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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 홀라당 까먹고 백지상태 되자 관객 반응은?

연극 <웃음의 대학> 정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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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에 <연극열전>이 자리 잡은 이후 관객들에게는 암암리에 두 가지 믿음이 생겼다.


“공연 3시간 전에는 공연장에 와요. 몸도 좀 풀고, 느긋하게 준비하고 싶거든요. <웃음의 대학>은 대사가 어렵고 양도 많고 속도도 빨라서 잠깐 깜빡하면 엉키기 때문에 워밍업을 해보고 무대에 서는 편이에요.”

토요일 정오, 전날의 열정이 가라앉은 텅 빈 무대에서 기자와 그는 잠이 덜깬 머리를 달래고 있다. 우리가 자리한 곳은 잠시 뒤 검열관과 작가가 마주 앉을 자리. 정경호가 상대하는 검열관은 주로 송영창,엄효섭. 쟁쟁한 선배들인지라 무대마다 긴장할 수밖에 없다.

“<웃음의 대학>은 검열관 위주의 작품이라서 작가는 서브하는 데 초점을 두는 것 같아요. 맞추는 건 어렵지 않은데, 선배님들이 불편하실까봐 걱정이죠(웃음). 사실 이 작품은 2인극이라서 배우가 해석하는 것에 따라 작품의 색깔이 미묘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아무래도 송영창 선배님은 가장 연장자라서 살아온 인생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작가 입장에서는 송 선배님이 더 어렵고 무서운 검열관처럼 느껴지죠.”

마음과 몸은 연결되어 있는 법. 그는 송영창 씨와 처음으로 무대에 선 날, 대사를 홀라당 까먹었다.

“리허설까지 하고 들어갔는데, 대사를 2쪽 정도 뛰어 넘어 버렸어요. 그 정도면 내용 전개가 힘든 상황이죠. <웃음의 대학>은 구성이 치밀해서 따로 애드리브를 할 필요가 없는 작품인데, 뭘 뛰어 넘은지도 모르고 즉흥적으로 말을 만들었어요. 문제는 송 선배님까지 백지상태가 된 거죠(웃음). 다행히 선배님이 받을 수 있는 대사를 넘겨서 안정을 찾았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관객 반응이 굉장히 좋았어요. 아마 실수 때문에 세포가 깨어나서 공연이 더 생동감이 넘쳤던 것 같아요.”


<웃음의 대학>에 출연하는 배우들에게 바뀌는 건 상대 배우만이 아니다. 공연장도 둘(대학로 원더스페이스 동그라미극장, 강남 코엑스 아트홀)이기 때문이다.

“공연장의 느낌은 많이 달라요. 강남에서 웃음이나 박수가 난 부분이 대학로에 오면 별 반응이 없기도 하고요. 강남은 객석과 무대가 가깝다 보니까 더 친근감이 있고, 대학로는 천장이 높다 보니까 웅장함이 있어요. 엔딩 박수는 대학로가 일찍 나와요(웃음).”

앙코르 공연에도 대학로와 강남 공연장은 꽉 들어찬다. 연극 <웃음의 대학>의 인기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정경호는 우리에게는 영화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로 잘 알려진 작가 미타니 코우키를 극찬한다.

“<웃음의 대학>은 굉장히 고급 코미디인 것 같아요. 즉발적인 웃음이 아니라, 사람마다 웃는 포인트가 다르고, 한 박자 생각을 하고 웃을 때도 있고, 때로는 집에 가다 웃는 관객들도 있는 식으로요. 또 코미디임에도 불구하고 진한 페이소스가 있어요. 작가가 굉장히 영리하다고 생각되는 게, 그 상황에서 관객을 울리려고 하지 않고 짠하다 싶을 때 웃기기 시작해요.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는 상태로 몰고 가는 코미디, 슬픈 상황에서 웃음이 터지는 작품인 것이죠. 그게 잘 갖춰진 작품이고, 저 역시 그렇게 풀어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영화와 드라마에서 감초 연기를 선보여 왔던 그는 요즘 케이블 TV ‘롤러코스터’에서도 주가를 올리고 있다.

“배우로서 작품을 신중하게 고르고 싶지만, 간간이 들어오니까 고르고 자실 것도 없어요(웃음). 영화를 조폭코미디로 시작했어요. 그랬더쾴 한동안은 조폭이나 악역이 많이 들어오더라고요. 그런데 나이를 먹다 보니까 어린 부하를 하기도, 그렇다고 나이 많은 보스를 하기도 애매하게 된 거죠. 그래서 공백기가 있었어요. 지금은 나이도 좀 들고 살도 찌면서 얼굴이 유해지니까, 악역보다는 코미디 쪽으로 풀려가는 것 같아요. 저를 필요로 하는 역할이 있으면 매 순간 최선? 다할 뿐입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언뜻 비슷한 이미지의 배우들이 떠오른다.

“스스로 저와 닮은 사람들을 발견했어요. 일단 목소리까지 비슷한 사람은 엠씨몽 씨, 봉태규 씨도 좀 닮았고, 안경을 벗고 격정적인 표정을 지으면 유해진 형, 비니 모자를 쓰고 헤 웃으면 박철민 선배님. 주로 구강 돌출형 인류를 닮은 것이죠. 인류는 돌출형 구강을 가진 인류와 함몰형 구강을 가진 인류로 진화해가는 것 같아요. 그런데 돌출형이 연기는 좋습니다(웃음).”

대다수 구강 돌출형 배우들의 연기가 그렇듯, 사실 정경호의 연기 역시 진지하다. 그 진지한 분위기에서 코믹함이 묻어나는 것이 묘미다.

“제가 추구하는 코미디인데, 제 연기를 그렇게 읽어주시면 다행이죠.

아무래도 연극으로 시작해서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연극은 카메라가 들어오는 찰나가 아니라, 어찌됐든 관객과 긴 시간을 들여 캐릭터를 쌓아가는 거잖아요. 관객과 캐릭터가 약속이 되면, 그 다음에는 진지한 코미디를 보여줄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면은 저의 장기니까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굳이 버릴 필요가 없었고요.”


연극은 영화나 드라마와 비교해, 배우로서 들이는 노력에 비해 돌아오는 것이 적다. 그럼에도 연극무대를 찾는 것 역시 그러한 매력 때문인가?

“이쪽 일을 처음 시작할 때 부귀영화를 누리겠다는 생각이 전제가 되지는 않았어요. 따라서 소정의 보수를 비롯한 결과물은 많이 벌면 좋고 행복한 것이지만, 적게 번다한들 박탈감이 덜 한 것이죠. 사실 저는 학교 다닐 때 공부도 못하고 놀지도 못하는 어중간한 사람이었어요. 다만 호기심이 많고 상상력이 좋았죠. 그런 저에게 작품을 통해서 끊임없이 다른 세계를 만나는 배우라는 직업은 잘 맞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는 최근에 슬럼프를 겪었다. 배우로서 그려내는 모습의 문제일 것이다.

“하고 싶은 역할이 아니라 자꾸 다른 게 들어오고, 거기다 내가 하는 방향과 달리 그림이 그려지니까 슬럼프가 오더라고요. 그런데 해답은 화장실의 명언 문구에서 찾았습니다(웃음). 제가 일주일에 한 번씩 축구를 하는데, 그 축구장 화장실에 ‘주변에서 하는 비평을 곧이곧대로 믿었다면 지금의 너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쓰여 있더라고요. 나를 믿어서 여기까지 온 것인데, 왜 믿지 못하고 이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또 하나의 해답은 한석규 선배님의 인터뷰 기사에서 찾았는데, ‘배우는 자기 연기에 만족하고 더 욕심을 내지 않게 되면 슬럼프가 온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배우로서 교만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자리를 빌려 화장실 문구를 쓰신 분과 한석규 선배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웃음).”

그가 이제 욕심내는 캐릭터는 귀여운 매력이 있는 인물이다. 그렇게 그는 소시민들의 특별한 삶을 연기하고 싶다.

“제가 귀여운 매력이 있어요(웃음). 귀엽고 뺀질대지만 절대 밉지 않은, 그런 매력을 살릴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물을 하게 되면 물 만난 듯 잘할 것 같아요. 궁극적으로는 소시민의 특별한 삶을 행복하게 그릴 줄 아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위기를 희망으로 그려낼 줄 아는, 그런 느낌이 되는 배우로 성장해가고 싶습니다. 그런 배우가 되기 위해서 더 많이 노력해야죠.”

무대에 오른 그는 역시 진지했다. 진지하게 웃겼다. 이것은 포복절도(抱腹絶倒)할 웃음이 아니다. 어이없고 기가 막혀, 동행인과 눈 마주치다 나도 모르게 삐져나오는 웃음이다. 정경호는 내년에도 그렇게 비루하지만 소시민들의 흥겹고 낙천적인 삶이 담긴, 드라마와 코미디가 있는 작품을 만나기를 소망한다. 그 느낌을 잘 그려내기 위해 오늘도 무대에서 자신을 믿되 과신하지 않으며, 진지하게 웃음을 자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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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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