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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국가대표 작곡가!

박근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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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에게 트렌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트렌드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트렌드를 따라야 하기도 해야 하며, 트렌드에서 벗어도 나야 한다.

작곡가에게 트렌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트렌드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트렌드를 따라야 하기도 해야 하며, 트렌드에서 벗어도 나야 한다. 이 미묘한 연관성은 대중음악이 시작됐던 1900년대 초반은 물론이고 현재도, 그리고 미래에도 안고가야 할 숙제이자 숙명이다.

박근태는 이런 연결고리들을 질서 있게 통제하고 엮어내면서 눈부신 성공 퍼레이드를 펼친 작곡가다. 지난 20년간 대중을 위로해준 노래들 「100일째 만남」(룰라), 「행복한 나를」(에코), 「시간이 흐른 뒤」(윤미래), 「친구여」(조피디), 「Timeless」(에스지워너비), 「사랑 안 해」(백지영) 등 수많은 박근태 작곡의 히트 넘버들은 유행과 따로 놀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내는 역설의 미학을 실현했다.

그의 음악은 새 천년 음악계를 지배했고 대중들은 그의 음악을 아낌없이 사랑했다. 2000년대 국가대표 작곡가는 박근태다. 데뷔 20년을 맞이하기도 한 2011년, 그는 곧 한 여자의 남편이 되는 경사도 맞이할 예정이다. 가정과 음악 모두 어깨가 무거워지는 시점이라고 예상했지만 그는 “20년 동안 쉰 적이 없다가 쉬고 있는 요즘이 편하다”고 말했다.


데뷔 20년을 축하한다.

“20년이라고 하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실감도 잘 안 나요. 앞으로 새로 계획하는 일들, 음악 작업들 이런 것들을 생각해봤을 때 더 실감이 안 나고요. (장가 소식을 물었더니) 확정은 안 됐는데, 4월에서 5월에 할 것 같아요. 신부는 아이티 분야에서 일해요. 그쪽에서 일한지 10년 정도 됐어요. 음악 모임이 아니라 사업자 모임이 있었는데, 거기서 만났어요.”

1990년대 중반부터 좋은 곡을 썼지만, 새천년 국내 최고 히트 작곡가가 박근태라고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할 것 같다.

“히트곡이 많다는 게 자랑스러운 게 아니라, 데뷔 때부터 다양하게 추구 해왔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요. 좀 더 정확히 설명해드리면, 우리나라에서 미디엄 템포라는 특화된 장르는 2000년 초반 「벌써 일년」으로 정립됐죠. 이후로 에스지 워너비(Sg Wannabe)란 친구들을 만들면서 「Timeless」라는 곡으로 그와는 또 다른 미디엄 템포의 방향을 세워놨거든요. 그러자 2~3년 간 소몰이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굉장히 많은 곡들이 나왔어요. 그런 부분에 있어서 제가 시작했다고 말은 못하겠지만, 「벌써 일 년」과는 다른 코드였고, 그 이후에는 미디엄 템포를 작업한 게 한 두곡 밖에 없어요. 엠투엠(MtoM)의 「세 글자」 이후에는 쭉 없다가, 2009년도에 다비치(Davichi)의 「사고쳤어요」 정도. 그거 외에는 미디엄 템포를 해본 적이 없어요. 스스로 배제한 거죠.”

송라이터로서 정상에 올랐다고 느꼈을 때는 언제인가.

“이효리, 삼성전자와 했던 「Anymotion」요. 제가 생각할 때, 좋은 음악의 기준은 그 시대가 하지 않았던 것. 새로운 음악 장르가 됐든 조합이 됐든, 어떤 그런 패키지 형태로 새로웠을 때인 것 같아요.”

대중적 반응을 제외하고, 실험이나 고민을 많이 했던, 여러 측면에서 완성도가 높은 곡은 무엇인가.

“두 가지 포인트가 있을 수 있는데요. 하나는 정말 음악 그 자체가 정말 특이한, 그러면서도 대중들이 좋아하는 완성도가 있고요. 온전히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 그래서 완성도가 높을 수 있잖아요. 후자가 저한테는 만족스러운 결과물이었어요. 그런 대표적인 곡이 백지영의 「사랑 안 해」였는데요. 그 곡은 노래 녹음만 두 달 했어요. 그 당시 지영씨의 목 상태 상태가 좋지 않았던 시기였고, 두 달 동안 오케이 버전만 9개가 나왔었어요. 정말 잘 세공된 오케이가 9개였는데, 그걸 다 버리고 두 달 째 되던 타이밍에 한 번에 나온 것을 택했죠. 굉장히 그 사람의 상황과 딱 떨어지게끔 유도를 했고, 어떻게 보면 노렸다고 하기보다는, 철저하게 이 사람과 나와의 집중적 결과물인 거죠.”

오선지만 봤을 때, 송라이팅 자체가 우수했던 곡은.

“한 10년간 썼던 곡 중에는 다비치의 「사고쳤어요」. 멜로디가 좋아서요.”

본인은 어떤 스타일인가.

“예전에는 너무 섬세해서 문제가 될 정도였어요. 일을 할 때도 꼼꼼함이 지나쳐서 스스로 피곤했던 스타일. 그게 2000년대 들면서, 180도는 아니더라도 많이 바뀌었어요. 이제는 굉장히 너그럽고 여유 있죠.”


박근태 인생의 전환점은 언제인가.

“2000년도였어요. 1990년도에 데뷔를 록으로 했죠. 록 기타리스트였고, 온통 듣는 음악, 하는 음악이 록이었죠. 가요도 록발라드였어요. 그래서 음악적 편견이 굉장히 심했고,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죠. 그런데 작곡가 데뷔 이후, 사람들은 전혀 다른 걸 요구하더라고요. 내가 맞다고 생각하면 계속 밀어붙이고, 남의 말 잘 듣지 않는 전형적 성격이라 주변사람들이 많이 힘들어했죠. 히트곡이 생기고 나서부터 일에 대한 자세 음악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 게, 작곡은 혼자 하지만 음악이 탄생하기 까지 많은 스텝의 도움과 협력이 필요하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일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과 제가 가진 능력을 합치려고 했었죠. 그런데 제가 데뷔한 1990년 무렵은 잘 아시겠지만 암흑의 시대였잖아요. 댄스뮤직이 점령했으니까요. 그만큼 솔로 가수들이 몇 명 없었고 그만큼 또 지금 하고 비교해도 다르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시장이 위축되어 있었죠. 그리고 소위 ‘뽕땐스’의 시기. 2000년도에 들어가면서 소몰이 시기하고 비슷한 유행이었죠. 그때 정체성에 굉장히 혼란이 왔었어요. 저도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원하는 걸 맞춰주다 보니까 그런 곡을 썼는데, 돌이켜보면 절대 제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었고. 그런 충돌 부분이 굉장히 심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남들 다 댄스 할 때 자꾸 발라드로 부딪히고…”

그런 노력이 새천년에 들어와서 박근태 시대의 기반이 된 것이 아닐까.

“기반은 아니고요. 어떤 성격이죠. 성격이 남아 있는 건데, 그걸 어떻게 합리적으로 영리하게 하느냐. 나의 문제였던 것 같아요.”

계기가 된 곡은 무엇인가.

“곡은 아니고요. 2000년대 이전에 지독하게 슬럼프가 있었어요. 1년 반 정도를 아무것도 못했어요. 잘 아시겠지만, 음악가는 어느 정도 영감이라는 게 필요하거든요. 그때 독일에서 페스티벌이 있었어요. 전 세계 작곡가들이 모여서 같이 음악작업을 했는데, 2000년이었을 겁니다. 꽤 유명한 분도 많았어요. 모타운 소속 작곡가 등 각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많이 왔었죠. 우리나라에서는 저와 조피디가 갔어요.

그 페스티벌에 참가해서 다른 나라 작곡가들과 같이 작업도 하고 나온 결과물로 공연도 했어요. 저는 기타를 쳤고. 일주일 과정이었는데 거기서 참 느낀 게 많았어요. 그 사람들은 즐기면서 음악을 하더라고요. 전 그런 광경을 처음 봤고 처음 알았어요. 전에는 성공하려고, 내가 원하는 걸 하기 위해서 밤새는 게 일이고, 되든 안 되든 했는데. 그들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음악의 즐거움을 알게 된 건가.

“잘 마무리 하고 돌아오는 일정이었는데 저는 안 돌아왔어요. 안 돌아오고 두 달간 유럽에서 혼자 있었어요. 그러면서 혼자 많은 걸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음악을 듣고 느낌이 있었다고 하기보다는 좋은 계기가 됐다는 거죠. 1990년대, 2000년대 이전에 어떤 제가 추구하고 얻고 싶고 했던 것들이 좀 너무 뭉뚱그려져 있었는데, 그걸 계기로 느꼈던 건 스스로 편안하게 하고 음악도 편협하게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었죠.”


박근태란 이름이 가장 먼저 알려지게 된 건 룰라의 「100일째 만남」일 것이다. 이런 히트작을 내놓고도 그 다음해에는 왕성한 활동을 펼치지 않았다.

“일부러 안 했어요. 하고 싶은데, 실력이 없으니까 잘 못하겠더라고요. 제가 댄스음악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게 첫 곡이었죠. 지금 들으면 말이 안 되죠.”

박?태에게 허쉬(Hush)는 빼놓을 수 없는 앨범일 것이다.

“원래 일진이(허쉬 멤버), 심현보, 저. 이렇게 친했어요. 그래서 “우리 뭐 한번 해보자” 해서 조수아가(허쉬 멤버) 합류하고, 동아뮤직 사장님께 제작을 부탁드려서 공동제작으로 했죠.”

그 때 이후로 신인을 처음부터 끝까지 봐주는 프로듀싱은 거리를 두는 것 같다.

“허쉬는 프로듀서를 다 했는데, 상당히 부대꼈어요. 그래서 지금은 효율적으로, 프로듀서를 하더라도 한두 곡만 제공해요. 곡을 받아서 취합하는 게 현명한 거지, 욕심내면 좋은 것 같진 않아요.”

체리필터의 「느껴봐」는 의외였다.

“결과적으로 나중에는 록을 잘 못 하겠더라고요. 어렸을 때 좋아한 건 남아있는데, 실력은 발전을 못 시켜서…”

박근태란 작곡가의 성공 요소는 뭐라고 보나.

“저를 잘 안 내세워요. 거의 내세우지 않으면서 그 사람(가수)의 매력을 끌어내는 편이거든요. 제 멜로디에 맞추라기 보단, 제가 그 사람의 장점을 살려주는 편. 아까 말한 「사랑 안해」 때와 같은, 그런 점인 것 같아요.”

2000년대부터 그는 기업과 연관된 음악에도 참여했다. 화장품, 휴대전화기 등에 삽입된 노래가 영상의 중심을 이루며 해당 브랜드의 새 이미지를 창출하는데도 높은 이바지를 한 것이 사실. 음악의 힘을 다른 매체에서도 보여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불거진 표절 논란으로 많은 잡음이 생겨나기도 했던 사건이었다. 충분한 시간이 지난 지금, 당시 상황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봤다.

기업 홍보와 연관된 음악도 했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쯤인가 하나라도 더 보고 배우려고 광고 프로덕션에 한번 놀러 간적이 있었어요. 판이 작지만, 지금보다 CM송이 많았잖아요. 그게 어떻게 보면 사람들의 소비 포인트를 접점을 만들어주는 것인데, 그런 걸 보고 참 매력 있다고 생각했어요. 음악이 상업과 연계되는 직접적인 역할을 하는 거니까요. 그런 (기업 광고음악) 작업들이 저로서는 놀랍고 재밌는 결과물이죠.”

민감한 부분이지만 표절 논란을 일으킨 문근영의 「& Design」, 쥬얼리의 「Super star」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다.

“참 많은 분들이 오해를 하시는데, 만약에 제가 알았으면 그렇게 떠들썩한 식으로 진행이 안 되게 했겠죠. 왜냐면 이건 케티에프(KTF)에서 많은 비용과 최고 배우가 출연해서 하는 건데 저로서는 굉장히 열정을 가지고 쏟아 부은 작업이었거든요. 근데 그렇게 됐더라고요.(웃음) 그래서 나중에는 좀 안타까웠어요.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저는 어렸을 때부터 가요를 안 들었어요. 가요를 거의,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가 아시는 정도밖에 모를 정도였어요. 이거 어디서도 얘기해 본적 없는데, 가요를 들었던 건 거의 2000년대 다가와서였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감사해야 한다면 스스로의 제약이, 틀이 좀 없는 편이라는 것이라고 봅니다. 작곡가로 데뷔하고 나서 남들이 보기엔 기이한 게 계속 유지가 됐던 것이고요.

나중에 조덕배 선배님을 만났어요. (문근영의 「앤 디자인」은 조덕배의 「나의 옛날이야기」와 표절시비가 일었다) 풀기 위해서였죠. 그러고 난 다음에 정리가 된 거죠. 다른 사람 음악을 듣지 않은 게 장점일 수 있지만, 그게 어떤 가수의 곡으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그렇고요. 내제된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거죠. 「슈퍼스타」는 의도가 전혀 아니었어요. 전혀 출발이 달랐어요.”


작곡 방식이 주로 가수의 색깔을 찾아내어 곡을 쓰려는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신화의 「Brand new」나 길학미의 「Super soul」은 그런 부분에서 어긋난 것 같다.

“「Brand new」 같은 경우에는 레퍼런스가 확실히 「Crazy in love」가 맞아요. 그 부분에 있어서는 그게 맞다! 고 생각을 해서 제가 밀어낸 건 있어요. 이전 신화 음악과는 상당히 다른 음악이잖아요. 한 8개월 고민했거든요. 결과물을 보면은 저도 만족스럽지는 못해요.”

단일 곡으로 가장 저작료가 높았던 곡은.

“「사랑 안해」가 아닐까요. 시간이 지나도 많이 불릴 노래 같아요. 그런 결과물이 나온 거 자체만으로도 만족해요. 더 바랄 것도 없고. 그리고 굉장히 고생 많이 했거든요. ‘한 번 만들어보자!!’였어요. 개인적인 거 다 떠나서, 물론 친했으니까 더 했던 게 있었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요. 방송 정지에 이미지가 더 이상 내려갈 데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가수의 잠재력을 믿은 겁니다. 그래서 더 보람쳀 있었죠.”

「친구여」 작업 할 때 주안점은.

“조피디는 상기한 페스티벌 때문에 인연이 됐지요. 싱어송라이터로 「친구여」 앨범도 두 장짜리로 나왔었어요. 어느 날 도움을 청하더라고요. 고민을 해보겠다고 한 게 인순이씨가 섭외가 되겠냐 해서 섭외가 되면 제가 한 번 해보겠다고 했어요. 인순이씨 말고는 파워풀은 없다는 판단이었고 서로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섞으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순이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이미지가 젊지 않았는데, 그 이후로 젊어지셨죠.”

많은 작사가들과 호흡을 맞췄는데, 그 중 인상적이었던 작사가는.

“그 부분은 항상 열려 있어요. 보통 저는 일일이 다 설명을 하면서 경쟁이랄까 그런 것을 붙입니다. 그래서 더 좋은 걸 써요. (왜 작사를 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못해요. 능력이 제로에요. 어렵더라고요. 근데 하고 싶은 것은 사실입니다.”

곡을 만드는 방법이 궁금하다.

“저는 곡을 쓰기 전에 준비기간이 있습니다. 그 사람(가수)의 생김새와 말하는 표정, 말하는 느낌, 무대에서 노래할 때의 느낌 등을 취합해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데, 전에 만든 노래는 듣지 않아요. 만나서 이야기 하고, 노래 한 번 시켜보고 그래서 딱 캐치를 해서 담아가요. 가수와 술도 안마시고, 연락처도 없어요. 좀 특이해요. 사적으로 전혀 만나지 않아요. 머릿속에 기억해두다가 뭔가 올 거 같은 때가 있어요. 그럼 건반 앞에 앉아서 정리하고, 그게 안 오면 제작사에 얘기하고, 올 때까지 또 기다려요.”


자신을 음악으로 인도한 뮤지션은.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전 앨범 다요. 초등학교 때부터 정말 불이 나게 들었어요.”

존경하는 작곡가는.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를 정말 좋아해요. 사람 마음을 건드리는 그분의 감성은 최고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정확히 모르지만, 닮고 싶어요.”

후배에게 들었던 가장 큰 칭찬은 뭔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깨고 싶지 않은 원칙은 음악적으로 편식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뭐가 히트를 치면 모든 사람이 그걸 해 달래요. 그걸 안 해주면 욕을 먹지요. 거부하는 자체가 현실적으로 굉장히 힘든 일이에요. 매번 블로킹을 하는 소신이 있거든요. 그걸 후배들이 높이 사요. 만약에 「Timeless」만 하더라도 그걸 제가 계속 (에스지워너비와) 같이 해서 가는 게 맞는 거죠. 하지만 이것은 제가 사회생활 잘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음악하려고 사회생활 하려는 거잖아요. 일의 양이나 히트의 양이 줄어든다 하더라도 그걸 버릴 수는 없어요. 남들이 봤을 때 그게 무슨 소신이냐 할지 몰라도 저에게는 원동력이거든요. 고정이 되면 끝입니다. 예를 들면, 미디엄 템포 발라드에 갇혀 있었다면 「Anymotion」이나 「유혹의 소나타」(아이비)를 쓸 수 있었냐라는 거죠.”

박근태 곡의 핵심은.

“멜로디요. 코드와 멜로디를 동시에 잡으면서 워낙 한 순간에 오니까 리듬을 찍고 자시고도 없어요. 리듬은 큰 틀에서 상상이 되고 나머지는 그냥 딱. 꿈이 세션맨이였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작곡가를 하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어느 날 앨범을 내자고 해서 곡을 써오라고 했는데, 그래서 집에 가서 곡을 쓰려고 했는데 코드를 모르더라고요. 그냥 감으로는 아는데, 이게 왜 이러는지 모르는 거예요. 본질을 모르니까 할 수가 없고 그러니 얼마나 화가 나요. 창피했습니다.

기타를 그날 이후로 치질 않았어요. 음악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었죠. 어렸을 때 잘난 척도 심하고 자부심도 많고, 기타를 잘 친다는 거 그런 게 있었는데 화성, 멜로디, 코드 어떻게 쓸지를 모르니까 반박자도 못가고 부딪혔어요. 작곡 공부를 했고 클래식부터 공부했어요. 전통 화성학, 재즈 화성학부터 한동안 많이 했었죠.”


음악을 배워야 하는 것엔 동의하는가.

“학문적으로 배우는 것은 별로 크게 작용되지 못해요. 물론 하나도 모르면 음악 못 만들죠. 어느 정도 알아야 내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그 과정을 익히면 훨씬 빠르고 ?껈한 거죠. 최소한의 교육은 필요한데, 그게 학문적 교육을 전제로 되는 건 절대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가르쳐주는 것도 키포인트가, 디렉션이 없어요. 음악을 잘하는데 있어서 기준은 없으니까요. 느낌을 잘 표현하는 게 음악 잘하는 것이잖아요.”

근래 히트곡 수가 줄어들었다.

“인위적으로 곡을 쓰지는 않습니다. 안 나오면 못 써요. 좋은 곡이 나올 때 좋은 것을 받아먹을 준비가 되어야 나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밸런스가 잘 맞아 떨어질 때는 저도 모르게 잘되는 게 있고, 밸런스가 깨지면 잘 안 되더라고요. 지금은 그런 밸런스를 차근차근 잡아가는 시기라고 할까요. 오히려 마음 편해요. 사람들은 히트곡이 너무 안 나오지 않는가 하는데, 저는 욕심이 없어요. 욕심내도 안 된다는 것을 아니까요.

최근 몇 년 사이에 안 좋은 일들을 참 많이 겪었어요. 매니지먼트 사업도 꽤 크게 했었다가 제가 가야 할 방향이 아닌 걸 깨닫고 접었고요. 여러 사업을 준비 하면서 작곡이 제 근간이고 잘 했어야 했다는 것을 알지만 안 나오는 걸 어떡해요. 오히려 20대 초반부터 한 번도 쉬어본적 없어서 지금이 좋습니다. 여행처럼 지금이 딱 그런 쉬는 시점 같습니다.”


인터뷰: 임진모, 홍혁의, 이종민
사진: 이소희
정리: 임진모

글 / 임진모(jjinmoo@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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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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