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비평가가 뽑은 올해 가장 좋은 시 「맨발」(2004), 「그늘의 발달」(2008) 문인들이 애송하는 좋은 시 「가재미」(2004), 문인들이 뽑은 가장 좋은 시인 문태준(2005 ‘오늘의 시’ 설문 조사)……. 단 세 권의 시집으로 문단의 중요한 시인으로 자리 잡은 문태준 시인. 『수런거리는 뒤란』(2000), 『맨발』(2004), 『가재미』(2006) 『그늘의 발달』(2008). 그리고 지난해에는 산문집 『느림보 마음』(2009)을 펴냈다.
시집마다 평단과 독자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았다. 동서문학상, 노작문학상,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러한 사실에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는 아직 문태준의 시를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일 확률이 크다. 그가 그려내는 서정의 세계는 친숙하면서도 지루하거나 투박하지 않다. 익숙한 것들이 그의 시 속에서 뒤태를 내보인다. 시 속에서 보여지는 자연과 풍경들은 감각적이고, 아름답고, 무엇보다 매혹적이다.
시골 풍경은 수런거린다. 그야말로 끊임없이 ‘수런거리는 뒤란’이다. 염소, 풀벌레, 가을밤, 댓잎, 돌담, 귀뚜라미, 감나무, 보슬비, 들쥐. 정지한 이미지로 각인되었던 것들이 끊임없이 몸을 움직여 댄다. 그의 시를 읽으면, 논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와글와글와글와글’ 쏟아지고, 국숫집에서는 면발을 먹을 때 나는 ‘쯧쯧쯧쯧 쯧쯧쯧쯧’ 따뜻한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그는 풍경을 깊숙이 보는 사람이다. 그렇게 한 컷 한 컷으로 이루어진 풍경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불교 방송국이 있는 마포 근처 홍대에서 약속을 잡았다. 문태준 시인은 현재 성전 스님이 진행하는 <행복한 미소>와 <영화음악실> 프로그램 담당 PD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번 인터뷰 때처럼, 이날도 간만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닐 지붕 위로 떨어지는 경쾌한 빗방울 소리와 창문에 후둑후둑 달라붙는 빗줄기 소리가 제법 근사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기억 깊숙한 곳에서 이미지를 쑤욱 길어 올렸다. 하나의 질문도 빗물처럼 가볍게 튕겨 내는 법이 없었다. 마치 암산을 하듯, 머릿속에서 단어를 꺼내고, 순서를 맞추고(맞지 않으면 재차 언급하고), 마치 각운을 맞추듯
“그러더군요.” “하더군요.”라고 말을 맺었다.
질문을 할 때면, 시인은 이미지를 불러들이고, 그것에 골몰하며,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놀라울 정도로 구체적인 풍경들이 말 속에서 펼쳐졌다. 문태준 시인의 낮은 목소리는 비 오는 날, 덤덤히 기억을 짚어나가는 데 잘 어울렸다. 간간히 문태준 시인이 웃을 때면, 한일자로 꼭 감기는 두 눈 때문에 나는 뒤늦게 한 번 더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수런거리는 뒤란
누가 바람을 빚어낼까요
서쪽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산죽의 뒷머리를 긁습니다
산죽도 내 마음도 소란해졌습니다
바람이 잦으면 산죽도 사람처럼 둥글게 등이 굽어질까요
어둠이, 흔들리는 댓잎 뒤꿈치에 별을 하나 박아주었습니다
문태준이라는 이름만 아는 독자들은 할아버지가 아닌가, 생각하시는데 훨씬 젊으시군요.(웃음) 저도 처음 선생님 시를 읽고 꽤 연배가 있으신 분인 줄 알았어요.
“조숙해 보인다. 나이가 들어 보인다고 그래요. 익숙하지 않은 자연들이 시 속에 많이 들어와서 그런 걸 거예요. 시골 풍경이라든지 시골 사람들의 주름진 얼굴. 이런 것들을 쓰니까 아무래도 요즘 감각하고는 조금은 거리가 있어서 그렇지 않나 싶어요.
개인적으로는 중학교 때 크게 아프고 난 이후에 성숙해진 것 같아요. 사경을 헤맬 정도로 아파서 다들 죽는다고 그랬는데, 살아났어요. 그때 마치 성자처럼(웃음) 십오 세에 깨달은 사람이 된 것처럼요. 병명을 아직도 몰라요. 고열이 계속 났고, 환각에 시달렸어요.”
병중에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으셨는지 기억이 나세요?
“요즘 공포 영화보다 더 무서운, 그러니까 사물의 소리가 갑자기 커진다든지 그런 경험을 했어요.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섬뜩섬뜩한 느낌이 있어요. 예를 들면, 여울물 소리가 여름에 장마철에 물소리처럼 들린다든지, 작은 도르래 바퀴가 달린 문에서 큰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린다든지. 그리고 계속 열에 시달려 있었죠.”
그 병을 겪고 나서, 달라진 게 있다면요?
“아, 죽을 수 있구나, 이런 생각을 일찌감치 했죠. 죽음이 이렇게 가까이 있을 수 있구나, 죽음이 나를 데려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열다섯 살 나이에.”
느림을 얘기하는 작가님의 시는 왜 이렇게 문단을 빠르게 치고 올라가나요.(웃음) 작가님의 시가 받고 있는 찬사는, 시의 분위기와 다른 것 같아요. 작가님 시는 고요하게 수런거리고, 미동하고 있는데, 찬사는 강렬합니다. 시대를 역행한다, 특이하다, 변종, 별종이다…….
“자기가 소유하고 싶은 부분, 이런 부분들을 제가 보여 주기 때문일 거예요. 느린 것에 대해 말한다든지. 사물과 대상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들이 평소에 겪어 보지 못한 특별한 즐거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제 시를 반겨 하는, 독특한(웃음) 현상이 벌어지는 거죠. 제 시는 슬퍼요. 슬프다고 해요. 제가 십오 세 이후에 삶을 슬픈 눈으로 보는 것 같아요.”
그 슬픔이 ‘아! 슬프다!’ 하고 오기보다는 아련하게 슬프잖아요. 지긋하게 슬픔이 밀려오는.
“그렇죠. 그림자같이. 가슴을 지나가는 그림자 같은 것.”
일상도 그런 시각으로 보는 편인가요?
“세계나 세상을 반가운 기색으로 보는 기질은 아닌 것 같아요. 뒤가 뭘까. 사물의 뒷모습이 뭘까. 이 사람의 뒷등이 뭘까, 이런 것들을 잘 생각하죠. 뒤란, 뒷마당, 등짝, 생각의 뒷 등짝 이런 것들.”
그런 시각이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피디 일에도 도움이 되겠네요.
“그렇죠. 직접적으로는 음악을 듣는 게 더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요즘 시대 음악보다 클래식이나 영화음악들을 많이 들어요. 그런 음악들이 만들어 내는 음계는 굉장히 시적인 음악성을 지니고 있어요. 그래서 많이 도움이 되죠. 김종삼 시인이 방송국에서 음향 보조 일을 했었거든요. 다른 사람들 다 퇴근하고 나면 혼자 방송국에서 남아 큰 스피커로 클래식 음악을 많이 들었다고 그래요. 저도 출퇴근하거나 사무실에 있을 때 클래식을 많이 듣는데, 그런 음악들이 감성을 유지하게 하는 역할을 해주는 것 같아요.”
예전부터 음악을 좋아하셨어요?
“예전에는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어요. 시골에서 자라서, 시골에 있는 음악이라는 게 뻔하잖아요. 물소리, 새소리, 경운기 소리…….(웃음)”
시집을 쭉 읽으면서 선생님이 아직도 김천에 사시나 싶었습니다.(웃음) 마포 아파트 동네를 보고 지내시면서, 어떻게 항상 고향의 이미지를 가질 수 있는지요?
“마포, 번화하죠. 사무실 창 쪽에서 보면 밤섬이 바로 보여요. 밤섬을 조망하기 가장 좋은 곳 하나가 사무실 창가 쪽 같아요. 밤섬을 보면 오종종하게 앉아있는 새 떼라든지, 모래. 섬과 물이 만나면서 만들어지는 모래펄. 이런 것들이 보여요. 계절에 따라서 강의 느낌도 많이 달라요. 서늘한 가을볕이 쏟아질 때 강은 북한강의 느낌을 줘요. 봄볕이 막 쏟아질 때는 남쪽 섬진강의 풍경을 떠올리게 하죠. 이런 풍경들이 도심에 있지만 시를 쓰게 해 주고, 저에게는 회사에 있는 동안, 한강을 내다보는 일이 아주 큰 위안이죠. 집은 또 산 쪽에 있는 아파트예요. 산이 바로 붙어 있어서 산책하기가 좋죠.
산 옆에 계속 살아온 것 같아요. 얕은 산이라도 있어야지 산에서 좀 떨어지면 좀 불안해져요. 저는 휴대전화 첫 화면도 우리 집에서 보이는 산 풍경이에요. 푸른 하늘…… 새가 마른 나뭇가지에 지어 놓은 둥지가 있는 장면…… 이걸 넣어 놓고 있는데. 그런 것들을 내 마음속에서 계속 연상시키는 거죠. 그걸 연장시키면서, 시를 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거죠.”
마음속에 저장된 풍경의 이미지가 굉장히 많으실 것 같아요.
“풍경이 풍경을 만났을 때, 교차할 때 주는 이미지 있잖아요. 그런 것에 굉장히 민감하죠. 그리고 시장에 만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가장 좋아해요. 시장 골목에 순대 국밥집에서 혼자 앉아서 소주 먹는 시간이 가장 행복해요.(웃음) 그 사람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이렇게 듣고 있죠.”
그럴 때 무슨 생각 하세요?
“‘누구나 다 괴롭지 않은 사람이 없고,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역시 없구나.’ 하는 생각이죠. 마포?공덕역에 가면 순대 국밥집이 많은 데가 있어요. 그런데 가서 혼자 앉아있다 오기도 하고, 지방에 내려가면 그 동네 시장 국밥집에 꼭 들렀다가 가요. 다른 핑계를 대서 일행을 따돌린 다음에.(웃음)”
왜 꼭 혼자 가세요.(웃음)
“좋아요. 그냥. 낯선 사람을 만난다는 게. 이 시간에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는 거죠. 그리고 열심히? 제대로? 아무튼, 다시 가서 살아야 되겠다.”
가재미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제목이 되는 시들,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은 직접 정하신 건가요?
“시집 제목이 꼭 전체를 표상하지는 않아요. 제목도 잘 정해야 되는데, 『그늘의 발달』은 실패한 제목이 아닌가 싶어요.(웃음) 주변에서 많이들 말렸어요. 아내도 좀 말리긴 했는데, 저는 좀 세련된 면모를 보여 드리고 싶었어요. 그늘이라는 다소 정서적인 컬러와, 발달이라는 속도감하고 전혀 잘 안 맞잖아요. 비대칭인데, 그것이 오히려 세련돼 보이지 않나. 야, 이건 영화 제목 같다.(웃음)
그렇게 생각해서, 제가 오히려 고집을 부렸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네 번째 시집 제목을 「百年」 이라는 시로 정할 걸 그랬나 싶어요. 그 시가 슬프거든요. 독자 분들이 시집 중에 많이 좋아해 주더라고요. 사실 둘 중에 고민을 했어요. 제가 옹집하게 고집을 부려서, 그렇게 되었는데,(웃음) 「百年」이라고 해도 괜찮았겠다 싶어요. 시 전반에 분위기를 끌고 가는 게 있어서. 다 지난 일이죠. 뭐.”
선생님께는 『가재미』가 조금 남다른 시집이 아닐까 싶어요. 평단은 물론 독자들에게도 유독 많은 사랑을 받은 시집이었죠.
“제가 최근에 <낭독의 발견> 프로그램에 나갔는데 함께 출현했던 김혜옥 씨가 『가재미』 얘기를 했어요. 사실 제가 거기서 낭독한 시는 『그늘의 발달』에 있는 시였는데(웃음), 그 이후에 『가재미』가 많이 나갔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저는 『그늘의 발달』이라는 네 번째 시집이 더…….(웃음) 그 시집이 많이 묻혀 버렸어요. 시적인 변화를 궁리한 부분이 『그늘의 발달』에 있는데, 그 부분보다는 『가재미』가 좀 더 대중적이기 때문일 거예요.”
『그늘의 발달』에서의 시적인 모색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요?
“좀 더 생각이 많아졌어요. 감정이라든지, 사랑의 느낌. 이런 것보다는 조금 더 사유적인 시, 이런 부분이 더 많이 들어갔죠. 내가 대상과 세계를 만났을 때 빚어내는 사유의 모서리를 보여주려고 한 게 『그늘의 발달』이었던 것 같아요. 표정이 많이 바뀌지는 않았는데, 조금 더 그랬다는 거죠.”
그렇다면 다음 시집은 『가재미』에 가까울까요. 『그늘의 발달』의 시적 모색을 심화시키실 건가요.(웃음)
“아……. 고민 중이에요.(웃음)”
『가재미』는 돌아가신 큰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쓴 시로 알려져 있는데요. 큰 슬픔을 꾹꾹 눌러 담은 시일 텐데, 시를 쓸 때는 어떠셨나요. 여러 사람들을 위로한 이 시가, 선생님도 위로했나요?
“죽음은 헤어지는 것하고는 또 다르게, 갑자기 볼 수 없는 것이고 어떤 계기로도 만날 수 없다는 것이잖아요. 그게 참 고통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을 느꼈고, 쓰는 동안에 새벽에 많이 울었어요. 몇 날 며칠, 멍하니 울고만 있었어요. 어느 날, 눈물이 말라갈 무렵에 쓰기 시작했어요. 순식간에 썼어요. ‘눈물을 다 흘렸고, 내 눈물이 마를 때, 그녀가 이제 떠나겠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저로선 이별의 한 과정을 겪었다고 봐야죠.”
‘최근 가장 많이 불려 다니는 시인’이라고도 해요. 시 쓰는 일 외의 외적 활동이 번거롭지는 않으세요?
“번거롭죠. 시인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사람일수록 좋은 시를 많이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불려 다니는 일이 좋은 경우가 더러 많아요. 독자들을 만날 때 그렇죠, 감명 깊었던 적이 되게 많아요. 교통사고를 당한 60대 독자 여성분이었는데, 그분이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기억력에 문제가 생기신 분이에요. 그 분이 「가재미」라는 시를 낭송했는데, 그걸 위해서 몇 날 며칠 고생을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고 그분 손을 꼭 잡았죠. 너무 고맙다고. 그런 분이 있어서 허투루 시를 쓴다는 게 무섭고…….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독자를 만나지 않는다는 건 다소 직무유기 같아요. 시가 덜 읽히는 시대일수록 시인들이 사회적인 발언을 하고, 좋은 시로 독자들과 계속 소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 독자들에게 시 배달도 하시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웹진 <문장>(//webzine.munjang.or.kr/)에서 시 배달 일을 하고 있어요. 요즘 읽고 있는 시들 중에서 좋은 시를 소개하는 글 청탁이 많이 와요. 그런 청탁은 거절해 본 적이 없어요. ‘아, 이 시는 이게 너무나 좋습니다. 이런 좋은 시가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이 발표되고 있는 줄 아십니까? 우린 얼마나 행복합니까!’ 이런 얘기를 쓰는 거죠. 저 역시 시를 쓸 때는 고독한 방을 선택하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독자들을 만나고 시를 배달하고, 앞으로도 기회가 될 때마다 이런 역할을 계속 하려고 해요.”
저것이 나한테 들어 있고, 내가 저것 속에 들어 있다
네 해 동안 꽃이랑 풀, 낯빛이 어두운 사람, 별과 여울, 미루나무를 만났다. 습지와 같은 그늘을 드리운, 낱낱이 오롯한 존재들을 만났다. 그들과의 대화가 이번 시집을 낳았다. 입아아입(入我我入)이다. 저것이 나한테 들어 있고, 내가 저것 속에 들어 있다. 나 아닌 것, 그러면서 동시에 나인 것들을 잘 섬기며 살아야겠다. (…) 다만, 시 쓰는 일이 오래오래 해야 할 것임을 믿는다.
선생님 시를 두고 ‘예전과 다른 서정’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직접 그렇게 말씀하시기도 했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 서정입니까?
“예정의 서정시가 가지고 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면모, 다른 표정이 있다는 거겠죠. 자연 서정에서 조금 다른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보통은 자연 서정을 많이 얘기하는데, 저 역시 자연 서정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서도, 관계 같은 것에 주목하거든요. 시를 짓는 화자와 대상의 수평적인 관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요.
모든 사물과 사물이 수평적인 자리에서 관계해 있다고 봐요. 우열은 우리가 만들어 낸 이미지고. 우리가 만들어 내는 권력이에요. 본래의 물건들은 모두 다 같은 무게를 달고 있는 천칭처럼 나란한 수평을 이루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그런 것을 제 시가 얘기를 하려고 했고, 앞으로도 아마 그런 얘기를 당분간 하게 될 것 같아요.”
선생님 시를 얘기하면서, 불교를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 또한 관계적인 것과 관련이 있을 듯한데요. 시에서 불교란 어떤 것입니까?
“경전을 잘 보면, 불교는 구체적인 질문과 구체적인 답변이에요. 그것이 누구 한 명이 설법하는 구조가 아니라 대화하는 구조라는 거죠. 우리가 불교의 그런 면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생활의 고민, 고통, 이별, 싸움의 문제, 국가와 국가가 싸울 때 문제에 대해서도 불교는 구체적으로 답변을 하거든요. 그런 구체성을 불교의 한 특징으로 새롭게 봐야 할 것 같아요.
불교가 저에게 도움을 준 것은 관계에 대한 것이에요. 그물처럼 얽혀 있는 관계. 지금의 나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나와 만나고 있는 상대방, 내 둘레, 나와 정면하고 있는 세계를 통해 나를 설명할 수 있다는 거죠. 그게 관계거든요. 이런 것을 불교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죠.”
이런 방식으로 시를 쓰는 까닭은 무엇인가요? 이런 자연의 이미지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공유, 교감인가요?
“일차적으로 자기해소죠. 94년도에 등단을 했으니까 꽤 오래 시를 썼는데, 왜 시를 쓰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답변을 못 하겠어요. 안 쓰고 있으면 굉장히 제가 저를 괴롭힌다는 거죠. 오랫동안 목욕탕에 가지 않은 몸처럼 제가 괴로워요. 좋은 시를 발견하면 뭔가를 발명한 듯한 느낌. 혹은 비밀을 캐낸 듯한 느낌을 받아요. 몸의 피로 같은 걸 잊어버리게 되는 것 같아요. 좋은 시를 썼을 때의 몸은 이루 말할 수가 없죠. 솔직함에 대한 얘기 같아요. 우리가 대화할 때도 솔직하게 다 털어놓으면 후련하잖아요. 시도 마찬가지로 시원하고 후련한 느낌을 주죠. 좋은 시를 쓰고 나면.”
그때 좋은 시라는 건 뭐예요?
“시가 처음으로 올 때의 첫 느낌. 그 말이 나에게 온 첫 느낌, 그것이 그대로 살아있는 것, 훼손되지 않은 싱싱한 상태. 그 상태 그대로 시가 되면, 그게 좋은 시인 것 같아요.”
이제껏 쓴 시중에 가장 싱싱하고 애착을 갖고 있는 시가 있으신가요?(웃음)
“아마 최근에 쓴 시가 가장 싱싱하고 가장 마음에 드는 시라고 할 수 있겠죠.”
시간상 최근이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최근에 시도한 모색 때문인가요?
“저는 제가 썼던 시들을 기억을 잘 못해요. 아무리 짧은 시라도 낭송할 수 있는 시가 한 편도 없어요. 그런 노력을 하지도 않고. 노력을 해도 잘 안 되더라고요. 저는 그 순간에 대상과 물건과 내가 탁 맞부딪치면서 섬광처럼 생겨나는 빛, 이런 걸 즐기는 거지. 이것이 만들어내서 이미 작품화된 것을 또 기억하고 싶지는 않고, 또 다른 섬광을 기다리는 거죠.”
이후에도 선생님 시에서 김천의 이미지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앞으로도 그쪽에 대해 얘기하실 건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벌써 70년생이 마흔이 넘어 버렸어요. 마흔을 넘고 보니……. 아마 이 사회 한 귀퉁이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작은 역할이 있을 걸로 생각해요.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일 텐데, 발언을 할 책무도 좀 가지고 있다…… 나의 입장을 드러내는 작업들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시에 있어서도 앞으로 조금 더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해요. 입장에 대한 고민이 최근에 많이 생기고 있어요.”
그 고민이 생긴 까닭이 있다면요?
“제가 방송 일 하면서 취재도 많이 다니는데, 용산 참사 해결을 지켜보고, 청년 실업과 관련해서 인터뷰를 하고 학생들을 만나기도 하고, 전세금이 너무 뛴다고 해서 전세 대란 취재도 다니고 있고, 부동산 중개소도 많이 다니고 하고 있어요. 그런 사회적 관심이 좀 시에 들어올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시국의 문제뿐만 아니라, 저에게 스스로 질문을 하는 거죠. 너의 입장이 무엇이냐. 그 질문들은 지금까지 많이 유보해 왔던 질문들이에요. 앞으로는 그런 질문들을 많이 하지 않을까. 그럼 시가 조금 바뀌겠죠.”
시에 대한 생각은 어떠세요?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와 지금, 달라진 게 있나요?
“시에 대한 생각이 바뀐 것은 없어요.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의 그 기본적인 태도. 시 작업이 나에게 주는 어떤 묵직함은 변함이 없어요. 이를테면, 힘들고 외로운 새벽을 견뎌야 한다. 홀로 남겨져 있어야 한다는 원칙들이 있어요. 그것이 나를 쓰게 하는 힘이죠. 어떤 것에 대해 쓸지는 많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시를 대하는 태도는 변하지 않겠죠. 태도가 바뀌게 되면, 시를 안 쓰게 되거나 시에서 멀어지게 되겠죠.”
마음아, 너 갈 데라도 있니?
가는, 조촘조촘 가다 가만히 한자리서 멈추는 물고기처럼
가라앉은 물돌 곁에서, 썩은 나뭇잎 밑에서 조으는 물고기처럼
추운 저녁만 있으나 야위고 맑은 얼굴로
마음아, 너 갈 데라도 있니?
살얼음 아래 같은 데
흰 매화 핀 살얼음 아래 같은 데
어떨 때 시가 쓰고 싶으세요?
“일이 너무 바쁠 때, 하기 싫은 일이 막 쌓여 있을 때. 생활을 위해서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쌓여 있을 때…… 확 도망쳐서 시 쓰는 공간으로 들어가고 싶어요.”
일 감각과 시 감각이 바로바로 전환이 되나요?
“곧바로 안 이어져요. 그래서 쓰기 전에 잠을 짧게 자요. 생활과 시 쓰는 감각을 구분하기 위해 짧게 잠을 자고 난 후에 시를 쓰죠.”
일하는 것과 시 쓰기를 병행하기 위한, 개인적인 원칙 같은 게 있으신가요?
“둘 다 소홀히 하지 않죠. 소홀히 할 수도 없고, 직장에 일이 너무 많아서, 그 일은 그 일대로 해야 하고, 대신 집에 돌아가서는 내 나름대로 내 시간을 살려고 하죠.”
그럼 가족과의 시간은 언제 보내시나요.(웃음)
“어……. 가족들은 대개 열두 시면 조용해지죠.(웃음) 아이들도 번갈아 가면서 돌봐야 하는데, 최대한 아이를 돌보는 일과 집안일을 신속하게 하고, 새벽에 내 일을 하려고 하죠.”
일을 한다는 것은 어떻습니까? 단순히 밥벌이 이상의 일이죠?
“밥벌이 이상이죠. 음악을 배운다거나 (생각의) 폭이 넓고 깊어진다든지, 아무래도 세계가 돌아가는 형편에 대해서 민감한 곳이 방송 쪽이니까, 그런 부분에 있어서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요. 제가 있는 곳이 불교 방송이라서, 스님들의 세계, 청정한 세계 가까이에 있는 것도 그렇고요. 다른 종교의 신부님이나 목사님들이 종교 수행자로서 보여 주는 것들을 저는 스님들을 통해 보고 있는 거죠.”
일하다 보면 화가 날 일도 많을 것 같은데요……. 선생님은 화를 안 내실 것 같아요.(웃음)
“왜 화가 안 나요. 화가 날 때가 있죠.(웃음) 그래도 젊을 때보다는 좀 더 화내는 게 줄긴 했는데.”
어떨 때 화를 내세요? (웃음)
“서운함이죠. 내 생각은 그게 아닌데, 그리고 이것도 이렇게 돌려서 생각해도 될 텐데 이렇게 바로 받아칠까……. 일은 결과적으로는 다 하게 되어 있으니까 진행 과정에 있어서 좀 여유를 가질 수는 없나. 이런 것들 때문에 화가 나지만, 화가 났다고 잘 표현 못 해요.(웃음) 혼자 앓는 스타일이에요.”
일반적으로 피디의 일이나 생활이 선생님의 글과 잘 매치되지가 않아요. 선생님은 느림보 마음을 고수하시는 분인데.(웃음)
“일은, 시인 기질이 있어서 그런지 조금 미루는 스타일이라……. 다른 사람들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려요.(웃음) 시 쓰는 사람이라서 좀 더 조심스러운 게 있어요. 제대로 하려고 하고, 실수가 적도록 하려고 하고요. 시 쓰고 있는 사람이면, 자기 마음대로 식이다, 흔히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잖아요. 사회 생활하는 공간에서는 그런 느낌을 주고 싶지 않아서 신경 쓰는 게 있죠.”
중심이라고 믿었던 게 어느날
우리가 믿었던 중심은 사실 중심이 아니었을지도
저 수많은 작고 여린 순들이 봄나무에게 중심이듯
환약처럼 뭉친 것만이 중심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중심이라고 믿었던 게 어느날」 중,
『맨발』(p.74)
제게는 낡고 익숙하기만 한 것들이 어떻게 선생님께만 낯선 모습을 보입니까? 선생님은 감각의 필터 같은 것이라도 지니고 있으신 건가요?(웃음)
“감각의 필터. 그거 좋은데요. 청소기도 필터를 가지고 있잖아요. 저는 필터를 자주 바꾸는 청소기라고 생각하면 되죠.(웃음)”
필터를 자주 바꾸신다고요?(웃음)
“그만큼 감각이 예민한 감정선을 가지려고 노력한다는 거죠. 누군가와 대화를 하든지 몸동작을 보든지 할 때 연상되는 것들이 굉장히 많아요. 악기의 현 같은 감정선 같아요. 어떨 때는 그걸 유지하느라 굉장히 괴로운데, 그렇게 느끼는 것을 메모해 두었다가 시로 쓰죠.
제가 중?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선생님들이 어떤 단어들을 판서를 하면, 그런 느낌을 굉장히 많이 받았어요. ‘아, 이 말은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처음 들어 보는 것 같다?’ 국어 선생님이 어떤 낱말이라든지 중요한 단어를 칠판에다가 쓰잖아요, 쓸 때 창가에 앉아서 보다가 어떤 순간에, ‘저런 말이 있었나?’ 이런 생각이 들 때가 많았어요.
그게 알고 보면, 시를 쓰게 하는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툭툭 주고받는 말이지만 거기서 불쑥 나에게 완강한 힘으로 다가오는 게 있어요. 그걸 느낄 수 있고, 낚아챌 수 있고, 잡아낼 수 있고, 심을 수 있는 그런 감각, 이것이 시인의 감각 같은 것 같아요. 시대를 보는 시선도 마찬가지죠. 시대를 보는 예민하고 정직한 시선도 마찬가지죠.”
현악기 같은 감각은 타고났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십오 세 이후로…….
“십오 세 이후의 영향이(웃음) 있는 것 같아요. 느리지만 꼼꼼한 기질이 있는데, 저는 좀 깊게, 오래 보는 시선이 있어요. 뭘 보더라도 오래 보고 깊게.”
어렸을 때도 생각이 많은 학생이었나요?
“그건 아마도 많이 기다린 경험 때문인 것 같아요. 컴컴해지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은 엄마, 아버지를 기다리면서. 기다림 때문에 귀와 눈이 발달된 것 같아요. 왜 아직도 안 오시나 하고 고개를 빼고 기다린 적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이런 생각 처음 해봤네요.(웃음) 뭔가 애타게 기다렸기 때문에 눈과 귀가 좀 더 예민해진 것 같아요.”
여자 형제들 사이에서 자라셨어요. 외아들이라고 대접받으며 자라셨나요?
“오히려, 어머니는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강하게 키우려고 하셨어요. 회초리로 굉장히 많이 맞았어요.”
문득 궁금했는데, 연애하실 때는 어떠셨어요?
“대학 때 좋아하고 쫓아다니던 사람과 결혼을 했어요. 연애는 서툴렀죠. 아주. 시골에서 쭉 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처음 서울에 왔을 때 문화적 격차를 굉장히 많이 느꼈어요. 그게 어떨 때는 공포감으로 다가오곤 했는데, 그게 잘 극복이 안 되더군요. 서울에 살았던 친구들은 다른 세계를 즐기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연애의 방식도 서툴렀고, 무작정 그냥 진심만 있으면 되겠거니 생각을 했던 거죠. 결국은 통하긴 했는데 과정은 복잡했어요.(웃음) 많이 차이고, 이별을 통보받고 그랬었죠. 그럴 땐 잊고 싶어서, 시골 내려가서 농사일을 열심히 거들었어요.(웃음)”
‘중심이라고 믿었던 게 어느 날’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경험이 있었나요? 시야가 한 꺼풀 벗겨진 느낌.
“김천 시내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요. 시골에 살다, 김천 시내에 나가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1983년 이 무렵에 김천 시내가 무슨 대단히 발달된 도시도 아니었을 것 아녜요?(웃음) 그런데도 가슴이 답답하고 그러더라고요. 그때 추풍령에서 내려오는 버스를 타고 가는데, 그 차가 얼마나 학생들이 많이 탔는지 몰라요. 버스 안내양이 가방을 창문을 통해서 밀어 넣어 무조건 올라탔거든요.
그리고 십오 세 때 아픈 적이 있었고, 대학교 시험을 보기 위해서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도 충격이 있었죠. 원서를 접수하려고 친구들과 올라왔는데, 대학교 선배들이 피켓을 들고 서울역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선배들 도움을 받아서 원서를 내고 처음 갔었던 곳이 이화여대 앞이었는데, 거기서 떡볶이를 사 줬던 기억이 나요. 왜 그렇게 사람이 많은지. 진짜 번화하구나. 이런 느낌을 받았어요. 그러면서 혼란스러웠죠.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도 내내. 집에 내려가니, 시골집은 캄캄하니 아무 소리도 없고, 어두운 길 위에 우리 집의 불만 켜져 있었어요. 그날 하루에 극과 극의 세계를 경험한 거죠.”
이런 경험이 환경적이었던 것이라면, 혹시 생각이 완전히 뒤바뀌었던 적은 없었나요?
“대학 때 제가 사촌 누님 집에서 생활을 했어요. 이건 아마 처음 얘기하는 걸 텐데……. 식구들이 같이 외식을 하는 모습, 시골에 무슨 외식이 있었겠습니까, 일요일 날 산에 간다든지 이런 것들이나 아니면 사촌 누님의 남편이 퇴근해서 들어오면서 빵을 사 들고 들어오는 모습, 청소기를 들고 청소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부분이 깨져 나가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것은 시골의 한 가정의 모습과 굉장히 다른 모습이잖아요. 물론 아버지는 논밭에 늘 계셨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할 순 없었지만, 그렇게 도시 가정의 한 풍경을 본 것은 저에게 굉장히 많은 영향을 끼친 것 같아요.
그것도 관계의 문제였죠. 가정이 이렇게 소소한 것에 서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다정함의 세계가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시골에는 잠과 노동만 있는 가정이었으니까. 잠자고 밥 먹는 시간 외에는 일하는 시간만 있었으니까. 그런 것을 봤을 때, 아주 충격적이면서도 눈을 많이 뜨게 해 줬죠. 오히려 친구들과 술 마시면서 문화적 충격을 극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나를 개안한 사건이 사촌 누님 집에서 생활했던 그 시간 같아요.”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오늘은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길을 가다 우연히 갈대숲 사이 개개비의 둥지를 보았네
그대여, 나의 못다 한 말은
이 외곽의 둥지처럼 천둥과 바랍과 눈보라를 홀로 맞고 있으리
둥지에는 두어 개 부드럽고 말갛고 따뜻한 새알이 있으리
나의 가슴을 열어젖히면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나의 말은
막 껍질을 깨치고 나올 듯
작디작은 심장으로 뛰고 있으리
대학교 시절, 시를 못 썼다고 혼도 많이 났다고 하셨는데(웃음)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들과 날 선 각오들이 있었나요?
“많이 혼났죠. 처음에는 원고지 같은 데에다 시를 쓴 시인을 보고, 저도 원고지를 많이 쌓아 놓고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문방구 여러 군데에서 산 원고지를 수북이 쌓아 두고 시를 쓴 적도 있었고, 타자기로 쓰면 시를 잘 쓸 수 있다더라 하기에 중고 타자기를 구하려고 무지하게 애를 쓴 적도 있어요.
시골에 갈 때면 꼭 그 무거운 타자기를 들고 갔었어요. 시를 쓸 수 있는 분위기, 여건 이런 것들을 굉장히 고민하면서 찾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내 몸에 맞는 시적인 풍경을 찾기 위해서 많이 애를 썼죠. 잠을 덜 자고 시집을 집중적으로 많이 읽던 시절도 있었고요.”
개중 선생님께 맞는 방법을 찾으신 건가요?
“제가 타자기를 가지고 밤새 작업을 하고 있으면, 작업을 하고 난 후에 쓴 시를 벽 같은 데 딱 붙여 놔요. 그럴 때 굉장히 기분이 좋아요. 어떤 날은 네 편, 다섯 편 붙여 놓고 그랬어요. 미완성이지만, 일단 쓴 시, 마무리된 시를 벽에 딱 붙였을 때의 느낌은 아직도 굉장히 좋아요. 요즘도 시 쓰면 벽에다 붙여 놔요. 눈에 잘 보이는 데다 붙여 두고, 그 시의 느낌을 지나가면서도 보고 그러죠.”
타자기로 쓰면 정말 시가 잘 써지나요?(웃음)
“지금은 타자기로 안 쓰고, 제 메일로 시를 써요. 이메일 편지 쓰기로 써서 나에게 보내요. 몇 년 동안은 그 느낌이 좋은 것 같아요.”
선생님 메일함을 열면, 발신자가 ‘문태준’ ‘문태준’ ‘문태준’ 이렇게 되어 있겠는데요.(웃음)
“네, 거의. ‘문태준’한테 온 메일이 많아요.(웃음)”
한 편의 시는 어찌 보면 암호 같고, 시 읽기는 짐작이 많이 필요한 일이라, 어려울 수 있잖아요. 시를 조금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법이 있다면요?
“다 알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쓴 사람도 자기 것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시는 영혼의 작업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설득이 안 되는 경우가 많지요. 쓰는 당사자도 그 정도니. 읽는 사람이 이 시가 뭘 얘기하려는지 다 알아채기는 어렵죠. 그저 짐작하는 것 그것을 즐기라는 거죠. 한 편의 시가 주는 느낌, 무늬를 즐기면 좋을 것 같아요. 시 한 편을 보는데 금방금방 볼 수 있잖아요. 1, 2분 정도면 시 한 편 볼 수 있으니까, 한 편 보고 잠깐 생각하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시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시나 시집이 있다면요?
“어느 한 특정 시집보다는 요즘 나오는 시집을 무턱대고 읽기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예전의 시들보다는 요즘 나오는 시집을 사 봤으면 좋겠어요. 동시대를 사는 시인이 쓴 시들을 읽는 것이 가장 빨리 시를 알게 되는 방법인 것 같아요. 최근의 시로는, 나희덕 시인의 『야생사과』도 좋았고, 제주도에 내려가 있으면서 쓴 시편들이라는 이대흠의 『귀가 서럽다』도 좋았어요. 안현미의 『곰곰』도 좋았고, 남진우 시인의 시도 좋았어요.”
시가 가지고 있는 힘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나와는 다른 것들을 자꾸 이해하게 해 주는 것 같아요. 나와는 다른 것들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하게 해 주고,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세련된 방식을 시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는 거죠. 그리고 언어가 얼마나 맛있는지, 그 언어를 우리가 대화를 통해서 사용하면서 대화 자체도 얼마나 맛있고 세련될 수 있는지 도움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날도 문태준 시인은, 창밖의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런 날은 시를 쓰기 좋아서 약속을 거의 잡지 않는다고 했다. 문득 그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하나의 도서관처럼 이미지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지 않을까? 아마 어지러이 늘어져 있지는 않을 테다.
“겹쳐 / 서로 겹쳐서 / 그러나 댓잎 소리가 풀벌레 소리를 쓸어내거나 / 그러나 풀벌레 소리가 댓잎 소리 위를 앉거나 / 그러지는 않았다 / 혼동이라는 / 그 말에 / 큰 오해가 있음을 알았다 / 혼동이라는 / 그 말로 / 나를 너무 내세웠다.” (「혼동」, 『그늘의 발달』, p.18)
이날의 인터뷰는 마치, 그의 이미지 도서관에서 그가 꺼내 준 몇 장의 이미지를 들여다보고 이야기를 들은 기분이었다. 사진보다 더 구체적인 이미지들. 이미지보다 훨씬 입체적인 기억들. 그것이 ‘시 쓰는 일을 오래오래’ 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아닐까. 이제 막 시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었다는 그의, 새로운 입장이 담긴 시들이 궁금해진다. 아마도 여름호 문예지가 나올 즘에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표지에서 그의 이름을 잘 찾아봐야겠다. 문태준 시인의 이미지 라이브러리에서 이미지 몇 개쯤 대출하고 싶은 마음이 벌써부터 간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