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때로 기억해요. 무슨 까닭인진 몰라도, 한때 ‘죽음’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핵이 터져서 세상 모든 것이 사라지면 어쩌지’ ‘전쟁이 나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으면, 나 어떡해’ ‘내가 죽으면, 세상이 없어지는 건데, 엉엉’ 아, 생각만 해도 끔찍했습니다. 어느 날은, 잠자리에 들어 그런 생각이 막 들던 찰나, 어머니가 들어오셨는데 어머니 품에 안겨 엉엉 울었던 기억도. 엄마 죽지 마, 죽지 마, 하면서 눈물 흘리던 그 어린 소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죽음. 아마도, 소년이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했던 때가 아닌가 싶네요.
소년은 청년이 돼서 군대에 갔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을 읽었습니다. 한참 신나게 읽고 있는데, 명치를 때린 한 구절이 나왔습니다.
죽음은 삶의 대극(對極)으로서가 아니고, 삶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죽음과 삶을 분리해서 생각했던 분리주의자였던 청년, 띵~ 했습니다. 그 짧은 구절, 혼란스러웠죠. 아니 저 말, 대체 뭥미! 죽음과 삶은 명백히 갈라진 세계잖아. 아둔하고 늦된 청년, 뭔지는 몰라도 저 말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죽음. 쉬운 문제는 아니더군요. 언젠가는 죽을 것을 알지만, 그 죽음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던 시절이니. 허허. 단지 멀리 있을 뿐, 맞닥뜨리지 않을 것이 아님에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취득하는 권리가 죽음이라는 것을. 이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세상에도, 나이듦과 함께 그것만은 똑같이 부여받았습니다. 천하의 진시황도 이루지 못한, 영생불사의 꿈. 모든 것을 손에 쥔 권력자들에게도 죽음은 두려웠나봅니다. ‘태어나면 죽는다’라는 참 명제를 거스르고 싶어 했으니. 물론, 한편으로 그것은 죽음을 경시한 태도일 수도 있겠습니다. 죽음을 대체 어떻게 생각했기에, 그런 무엄한 생각을.
태어나면 죽는다. 다시 곱씹어 봅니다. 생과 죽음, 그렇게 한 몸입니다. 자웅동체입니다. 암수 한 쌍입니다. 결국 맞는 말입니다. 죽음이 삶의 대극이 아닌 일부라는 것. 태어남이 곧 죽음과 통한다니, 재밌고도 아이러니한 진실. 우린 그렇게, 진실을 부둥켜안고 태어났습니다. 허허.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죽음.
자라면서 죽음을 겪고, 책을 읽고, 생각하면서, 죽음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면서, 그 오래전 막연한 두려움에선 벗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완전히 벗어났다는 새빨간 뻥은 치지 않겠습니다. 다만,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까, 고민도 하고 있어요. 웰 다잉(Well-dying). 젊은 놈이 별 호들갑 다 떤다굽쇼. 음,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한번 속는 셈치고, 지금부터 하는 이야길 들어보셔도 좋겠습니다.
몇 년 전, 읽었던 이 책.
『죽음과 죽어감』(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지음/이진 옮김|이레 펴냄). 이 책의 가치는, 죽음을 이야기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나는 죽음이 코앞에 닥치기 훨씬 이전에,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얘기를 나누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죽음과 죽어감』, p.68)
엘리자베스의 죽음학은, 특히 죽음을 선고받고 죽어가는 자들, 즉 시한부 환자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는데, 꼭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충분히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저항이 아닌 죽음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인간 본연의 모습, 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우리 자신의 죽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이 겪어야 하는 비극이지만 결코 피할 수도 없는 죽음을 보다 침착하고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죽음과 죽어감』, p.29)
우리 사회가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던 책이었습니다. 죽음을 저 멀리 두고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보다, 삶의 한 부분으로.
“우리는 차갑고 경직된 사회가 아닌,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회, 그런 대화를 격려하는 사회를 만들어서 사람들이 죽는 그날까지 보다 덜 두려워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죽음과 죽어감』, p.421)
그리하여 저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던 윤동주의 「서시」를 떠올리는 별소년의 마음이 되기도 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편, 30년을 의사로 살아온 야마자키 후미오 도쿄 사투라마치병원 호스피스케어 연구소장이 쓴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그는 품위 있는 죽음을 말했습니다. “지금과 같은 병원에선 인간적이고 존엄한 죽음을 맞는 것이 불가능하다. 내가 불치의 병에 걸려 만약 몇 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면 결코 내 마지막 삶을 병원에서 보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미 누군가에겐 닥쳤고, 언젠가 내게도, 당신에게도 있는 그 죽음.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요. 죽어가는 이들의 마음에 한 발짝이라도 들어가는 일. 그것은 곧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
그리고 문을 두들겼습니다.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관심을 두고, 그들의 마음과 함께 호흡하는. 그들이 아직 생을 누리고 있고, 우리와 같은 하늘아래 숨을 쉬는 사람임을 알려주는.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그 얘기에 장단을 맞춰주면서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도와주는, 호스피스.
지난 9일 서울 후암동에 위치한 마리아의작은자매회 모현가정호스피스(
www.mhh.or.kr)를 찾았습니다. 마리아의작은자매회는 최근
『죽이는 수녀들 이야기』(마리아의작은자매회 지음|한겨레출판 펴냄)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이날 김갑경 안나 수녀님과 김은배 스텔라 수녀님을 만나, 호스피스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좀 더 죽음과 편하게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수녀님들과 나눈 이야기, 한번 들어보시죠. 어쩌면 당신도, 죽음이 좀 더 친숙해질지 모르니까요. 장담하건대, 그건 결코 나쁜 일이 아니랍니다.
2003년 나온 『죽이는 수녀들의 이야기』를 다시 펴냈습니다. 소감이 어떠세요. 개정판에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많이 달라졌어요. 뭣보다 사진이 들어갔죠.(웃음) 처음 냈을 때는 출판에 의의를 두고 기념하는 거였어요. 그때 책을 낸 계기는, 식탁에서 자기 경험을 나누면서 여러 얘기들이 좋았고, 그 기록을 공유하기 위해 책을 내자고 했어요. 그런데 출판사들이 내주려고 하지도 않던 차에, 성바오로출판사에서 내줘서 되게 기뻐했죠.
어쨌든 이번에 휴(休)에서 다시 내면서 디자인, 배열 등이 달라지고 사진도 들어가서 참 좋았어요. 우린 이걸 에세이집이 아니라, 화보집이라고 말하고 있어요.(웃음) 내용을 일부 빼면서 사진을 좀 집어넣고, 사진을 통해서 내용이 업그레이드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요.”
책을 읽는 분들과 진지하지만 발랄하게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환자를 만나며 느꼈던 행복과 추억, 인생에 대해서 배웠던 순간들을 나누고 싶습니다.(p.8)
마리아의작은자매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호스피스입니다. 책에 설명이 나와 있지만, 호스피스에 대해 설명 부탁 드려요.
“우리나라에는 호스피스에 대한 약간의 오해가 있어요. 암 말기 환자만 돌보는 것이 호스피스라는 것인데요. 호스피스는 암만 놓고 얘기하는 건 아니에요. 모든 환자, 임종을 맞이하는 분을 위한 것이 호스피스죠. 그런데 보건복지부 암 관리과에서 호스피스를 담당하고 있어요. 제도적으로는 호스피스에 대한 관할이 그렇다는 거죠. 호스피스는 말기 암뿐 아니라, 암이 아닌 치매나 장기요양, 고혈압, 임종을 앞둔 이들을 돌보는 일, 넓은 의미에서 봐야 합니다. 실제로 화를 내시는 분도 계세요. 암 환자만 돌봐주느냐고.”
호스피스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임종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다. 환자와 그 가족들이 생애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 즉 미래에 대한 불안감?분노?외로움?공포의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다. 죽음도 삶의 일부라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호스피스 본연의 목적이다. 이 돌봄은 완치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심신의 편안함을 도모함으로써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다.(pp.60~61)
20여 년간 임종환자를 돌봐 오신 권오숙 로사 수녀님은 “호스피스는 인권회복운동”이라고 설명하시던데요.
“호스피스는 미국에선 인권운동으로 시작했습니다. 태어날 권리가 있듯, 죽음에 대해서도 권리가 있다는 거죠. 대개 죽음 앞을 앞둔 환자가 있을 때, 의사와 가족이 얘기하지, 환자는 소외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우리나라도 환자가 아프면 보호자 불러서 얘기하잖아요. 내 병이고, 성인인데, 환자 자신이 모르고 쉬쉬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거죠. 치료를 원하지 않거나 항암치료도 선택이고. 혹자는 호스피스를 ‘포기’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기분 나쁘고~(웃음)
호스피스도 치료 방법 중의 하나예요. 호스피스, 항암, 방사선, 수술 등을 놓고 환자에게 설명해주고, 선택하게끔 해야 하는 거죠. 그건, 포기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마지막 삶을 선택하게 하는 거예요. 항암치료 한다고 꼭 오래 살진 않아요. 환자에게도 뭔가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거잖아요. 죽는 순간에, 중환자실에서 기계와 함께 있는 것보다 최소한 가족에 둘러싸여 죽고 싶다는 소망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마지막으로, 지금 드시는 민들레차를 마시면서.(웃음)”
2003년 책을 처음 내실 때와 지금 호스피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얼마나 달라졌나요.
“굉장히 달라졌어요. 호스피스는 아직 운동인 것이 맞는데, 그땐 많은 사람들이 호스피스라는 것을 몰랐다가 차츰 확산되면서 제도화 등의 문제 제기도 있었어요. 당시는 암 선고를 받고 가족과 의사와 얘기해서 이것만큼만은 하겠다고 서류를 만들어 제출해도 병원에서도 안 하겠다는 경우도 있었어요.
또 갈바리 의원은 당시 강릉 지역에서는 싫어했어요. ‘거기 가면 다 죽더라. 살아서 나오는 사람 없더라’(웃음) 요즘은 입원부터 스스로 찾아오는 분도 많고, 호스피스 찾는 분도 많아졌어요. 문의도 많고. 옛날엔 호스피스 안 하는 사람도 많고, 주변에서 설득을 해야 했는데, 지금은 설득 안 해도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편안하게 임종하고 싶다며 호스피스를 찾으세요.
호스피스 사업에 뛰어든 사람도 많아졌어요. 일본은 호스피스가 잘되는데, 순간적으로 잘됐어요. 물론 국가적으로 잘되게끔 해줬죠. 한국에 성형외과 왜 많은 줄 아세요. 돈을 벌게 해 줘서 그런 거예요. 한 의대교수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사람들은 돈의 흐름에 따라가기 마련이라, 호스피스도 중요하면 돈이 되게 해줘야 한다고. 일본도 호스피스가 그러면서 커졌어요. 그 뒤에 사명감도 생기고. 한국은 지금은 과도기예요. 어떤 사람들이 이쪽으로 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차츰 정리도 될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사업으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신체적 돌봄만 하는 게 아니라, 심리나 영적인 것의 돌봄, 즉 마인드가 중요해요.”
마리아의작은자매회에도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후암동 모현호스피스는 크고 예쁜 집이 됐고, 많은 추억들도 스쳐 갔고. 처음 모현호스피스 왔을 때와 비교하면 어떠세요.
“그때랑 비교하면 부자가 됐어요.(웃음) 2003년엔 일본식 목조건물이었는데, 주소도 44번지 4통 4반이었어요. 지금은 5통 7반으로 바뀌었지만. 옛날 건물에선 소박하게 했어요. 집도 크지 않고. 목조건물이라 금방 무너진다고 그랬어요. 그때 마침, 책이 처음 나올 때인데, 지상파에서 다큐멘터리를 찍었는데, 후원금이 엄청 들어왔어요. 계획도 있었지만, 돈이 없었는데, 들어온 후원금으로 마침 지금의 병동도 지었어요.”
정이 넘치고, 공동체 문화가 강했던 과거에는 임종을 앞둔 환자들에 대한 배려나 문화가 있지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우리나라도 장례문화가 많이 바뀌었어요. 지금은 핵가족화가 되면서 집에서 모시기 어려워서 병원을 선호하죠. 하지만 어르신들은 나가서 죽으면 객사라는 생각이 많으세요. 될 수 있으면 집에 있고자 하나, 가족이 없으니 간병인을 구하기 어렵고. 반면 병원 간병인은 돌아가면서 하시니까 간병을 할 수 있고. 그런 것은 조금씩 변화가 돼야 하는데, 갑자기 병원 문화로 바뀌어서 갭이 큰 것도 있어요.
아이들에게 죽음을 안 가르치는 것도 문제예요. 구라파나 일본은 어릴 때부터 죽음을 알려주거든요. 우리는 죽음이 배제돼 있어요. 어떻게 하면 돈 많이 벌어서 살 수 있을까만 알려주고.(웃음) 그래서 죽음을 못 받아들이는 문화가 된 것 같아요.”
죽어가는 환자가 있는 집에 아이들이 머무는 것이 허락되고 모든 대화와 토론, 두려움에서 소외되지 않을 때, 아이들은 자신들의 슬픔이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들 자신도 가족으로서의 의무와 애도에 동참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아이들은 위안을 얻는다. 그런 경험은 아이들로 하여금 서서히 죽음에 준비할 수 있게 해주고, 죽음을 삶의 일부로 여길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죽음을 금기시하는 사회, 죽음을 얘기하는 것 자체를 끔찍한 것으로 여기는 문화권에서 아이들은 ‘감당하기 벅차다’는 이유로 소외된다.(『죽음과 죽어감』, pp.16~17)
호스피스가 환자의 영적?정신적 돌봄과 안정, 통증 완화에 초점을 둔다면, 지금의 의료 시스템은 단순히 목숨 연장을 위한 의료행위가 중심인 것 아닌가요. 어느 것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은 아니지만, 호스피스의 필요성에 대해 한 말씀 부탁 드려요.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어떤 돌봄이든 신체적으로 편해야 해요. 그래서 의료 시스템이 있는 거고, 호스피스도 의료 시스템과 함께 가는 거예요. 생명연장은 다른 치료가 적극적으로 들어가는 건데, 치료를 적극적으로 해도 수명이 길어진다는 보장은 없어요. 하느님이 정해놓은 수명이라.(웃음)
호스피스도 의료 시스템의 일부고, 호스피스 기관의 의사도 경험이 많은 분이어야 해요. 종양내과에 계신 분이나 환자를 만나 본 경험이 많은 분이 좋아요. 명칭도 호스피스가 죽음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완화의학으로 바뀔 거예요. 의사들은 완화의료를 많이 얘기하시는데, 완화의료도 공부가 많이 필요해요. 의대나 간호학과에서 현재 (완화의료에 대한) 커리큘럼이 없고, 단지 몇 시간 알려주는 것으로 끝나요. 환자와 의사소통을 위해 의사도 배경지식이 필요해요. 학교 커리큘럼에서도 학기과목 정도로는 들어가야 하지 않나 싶어요.”
호스피스 의뢰를 받고 가정방문을 가보면, 의외로 환자보다 가족들이 병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크게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런 가족들의 두려움이 환자 본인에게 더욱 큰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 한다. 일반인 대상의 호스피스 교육이 절실한 이유다.(p.66)
죽음을 금기시하지 않고 준비하는 일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세요.
“한 사회가 죽음에 대해 얼마나 신경 쓰느냐는, 의대나 간호학과의 커리큘럼을 봐도 알 수 있어요. 아직도 죽는 것은 나쁜 것이라거나 아프면 벌 받은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렇게 따지면 안 죽는 사람도 생겨야 하는데, 모든 사람은 다 죽잖아요.
우리끼리 농담 삼아 이런 얘기도 해요. 동양식 정원과 서양식 정원의 차이에 대해. 서양식은 죽은 나무를 내버려둬요. 담쟁이를 심기도 하고. 정원 안에서도 삶과 죽음이 공존해요. 반면 동양식 정원은 죽으면 파묻어 버려요. 유교 문화권이 그래요. 동서양의 정원만 해도 그렇게 달라요.
여기도 처음에는 주민들 반대가 심했어요. 방문을 나가는 것임에도 환자는 동네 근처에도 못 오게 하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죽음이 무섭고 터부시되고, 나랑 상관이 없어야 하는 거죠. 누구나 다 죽는데 말이에요. 죽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 아니에요. 시간이 다른 거지. 먼저 가고 나중에 가는 것일 뿐이에요.
아까도 말했지만,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죽음에 대해 차단시켜요. 아이들에겐 그게 상처가 될 수 있어요. 한쪽 부모가 먼저 죽어도 아이들과 남은 부모와 대화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해요. 아빠(엄마) 힘들지, 하면서. 그것을 쉽게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것, 죽음을 전파해서 삶 안에서 이뤄지도록 하는 게 우리의 몫이죠. 대부분은 죽음도 어느 순간 편안해지는데, 그 순간이 되면 참 아름다워요.”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풍요롭게 하는 일은 건강하고 부유한 가운데서만 이루어지는 것일까. 단언컨대 그렇지 않다. 죽음에 임박하지 않았더라도 자신의 죽음에 늘 대비하는 자세로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자신뿐 아니라 가족이나 이웃의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기도 하다. 죽음을 금기시하지 않고 가깝게 받아들일 때 그 삶은 더욱 풍요롭고 따뜻해질 것이다.(p.66)
간호하기 좋은 분과 아닌 분도 분명 있을 것 같은데요. 호스피스를 하는 데 있어 필요한 태도나 자세가 있다면. 책에서는 중요한 덕목의 하나로 ‘유머감각’을 꼽으시기도 하던데요.
“유머는 1순위예요.(웃음) 임종을 앞둔 분과 같이 죽을 순 없고 웃어야죠. 대체로 임종을 앞둔 분이 계신 집에 가면 환자를 앞에 두고 대부분 우울하세요. 지금 살아 있는 순간이, 살아있는 것이 죽음이 다르지 않다고 얘기해줘야 해요. 죽는다고 생각하니 지겨운 거예요. 사실 그렇잖아요. 사회에 모든 관심을 끊으면 심심해요. 할 게 뭐 있겠어요. 즐거운 건 즐거워야 하고, 좋아하는 것 있으면 하게 해야 해요.
그리고 이건 이론에도 없는 건데, 우리만의 노하우랄까요. 호스피스는 그 사람이 성질대로 죽게끔 도와주는 거예요. 화를 많이 내는 사람이면 순해져서 돌아가시는 게 아니고, 살아가는 방식대로 돌아가시도록 도와주는 거죠. 그게 우리 수녀들이 만들어놓은 정의예요. 큰 변화가 아니고 자신의 살아온 모습을 유지하면서.”
책을 읽으면서, 호스피스는 마음의 도우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논리나 이성에 의한 설득보다는 마음과 감정을 교감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은데요, 제가 제대로 본 건가요.
“마음이 안 통하면 쫓겨나요. 저도 처음 갔던 집에서 쫓겨났어요. 처음 5분을 기다렸을 때, 환자가 주는 게 더 많아요. 환자 이야길 들어주는 게 우리 몫인데, 봉사도 마찬가지예요. 봉사의 의미도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도록 도와주는 게 더 큰 의미입니다. 호스피스는 함께 가는 거예요. 5분을 기다리면 50분을 환자가 얘기해요. 다 얘기해요. 그러면 우리와 친해져서 뗄 수 없는 관계가 되는 거죠.”
환자들에게는 정신적인 위안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건강한 사람의 척도로만 그들을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나름대로 즐거움을 찾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그러기까지 가족이나 주변사람들의 적극적인 도움도 따라야 한다.(p.52)
호스피스가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책에서도 “지금도 우리는 환자들에게서 많은 것을 얻고 배우는 중”이라고 말씀도 하셨는데, 그것도 관계를 맺는 것이기에 가능한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생을 배워요. 사람은 마지막 죽는 순간엔 철학적으로 돼요. 평소엔 표현이 안 되신 분이라도, 인생을 통해 지혜를 배운 게 있고, 죽음 앞에선 그 지혜가 나와요. 그래서 우리한테도 행운이요, 은총입니다. 우리 수녀원이 다른 수녀원과 다른 부분이 있는데, 돌아가시는 분을 보면 대범해지는 부분이 있어요. 어떤 걱정을 하다가도, 뭐 죽고 사는 일도 아닌데 하면서 아등바등하다가도 순간적으로 나아지는 게 생겨요.
어떤 분은 환자들에게 퍼주고 뭐 먹고 사느냐고 하는데, 정말로 글이나 영상으로 보여주지 못하지만, 한 분 한 분이 주는 은총은 굉장히 크고, 이것을 이어가야 한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 사도직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인 것 같아요. 그건 굉장한 에너지고, 그것을 주고받는 거죠. 50년 동안 무너지지 않고 할 수 있는 힘이 그 에너지에요. 우리 도움을 받은 사람은 살아 있지 않고, 보상이 눈에 띠는 건 없음에도 말이죠.”
장영준 님은 간호하는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을 위해 내가 뭔가 해줄 수 있다”는, 봉사하는 만족감을 갖게 해주었다. 또한 거부하지 않고 간병을 잘 받아들임으로써 간호하는 사람이 오히려 위로받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서로 주고받슴 관?가 ?성된 경우이기도 했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외로움도 표현할 길이 없는 분인데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였으므로 우리는 이분을 정성껏 돌보면서 봉사의 기쁨을 맛보고는 했다.(p.42)
호스피스도 사람인 이상, 스트레스가 쌓일 때도 있으실 텐데요, 스트레스, 어떻게 푸세요?
“환자한테 풀고 와요.(웃음) 스트레스 받으면 또 다른 환자한테 가고. 그 안에서 이뤄지는 사랑도 있어요.”
잘은 모르지만, 한국의 호스피스 시스템은 아직 미비한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현장에 계신 입장에서 어떤 점이 가장 아쉽고 어떤 정책이 필요할까요.
“우리가 1965년에 들어왔는데, 한국은 (호스피스가) 빨리 들어온 셈이에요. 아시아에서도 빠른 편이고, 미국과 차이가 별로 없어요. 인식에 있어선, 국민소득과 맞물리는 부분이 있어요. 대개 2만 달러부터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는데, 먹고사는 것이 급한 나라에서 죽음을 이야기하겠어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건, 1만 달러부터인데, 우리나라가 굉장히 달라진 것은 느껴요. 90년대는 이런 움직임이 없었어요. 2000년부터 터닝 포인트처럼 바뀌면서, 제도화가 시작됐는데, 제도화 몫은 우리로선 어려워요. 만나는 환자에 더 관심이 많고.
호스피스는 마음이 중요해요. 마음이 있으면 기술적인 것은 배워요.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기술만 배운 사람은, 임종을 앞둔 환자에게 도와줄 것이 많지 않아요. 기술적으로. 마음으로 다가가는 사람이 호스피스를 해야 하는데, 그 영역을 넓혀줘야 해요. 학교에서 그것을 하는 움직임이 있어야 해요.
아쉬운 점이 또 하나 있다면, 얼마 전 호스피스 수가 조정을 했는데, 열 받아서 참여 안 했어요. 이유가, 똑같은 돌봄인데, 종합병원에서 하면 20만 원을 지원하는데, 우리 같은 독립형은 7만 원을 받아요. 똑같은 서비스를 하는데도, 외려 독립형이 돈이 더 드는데도 그렇게 돼 있는 거죠. 화가 나서 참여 안 했어요. 환자를 위한 수가 조정도 아니고, 제도화하겠다고 한 사람들이 환자를 쏙 빼놓고 수가를 따지는데, 그게 마음이 아파요. 환자 위주의 제도화가 돼야 해요. 유럽은 오히려 독립형을 키워요. 전문적이 될 수 있으니까요. 우리도 전문적이라고 자신해요. 우리와 함께하는 의사 선생님도 완화의학을 따로 공부하신 분이고.”
현재 우리나라에서 말기 암 환자를 위해 따로 마련된 의료시스템은 별달리 없는 것 같다. 많은 검사와 치료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환자들은 자신의 죽음을 맞이할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못한 채, 가족과의 화해나 이해도 제대로 구하지 못한 채 임종을 맞고 있다.(pp.98~99)
마지막으로 여쭙겠습니다. 수녀님들은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싶으세요? 각 수녀님의 죽음에 대한 생각들을 듣고 싶습니다.
“수녀님들끼리 얘기해요. 노환으로 죽고 싶은데…… 수명대로 장수하고 죽는 게 꿈인데…… 이런저런 얘길 하다가, 내 상태를 받아들일 수만 있으면 좋겠다는 결론을 맺어요. 환자들이 임종을 앞두고 자존감이 사라지는 경우도 많이 봤어요. 어떤 사회복지학과에서는 학생들에게 기저귀를 차고 다녀보라고 얘기를 한대요. 정말 독한 애들이 소변 정도나 보지, 정말 못 한다고 하더라고요. 대부분 변비로 가고. 그래서 바라죠. 내 몸이 어쩔 수 없을 때, 까칠하게 안 굴었으면. 나의 현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면 잘 살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품위 있게 죽는 건 욕심인 것 같고.(웃음)”
죽음에 대한 상념에 빠져 있다가 불현듯 내가 지나친 욕심을 부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하나만 이루어지면 되는 것을……. 그 단 하나의 소원은, 어떤 상황이 오든 그 상황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다.(p.82)
“수용할 수 있는 마음만 있으면 어떤 상태든 인정하면 되는데, 쉽진 않아요. 들은 얘긴데, 어떤 엄마가 아파서 딸이 목욕을 시키는데, 엄마가 수치심을 느꼈대요. 딸이 해줬음에도. 나만 벗고 딸이 나만 목욕시켜줘서……. 그래서 저도 환자와 목욕할 때, 옷을 벗진 않지만, 물을 주고받으면서 해요. 다 젖는 한이 있어도. 환자들이 참 좋아해요. 같은 격이라 생각하니까. 환자와 돌봐주는 사람이 동급이어야 해요. 그러면 들어오는 마음이 달라요. 내가 아플 때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살면서 연습해야 할 것 같아요.”
고 김수환 추기경님이 남긴 이 책에 대한 추천의 글은 이렇습니다. “풍요로운 삶은, 죽음이 삶의 한 과정임을 받아들이는 데서 비롯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에서 한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누구든 풍요로운 삶을 원할 테지요. 그러기 위해선 죽음도 함께 생각하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나나 당신에게 묻습니다.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