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영재, 방 밖으로 나오다
“나루 알아?”
지인에게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어떤 나루? 강나루? 여의나루? 이런 거?”
가수 ‘나루(NARU)’다. 본명은 강경태. 친구들이 강씨 성을 따서, ‘강나루’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특별한 의미는 없었어요. 강나루라는 별명에서, 나루가 어감이 좋고, 차분하게 그림이 그려지는 듯한 느낌이 있어서 정했어요.” 음악 콘테스트에 응모하기 위해 음원을 게시판에 올릴 때, 이름이 필요해서 즉석으로 지어냈다.
나루, 얼핏 평범한 느낌의 이름에, 그는 두 장의 앨범으로 그 이름에 인상적인 색을 칠했다. 지난 6월에 발표한 두 번째 앨범
<yet>을 들은 후, 되새겨본 ‘나루’란 이름. 애초의 차분하고 소박한 느낌은 여전하지만, 일정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강의 나루처럼, 단단하고 고집스러운 구석도 느껴진다.
그의 유별난 작업방식 탓이다. 앨범의 작사, 작곡, 프로듀싱 등 전 과정을 직접 해냈고, 음반 커버의 그림까지 그렸다. 노래는 물론, 연주까지 혼자 도맡아 하는 ‘원맨밴드’다. 나루, 온전한 자신의 앨범을 위해서다.
“투박하다 싶어도, 내 색깔을 분명히 드러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어요.”
나루는 2008년
<자가당착>으로 ‘조용히’ 데뷔했다. 그럼에도 귀 밝은 팬들과 가수 선배들에게 ‘발견’되었다. 그렇게 입소문을 타면서 괜찮은 신인의 탄생이 알려졌고, 그가 이제껏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독학형 아티스트라는 배경이 더해져, ‘모던 영재’라는 별명을 얻었다.
골방에서 음악을 짓고, 홀로 연주하는 소심한 소년 이미지 물씬했던 나루는 2집
<yet>을 들고 골방 밖으로 나왔다. 지난 8월 8일 쇼케이스 겸 첫 단독공연을 가졌고, 다가올 그린민트페스티벌(GMF) 공연 무대에 선다는 소식도 들린다.
<yet>에서 느껴지는 나루의 이미지도 전작과는 조금 다르다. ‘90년대 델리스파이스, 언니네 이발관 등 모던 록 사운드의 21세기 재해석’이라는 평을 받은 첫 앨범
<자가당착>은 신인의 풋풋함과 투박함이 솔직한 매력으로 발산됐다. 이번 앨범
<yet>은 그가 스스로 말하듯, ‘좀 더 그럴 듯하게’ 나루의 소리를 ‘정리’했다. ‘아직’(yet)이라는 단어는, ‘완성’이라는 목표를 전제하는 말이 아닌가. 지난번보다 훨씬 선명한 나루의 색이 담겼다. 일렉트로닉을 가미해 곡 전체적인 느낌도 쾌활해졌다.
이한철, 이지형, 노리플라이 등 많은 아티스트들이
<yet>을 두고 “근래 최고의 역작”이라고 평했다. 이 앨범은 네이버 대중문화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과 네티즌의 찬사를 받으며, ‘이주의 최고의 앨범’으로 선정됐다. 선정 위원 배순탁 평론가는 “익숙한 것들에 대한 호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대중음반”이라면서, “모든 요소들이 인상적인 평균을 이룬다.”고 말했다.
배워가며 실험하며 길을 찾아가는 음악
“공부하고, 고민했죠. 계속 배워가면서 만들어나가는 것이니까요.”
그가 인터뷰 중 자주 반복한 이야기다. 여기서 나루 음악이 시작됐다.
“제가 애초에 작곡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스무 살 넘어 시작했으니 늦은 편이거든요. 학창시절 때 기타가 좋아서 동영상을 찾아보면서 연구하고 따라해 봤어요. 기타를 연주하다보면, 마냥 남의 노래만 할 수 없거든요. 혼자 이 코드, 저 코드 쳐보면서, 멜로디를 덧붙여 흥얼거리면서 놀았어요. 학생 때는 그렇게 노는 수준에 그쳤다가, 스물한 살 때, 첫 곡을 만들었어요. 3, 4분 길이의 형태로 완성을 시켰죠. 군대에 들어가서, 노래를 한 곡씩 만들어보자, 해서 만들어진 게 1집이었어요.”
1집
<자가당착>(2008년) 이후, 2년의 공백은, 다시 “공부하고, 고민하고, 실험해보는 시간”이었다.
“1집에서 감히 시도할 수 없었던 컴퓨터 음악, 미디 등을 공부했어요. 좋아하고, 하고 싶으니까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모르는 건 계속 찾아보고, 다른 사람의 음악을 찾아보면서 나름의 공부를 계속 했죠.” 처음 쓴 곡들을 모아 발표한 것이 첫 앨범이라면, 두 번째 앨범은 “어떤 음악을 들려줄까, 고민하면서 만든 앨범”이다. 그러다보니 곡 구성에 공을 많이 들였다. ‘전체적으로 고르게 뛰어나다’는 평은 여기에서 비롯한다.
“스무 곡 정도를 썼는데, 이렇게 저렇게 배치해보며, 앨범의 모양을 만들어갔어요. 좋은 노래를 욕심내서 넣기보다는 정서적으로 일관되는 곡들로 추렸어요. 간결하고 담백하게 가자는 생각으로 곡을 줄여나갔어요.”
배우며 만들어나가는 것, 나루 음악의 현재이기도 하다. 나루는 자신의 음악이 새롭게 들린다면 그 비결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하나의 곡을 지을 때도, 배운 대로 아는 대로 익숙하게 만들어가기 보다는,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지? 저렇게 해보면 어떨까? 빙빙 돌아가며 답을 찾아가는 방식이거든요. 오래 걸리지만, 오히려 더 재미있는 게 나올 수도 있는 거죠. 그런 실험을 할 수 있었고, 그게 이번 앨범의 색깔이 된 것 같아요.”
완벽한 A를 만들기 위한 작업
“혼자 하다보면, 속도가 느리죠. 하나씩 배워가면서 해야 하니까요. 곡의 뼈대를 만들고, 베이스를 입히고, 드럼을 프로그래밍하고…… 1인 5역을 소화하는 거죠. 그러려면 남들보다 4~5배 시간을 투자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럼에도 이번 작업을 혼자 뚜벅뚜벅 해 낸 것은, 나루 음악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모험이었다.
“제가 원하는 기타 연주와 베이스, 건반과 멜로디, 가사…… 순전히 제가 생각한 그대로의 음악이 나오는 거잖아요. 아무래도 밴드로 가게 되면, 양보하고 절충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으니까요. 완벽하게 나의 의도를 드러내는 일은 혼자 작업하는 방식이 나은 것 같아요.”
다른 일에 있어서는 느긋하고 여유로운 편인데, 음악 작업에 있어서만큼은 고집을 부린다는 그다.
“아무리 닮은 사람이라도 차이가 생겨나는 법이잖아요. 내가 원하는 멜로디는 A인데, 함께 작업하는 사람이 A'를 원한다고 쳐요. 여기서 시너지가 나올 수도 있지만, 저는 제가 애초에 원했던 A에 집착하고 고민해요. A 옆에 ‘쩜’이 보기도 싫고, 왜 삐져나왔을까 생각해요.(웃음) 꼭 결벽증 같이 느껴지는데.”
하나의 풍경화를 그려내는 가사들
그가 이번 앨범에서 ‘완전하게 그려내고 싶었던 것’은 이런 거다.
“음악적으로는 듣는 재미가 있는 음반을 만들고자 했어요. 남들이 안하는 방식으로 작곡해보고, 나름 파격적인 코드 진행을 시도해보려고 했어요.” 가사는 평소에 하던 생각들, 일기에 적어놓은 메모들을 토대로 했다.
“가사가 밝은 음악이랑 상반되게 자조적인 게 많아요. 소시민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해 반추해봤어요. 마냥 ‘너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고, 질문을 던지는 가사가 많아요.”
나루의 가사는 하나의 장면을 그린다. 화자는 장면 속의 주인공이 아니라, 엿보는 사람이다.
“성격이 반영된 것인지도 몰라요. 저란 사람이 ‘오늘 밤 나와 춤을 춰’라고 하기 보다는 ‘사람들이 춤을 추네, 난 뭐하고 있나.’ 이런 타입의 사람이거든요. 「먼데이 댄싱」처럼.” 그렇게 11곡의 장면들은 한 편의 풍경화를 이룬다. 그의 앨범에 ‘음악여행’이라는 별칭이 잘 어울리는 것도, ‘배낭 메고 마냥 떠나고 싶게 만드는’(정희웅 네티즌 평) 까닭도 이 때문이 아닐까.
나루의 여행은, 멀리 우주까지 꿈꾸게 한다. 나루의 가사 중 가장 눈에 띄는 단어는 ‘우주’다. 두 앨범을 통틀어 종종 만나게 되는 이 단어.
“막연한 환상이 있는 것 같아요. 세상의 모든 눈물과 웃음이 우주 속에 두고 보면, 먼지 같잖아요. 우주 뿐 아니라, 인생 전체를 두고 세상만사를 생각해봐도 그래요. 오늘 두근두근하거나, 화가 난 일도, 인생 전체를 두고 보면 기억도 안날 일들이죠. 그런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새옹지마. 그런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편이에요. 그런 생각들이 우주라는 공간을 불러오는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는 환상이라, 죽기 전에 꼭 한번 우주에 가보고 싶어요.”
하나 더. 나루의 가사가 조금은 섬세하게 다가왔다면, 그것은 그가 사람에 대한 관심이 지극하기 때문일 테다. 나루의 전공은 심리학이다. “남자가 음악해서 뭐해먹고 살래” 하는 등쌀에 못 이겨 선택한 공부였지만, 사람을 두고 공부하는 일에 매력을 느꼈다.
“저 스스로에 대해서도 아리송한 게 많았거든요.” 허나, 막상 시작한 공부는 ‘환상’과 달랐다.
“데이터에 근거한 과학이더라고요. 결국 자연스럽게 그 관심이 사회학과 철학으로 옮겨갔어요. 이러한 지식이나 관심이 가사를 쓸 때도 많이 반영되죠.” 반영이 된다.
소심한 성격, 오히려 개성 있는 결과물 내지 않을까
“혼자 다 하려면, 막막한 마음이 앞서죠. 그럴 때 가장 힘들었어요.”
해보지 않아도 막막함이 전해져오는, 그의 작업 과정을 듣고, 혹시 완벽주의자가 아니냐고 떠봤다. 금방 고개를 젓는다.
“그보다, 좋아하는 게 있으면 파고드는 성격이에요. 어렸을 때 피아노를 배웠는데, 그땐 정말 싫어했어요. 나중에 독학으로 피아노를 공부하면서 재미를 붙였죠. 기타도 사촌누나가 치는 걸 보고, 나도 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연습하기 시작했고요. 남들이 운동 좋아하고, 게임 좋아하듯, 그렇게 음악을 좋아하고, 익히게 됐어요. 게임만큼이나 재미있었기 때문에, 혼자 독학하는 일을 견뎌냈어요.”
독학을 해내는 것은, ‘대한민국 대표 소심남’이라는 그의 성격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 그는 이런 자신의 성격도 개성이 되지 않겠느냐며 웃는다.
“가사나 음악 자체에 영향을 미치겠죠. 활동적인 분들은 여기저기에 많잖아요.(웃음) 오히려 이런 방식이 에너지를 집중시키고, 개성을 잘 드러내서, 유니크한 결과물을 내지 않을까 생각해요.”
이번 앨범의 유니크함은, 대중과의 접점도 적절히 찾아낸 듯 보인다. 1집보다 귀에 꽂히는 멜로디가 많지만, 특별히 대중성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하면 더 쉽고 친근하게 들릴까? 하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만들면 내가 듣기 좋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막연하게나마 우선 내가 좋아해야 남들도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사실, 제가 좋아했던 음악들, 패닉이나 토이, 김동률 음악이 그랬거든요. 대중성을 갖추면서도, 완성도도 뛰어난 곡들이었어요. 쉽게 들을 수 있으면서도 인스턴트 음악은 아니었죠. 제가 팬이다 보니 저 역시 그런 음악을 만들고자 한 것 같아요.”
음악은 무엇보다 멜로디와 리듬에 충실해야 한단다. 멜로디의 정석, 아바나 비틀즈처럼.
“멜로디가 경박하지 않으면서도 따라 부르기 쉬워야죠. 후크송같이 따라 부르기 위한 노래 말고요. 멜로디 진행이 주는 감동이 아니라, 세뇌되는 일은 경계하려고 해요.”
무대 위에서도 소통을 꿈꾼다
음악이나 가치관에 있어서는 조언 앞에서도 대뜸 “(그건)아냐, 아냐, 아냐” 고집을 부렸다는 나루. 2집을 만드는 동안의 얘기다. 온전한 자신의 앨범을 완성해낸 지금, 자신만의 견고한 성에 작은 창문이 열린 듯 하다.
“혼자 하는 작업은 완벽하지만, 독단적인 작품이 나올 수도 있잖아요. 내가 원하는 게 무조건 좋다고 할 순 없는 거니까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고 소통하려고 해요. 다음 앨범은 프로젝트로 꾸릴 수도 있고, 제가 한 발 물러서 협업을 할 수도 있겠죠. 아직은 막연한 생각이에요.”
앨범에서 뿐만 아니라, 이제는 무대 위에서도 소통을 꿈꾼다. 그 ‘유니크한’ 성격 탓에 무대에 서는 일이 어렵진 않을까 싶었지만,
“원래 기타리스트를 꿈꾸는 기타키드였기 때문에, 무대 위에서의 재미를 더 느끼고 싶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처음에는 물론 겁도 나고, 잘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많았죠. 이제까지 보기만 했지, 공연을 한다는 것에 아무런 개념조차 없었으니까요.”
공연 경험 전무, 1집을 내고서야 공연을 처음 가졌다.
“무대 위에서 그저 내 음악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소통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관객들이 더 즐거워할수록, 저도 즐거워지더라고요.” 관객반응의 상호작용을 느끼게 되었을 때, 무대 위에 서는 일을 즐기게 되었다.
가끔, 무대 위에서 가사를 잊기도 하고, 코드가 빠진 줄도 모르고 기타를 치는 등
“프로라면 안하는 잔 실수”를 많이 한다고 했지만,
“다른 곡의 가사를 붙이거나, ‘나나나나~’ 하며 넘어가기도 한다.”며 여유로운 모습도 보인다. 나루의 무대 역시 하나씩 완성해나가는 중이다. 지금은 그저 yet일 뿐.
나루, 색깔이 뚜렷한 뮤지션이 되고파
여전히 그에게 과제는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음악’ 만들기다. 더불어 다른 사람들의 공감도 구하고 싶다. 음악으로 이루고 싶은 궁극적인 꿈에 대해 묻자, 잠시 생각하고는 대답한다.
“음악으로 평생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여전히 그에겐 음악이 즐거운 것, 재미있는 것이다. 심지어 음악을 듣다가 피식피식, (어쩔 땐, 푸하하)웃기도 한단다.
“어떤 기발한 요소들이 웃음을 터뜨려요. 제가 좋아하는 음악이 그런 거거든요. 재치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감동을 전해줄 수 있는 음악. 이를테면 페퍼톤즈 음악이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