리로 태어난 것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웃음) 삶이 나아질 방법이 없는 거죠.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게 정말 많아요.”
심청전에서 심청이가 환생한 건, 효성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했는데. 잘 읽어보면 당시 풍속에 대한 반기라고 하셨잖아요.
“효녀뿐만 아니라 열부 얘기들, 다 여자 죽이는 얘기죠.(웃음) 그들을 희생을 시키는 시스템에서 심청이 환생해 눈을 뜨라고 말해요. 중요한 얘기죠. 중요한 메시지를 치밀하게 매장해놨어요. 독자들이 즐겁고 유쾌하게 읽을 수 있도록. 그렇지만, 잘 생각해보면 깊은 메시지가 있어요.”
그동안 내가 읽은 수많은 책에는 내가 놓친 비밀이 얼마나 많을까! 싶었어요. (웃음)
“그렇죠. 이렇게 읽어내면, 자기 인생도 이렇게 읽어낼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의 사연도 단정하지 않고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겠죠. 발견해내지 못한 아픔, 절망, 희망을 읽어낼 힘이 생기면, 진짜 우리 사회가 좋아지지 않겠어요?(웃음)”
선생님 독서의 역사를 들려주세요.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서, 여섯 살 때 한국에 왔어요. <헨젤과 그레텔>을 읽는 아이가 학교에 들어갔더니, ‘철수야 영희야, 같이 놀자’를 읽고 있으니까 미치겠더라고.(웃음) 그러다 아버지가 계몽사 문학 전집 50권을 사다 주셨어요.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그게 동화와의 첫 만남이에요.
책의 세계는 늘 깊이 빠져들어 있었어요. 내가 목회하느라 성서를 읽었잖아요. 그게 독서를 하는 데 큰 힘을 더해줬어요. 성경은 짧은 문장 속에 매우 많은 비유와 이야기가 숨어 있어요. 그걸 읽어나가는 훈련이 책을 읽는데 엄청난 도움이 됐어요.”
『동화독법』에서 재해석이 아니라 이야기 자체를 충실하게 읽으라고 강조하셨어요.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자는 거죠. 그 이야기에서 혹시 놓친 지점은 없을까? 살펴보고, 이야기가 어떤 맥락에 놓여 있는지 보는 것도 중요해요. 이야기는 맥락 속에서 뭔가 반발하거나 선동하거나 저항하는 것인데, 그런 점을 발견하면 이야기가 변화하고 발전하게 되죠. 어떤 이야기가 이 지역에서 이야기될 때, 다른 맥락으로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기도 하잖아요. 오늘날 그런 작업도 많이 이루어지고요. 그러기 위해서 꼼꼼히 읽는 게 우선이죠.
스토리텔링이 많이 주목을 받고 있는데 사실 우리에게 스토리텔링의 힘이 그만큼 자라나 있지 않은 것 같아요. 이야기할 수 있는 실력 이전에 들을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하거든요. 듣고 그 안에 숙성해 있는 이야기를 발견해내는 힘이 있게 되면, 그 힘으로 자기 이야기를 성찰할 수 있어요. 이런 힘은 인문정신의 성숙뿐 아니라 사회의 창조성까지 성장시킬 수 있겠죠.”
꼼꼼히 읽기란, 정독의 개념인가요?
“그 안에 질문이 담겨야 해요. 한 자 한 자 읽어 나간다는 말이 아니라,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과 만나야 해요. 이야기가 나를 밀어붙여야 해요. 서로 밀어붙이며, 긴장관계가 생기고, 거기에서 절박한 읽기가 생기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 그냥 읽고 마는 거죠. 그런데 꼼꼼히 읽으려면 다독이 밑받침되어 있어야 해요.
왕성한 다독을 통해 이야기를 다양한 각도와 정보를 읽어내는 힘이 있어야 하죠. 다독이 없는 정독은 의미가 없어요. 인간에 대해 알아야죠. 역사를 알아야죠. 그러고 나서 어떤 텍스트를 꼼꼼히 읽으면 그 안에서 여러 흐름을 읽어낼 수 있겠죠. 풍성한 독서와 그걸로 자기 질문을 만들어서 하나하나 읽어나가는 게 중요하죠. 다독이 문제를 뚫어낼 힘이 되는 셈이에요.”
동화를 텍스트로 삼은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인가요?
“새로운 이야기라면, 그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 이야기의 주도권을 갖게 돼요. 모두가 알고 있는 동화라고 하면, 그 얘기에 관한 발언권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의미인 거죠. 각자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고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예요. 그게 동화, 민담, 우화의 힘이죠. 참여해서 이야기하다 보니 질문에 부딪히고, 새롭게 생각하고 질문을 밀고 나가는 과정을 거치게 되죠. 그래서 좋아.
이 책을 가지고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에서는 이 책을 가지고 강의를 해요. 이걸로 철학, 정치학, 논리학을 다 읽을 수 있지. 시민 민주주의, 자본주의의 역사, 국제 정치 다양한 것들을 다 연결할 수 있어요. 대학생들은 그렇게 읽고, 집에서는 부모와 아이가 읽고 다양한 얘기를 나눠볼 수 있겠죠. 특히 10대 아이들이 읽고 사유하는 훈련을 했으면 좋겠어요. 동화는 쉽게 문을 열 수 있고, 깊이 들어갈 수 있어요. 그렇게 삶도 유쾌하고 깊이 있게 통찰할 수 있는 거죠.”
다독이 바탕이 된 꼼꼼히 읽기가 수행되면, 무궁무진한 맥락으로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다고 하셨는데요. 혹시 아직 특별히 독서 기반이 잡혀 있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어떻게 독서를 권하시나요?
“책은 이게 기초다, 라고 얘기할 수가 있는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누군가가 좋은 책이라고 추천하거나, 고전이라고 생각되는 책이 있다면 그냥 읽는 거에요. 그걸 이해할만한 지적 기반이 되어 있지 않아서 어려울 수도 있어요. 이 책을 읽어서 다른 책이 이해되는 때도 있어요. 일종의 난독인데 나는 그런 방식이 좋아요. 사람마다 다르잖아요.
체계적인 독서라는 게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무조건 손에 잡히는 걸 읽으라고 말해요. 역사면 역사, 문학이면 문학대로 좋아요. 광범위하게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새끼를 쳐나갈 테니까요. 그래서 서평의 역할이 중요한 것 같아요. 서평이 책을 소개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책이 어떤 맥락에 놓여있는지 말해줘야 해요. 그 맥락 속에서 책을 읽는다면, 건질 수 있는 게 폭넓어지겠죠.”
이 책도 서평의 색깔이 있는 셈이네요. 선생님. <프레시안>에 꾸준히 서평을 기고하시는데요. 좋은 서평은 어떤 서평인가요?
“이 책은 텍스트의 맥으로 들어가는 방식이죠. 서평에서는 다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서평은 무엇보다 책이 놓여 있는 자리를 잘 설명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독자가 질문을 만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정보를 풍부하게 제공해줘야죠. 책의 이야기를 옮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풀고 들어가기 위한 풍부한 지적 정보를 공급해줘야 해요. 책은 이미 나오는 순간에 다른 형태로 사회적 공유가 돼요. 거기에 필요한 것들을 지속해서 공급해주는 게 서평이죠. 한마디로 끊임없이 공부해야 해요.”
지금도 어떤 이들은 힘없고 가진 것 없어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의 욕망을 위해 죽음의 인당수에 뛰어듭니다. 재촉당하며 등 떠밀려 뱃머리에서 떨어집니다. 「심청전」은 그런 격류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들의 애통함과 절규에 눈 감은 우리에게 눈을 뜨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던 인당수에 생명의 연꽃이 피어오르는 세상을 만들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p.442, <인당수에 빠진 심청이를 돌려보내노라>중) | ||
답을 구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게 질문을 찾는 일인 것 같습니다.
“답보다 질문이 훨씬 중요한 거예요. 질문을 밀고 나가는 순간부터, 이미 새로운 답을 만들어가는 과정인 거죠. 1 더하기 1이 2가 아닐 수 있잖아요. 1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따라서 답은 달라져요. 힘을 합쳤는데 분열이 나서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고, 열이 될 수도 있죠. 이런 식으로 성찰하다 보면 문장, 어법, 이런 것들을 풍부하게 해석할 수 있죠. 쉬운 질문이 어려워요.
가령, 당신은 지금 어디 있어요? 하면, 물리적 공간을 얘기하겠지만, 점점 밀고 나가면, 존재론적인 질문이 되겠죠. 어디로 가? 뭘 보고 있어? 뭘 듣고 있어? 쉬운 것 같지만, 핵심적인 질문이에요. 이런 질문들이 본질로 향해가는 힘을 만들어 주는 거죠. 자기 질문이 있는 사람은 피상적인 여론이나 언론, 획일적인 교육에 흔들리지 않아요. 일종의 통찰적 주체성을 가지는 사람이 되는 거죠. 그렇게 성찰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동화독법』을 밀고 나간 질문은 뭘까요? 심청이가 심봉사에게 그랬듯, ‘어떻게 눈을 뜨게 할 것인가?’ 일까요?
“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요. 시련 당하는 사람들을 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그들의 고통의 아우성을 듣지 못하는 건 아닌가? 그런 것들이 이 책 전반에 걸쳐져 담겨 있는 셈이에요. <이솝우화>도 그렇고 <신데렐라>도 그렇잖아요. 우리가 관성이나 고정관념 때문에 놓치고 듣지 못하는 아픔의 절규가 있어요. 귀를 기울일 때만 들리는 소리들이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그 사회는 자기 변화를 가져와요. <개미와 배짱이> 이야기를 보세요. 부지런한 개미의 최종적 삶의 모양은 굉장히 몰인정하잖아. 상대가 어떻든 간에 춥고 배고픈 날 문을 두드렸을 때, 문전박대했잖아요. 아파할 줄 모르는 존재가 된 거에요. 비극이죠. 토끼전도 그래요. 남의 간을 빼먹는 사람은 대체 누군가요? 제 삶을 밀고 나간 질문도 비슷해요. 아파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현실을 아파하는 거죠.”
선생님의 글을 볼 때마다, 늘 주변을 둘러본다는 인상을 받아요. 혹시 얘 때문에 아픈 존재는 없나? 사람 아닌 존재들까지 배려하는 시선이 인상적이었어요.
“배려라는 말도 잘 쓰지 않아요. 배려라고 하면, 상대방에게 적선하는 느낌이 들잖아요. 개미가 베짱이가 불쌍하니 먹이를 주면 그만이다, 는 아니에요. 베짱이의 가치를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그게 이루어져야 해요. 상대방에 대한 적극적인 인정과 존중이 중요한 거죠. 걔는 ‘찌질이’야. 그러니까 봐주자. 이런 방식일 수 있잖아요.
약자를 충분히 담아내야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존재를 적극 인정하는 게 그 못지않게 중요해요. 결국, 아픔에 관한 감수성이 필요한 거죠. 그게 없는 사회는 정말 무서운 사회에요.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희생당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사회죠. 인어공주를 몰라보는 왕자를 보세요. 자기를 살려준 존재인데도 못 알아보죠. 그런 감수성이 없는 거예요.”
선생님의 그런 감수성, 생각하는 힘은 역시 오랜 시간의 독서에서 형성된 걸까요? 어린 시절 독서 환경은 어땠나요?
“아버지 어머니의 영향이 커요. 아버지께서 책을 많이 읽으셔서, 집에 항상 읽을 게 많았어요. 어릴 때부터 뭘 보거나 읽거나 하면 대화를 많이 했어요. 정답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생각할 수 있게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50년 전이니까, 자유로운 교육이 거의 없는 풍토에서도 아버지는 내가 자유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아이로 길러주신 거죠. 언제나 너의 견해는 어떠냐? 왜 그러냐? 이런 것들이 중요했어요.
어릴 때 일본에서 건너왔으니 한국말을 잘 못하잖아요. 책 읽는 일이 힘들었어요. 모자라고 하면 쓰는 모자만 알지 모자(母子)라는 의미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식이었으니까요. 이런 게 많이 도전됐죠. 돌이켜보면, 한국에서 성장한 시간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밀고 나갔던 것 같아요. 한국 교육 방식과 시스템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질문이 허용되지 않아서, 그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밀어 나가야 했고요.”
“’재를 뒤집어쓴 소녀 신데렐라’는 그런 점에서 어떻게도 빠져나올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어제와 오늘이 같고, 오늘과 내일이 달라질 전망이 보이지 않는 암담함을 의미합니다.(p.68)”라는 대목이 있어요. 친구나 선배들과 나누던 이야기가 떠오르더라고요. 아직 요정 할머니를 만나지 못한 신데렐라, 희망을 의심하는 신데렐라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희망은 의심받게 되어 있는 거예요. 희망이라는 게 실제로 놓여 있고, 잡을 수 있는 걸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희망적인 존재가 되면 돼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게 답이에요. 희망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내 존재가 희망이 되고, 이길 수 있다,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에요.
그러면 새로운 목표와 새로운 지평이 계속 생겨나거든요. 그때야 자기가 가야 할 길이 보여. 그런 힘이 없으면 갇혀 버려요. 희망이라고 설정한 것에 내가 속거나 당하거나 휘둘리는 거죠. 그런 것들이 나를 망가뜨리지 못하게 만들어야 해요. 희망을 설정한 그 자체에 휘둘려서 의심을 받고 있다면, 생각해볼 일이죠. 그런 의식을 갖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험난한 세상입니다. 하지만 바위 틈 하나 정도만 있으면 됩니다. 포기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면 되는 거지요. 아무것도 아닌 듯 해도 ‘조금씩’ 밀고 나가면 그 바위틈은 어느새 난공불락의 견고한 요새가 될 수 있습니다. 미미하게만 여겼던 그 자리가 하늘 독수리의 습격도 지켜내는 보물 주머니가 되는 놀라운 역전, 이걸 깨닫는 순간 새삼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용기와 지혜가 쑥쑥 자라날 것만 같지 않나요? 이제 보니 토끼굴, 우습게 볼 게 아니네요.(p.225 <간을 놓고 다녀야 하는 토끼들을 위하여> 중)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