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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여기에 버려졌음’이라고 쓰지 않고, ‘여기에서 발견되었음’이라고 쓴다 - 『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 조병국

‘내가 살아있다는 것, 엄마가 살아있어 고맙다는 말을 전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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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 많은 일을 다 감당하셨어요?” 홀트아동병원 조병국 원장님의 책 『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를 읽고 내뱉은 첫 감상이자, 제일 먼저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어떻게 이 많은 일을 다 감당하셨어요?”

홀트아동병원 조병국 원장님의 책 『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를 읽고 내뱉은 첫 감상이자, 제일 먼저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50년의 긴 시간 동안 원장님 마음에 기적으로 혹은 아픔으로 남았던 스무여 명의 아이들의 이야기를 읽고 한참이나 마음을 쓸어내렸다. 나 역시 이야기(fiction)의 힘을 믿는 사람 중 하나지만, 이번만큼은 이 생생한 다큐멘터리 앞에서 마른 침을 삼킬 도리밖에 없었다. 책 속에서 만난 아이들의 눈동자와 표정이 며칠째 머릿속에 아른거릴 즈음, 소설보다 더한 이야기를 겪은 원장님의 이야기를 듣고자 댁을 방문했다.

‘그 옛날에 비참했던 글을 지금 써서 무슨 도움이 될까, 괜히 내 자랑만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출판 제의를 만류하던 차에, 어떤 지인이 이런 얘기를 꺼냈다. 아이들 얘기를 해보라고. “아이들 얘기는 쓸 게 많죠. 지금도 생각나는 게 많은데…….” 원장님의 기억력이 좋다는 얘기는 책에서도 들은 바 있는데, 그 기억력, 보통이 아닌 모양이다. 이야기 대부분을 기록 없이 기억에 의존해서 쓰셨단다. 아마도 그건, 잊을 수 없는 일이라기보다는 잊히지 않는 일일 테다. “그런 일은 정말 평생에 한두 번 겪을까 말까 하는 일이잖아요. 잊히지가 않죠.”

그렇게 아이들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배신당한 이야기, 이런 건 안 썼어요. 내 글을 읽고 마음에 상처를 받는 사람이 있으면, 그건 안 쓴 것만 못하잖아요. 이 이야기를 사람들이 정말 믿을까 싶기도 했고……. 배고픈 적이 있는 사람이 배고픈 사람 사정을 안다고 하는데, 의외로 젊은 사람들이 보고, 따뜻한 글들을 올려줘요. 그 시절 어려움, 잘 모를 텐데……. 그런 마음의 표시를 보면 무척 고맙죠. 아마 그분들의 부모님이 나와 같은 연령이어서, 6?25 사변 때 고생했던 얘기를 좀 들어서 공감을 하는 게 아닐까?(웃음)”

책 속에 실려 있는 젊은 시절의 사진을 보면, 꽤 엄한 의사 선생님이 아니셨을까 싶었다. 사진 속, 쌍꺼풀 없이 짙은 눈동자가 단아하고 야무진 인상을 주었다. 강인하고 강직한 성품을 고스란히 담은 검은 눈동자는 이날에도 여전하셨지만, 세월의 흔적이 선사하고 간 부드러운 곡선이 이전보다 훨씬 자애롭고 친근한 인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조목조목 과거의 이야기를 짚어가는 와중에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만큼은 구체적으로 단어를 고르시던 생각이 난다. 자주 웃음을 터뜨리셨는데, 친할머니를 뵙는 듯 다정했던 기분은 비단 그분의 인상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짧지 않은 글 속에, 차마 자신의 이야기는 쓸 수가 없으셨단다. “나는 극히 일부 애들의 몸에 이상을 체크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인터뷰까지 하고 그러니 멋쩍죠.(웃음) 자랑스럽게 쓸 수도 없고, 자랑도 아니니까, 책에 내 얘기는 거의 없지…….” (원장님,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수많은 이야기 뒤에 서 계셨던 원장님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요.) 그렇게 이날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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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메시지가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는 아이들 앨범.
정년퇴직 기념으로 외국의 사회사업가가 보내왔다.

 

거실의 작은 테이블 위에, 아마도 먼 타국에서 날아왔을 편지와 사진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중 유독 눈길을 끄는 두툼한 앨범을 열어 보이셨다. “정년퇴직 기념 선물로 앨범을 보내왔더라고. 다 일하면서 만났던 아이들인데, 그 아이들이 어떻게 크고 있는지 기록하고 담은 거예요. 양부모님들이 각각 앨범 한 장씩 맡아 채우고, 그쪽 사회 사업가가 손글씨로 깔끔하게 정리해서 가져왔더라고. 특별한 앨범이지.” 사진을 한 장 넘길 때마다 원장님은 사진 속 아이들에게 눈을 맞추시며, 이야기를 이어나가셨다. “일가친척이라도 이렇게까지는 못하죠. 이렇게 정성 들여 키우고, 좋든 나쁘든 수술 경과도 알려줘요. 어쨌든 불행하게 태어났지만, 그래도 좋은 양부모를 얻어, 교육을 받고 선량한 인간으로 자란 거죠. 타국에서 또 다른 나라로 유학을 가고, 아이들이 커서 자기가 있던 보육원에서 또 입양을 해가는 걸 보면, 그만큼 사랑을 듬뿍 받아서 나눠줄 여유가 있구나 싶어 감사하죠.”

보존 법칙은 에너지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사랑에도 보존 법칙이 있다. 한 번 시작된 사랑은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도 그 총량이 변하지 않는다. 입양된 아이가 자라 또 다른 아이를 입양해 기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p.54)


단 하루를 살더라도…… 부모 사랑을 받아야

외국 사람들이 입양 아동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어떤가요?

익스텐디드 패밀리(Extended family)라는 단어를 쓰더라고. 자기가 아이를 데려와서 ‘입양했다’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만약 아이의 친부모를 찾을 수 있으면, 그 부모도 한 가족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보는 시야가 우리보다 굉장히 넓고, 다른 것을 받아들이고 배우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어요. 우리는 먹어보지 않은 것을 못 먹는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일단 시도부터 해봐요……. 노력하는 태도가 좀 다른 것 같아요.

미국 학교들은 장애를 개인이 아닌, 사회와 모든 사람이 함께 분담해야 할 몫이라고 본다. 장애아가 있는 반에서는 수업 시작 전 교사가 아이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오늘 하루 이 친구 바디(body) 노릇 해줄 사람 손들어봐요.”
그러면 거의 모든 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지원한다. 아이들 모두가 매일매일 장애인 친구의 손발이 되어 주는 학교…….(p.44)


그런 것은 어디서 비롯된 차이일까요?

미국 사람들 입장에서는, 청교도들이 초기에 어려움을 겪었고, 본토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서 농사를 짓고, 추수감사절도 맞았잖아요. 고아, 과부 이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라는 성경적인 이웃 사랑에 입각해서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반면 입양에 관한 우리나라의 인식은 무척 좋지 않았잖아요. 당시에 그런 부정적인 인식과 편견 때문에 어려움도 많이 겪으셨지요?

‘수출한다’는 말 때문에 그랬죠. 아이에게 ‘수출’이라는 단어를 써서 물건처럼 취급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들어가 있다는 게 창피하기도 하고, 힘들었죠. 아동 병원에서 죽는 아이들을 너무 많이 봤어요. 기왕에 태어난 생명이면 그래도 살아야 되는 거고, 살려야 되는 거잖아요. 그런 형편이 못 돼서 죽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입장은 너무도 생각을 안 한 거죠. 자기 아이가 굶어 죽는다고 할 때 누가 가만히 있겠어요? 누군가가 그 아이를 살리지 못하면 도와줄 수도 있는 건데, 바꿔놓고 생각을 못 하고 수출이라고……. 우리나라는 어른이 먼저지 아이가 먼저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돌아보면 나에게는 그 시절이 참으로 지옥 같았다. 우리는 집 없고 병든 아이들을 위해 따뜻한 가정과 적절한 보살핌을 줄 양부모를 찾아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 부모가 국내에 없었기에 해외로 눈을 돌렸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입양기관에서 입양 수수료를 받고 고아를 해외로 수출한다고 생각했다. 검은 머리칼을 가진 아이가 해외 양부모 밑에서 자라며 겪을 정체성의 혼란과 아픔은 전혀 안중에도 없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지난 몇십 년 동안 내가 한 짓이 고작 ‘고아 수출’에 불과했나. 사회의 비난에 나는 크게 상처를 받았고 내 인생 전체가 흔들리는 위기감을 느꼈다.(p.272)

그 당시에는 어떻게 대응하셨어요?

어느 보육원이나 아동 병원에서 죽는 날까지 내버려 두는 것보다 단 하루나 이틀을 살다 죽더라도 부모 밑에서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가족의 일원이 되어 본다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정말로 필요한 일이라고요. 나는 피난 가서 동생들이 죽는 걸 봤고, 전쟁이나 해방 때문에 부모와 헤어진 적도 세 번이나 있었어요. 아이들이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해한다면 그런 말은 못할 텐데, 남을 배려 못하는 거지, 땅덩어리가 좁아서 그런진 몰라도(웃음) 마음이 좀 협소한 것 같아.

의사로서 가장 회의감이 들 때도 잦으셨죠? 책 속에서는 사그라지는 어린 생명을 그냥 지켜봐야만 할 때 회의감이 막심했다고 하셨는데요.

많았죠. 사망 진단서를 많이 쓰게 되니까, ‘이건 아니다. 내가 실력이 부족한가 보다.’ 싶어서 그만두고 싶었어요. 아이들이 아플 때, 엄마의 입장에서 돌보지도 못하니까, 내가 못하고 있는 것 같았고, 봉급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고요. 병원을 그만두고, 엄마로 돌아오고 싶은 적이 많았죠. 여권이 없던 시대라,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과장을 못 했을 때도 속상했죠. 경험은 내가 훨씬 많은데, 새로 오는 남자 선생님이 먼저 진급하거나, 원장의 감방 친구라고 승진이 우선시되는 일도 있었고…….

하고 싶은 일이 많으셔서, 승진이 더 간절하지 않았을까 싶었어요. 그 당시 과장이 되면 업무가 어떻게 달라졌나요?

전체적인 총괄 업무를 보는 거죠. 시야가 넓어지고, 환자도 많이 볼 수 있어요. 아동병원 전체를 관할한다는 개념이 들어오더라고요. 수술이 급하게 필요한 경우가 있잖아요. 맹장, 골절, 눈 손상, 영양실조 등등 급한 치료가 필요할 때면, 어린이 종합병원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어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까, 실천을 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여러 외국의 사회사업가들을 만나게 됐어요. 그저 나의 입장, 일할 생각만 하느라 다른 것을 신경 쓰지 못했죠. 그러니 뒤에서 월권이란 말도 나오고. 원장님도 있는데 과장 주제에 그렇게 한다고……. 찍힌 거지.(웃음) 그래도 그들이 모금해준 덕분에 의료기도 기증받고, 정말 급하게 필요했던 인큐베이터도 마련할 수 있었어요.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도와준다고 했을 때 믿지를 않았는데, 끝까지 약속을 지키더라고.

책 속에도 원장님이 도움을 받은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원장님이 특별히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까닭이 있었나요?

나를 도와준 게 아니라, 아이들을 보고 도와준 거지. 그런데 나팔은 내가 분 거고.(웃음) 도와 달라고 편지를 보내고, 카탈로그를 사서 보내고 했어요. 당시 우편물만 해도 한 달에 5, 6만 원 들고 그랬어. 다른 사람들은 책임이 없으니까, 평의사로 맡겨진 병실 환자만 보면 되고 더 이상 할 생각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나 나름대로 그랬던 거지.

50년간 홀트아동병원 원장으로, 6만 입양아의 주치의이자 엄마였던 조병국 원장님
일하실 때, 워커홀릭이었을 것 같아요.(웃음)

그렇죠. 그때 일 참 많이 했어요.

그 어려운 일을 50년이나 하셨잖아요. 어떤 마음이셨어요? 의무감이나 사명감이었나요?

소아과 의사니까 의무감도 있고,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라는 성경 말씀도 있었고. ‘내가 아니면 얘네들, 누가 이렇게 나처럼 열심히 봐주나.’ 그런 생각도 잠시 해보기도 했지만(웃음) 그건 교만했었던 거고……. 일을 하다가도 그런 교만한 생각이 들면, 입양 가고 난 뒤에도 문제가 자꾸 생기더라고. 그럼 내가 또 겸손해지고. ‘내가 그래도 잘해야지. 이 아이를 내가 입양을 한다면 과연 입양을 하겠나.’ 하는 생각을 가지니까, 더 꼼꼼하고 정성스럽게 보게 되죠. 모국 방문하는 아이들 보면서, ‘이렇게 오기도 하는구나.’ 싶어서 정직한 보고를 성의껏 해줘야겠다는 마음가짐도 들었고.

일을 하면서 훈련을 받은 거예요. 인생 훈련도 됐지만, 의료적인 면에서도 앞선 지식을 얻을 수도 있었고, ‘레지던트 하는 마음으로 해야 이 일을 싫증 내지 않고 하겠구나.’ 생각했어요. 시립아동병원하고 홀트에서 일하면서 배운 게 ‘인내하는 것’, 그것을 평생 배우고, 실천해 보고, 의심해 봤지.(웃음) 이를테면, 홀트 일산 복지타운 같은 데 치과 프로그램이 있어요. 그것 하나 진행하는 데, 7년 걸렸어요. 그러니까 이런 기관에서 일하려고 하면, 한 프로그램을 위해서 한 10년은 참고 노력하고 견디며 일해야 되겠다, 그런 생각도 뒤늦게 들었고.


어머니의 동반 자살로 인해 두 다리를 잃게 된 아이 이야기가 무척이나 가슴 아팠습니다……. 그럼에도 그 아이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나타나고, 정말 기적 같은 이야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 아이는 그래도 행복한 거지. 그게 기적이라는 거지! 그런 아이가 우리한테 올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고, 그렇게 도와줄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했고……. 그 멀고 먼 곳의 한 사람이 어떻게 여기까지 연결이 될 수 있었는지……. 그게 기적이지. 하나님께서는 준비를 다 하셨는데, 우리가 잘 못 찾는 거지, 그런 생각이 들어.

생모와 함께 데려가지 않고 신이 아이를 살려놓은 이유, 이토록 처참하고 가여운 모습으로 살려놓은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행복해질 기회, 아무도 오지 않을 거로 생각했던 그 기회가 아이의 앞날에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p.76)

그 친구 소식은 계속 듣고 계신가요?

지금은 소식을 몰라요. 대학 가고 취직했다는 것만 들었어. 연락을 하면이야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친구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모르겠고, 마음의 상처를 회상할까 염려도 되고……. 다른 아이의 경우지만, 수술 경과를 늘 알려주던 양부모가 한국에 찾아온 적이 있어. 내가 ‘요새 그 친구 몸은 어때요?’ 물었더니, 아버지가 본인도 못 물어본대요. 그건 개인의 사생활이고, 자기 몸의 일부의 문제인데, 더 이상은 물어보기 주저해진다는 거지.

아이들은 어른들의 생각과는 다른 것 같아요. ‘나는 입양아’라고 당당하게 밝히는 친구도 있고, 의족으로도 씩씩하게 살아가고요. 그런 아이들이 불행할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도 큰 편견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하고 부모하고 대화를 많이 해야지. 아이의 심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아이 말의 뒷면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깊은 관찰이 있어야…… 가출하고 이런 일이 없지.

책을 읽으면서, 입양 간 친구들이 부모님을 보고 싶어 하는 까닭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원망이나 미움이 많을 것 같은데도, 그리운 마음이 더 큰 것 같아요.

부모가 자식을 입양 보내는데 쉬이 동의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아이들 입장에서는 자기가 안 죽고 살아 있다는 것, 굶지 않고 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 입양 동의를 해줘서 고맙기도 한 마음을 전하고 싶은 거지. 여자들의 경우는 내가 누굴 닮았을까 하는 궁금증도 들 테고. 한국에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은 자기가 버려졌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닫혀서 못 오게 되는 거예요. 와서 찾아보려고 노력해도, 친부모 쪽에서 안 만나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고, 그런 부모의 입장까지 이해하고 돌아서는 아이들을 보면, ‘참 잘 키워줬다…….’ 이런 생각을 하게 돼요. 한 친구는 양모와 함께 왔는데, 못 만나고 가면서도 ‘내가 살아있다는 것, 엄마가 살아있어 고맙다는 말을 전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말하더라고. 속마음이야 얼마나 만나보고 싶었겠어……. 그 친구는 국제적인 아이스 쇼단에서 일하는데, 양모가 따라다니면서 매니저처럼 도와줘요. 그렇게 친딸처럼 아껴주는 걸 보면, 친부모라도 저렇게 할까 싶죠.

‘원장님을 가장 힘들게 한 친구’라고 한다면 혹시 떠오르는 사람 있으세요?(웃음)

힘들다기보다는, 좀 괘씸하다?(웃음) 크게 말하면 사기당한 거고, 작게 말하면 배신당한 건데, 재단사 기술이 있는 아이가, 외국에 취업해서 출국한다고 그러더라고. 구체적으로 물어보니까, 대답을 확실히 못 해요. ‘처음 타지에 나가니까 그런가 보다.’라며 끝까지 믿었지. 78년도 당시 50만 원이면 꽤 큰돈이었어요. 당시 내가 푼돈은 많이 당했으니까, 영수증이 효력이 없는 걸 알고 현금 보관증을 받았는데……. 한 20여 년 보관하다가 버렸어요. 양심이 있으면, 언젠가는 찾아오겠지, 홀트가 없어지지 않는 한 나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일이 참 많았어요. 내 이름을 빙자해서 사기 친 사람도 있었고, 도와준 사람이 배신하고, 다른 사람이 빌려간 돈을 나더러 갚으라고 찾아오기도 하고……. 그러면 얼마나 화가 나고 속이 상해. 잘 자라서 사회에 나간 아이들이, ‘빽’이 없다고 사람들한테 당한다는 소식 들을 때도 속상하지.

책에도 돈 문제로 곤경을 당하신 얘기가 있는데요,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연락 오면 또 믿어주고 하시죠?(웃음)

뭐, 이제는 빌려 줄 게 없으니까.(웃음)


봉사는 1:1로, 한 명을 돕는 일부터 시작하라

50여 년간 근무하시면서 두려운 적은 없으셨어요?

행여 오진할까 봐 걱정됐죠. 두려운 건 없었어요……. 한 번, 교통사고를 당하고 나서 나도 장애를 가질 수 있다, 휠체어를 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는 겁이 났죠. 그래서 그날 밤 기도했어요. ‘나를 불구로 남길 거면…… 오늘 밤으로 데려가 주셨으면 좋겠다.(웃음)’ 그렇지 않으면 내가 불구가 될 때까지, 집 없는 아이들을 떠나지 않겠다고 기도를 했어요.

그때 일 생각하면, 힘들어도 여길 떠나고 싶은 마음이 희석되죠. 일산 복지 타운에서 입양을 못 가는 아이들을 키웠거든요. 그 아이들을 보면서 배우는 거지. 나도 저렇게 될 수가 있겠구나. 골절이 되면 어떻게 되고, 기억이 상실되면 어떻게 되고……. 그렇게 평생 배우는 마인드로 일을 했어요.


서러운 일도 많고, 울 일도 참 많으셨죠.

많죠. 아이들이 불쌍한데,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어디 호소할 데 있어요? 혼자 집에 와서 기도하면서 호소하는 수밖에 없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항의만 하지, ‘어떻게 해주세요.’ 하는 건 없었죠.(웃음) 책 쓰고, 교정하면서도 많이 울었어. 요새 또 김정일 얘기가 자꾸 나오고 해서, 순간적으로 나쁜 맘 먹을까 염려스럽죠. 아이티 사건이 나니까, 옛날 생각도 자꾸 떠오르고, 저 애들을 어떻게 하나 싶고…….

못 볼 모습들, 안 봐도 되는 장면들, 참 많이 보셨어요. 특히 속수무책일 때,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느낄 때의 좌절감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나로서는 빈손, 이 두 손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아이들이 너무 삐쩍 말라서, 월급 받는 날은 계란을 한 판 사서 먹이는 걸 7년을 했는데, 더 이상은 못하겠더라고. 우리 애들도 키워야 되는데. 그렇게 많은 아이들을 평생……. 나눔의 뜻도 그렇게 많이는 어렵겠더라고. 그럼 포기하게 되잖아요.

세상에 절벽이 있고 평지가 있다면, 우리는 지금은 평지만 잘 달려온 거지, 옛날에 비해 지금은 정말 잘사는 건데, 그러면 사람들이 허황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죠, 자살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는데. 그런 사람이 이런 아이들 한 명만 봐도, 그 마음을 돌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결국은 사회 구성원이 비슷하게 자라야지, 콩나물시루도, 하나는 아예 자라지 않고, 싹도 안 피면 그건 뭐 버려야지 어떻게 해요. 마찬가지로 동 세대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이기 때문에, 도와줄 대상이 있다면. 작으나 크나 일대일로 생각하면 좋겠더라고. 책에도 썼지만, ‘버닝 아웃’이라는 것. 속수무책이 되면 손 놓게 되는 거죠. 그런 상황이 안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기관에서 아이들을 일대일로 연결해 주면 좋겠어요. 일대일은 가능해요. 그건 되더라고요.


“I'm burning out.”
글쎄, 베지는 과연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대개 ‘버닝 아웃’은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소진되는 것처럼 어떤 일을 열심히 하다 녹초가 되거나 지쳤을 때 쓰는 말로 알고 있었는데, 당시 베지의 표정과 목소리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뒤에야 나는 베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출근하자마자 가장 먼저 아이들 사망 진단서에 서명하면서 나도 모르게 ‘버닝 아웃’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 아이들을 모두 살릴 여건도, 능력도 갖추지 못한 내가 과연 의사가 맞나 싶은 회의가 밀려들면서 베지가 말한 그 ‘버닝 아웃’이라는 게 이런 느낌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p.301)


험하고 힘든 일이었을 텐데, 집에서 반대는 없으셨어요?

우리 친정어머니가 아동 병원에서 일하는 걸 보시고 울고 가셨어요. ‘네가 이 가슴 아픈 일을 하려고 그 고생하고 공부를 했느냐.’라고 우시더라고. 그만두기를 바라셨는데, 나는 또 고집을 써서 의과 대학에 들어갔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웃음)


왜 아버지가 미안하다고 합니까?

‘버려진 아이’와 ‘발견된 아이’ 그 차이는 엄청나다. ‘버려진 아이’는 슬프지만 ‘발견된 아이’는 희망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입양 서류에 ‘OO에 버려졌음’이라고 쓰지 않고, ‘OO에서 발견되었음’이라고 쓴다.

평소 성격은 어떠신가요?

고집이 많죠. 그래서 ‘조고집’이라고 불러요.(웃음) 못 한다고 포기가 될 때까지 한번 해보는 거지. 어렸을 때도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안 들면 빌지를 않았어. 매도 많이 맞을 뻔 했는데, 내 동생이 워낙 착해서, 매 든 엄마를 가로막고 울어서 안 맞기도 하고 그랬어요.(웃음)

원장님 어린 시절은 어땠어요? 남들보다 자애심, 이타심이 많은 아이였나요?

외가에서 살았어요.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동생한테 갈라져야 할 사랑까지 듬뿍 받고 자랐어요. 욕심 많다는 소리는 들은 적 없는데, 게으르단 소리는 많이 들었어요.(웃음) 죽으면 썩을 몸으로 꼼짝도 안 한다고, 게으르다고……. 전후의 어려웠던 경험을 했기 때문에, 배고프고 추운 게 뭔지 알고, 피난을 겪고……. 고모가 요한웨슬레 클럽에 있어서, 판자촌에 사는 아이들 가르치고, 외국인이 봉사하는 걸 보고 자랐으니까, 보고 느낀 거지. 원래 심성에서 우러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의학 공부를 하시면서도, 이 길이다 싶은 확신이 있으셨어요?

학교 다닐 때 봉사를 많이 했어요. 영아원에도 많이 다녔는데, 그때 그곳은 사람 살 곳이 아니었어요. 죽은 아이를 그냥 방바닥에 놓거나 침대 밑에 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소아 병실에서 가죽이 밀렸다 싶을 정도로 마른 애들을 보고……. 피가 필요한데, 다른 아이들이 쓰고 남은 피가 맞으면 얻어다 주기도 했어요. 그런 상황에서 죽어가는 아이를 보니까 동정심이 많이 생기죠.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글에서도 물씬 느껴졌습니다. 버린 부모 입장도 매번 고려해주시고 행여 상처받을까 마음 쓰시는 게 보였어요. 막상 그런 처참한 풍경을 보면, 쉽게 그런 마음이 안 들 것 같은데도요.

그건 나이를 먹어서 그래요!(웃음) 한번은 술 먹은 아버지가, 산소 먹고 누워 있는 아이 목을 조르더라고. 진찰하느라 뒤돌아 있었는데, 간호사가 보고 소리를 질렀어요. 얼른 제쳐놓고 파출소에 신고해서 잡아가게 했지. 그런데 파출소에서 조서를 꾸미러 오라는 거야. ‘나 지금 공무집행 중이다. 환자 보는 중인데 어떻게 가느냐.’라고 했더니, ‘그럴 수 없다고, 애 아버지 술 깨서 정신 돌아왔으니까 조서를 꾸미자.’라고 하더라고.

갔더니, 순경이랑 아버지랑 남자끼리 죽이 맞아서, ‘오죽 답답하면 술 먹고 자기 자식 목을 눌렀겠느냐, 아버지 부모의 심경을 이해해주라.’며 놔주라는 거예요. 처음에는 안 놔주겠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사람을 교도소에 넣을 거야, 어떻게 할 거야.(웃음) 아이가 죽지는 않았으니까. 그래서 분개하는 마음으로 돌아왔어요. 그러고 나니 고민이 되더라고요. 상대방을 정말 이해해야 하나.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이렇게 자꾸 들어오는데……. 그때 누가 또 그러더라고. ‘오죽하면 버렸겠느냐, 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보라.’고.

우리 친정아버지께서 만날 그러셨어요. 말하고 싶고 분할 때, 침을 한 모금만 삼키라고. 내가 아버지더러 가증스럽다는 말까지 한 적이 있는데, 버스를 타고 가다 급정차를 해서, 아버지 발이 밟힌 거예요. 밟은 사람이 ‘미안합니다.’ 하더라고. 근데 우리 아버지가 ‘아이고, 미안합니다.’ 이러더라고? 그래서 ‘왜 아버지가 미안해? 왜 가증스럽게 그렇게 얘기해?’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그 사람이 밟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 내 발이 있었으니까 내가 미안하잖느냐.’라고 그러더라고……. 나는 도저히(웃음) 그 태평양 같은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더라고. 그런데 나이를 먹으니까…… 내가 저렇게 없으면 나도 저렇게 되지 않을까. 도둑놈이랑 나랑 둘 다 사흘 굶어 배고픈데, 그 사람이 도둑질할 때, 나라고 성인군자처럼 가만히 있겠어요? 나도 훔쳐 먹으러 갈 거지.(웃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까, 이해를 하게 된 거지. 젊었을 때는 이해가 안됐어요.(웃음) 절대로 용서를 못하지.


일을 그만두시고 나서, 가장 아쉬움이 남는 게 있다면요?

할 일이 없어진 것.(웃음) 뭘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 한두 달은 참 편하고 좋더라고요. 두 달 지나니까 내가 이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내가 젊었을 때는, 예과 다닐 때는 의료 선교사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어요. 그거 실천 못한 게 섭섭해서 퇴직하면 다른 나라, 예를 들면 중국 이런 데 입양 기관에 봉사도 해야지 했는데, 그거는 무서워서.(웃음)

올해 바라는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요?

요보호 대상 아동이 적어졌으면 좋겠다는 게 바람이죠. 요즘은 부모가 이혼하거나, 교통사고 때문에 혼자가 된 아이들이 늘고 있어요. 그런 요보호 대상 아동을 입양 대상 아동으로 보는 개념은 계속될 것 같고, 다른 얘기지만, ‘입양’이라는 말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입양 가정이 아직도 많아요. 입양아와 친자가 같이 살고 있을 때, 외부 사람으로 인해 구별이 될 때가 있잖아요. 입양된 줄도 모르다가, 제삼자가 들춰내 알게 되었을 경우, 아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잘 생각해봐야 돼요. ‘입양’이라는 말.

앞으로는 이런 가정이 더 늘어날 테니, 취재 같은 것도 조심스럽게 해야 할 것 같아요. 우리는 그러지 않아도 내 편, 네 편하고 야단인데……. 개인적인 우려예요. 하고 싶은 일(웃음) 여가 선용을 위해 집 가까이 봉사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좋겠죠. 국내 입양 간 아이들 중에서 사후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는데, 사후 관리에 인원수가 적으니……. 쫓아다니면서 도와줄 수도 없고, 바람뿐이죠.


그렇게 오랫동안 일하고 봉사하셨는데 아직도 더 하고 싶으세요?(웃음)

아직은 걸어 다닐 수 있고, 아직은 기억력이 괜찮으니까.(웃음)


아이들을 위한, 부끄럽지 않은 별명

05.jpg

 

입양된 아이들의 소식을 전해오는 사진과 편지들.
오른쪽은 해외 입양 기사가 난 <뉴스 위크>.

 


개인적인 소망, 바람을 여쭈어도, 원장님은 결국 다시 아이들의 이야기를 꺼내신다. 이야기만 들어도, 원장 재임 시절, 여장부처럼 눈썹을 휘날리며 일하셨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누구보다 의욕도, 열정도 넘치셨으리라. 마음속에 일렁이는 생각들을 결코 품고만 있지도 않으셨을 거다. 그런 만큼 많은 아이들이 따뜻한 가정에 안길 수 있었고, 입양 체계나 문화 등에서도 한층 달라질 수 있었다. “청와대 민정관 사람들하고도 면담을 네 시간이나 했어요. 나더러 ‘시립 병원의 불평 많은 여자, 넘버 원’이라고.(웃음)” 이렇게 뜨겁게 일하는 여의사를 둔 홀트 회장님 왈, “닥터 조는 의료부라는 우산을 쓰고 있지만, 나는 홀트아동복지회라는 큰 지붕 밑에 사는 거니까 좀 이해해달라.”고도 하셨단다.

그렇게 여기저기 앞장서느라, 속상한 일도 많았을 테지. 앨범 사이에 오래된 <뉴스 위크>가 끼어 있었다. “욕 먹던 시절에 기사가 났는데, 내 사진이 들어가 있더라고요. 애 팔아먹는다고. 아동 수출 세계 1위라고……. 난 기사가 난 줄도 몰랐는데, 입양 간 아이가 들고 왔더라고.” 이런 원장님 마음도 몰라주고, 안팎에서 수출한다고, 돈 타령을 한다고 많이들 닦달한 모양이다. “한 외국 복지사가 ‘닥터 조는 왜 이렇게 돈, 돈 해.’ 그러더라고.(웃음)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기관에 매치를 해주다 보니. 미혼모 숙식 보호 시설부터, 분만 전 질병 치료 모금까지, 돈이 많이 들거든요. 그러니까 ‘국제 거지’란 별명도 들었고…….” 그 마음이랴 오죽하셨을까. “내가 월급을 더 받으려고 한 것도 아니고, 내가 쓰기 위해서 입 벌린 것도 아니니까,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 아이는 여기에 있지만, 여기서 충분히 검사를 해야 받는 부모도 좋고, 아이에게도 좋으니까요.”

인터뷰를 마치고도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곳곳의 아이들의 얼굴과 흔적이 묻어 있었다. TV세트 위에 놓인 작은 액자에도, 거실에 놓여 있는 잡지 속에도, 정성껏 접혀 있는 종이배에도. 그 위에 사뿐히 얹혀 있는 원장님의 기억들이 먼 곳의 아이들을 이곳 거실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금 앨범을 펼쳤다. “이 애는 룩셈부르크의 경찰인데…… 이 아이가 백혈병이었는데, 친모의 골수로 살았지……. 이 가정은 특수 아동만 입양한 가정이에요. 의사가 되어서 이렇게 편지를 보내고……. 사진이 많은데, 잃어버린 것도 많고.” 원장님에게 이 앨범은 보물이다. “이걸 누구에게 주고 가나…….” 잠시 읊조리시더니 “말리에게 주면 어떨까? 그래야겠다.”라며 미소를 지으셨다.

“젊었을 때는 다들 자기가 제일인 것처럼 사는데, 나이를 먹으면 상대방을 이해하게 된다고. 그런데 철 나면 망령 든다는데.(웃음) 예전에 엄마가 이런 소리를 할 때는, ‘엄마는 나이도 안 많은데 왜 이렇게 늙은이 같은 소리만 하느냐.’고 만날 그랬어. 그런데 그 소리를 내가 지금 만날 하고 있네.” 돌아가는 길까지 활짝 웃는 얼굴로 배웅해주신 원장님의 손을 꼭 잡고, 부디 건강하시라고 부탁을 드렸다. 원장님 손을 거쳐 새 가정을 찾은 아이들이 멋진 어른이 되었다는 소식, 따뜻한 새 가정을 꾸렸다는 소식이 더 많이 들리길, 원장님 얼굴에 웃음 번질 일이 가득하길 빈다.

실오라기만큼의 희망도 찾을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로 눈 크게 뜨고 한번 찾아보기 바란다. 철도사고로 두 다리를 잃었던 그 아이의 경우처럼 희망이란 삶의 어느 모퉁이에선가 예고도 없이 불쑥 튀어나온다. 우리 삶이 준비하고 있는 이 깜짝 선물을 보지 못하고 생을 포기하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러니 부디 살지어다. 힘들고 고된 삶이라도 포기하지 말고 살아서 내 인생이 어떤 선물을 준비하고 있는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일이다.(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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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김수영

summer227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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