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읽은 책이 떠올랐다. 스티븐 코비의 아들이 쓴 『성공하는 10대들의 7가지 습관』. 나는 그런 책을 꼼꼼히 읽던 청소년이었다. 아직도 성공하는 사람들이 어떤 습관을 가지고 있는지 분명히 기억한다. 자기계발서적에서 일러준, 다양한 자기 계발 비법들이 잠언처럼 머릿속을 떠돈다. 적지 않은 책을 읽고 낸 결론은 이거다. “아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성공하는 방법을 쓰시오’라는 문제가 있다고 치자. 아마 꽤 길게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대부분이 그렇다. 소위 ‘성공’을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게다가 그 방법을 실천하지 않아서, 혹은 못해서 매년 새해의 목표를, 월초의 다짐을 이루지 못하는 것도 알고 있다. 너무 완벽하면 각박하지 않겠냐는, 헐렁한 생활관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책에 나온 대로, 알고 있는 대로 사는 사람들의 (각박할!) 모습이 내심 궁금했다.
한유정은 할리우드 최초 한국인 미술총감독이다. 그녀의 독특한 이력이 방송에 소개되었고, 할리우드 도전기와 삶의 이야기가 담긴 책
『꿈보다 먼저 뛰고 도전 앞에 당당하라』가 출간됐다. 이 책은 마치 한유정 버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처럼 다가왔다. 물론 책 속에 드러나는 미술감독이라는 직업과 할리우드 세계도 흥미로웠지만, 그녀가 꿈에 접근해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노력했고, 약속처럼 대가(기회)를 얻으며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갔다. 이론으로 지어낸 성공 비법이 아니라, 삶으로 겪어낸 이야기라 더 살갑게, 조금은 따갑게 다가오는 이야기다.
한국에서 머무는 짧은 일정 동안 많은 인터뷰와 미팅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날 인터뷰 직전에도 긴 촬영을 마치고 온 상태였다. 저자가 옷매무새를 다듬는 동안, 함께 온 편집자에게 물었다. 며칠 동안 가까이서 지켜봤을 텐데 어떠냐고 했더니, 역시 모든 면에 적극적이고 완벽할 정도로 성실하다며 혀를 내두른다. 마주 앉은 저자에게 피곤한 기색이 보였지만, 이내 유쾌한 미소를 띠며 인터뷰에 응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인상을 갖고 있는 듯했다. 이야기를 듣거나 말하며 짓는 작은 제스처에도 어떤 확신이 느껴졌다. 짧은 시간 이야기를 나눠도 금세 눈치 챌 수 있는 걸 습관이라고 한다면, 그녀에겐 자신감과 당당함이 습관인 셈이다. 그러니까 실천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표정을 갖게 된다는 것을 그녀를 통해서 확인했다.
할리우드. 영화 너머의 꿈같은 세계. 그곳은 열아홉 소녀 한유정에게도 꿈과 같은 곳이었다. 다만, 남들보다 좀더 간절했을 뿐이다. “무대 디자인을 해보는 게 어떻겠니?”라는 운명 같은 한마디가 삶의 화살표가 되었고, 그녀는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었다. 뻔한 성공스토리라고? 지켜보는 이야 그렇겠지만, 겪어낸 사람에겐 세상 유일의 블록버스터이자 눈물 없이는 회고할 수 없는 드라마일 테다. 그녀가 꿈을 이뤄낸 힘은 뭘까. 그녀가 노력하고, 실천하게끔 하는 것은 뭘까? 꿈꾸는 많은 사람들을 대표해서 물었다.
하나. 자신에게 엄격하기 - “가장 무서운 사람은 나 자신”
첫 책이 나왔다. 영화 찍는 것과 소감이 다를 것 같다.
“책 작업이 영화 작업과 닮아있더라. 힘들었던 것은, 영화는 찍고 싶을 때 찍으면 되는데, 책은 쓰고 싶다고 바로 써지는 게 아니더라. 많은 중압감 때문에 안 써지는 날도 있었고, 어떤 날에는 또 여러 페이지를 금방 썼다. 결국 이것도 나 자신과의 싸움으로 집약 되더라. 끊임없이 나를 채찍질하고 동기부여하고 혼내기도 하고(웃음) 알아주는 이 없는 외로운 밤, 적막이 흐르는 밤에 집중력이 많이 생겼다.”
책 작업 과정을 한 편의 에피소드로 실어도 될 뻔했다. 일을 하는 방식에 일관성이 있는데,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괴롭히는 방식이 한유정의 작업 스타일인가?
“그런 셈이다. 어떤 일을 하든 스스로에게 후회되지 않게 하고 싶다. 처음 책을 쓰면서,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다. 방법은 잘 모르겠더라. 하지만 ‘정말 열심히 썼나? 최선을 다 했나?’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썼다. 일할 때 나를 괴롭히는 편이다. 가장 무서운 사람은 나 자신이다. 나는 언제 얼만큼 노력했는지, 더 잘할 수 있는데 못했는지를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더 이상은 없다 싶을 정도로 한다.”
이렇게 채찍질하면, 당근으로는 무엇을 주나.(웃음)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 포상을 주고 싶더라. 1불에 3개 주는 맥도널드 햄버거 먹던 유학생 시절, 거금을 들여 나에게 핑크 원피스를 선물했다. 보상은 액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목표를 이뤄서 보상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 같다. 지금 차고 있는 시계도 스스로에게 준 거다. 작은 일에 포상을 배분하기보다는 큰 성취를 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좋은 걸 준다. 지금 내 차도 큰 목표를 이루고 얻은 포상이다.(웃음) 계기가 있을 때마다 의미 있는 물건을 주고 있다.”
이번 책 작업의 당근은 뭔가?
“유럽 여행이다. 9~10월쯤에 갈 예정이다.(웃음)”
“무대 디자인 해보면 어떤가?” 한 선생님이 던진 운명의 한마디로 이 일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생소한 직업이었는데, 어떤 확신을 가지고 달려들게 되었나?
“성악 레슨을 받고 있는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레슨 선생님과 맞닥뜨렸다. ‘자네는 무슨 전공인가? 자네가 미술을 한다면, 무대 디자인을 해보게’ 불쑥 말씀하셨다. 오페라 무대에 자주 서는 선생님이었는데, 무대 디자인이 따라주지 않아서 배우로서 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들 때도 있었단다. 잘 알지도 못했는데, 무대 디자인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남았다.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 없지만 확신이 있었다. 그냥 하고 싶으니까.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하지?’ 방법을 찾았고, 그렇게 원하는 것을 따라가다 보니 미국까지 가게 되었다.”
설명할 수 없이 좋았다고 하더라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유가 필요했을 것 같다. 결국 이유를 찾았나?
“미국에 가서 대답을 찾았다. 이전까지 인테리어 디자인을 공부하며, 공간에 흥미가 있었다. 인테리어 디자인이 3차원이라면, 무대는 배우가 살아 움직이고, 음악 등이 흐르는 4차원 종합 예술이더라. 살아 움직이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무대디자인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둘. 오픈 마인드 - “편견 없으면 더 많이 보인다”
| | 맥시코 칸쿤 정글에 만든 TV쇼 <길리건스 아일랜드>의 세트와 촬영 현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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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에 빠른 시간에 적응한 편이다. 비결이 있다면?
“새로 만나게 된 환경과 사람들에게 항상 오픈 마인드로 대했다. 평균적인 잣대로 재단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흡수하려고 했다. 나의 그림을 미리 한국에서 그려갔다면, 오히려 그들의 그림을 제대로 못 봤을 테다. 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다가갔다. 오해와 편견이 없으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가르쳐주지 않는 것까지 보는 눈이 생긴다.”
창조적인 작업에 있어 이국의 환경은 여기와 어떻게 달랐나?
“한국 사회에서 자랄 때는 남이 이렇게 하니까, 너도 이렇게 하라는 식의 비교 문화가 있잖나. 그게 어떤 일을 하는 데 좌절하게끔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하는데, 미국에서 만난 친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50, 60대 분들도 뭔가 도전하려고 노력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들을 볼 때, ‘정말 좋아서 하는구나’ 인정해준다. 그런 환경이 도전의식과 창조력을 끌어 올리는 것 같다.”
할리우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가치 판단이 필요하지 않고 팩트를 받아들여야지 살아남는 곳”이라고 말했다. 저자 개인에게 할리우드는 어떤 곳이었나?
“처음에는 마냥 멋있고, 꿈같은 곳이었는데, 알면 알수록 무서운 곳이었다. 가만히 물 흐르듯 있어서는 살아남기도 어려운 곳이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유리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고 할까? 나는 언어적 문제도 있고, 문화적 차이도 있어서 미국 친구들을 보면, 나는 마치 모래주머니를 세 개 더 차고 뛰는 느낌이 들었다.
어쩔 때는 그들의 기본적인 것이 부러웠다. ‘내가 언어만 잘하면, 이렇게 힘들진 않았을 텐데. 저들이 왜 웃는지 문화적인 코드를 이미 알고 있다면, 좀 더 쉬웠을 텐데’ 생각하기도 했다. 할리우드는 인생의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아무래도 스토리를 다루고, 남의 인생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그곳에서 일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만의 드라마를 만들어내게 되더라. 웃고 우는 시간들 속에서 인생의 깊이를 배웠다.”
셋. 도전은 나의 힘 - “Make it happen”
| | 한유정 미술감독이 작업했던 영화 <하프웨이 홈>의 세트. 엉망진창이던 집을 2주 만에 탈바꿈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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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의 경험을 토대로, ‘인생은 이런 거다’라고 정의한다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그곳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에 하나가, ‘Make it happen’ 무조건 해내라는 말이다. ‘이거 어떻게 할까요?’ 물으면 설명 없이, 알아서 해결하라고 말한다. 이런 방식이 독립성을 키워줬다. 누군가가 나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는 것보다 아무 말 없이 그저 해내라는 말에서 거꾸로 유추하게 됐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고민의 단계를 통해, 스스로의 문제 해결능력이 생겼다. 예상치 않는 상황이나 질문이 닥쳐도 두렵지가 않더라.(웃음) 스태프들끼리 모이면 이런 말을 자주 한다. ‘그것도 했는데, 이것도 못 하랴?’(웃음)”
어려운 상황이 생기면, 그 상황이 도전적으로 다가오나?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기면 물론 당황스럽다. 하지만 주변에서 ‘그냥 하던 거나 해. 편하게 해라. 네가 할 수 있겠어?’ 이렇게 질문하면 그건 나의 방아쇠를 당기는 거다.(웃음) 으응? 못할 건 또 뭐야. 처음에는 내가 ‘맹랑한 생각을 하나, 이러다 큰 코 다치는 거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누군가 했다면 나라고 못할 것도 없고, 누구도 하지 않은 일이라면 내가 처음이니까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무대 디자인도 생소한 길이었다. ‘좋은 길을 두고 왜 다른 길을 보느냐, 무대 디자인 알기나 하느냐’는 말을 들을 때면, 가서 알면 되고, 하면 되지. 하는 도전 의식이 생겼다. 그것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도전하는 일에는 아무래도 남에게 성과를 드러내야 하고, 자기 관리도 철저해야 할 것 같다. 이런 과정 속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는 않나?
“굉장히 많이 받는다. 미술부는 세트에서 컷, 하고 해산하는 게 아니라, 24시간 그 일에 매여 있다. 영감이라는 게 맘먹은 대로 떠오르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내내 붙들고 있어야 한다. 이런 데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이겨내려면 끊임없이 마인드 컨트롤을 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 하지만, 할리우드는 반대다. 할리우드에서는 문제를 정확하고 차분하게 이야기해야 프로페셔널로 여긴다. 무조건 소리 지르고 우기는 사람은 아마추어로 간주한다. 그러기 위해서도 마인드 컨트롤이 항상 되어 있어야 한다. 이게 하루아침에 되는 건 아니고, 마음을 잘 다스리는 사람 가까이에서 보고 배우며 훈련해야 하는 것 같다.”
넷. 시간관리 - “5분 동안 세운 계획이 50분의 능률을 높인다”
감독 일이라면, 시간 관리가 철저해야 할 텐데, 개인적인 습관이나 노하우가 있나?
“메모하는 습관이 있다. 다음 날 일정을 전날 정하는 게 가장 좋다. 이미 준비된 상태로 하루를 시작하는 거다. 계획을 분 단위로 쪼갠다. 이동을 많이 하는 편이라, 방향이나 시간을 정확히 계산하지 못하면 일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주차 소요시간까지 계산한다. 이런 게 노하우라고 할 수 있겠다. 전날 미리 준비하는 습관이 생겼다.”
예상치 못하게 일이 미뤄지거나 소요시간이 늘어질 때는 유동적으로 계획을 수정하는 편인가?
“그럴 때는 재정비를 해야 한다.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면 더 힘들어지는 걸 안다.(웃음) 차라리 간추리더라도 오늘 해야 할 일을 오늘 끝내는 방향으로 하는 일을 한다. 세트에서 핵폭탄이 떨어진 상황인데, 나는 ‘잠깐만’ 하고 앉아서 스케줄을 정비한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 시간에 뛰쳐나가서 해결해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5분 생각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정비하는 시간이 50분을 세이브한다. 이건 스스로 증명해본 일이다. 지금 급한 일 생겼다고 우왕좌왕하기보다는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까 생각하고 계획을 짜는 게 더 중요하다.”
다섯. 현명한 커뮤니케이터 - “’무엇을 말할까’보다 ‘무엇을 듣고 싶어할까’ 고민한다”
도전기를 지켜보니, 커뮤니케이터로서 한유정이 보이더라. 자기 자신을 설득해 길을 정했고, 부모님을 설득해서 미국에 왔고, 이제는 동료들을 설득하며 일하고 있다. 좀더 세련된 커뮤니케이터로서 성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예전에는 맞는 건 맞는 것, 틀린 건 틀린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곤 했다. 남을 설득할 때 옳고 그름만 강조했는데, 그러다 보니 섭섭한 일이 많았다. 같은 팀으로 일한다는 것은, 저 사람의 내 의견에 맞춘다는 게 아니라,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더라. 지금은 모든 결론을 내가 내리려고 하지 않는다. 저 사람이 관철시키려는 포인트를 짚어서, 내 포인트와 만나는 지점을 찾아본다. 경청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상대방이 주장하는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정말 아니다 싶을 때는 끌려 다니지 않는다.
남을 설득시키려면,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사람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부분이 생겼고, 의견을 나눌 때도 내가 많이 부드러워진 것 같다.”
설득의 요령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면?
“프레젠테이션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보다는, 저 사람이 ‘이 자리에서 듣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일까’를 먼저 생각해본다. 감독과 예산 문제로 자주 갈등을 겪는다. 초창기에 ‘우리는 이 예산 이상은 안 된다’는 감독의 말에 나는 ‘YES’ 혹은 ‘NO’로 대답했다. 세트에다 런던 브리지를 세우고, 파리를 재현시켜야 하기 때문에 나는 안 된다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감독님의 말을 듣고 그렇게 결정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나에게 조건은 풀어야 할 문제일 뿐이다.
따로 프로듀서를 찾아서 감독님이 원하는 건 이런 건데 우리 상황은 이렇다고 설명을 하고, 된다, 안 된다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거꾸로 의견을 묻고 조율하는 거다. 그러면 ‘이거는 될 수 있을 것 같다. 저건 어렵겠다’ 답이 나온다. 이러면 같은 얘기를 해도, 내 의견을 어느 정도 관철시켜준다. 무조건 예산 때문에 못 한다 안 된다고 하면, 감독도 창조적인 일을 하기 어렵다. 같은 얘기를 해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나 반응은 매우 다르다.”
동료 간의 관계 문제는 어땠나?
“서로 간의 신뢰가 중요하다. 약속을 잘 지키는 일만큼 신뢰를 줄 수 있는 일도 없다. 남들이 잊었겠지 싶은 일도 잊지 않는다. 진정성은 언어와 문화를 뛰어 넘는다. 억울한 상황에 처한 적도 있었지만, 그때에도 진심과 진정성은 통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태도가 신뢰를 쌓는다.”
미국 유학을 두고 부모님과의 갈등도 있었다. 부모님은 가장 든든한 지원자이지만, 때론 가장 어려운 반대자이기도 하다. 만약 유학을 두고 갈등을 빚던 때도 돌아간다면, 이제는 부모님을 어떻게 설득시켰을 것 같은가?
“그때는, 내가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왜 안 되냐고 외쳤다. 하지만 내가 그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면 부모님께 더 세련되게 말했을 것 같다. 물론 학창 시절이라,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서, 속상한 마음뿐이었지만……. 사실 그때로 돌아간대도 비슷했을 것 같다.(웃음) 지금은 오히려, ‘너는 거기서 꿈을 펼쳐라. 거기가 더 잘 맞는 것 같다’고 말씀해주신다.”
여섯. 자기 확신 - “도전은 인생의 무료강습”
책 속에서 악바리 이미지가 연상 되었다.(웃음) 물면 끝을 보는 완벽주의자랄까. 실제 성격은 어떤가?
“놀 때 확실하게 놀고 일할 땐 확실하게 일하는 성격이다. 이도저도 아닌 시간을 보내면 스스로에게 화가 난다. 즐기면서 살고 싶다. 그런 면에선 낙천적인데, 일할 때는 스스로 힘들게 하기도 한다. 그런 데에 밸런스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외국에서 오래 생활했는데, 외롭지는 않았나?
“외로움을 많이 타지 않는 체질이다. 혼자 있는 것도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가끔은 외롭구나, 인정하게 되는 때가 있는데, 그럴 땐 음악을 듣기도 한다. 혼자 외로워하기보다는 이 시간에 나를 키울 수 있는 건 뭘까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외로움도 희석되는 것 같다.”
한유정에게 어려운 상황을 버티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매번 ‘처음’을 극복하게 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나?
“결국 나는 내 스스로 키워야 하는 거다. 도전의 처음은 두렵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걸 도전이 아니라 배움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어렵지 않다. ‘나는 처음이니까, 이걸 배우는 거다’라고 생각하면 실패하더라도 하나의 배움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두렵지 않다. 사람들은 실패를 두려워하는 거다. 그걸 배움으로 승화시키면 된다. 배우러 돈 주고 학원에도 다니는데, 이런 것은 공짜 레슨이잖나.(웃음) 그러면 도전이 두렵지 않다.”
자기 확신, 자존감이 단단한 것 같다.
“스스로가 믿어주지 않으면 누구에게 날 믿어달라고 할 수 있겠나. 이런 깨달음을 준 계기가 있었다. 초창기 시절, 세팅을 담당했을 때 조감독이 자꾸 날 무시한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그래서 디자이너한테, ‘나는 존중받아야 하는데, 왜 저 사람은 날 존중해주지 않느냐’고 물었다. 디자이너가 딱 한마디 하더라. ‘Respect is not given. It's earned.’ 존중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벌어야 하는 거란 말이 굉장히 와 닿았다. 남에게 존중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스스로를 먼저 존중하고 믿어주는 것이 우선이다.”
에너자이저 한유정에게도 슬럼프가 있지 않나. 지쳐 나가떨어질 때는 어떻게 하나?
“그럴 때를 슬럼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일을 하고 싶지 않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쉬어버리는 거다. 쉬는 일이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얼마나 쉬느냐고? 자기가 버틸 수 있을 만큼, ‘아, 이제 그만 쉬어야겠다’ 할 정도로 쉬고 나면. 활력도 생기고 충전이 된다.”
무엇이 가장 두렵고, 무엇이 자신을 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나?
“‘내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두렵고, 또 나를 강하게 만든다. 나 역시 사람이기 때문에 새로운 일이나 모르는 일을 시작할 때, 남들이 주변에서 왜 하느냐, 어렵다 등의 이야기를 할 때 나에게도 내면에 두려운 목소리가 들린다. 정말 그런가? 자기 최면에 걸려 내가 우기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럴 때, 나는 내 자신에게 냉정해진다. ‘괜찮아. 잘될 거야’에서 그치지 않는다. 불안하다는 것은 스스로를 충분히 설득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므로, 나를 설득할 만한 자료들을 찾는다. 내가 믿을 만하게끔 만든다. 그래서 이게 맞다는 생각이 들면, 한 걸음 나아가게 되고, 주변에서 무슨 말을 듣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일곱. 미리 준비하고, 멀리 본다 - “나에게 맞는 시기가 ‘좋은 때’다”
미술 감독으로서 특별한 습관이나 직업병이 있다면 뭐가 있나? 평소에도 미술 같은 것을 주목해 볼 것 같다.
“전시와 공연을 자주 접한다. 페스티벌도 참석한다. 다른 문화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려있는 현장을 좋아한다. 지금 당장 하는 일과 꼭 관련은 없더라도 그렇게 접하고 나면 잔상으로 남게 되더라. 그런 것들이 정말 필요할 때 떠오른다. 영감은 가만히 앉아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본인이 스스로 그런 것에 충분히 노출시키면 필요한 때에 그것들이 떠오른다.”
아직 해보지 않았는데 꼭 해보고 싶은 장르가 있?면?
“갱스터 영화 해보고 싶다. 그 안에서 미술을 재미있게 해보고 싶다. 크게는 동서양을 접목할 수 있는 미술 작업을 하고 싶다.”
책에서 밝히기를 한국적 정서를 살리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외국 생활을 오래하다 보니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있더라. ‘Are you Chinese? Are you Japanese?’ 그 사람들은 익숙한 게 중국이고 일본이다. 중국과 일본은 외국 사람들에게 어떤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다. 중국은 거대한 스케일로, 일본은 정돈된 듯 잘 짜여진 이미지로 다가가는데, 한국은 선뜻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다. 그래서 한국적인 것은 무엇일까 고민을 많이 했다. 한국문화원에서 건축 재디자인을 의뢰받았을 때, 나는 가장 한국적인 것은 ‘자연미’라고 생각했다. 거기서 출발하자 한국적인 색깔은 자연의 색인 흙색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안에는 흐름을 간직하고 있는 ‘선의 美’도 있는 셈이다. 한국문화원은 자연의 미와 곡선을 살려 작업했는데, 교포는 물론 미국인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프로덕션 디자이너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소양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넓게 생각하고 멀리 보는 것. 프로덕션 디자이너의 일은 단순히 디자인만 담당하는 게 아니라. 전체의 흐름을 봐야 한다. 독자들은 구체적인 조언을 원하는 것 같다. ‘미술을 열심히 하세요. 그때는 이런 걸 하세요’ 등등. 하지만 좀 더 멀리보라고 말하고 싶다. 당장 관계된 일을 하고 있지 않더라고 하더라도 목표를 확실하게 설정하고 다가가면 된다. 한 우물만 파서 그것만 보고 가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공식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심지어 내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해도, 이곳에서 사람을 다루는 기술을 배운다고 생각하며 일해야 한다. 그러면 어디에서든지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은 ‘지금 제 나이에 어떻게’ 이런 얘길 많이 하는데 인생에 포기해야 할 나이는 없다. 정답이 없잖은가. 내 답안지에 정답은 따로 있다. 나에게 맞는 시기가 적기다.”
마지막 질문이다. 멋진 여성으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것 세 가지를 꼽으라면 무엇이 있을까?
“자신감. 내면의 아름다움. 노력하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