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중 지드래곤이 제일 탐난다” - 가요계 역사를 다시 쓴 미다스의 손, 김창환
“만들어진 스타가 아니라 음악을 잘하는 친구가 스타가 되어야 한다!”
김창환은 신승훈, 김건모, 박미경, 클론 등 1990년대의 굵직한 이름을 잇달아 발굴하고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어준, 한국 가요계의 거물이다. 만든 곡마다 대중의 호응을 속속 빨아들인 미다스 터치가 따로 없다. 1990년대 음악계를 정리한 단 두 개의 키워드가 있다면 '서태지'와 '김창환'일지도 모른다.
김창환은 신승훈, 김건모, 박미경, 클론 등 1990년대의 굵직한 이름을 잇달아 발굴하고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어준, 한국 가요계의 거물이다. 만든 곡마다 대중의 호응을 속속 빨아들인 미다스 터치가 따로 없다. 1990년대 음악계를 정리한 단 두 개의 키워드가 있다면 ‘서태지’와 ‘김창환’일지도 모른다.
1980년대 초반 DJ 1세대에서 대표적인 작곡가로, 프로듀서에서 기획사 사장으로 발돋움한 그의 이야기 속에는 한국 대중음악의 최근사가 고스란히 배어있다. 그렇다고 그가 박제된 역사의 증인은 아니다. 인터뷰 내내 음악에 대한 일편단심 그리고 감탄을 부르는 트랜디한 안목을 보여줬다. 그는 “만들어진 스타가 아니라 음악을 잘하는 친구가 스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떻게 작곡가가 되었나요?
전 꿈이 작곡가가 아니었어요. 프로듀서가 꿈이었죠. 그래서 어릴 때부터 ‘작곡가로 유명해지자’ 이런 마음은 전혀 없었어요. 어릴 때는 밴드를 해서 대학에 가면 꼭 ‘대학가요제 나가야지’ 생각을 했었는데요. 막상 대학교에 가서 나이트를 다니면서 흑인음악을 처음 만난 거죠. 제가 그 때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꼭 앨범을 보여 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 앨범 표지에 다 흑인이 찍혀 있어서, ‘내가 이런 흑인 음악을 좋아하는 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우리 때는 불법 백판을 샀잖아요. 제가 흑인만 그려져 있으면 다 샀어요. 그래서 결국 ‘대학가요제’가 아닌 DJ로 방향을 틀게 된 거고요. 결국 DJ 1세대, 1980년대 다운타운의 유명한 DJ가 되었죠.
프로듀서의 꿈은 어떻게 갖게 되었나요?
마돈나 때문이었어요. 마돈나라는 여자가수가 데뷔를 했는데 음악이 무척 좋았어요. 그 중에서도 「Holiday」를 제일 좋아했는데요. 그 때 젤리빈 베니테즈(Jellybean Benitez)라는 DJ가 프로듀싱을 했어요. 나도 DJ니까 가수 프로듀싱을 할 수 있겠다 싶어서 혼자 공부를 시작했죠. ‘이 가수의 프로듀싱은 이 사람이 했구나’를 찾아내면서 음악을 듣다보니까 프로듀서는 작곡가와 다르구나. 가수의 색을 결정을 하는 중요한 사람이구나 라는 걸 알게 되었죠.
DJ가 어떻게 신승훈을 데뷔시킬 수 있었던 거죠?
제가 랩을 처음 쓴 사람 중에 하나에요. 그 때 친구를 데뷔시키기 위해 데모 음반을 만들었는데 친구가 랩을 잘 못했어요. 그래서 내가 랩을 하고 친구는 노래를 불렀죠. 당시에는 댄스음악이 잘 안 나갔고, 음악판이 다 발라드였어요. 그래서 선뜻 앨범을 내주는데도 없었죠. 음반회사에서 몇 군데 전화가 오기는 하는데 친구가 아니라 저를 데뷔시키고 싶어 했고요. 저는 DJ 다음 직업으로 프로듀서를 할 거라고 정해놓았기 때문에 가수가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다운타운에서 잘나갔기 때문에 음반사와 개런티가 안 맞는 것도 있었고요. (웃음) 여하튼 댄스음악은 안 된다 하는 기존 세력들과 부딪히다 보니까 호랑이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발라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변진섭, 이승환의 인기를 꺾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았죠. 그게 신승훈이었어요.
신승훈의 1집 외에는 음악적 터치가 거의 없었어요. 다른 소속 가수들과 달리 앨범에 관여를 안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실 ‘날 울리지마’는 R&B곡이었어요. 그 노래를 써서 줬는데 R&B가 아니라 신승훈의 방식대로 부르는 거예요. 그때 ‘노래를 잘한다고 해서 모든 노래를 잘하는 건 아니구나. 신승훈은 가요를 할 수 있는 사람이고 R&B를 할 수는 없구나’를 느꼈죠. 결국 ‘나하고 신승훈은 작품으로는 서로 안 맞는 구나.’도 알게 되었고요. 그 후에 ‘날 울리지마’를 R&B로 부를 수 있는 가수를 찾으려다 보니 흑인음악에 감성을 가진 김건모를 만나게 되었어요. 이곳 저곳 오디션에서 탈락한 것으로 알지만 저는 알아봤습니다. 그루브와 소울이었죠.
나의 빅히트 곡을 뽑자면 무엇인가요?
1위는 「핑계」(김건모), 2위는 「잘못된 만남」(김건모), 3위는 「초련」(클론), 4위는 「꿍따리 샤바라」(클론), 5위는 「상상속의 너」(노이즈)입니다.
워낙에 대박 난 곡이 많아서 ‘한반도 대박’이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입니다. 특히 애착이 가는 노래가 있을 것 같은데요?
굳이 든다면 김건모 2집의 「핑계」(1993)에요. 김건모를 국민가수로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저 자신에게도 작곡가로서 자신감을 준 노래죠.
가사 중 베스트를 뽑자면요?
「잘못된 만남」을 만들고 전화를 많이 받았어요. 전 가사에 나오는 어깰 두드리며 잊어버리라 한 ‘다른 내 친구’에요. 친구 둘에게 있었던 실화를 가사로 썼는데 사람들이 ‘너 어떻게 내 얘기를 썼어?’ 하면서 연락이 많이 왔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랑을 하는구나를 깨닫게 됐죠.
‘꿍따리 샤바라’는 어떻게 영감을 얻었나요?
구준엽과 강원래를 가수로 데뷔시키고 싶은데, 다른 가수들만큼 노래를 잘 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제가 「핑계」 뮤직비디오를 찍으려고 자메이카에 갔다 왔거든요. 거기 클럽에서 (강원래 랩처럼) 걸쭉하게 주절거리는 랩이 나왔어요. 그 노래를 들으면서 클론의 보컬 스타일의 힌트를 얻었어요. 그리고 솔직히 애들이 노래를 잘 못하다 보니까 단순하고 음폭이 없는 곡을 만들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완성된 곡이 「꿍따리 샤바라」였어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만들고 나서 굉장히 우울했어요. ‘이렇게 동요 같은 노래를 써야 하나?’ 멜로디가 너무 단조롭잖아요. ‘내가 정말 별 걸 다하는 구나’라는 자괴감 같은 게 들었죠.
곡이 이렇게 사랑받은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저는 대중을 잘 읽어 낸다고 생각해요. DJ를 할 때도 제가 노래를 선곡하면 관객의 반응이 굉장히 열광적이었어요. 다들 플로어로 쏟아져 올라왔고 폭발적으로 춤을 추곤 했어요. 팝송을 들어도 이건 파급력은 있는데 빌보드 4위정도 밖에 못가겠다, 이건 1위는 하는데 파급력은 없겠다, 이런 것을 모두 맞췄어요. 저는 정말 DJ가 천직인 것 같아요. 내가 히트를 하는 것보다 내가 고른 곡, 내가 고른 가수가 히트를 하는 게 더 짜릿해요.
지금도 그 감은 계속 유지되고 있나요?
네, 지금도 그래요. 뭐가 유명할 것 같고, 흐름이 어떨 것 같고를 알 수 있어요. 다만 요즘에는 그 흐름을 소화해줄 수 있는 아티스트를 데리고 있지 않을 뿐이죠. 그러니까 요즘은 내가 시대를 잘못 읽어낸다기 보다는, 그 시대와 흐름을 반영할 어린 친구를 못 만나고 있는 거죠.
예전에 굉장히 무섭다고 소문나 있었어요. 지금은 별로 안 그런 것 같은데요?
1997년에 경영자의 잘못으로 라인음향이 공중분해가 되었어요. 나는 음악만 열심히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죄인처럼 된 거에요. 검사가 “너 왜 이렇게 쓰레기 같은 노래를 만들었어?”라고 제 음악을 모독까지 했어요. 그 때 소속 가수들도 다 떠나고 클론만 남았어요. 클론을 가지고 다시 시작한 게 2000년도, 다시 뽑은 게 홍경민, 채연, 이정이고요. 원래 성격은 새로운 트렌드를 해야 하고, 1위 안하면 못 견디고 그랬어요. 그런데 세금 사건이후 관심을 받는 게 두려워졌죠. 그래서 신승훈, 김건모는 지금도 인터뷰에서 “김창환은 무섭고 카리스마 있다” 이런 말을 하는 거고, 채연부터는 “김창환은 오빠 같고 자상하다” 이렇게 말하는 거죠. 이제는 가수들한테 하기 싫은 거 안 시켜요. 자기 편한 걸 해주니까 자연스럽게 가수들이 따라오더라고요.
신승훈, 김건모, 클론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본 사람이잖아요. 그들의 장점을 제일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요.
신승훈은 천상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요. 처음 데모를 들었을 때 이렇게 매력적인 미성이 있구나, 그리고 굉장히 고급스럽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여성들의 감성을 가장 잘 건드릴 수 있는 목소리고요. 건모는 아무도 개척하지 않은 곳을 혼자 공부하는 친구였어요. 그 시절에는 정말 R&B를 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R&B를 하고자 하는 사람도 없었거든요. 클론 같은 경우 무대 위에서는 이 친구들을 이길 친구가 없다는 자신을 가지고 있었어요. 김건모가 아무리 노래를 잘해도 퍼포먼스로는 클론을 이길 수 없죠.
음악하면서 아쉬운 점은 없었나요?
클론 노래 중에 「Funky tonight」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제가 흑인음악 그리고 그중에서도 펑키한 음악을 좋아해요. 그동안 한국음악에 다양한 장르들을 시도했으니 이번에는 펑크다 싶어 타이틀로 밀어붙였죠. 뮤직비디오 찍는 것도 1억 가까이 퍼부었구요. 그런데 결국 잘 안되었어요. 주변에 얘기를 들어보니까 “노래는 좋은데 또 듣고 싶지는 않아요.”라더군요. 그러니까 ‘마이클 잭슨이 멋있지만 CD는 에이스 오브 베이스(Ace of Base)를 사요.’ 와 비슷한 논리죠. 대중은 어려운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 때 기준점에서 내가 오버하면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죠.
한국 대중의 귀에 대한 실망도 했겠어요?
제가 영어를 잘했으면 더 성공했을 거다 이런 말을 종종 해요. 스웨덴에 데니스 팝(Dennis Pop)이라는 프로듀서가 있어요. 우연히 만나서 이야기를 했는데 저와 자라온 환경이 비슷한 거예요. 그 친구는 유럽에서 유명한 DJ였고, 하물며 좋아하는 음악 목록도 똑같아요. 그 사람이 밀리 바닐리(Milli Vanilli) 노래를 리믹스할 때, 저도 한국에서 리믹스라는 작업을 처음 시도 했거든요. 그리고 둘이 ‘레게음악이 휩쓸 것 같아’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정말 레게 바람이 불어서 그 친구는 스웨덴에서 ‘에이스 오브 베이스’로 휩쓸고, 저는 우리나라에서 김건모로 대박을 치는 거예요. 그 친구가 어느 날은 스웨덴에 와서 같이 작업을 하자고 그랬어요. 그런데 막상 스톡홀름으로 가려니까 스웨덴은 영어를 쓰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다고 한국 사람들이 사는 것도 아니고 해서 망설였지요. 결국 조금 있다가 이 친구는 미국에 가서 백스트리트 보이스(Backstreet Boys)를 발굴했어요. 그리고 바로 엔싱크(N-Sync)를 하더라고요. (웃음 반 아쉬움 반의 표정으로) 제가 만약 그 때 스웨덴에 갔으면 브리트니 스피어스 (Britney Spears)까지 같이 했을 수도 있었지요.
자신을 음악으로 인도한 결정적인 아티스트는 누구였나요?
저는 비지스(Bee Gees)를 정말 좋아했어요. 비지스의 발라드는 물론, 디스코할 때는 더 좋았죠. 제 인생에서 음악을 듣는데 머리카락이 쭈뼛 선 노래가 3곡이 있어요. 비지스의 「Tragedy」, 퀸시 존스의 「Ai no corrida」, 갭 밴드(The Gap Band)의 「You dropped a bomb on me」죠. 지금도 이 곡들을 들으면 미쳐요.
작년에 아이돌 그룹 엔트레인(N-Train)을 만들었어요. 아이돌 음악을 해보니 어떤가요?
제가 아이돌과 작업을 거의 안 해봤잖아요. 딱 2달 활동했는데 시장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감을 잡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올해는 좀 열심히 해볼 생각입니다. 다행히 일본 쪽에서도 반응이 있고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돌을 키운다기보다는 ‘노이즈’같은 남자그룹과 음악을 한다는 느낌정도인 것 같아요. 아이돌이 아니라 남자그룹!
기존의 아이돌과 차별 점은 어떻게 잡고 있나요?
아이돌이라도 결국은 ‘음악’인 것 같아요. 예전에는 몰랐는데 되짚어보면 저희 회사가 방송 PR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동안 노래가 좋아서 성공한 것 같아요. 신승훈도 라디오에 몇 번 노래가 나오자 불이 붙었어요. 김건모도 기존에 없던 독특한 노래를 했잖아요. 박미경의 경우도 가스펠을 파워 있게 부르는 방식이 그 전에 없었기 때문에 30살에 데뷔를 해도 성공한 거죠. 클론도 애들보다는 「꿍따리 샤바라」 라는 곡이 먼저 떴고요. 홍경민도 가수 자체 보다 「흔들린 우정」이 유명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아이돌이라도 먼저 곡이 좋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이돌 중에 탐나는 사람이 있다면요?
제가 예전에 트위터에 비슷한 글을 올린 적이 있어요. SM은 동방신기, YG는 지드래곤, JYP는 비를 데리고 있어서 부럽다고요. 지금 제일 탐나는 사람은 YG의 지드래곤입니다.
SM, YG, JYP의 색을 비교해보면 어떤가요?
YG는 DJ와 R&B가 결합된 요즘 미국에서 잘나가는 일렉트릭 하우스를 하고 있죠. 예를 들면 니키 미나즈(Nicki Minaj) 같은 노래인거죠. YG가 절대적으로 팝을 쫓아가고 있다면 JYP는 기존의 박진영의 색에 트렌드가 반영된 악기로 최신 팝의 느낌을 표현하고 있고요. SM은 자기들만의 색에 맞는 음악만 주로 하는 것 같아요. SM이 스웨덴 작곡가와 많이 일해요. 유럽이나 외국 곡을 사다가 쓰는 거죠.
자신이 다른 프로듀서와 다른 게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솔직히 다른 기획사는 음악들이 다 비슷하잖아요. 그룹 이름만 바뀌었지 기획사 안에 음악들이 너무 똑같아요. 저는 같은 음악을 중복하지는 않아요. 김건모는 김건모 노래를 하고, 클론은 클론 노래를 하는 거죠.
그리고 음악은 기본적으로 소리인데 지금은 보는 것으로 너무 치우쳐 버렸어요. 물론 옛날에도 그런 비주얼 가수는 있었죠. 가수가 잘생기거나 멋있으면 음악도 뜨는 게 있었기는 한데, 지금은 전부 다 그렇다는 게 문제죠.
음악계의 발전을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요?
무엇보다 음악을 잘하는 친구가 스타가 되어야한다고 봅니다. 만들어진 스타가 아니고요. 1990년대 성공한 가수들은 음악이 중심이었어요. 클론의 구준엽, 강원래도 흑인음악을 정말 좋아하고, 음악이 인생의 전부였던 아이들이예요. 구준엽은 배우 제의가 많이 들어왔었는데, 전혀 연기에 관심이 없었어요. 걔는 지금도 돈을 많이 벌고 유명해지는 게 목표가 아니라 DJ 하는 것에 행복해 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세계적인 DJ 아비치(AVICII)와도 대등한 위치에 서있고요.
대중에게 ‘김창환의 음악’이 어떻게 남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음악적으로 유명한 프로듀서가 되어서 역사에 남자’ 이런 의도로 음악을 만들지는 않아요. 그저 제가 쓰고 만든 곡이 ‘즐거움’을 주는 음악으로 남았으면 좋겠어요.
정서의 유사성을 느끼는 뮤지션이 있다면요?
‘산울림’의 김창완 형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갔던 콘서트가 산울림이었어요. 저는 그때 산울림과 경쟁하고 있던 밴드 ‘사랑과 평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전 토토(Toto) 같은 음악도 안 끌려요. 그러니까 저는 연주를 잘한다고 음악을 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산울림 같은 감성을 좋아했죠. 그런데 아이러니는 제가 이장희를 무척 좋아했다는 거예요. 무지 대중적이고 감각적인 뮤지션이잖아요. 그런데 이 ‘사랑과 평화’를 이장희 형이 만들었어요. 이장희는 좋았는데 ‘사랑과 평화’보다는 ‘산울림’을 더 좋아했던 거죠.
현재 기획사 사장이시잖아요. 작곡, 프로듀싱을 계속 하실 건가요?
요즘 제가 가장 두려운 건 ‘이러다가 음악을 못하게 되면 어떻게 하지’ 예요. 나이를 60살을 먹어도 음악을 할 때가 가장 즐거울 것 같아요. 디자이너 이상봉씨와 그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회사의 사장이 즐거운 게 아니라 누군가가 내가 디자인한 옷을 입을 때 가장 즐겁다고요. 제가 만약 음악을 못하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날개가 부러지고 다리가 부러지는 거죠.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