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원래 무대 앞쪽 출신이에요(웃음). 연기는 거의 20년 만에 하는 건데, 늘 했던 것처럼 느껴져서 신기해요. 힘든 줄도 모르겠고, 정말 재밌고 즐거워요.”그렇다, 그녀는 ‘무대 앞쪽 출신’이다. 지난 20년간 뮤지컬 음악감독과 연출가로 살아왔지만, 1990년대 초 부산시립극단 배우로 무대 위에서 활동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Next to Normal)>을 보는 순간, 무대 회귀 본능이 되살아났다.
“2년 전에 외국에서 작품을 봤는데 ‘저 역할이면 모든 여배우가 탐내겠다, 나도 다시 연기를 하고 싶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일단 작품이 정말 좋았고, 저는 스태프적인 면에서도 보니까 스토리, 음악, 세트가 깔끔한 게 전체적으로 너무나 잘 만들어진 거예요.”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은 2009년 토니상 3개(음악상 포함) 부문, 2010년 퓰리처상 드라마 부문을 수상한 탄탄한 작품. 우울증을 앓는 엄마 다이애나와 가족들 간의 갈등과 아픔, 치유 등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소재를 파워풀한 록 음악으로 담아낸다.
그런데 꿈 많은 20대도 아니고, 이미 공연계는 물론 사회적인 리더로 대중의 탄탄한 인정까지 받고 있는 박칼린 씨가 20년 만에 다시 연기를 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제 그녀에게는 ‘그런대로’라는 말은 용납이 아니 되지 않던가. 용감한 것인가, 그만큼 자신이 있는 것일까.
“그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저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요. 안정을 취하나요? 그런데 저도 계산 엄청 해요.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결정을 안 내려줘서 힘들어할 때가 많거든요. 다만 결정을 내리면 신중하게 생각했던 것이기 때문에 믿고 밀고 나가는 거죠. 지금껏 쉽게 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넥스트 투 노멀>에서 다이애나를 맡을 때도, 그러니까 20년 만에 무대 앞쪽으로 돌아가는 데도 신중히 생각했다는 얘기다.
“기회가 주어졌다고 선뜻 ‘예스’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넥스트 투 노멀>도 갑자기 제의가 들어온 거라면 ‘왜 나를 캐스팅 하느냐?’고 되물어봤을 거예요. 하지만 이 작품의 경우 이미 오랫동안 생각해왔어요. 일단 나이 때가 맞고, 제일 중요한 음역대, 또 색깔, 캐릭터 등 조건이 다 맞아 떨어진 거죠. 나는 오로지 작품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빠져서 잘 될 것 같으면 빠지거든요.”그녀는 작품에 대해 이미 많은 그림을 그려 놓았기 때문에 주저 없이 오디션을 봤고 배우로서 신나게 내달리고 있다. 그런데 많은 작품을 직접 만들어냈으니 자꾸 무대 안팎의 여러 모습이 보일 것 같다.
“보이지만 각자의 영역이 있으니까 존중하고 배우로서의 선을 명확하게 지켜요. 다만 제가 연출이나 음악감독일 때 배우에게 원하는 것을 뽑아내기 위해 설명을 하잖아요. 그 입장을 알기 때문에 제작진이 저에게 얘기를 하면 ‘왜 저 말을 하는지’ 빨리 알아듣는 면은 있어요.”하지만 제작진의 말을 빨리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것을 100% 뽑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배우’라는 직업이 존재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연기에 대한 평가는 훨씬 냉정할 것이다. 이미 많은 것을 이룬 상황에서 바닥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모험, 두렵지 않을까?
“연출한다고 했을 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칼린 또 나대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얼마나 좋은 채찍이에요. 그래서 더 똑바로 해야 하는 거죠. 나를 믿었던 사람들이 욕먹지 않게 제대로 해야 하는 거잖아요. 평가는 관객의 몫이지만, ‘관객이 뭐라고 생각할까’를 먼저 신경 쓰면 뮤지컬 작업이 안 돼요. 평이란 건 작품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최선을 다해 만들었을 때 그 뒤에 따라오는 거니까요.”
40대 중반에도 이토록 지치지 않고 신나게 달릴 수 있는 박칼린 만의 비결은 무엇이란 말인가. ‘열정’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들도 한 10년 하면 지치지 않던가.
“재밌으니까 하는 거예요. 작품이 좋으면 배우는 연기하고 싶고 연주자는 연주하고 싶거든요. 한 번도 모든 걸 일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어떤 분야가 파악이 되면 다른 일을 해요. 내가 어떤 일에 재미를 못 느끼면 공장식으로 밖에 못하거든요. 그 바닥에 도움이 안 되는 거죠. 그럼 빨리 빠져줘야 해요. 저는 프로젝트에 도움이 안 될 때 알아서 빠져주는 사람을 제일 사랑해요(웃음).”
하지만 우리 속담에 ‘한 우물만 파라’고 했는데.
“저도 계속 한 우물만 판 것 같은데요? 인생 즐겁게 살기. 그게 제 모토예요(웃음).”그래도 슬럼프 정도는 있어야 사람냄새도 좀 나고...
“바빠 죽겠는데 무슨 슬럼프? 우리가 살 수 있는 몇 십 년이 얼마나 짧은데요. 세상 재밌지 않아요? 저기 가서 구경도 해야 하고, 이것도 맛봐야 하고, 이 사람하고 얘기도 해보고 싶고... 잘 생각해봐요.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아요? 불면증이 생길 정도로 자는 시간도 아까울 때가 많은데. 물론 아픔도 있고 힘든 것도 있죠. 그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삶의 기쁨도 더 크게 느끼는 거고요.”대화가 이쯤 진척됐으니 그녀가 달가워하지 않을 얘기를 꺼내본다. 지난 1995년 창작뮤지컬 <명성황후>를 통해 국내 뮤지컬 음악감독의 첫 장을 연 이후 박칼린 씨는 항상 공연계 중심에 있었다. 그런 그녀가 2010년 TV 예능프로그램에서 합창단을 지도하는 모습이 화제가 돼 국민스타로까지 떠올랐을 때 기자는 참 궁금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지인들끼리 똑같은 얘기를 해요. 방송을 위해 무언가 한 것도 없고, 대회 때문에 연습한 것밖에 없어요. 박칼린은 하던 대로 했을 뿐인데 이게 뭐지? 그럼 한국에 무언가 모자랐나?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경제난도 가장 빨리 벗어난 나라고, 카리스마 있는 사람, 리더십 있는 사람도 많고요. 많은 분들이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끌어안아서 리드할 수 있느냐’고 물어봐요. 저는 그냥 부모님이 가르쳐준 대로, 뮤지컬할 때처럼 한 것뿐이에요.”방송을 통해 유명세를 타고 난 뒤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일까?
“내가 뭘 얻었지? 그 질문이 꼭 나오는데 사실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다고 제가 차를 바꾸거나 집을 사거나 옷을 바꿔 입은 것도 아니고, 친구들이 바뀌거나 무언가 선택하는 데 있어서 결정하는 스타일이 바뀐 것도 아니고요. 다만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알아봐줘서 골목을 지나는 시간이 좀 더 걸린다는 것. 그게 얻은 것인지 잃은 것인지는 모르겠네요(웃음).”마지막으로 ‘박칼린’으로 희망하는 것은?
“달나라 여행, 우주여행? 제발 좀 나갔다 왔으면 좋겠어요(웃음).”
우리는 그녀의 무엇에 그렇게 열광했을까. 기자가 느낀 박칼린 씨의 매력은 ‘제대로’였다. 제대로 놀고 제대로 일하고 제대로 좋아하고 제대로 싸우고. 카리스마는 ‘완벽 추구’에서 시작된다. 스스로 느슨하면서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람은 없다. 어쩌면 우리는 내 안에 숨은 ‘제대로 본능’을 누군가 일깨워주길 바랐는지 모른다. 그래서 서슬 퍼렇게 지휘봉을 흔드는 그녀에게 그토록 빠져든 것이 아닐까.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은 11월 18일부터 내년 2월 12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공연된다. ‘마녀’라 불릴 정도로 배우들을 잡던 박칼린 씨가 그 칼 같은 잣대로 스스로도 완벽하게 재단했는지 확인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