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는 여전히 눈발이 성글게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그중에 가장 큰 눈송이가 화분 가장자리에 내려앉았습니다. 그 눈송이는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 아주 섬세하고 얇은 흰 옷을 입은 여자로 바뀌었습니다. 마치 반짝이는 수백만 개의 눈송이로 만든 옷 같았습니다. 여자는 아름답고 우아했지만 눈부시게 반짝이는 얼음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두 눈은 별처럼 환하게 빛났지만 따스함이나 편안함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여자가 창문 쪽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을 했습니다. 카이는 깜짝 놀라 의자에서 뛰어내렸습니다.
- 본문 중에서
1년에 두 번 있는 개편 시기마다 늘 관심을 모으는 EBS 애니메이션이 있다. ‘플랜더스의 개’ ‘빨강머리 앤’ ‘은하철도 999’ ‘톰 소여의 모험’ 등 <추억의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바로 그것. 주 시청 대상은 어린이지만 30~40대 남녀 시청자 비율도 꽤 높게 나온다. 말 그대로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려주기 때문인 듯. 이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는 선배는 ‘고아들이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이라는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역시 주인공이 되려면 뭔가 결핍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부족함 없이 풍족하고 행복하게 잘 자란 아이들을 보면서 신비감이나 호기심 같은 감정이 생길 리 없으니까. 때론 잔인하고 때론 두려우며 때론 가슴 아픈 장면들까지 함께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저마다 삶과 세상을 이해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안데르센을 좋아한다. 어린 시절 『인어공주』 나 『빨간 구두』 『성냥팔이 소녀』 『눈의 여왕』 같은 그의 동화들에 얼마나 매료됐었던가. 그가 보여줬던 세계는 순진한 어린이의 것이 아니었다. 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한 채 바다의 거품으로 사라져버린 인어공주, 잘려진 발목을 남기고 춤을 추며 어두운 숲 속 길로 사라지는 빨간 구두, 눈보라를 일으키며 얼음마차에 소년을 납치하는 눈의 여왕의 무표정한 얼굴, 추운 새벽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성냥팔이 소녀의 입가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미소 등 예사롭지 않은 몇몇 이미지들은 왠지 모를 두려움과 슬픔, 그리고 커다란 상실감을 동반한 채 강렬하게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아직도 춥니?”
여왕이 이렇게 물으며 카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 얼음보다 차가운 입맞춤이 이미 반은 얼어 버린 카이의 심장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카이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잠시뿐이었습니다. 곧 마음이 편안해지며 추위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중략) 눈의 여왕이 카이에게 다시 입을 맞추자, 카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게르다와 할머니와 집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잊어버렸습니다.
“이게 마지막이야. 한 번 더 입을 맞추면 넌 죽을지도 몰라.”
여왕이 말했습니다. 카이가 여왕을 쳐다보았습니다. 여왕은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 본문 중에서
소년의 이름은 ‘카이’, 소녀의 이름은 ‘게르다’. 둘은 한 동네에서 나고 자란 소꿉친구이자 단짝이다. 어느 겨울날 썰매를 타러 나간 카이를 눈의 여왕이 데려가 버리자, 게르다는 카이를 구하기 위해 머나먼 여정에 오른다. 길을 떠난 게르다는 요술쟁이 할머니의 꽃밭에서 기억을 잃기도 하고, 카이를 왕자로 착각한 까마귀를 만나 어느 왕국의 왕자와 공주 커플에게 도움을 받기도 하고, 산적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가 산적 딸의 호의로 탈출을 하기도 하고, 눈보라를 헤치며 라플란드 할머니와 핀란드 여자를 찾아가 눈의 여왕이 사는 곳에 대한 정보를 얻기도 한다.
이렇게 게르다가 죽을 고생을 하며 카이를 찾아다니는 동안, 카이는 눈의 여왕과 함께 세상 끝에 위치한 성에서 지내고 있었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그 성은 크기만 할 뿐 온통 싸늘하게 비어 있었다. 카이는 그 곳에서 얼음조각으로 퍼즐을 맞추며 놀았다. 그는 조각들로 여러 낱말을 만들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맞춰지지 않는 낱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영원’이라는 단어였다. 눈의 여왕은 카이에게 ‘영원’이라는 낱말을 만들면 자유롭게 놓아주겠노라고 약속한다.
우리는 달려간다 이상한 나라로
니나가 잡혀 있는 마왕의 소굴로
어른들은 모르는 4차원 세계
날쌔고 용감한 폴이 여기 있다
- <추억의 애니메이션: 이상한 나라의 폴> 주제가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추억의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이상한 나라의 폴(원제: Paul's Miracu lous Adventures)’이다. 1976년에 일본에서 제작된 TV 시리즈물로, 요즘 기준에서 보면 화질이나 그림체, 움직임, 더빙 상태 등이 촌스럽고 어색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상상력의 한계란 없는 것 같다. 어렸을 때도 워낙 재미있게 봤던 만화지만, 그 스토리와 캐릭터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 봐도 여전히 흥미롭다.
‘폴’은 평소 공상하기를 좋아하는 상상력이 풍부한 소년이다. 그는 열 살 되던 생일날 부모님에게 ‘찌찌’라는 이름의 봉제 인형을 선물 받는다. 어느 날 찌찌에게 마법이 걸리면서 현실의 시간이 정지하고 이상한 나라로 통하는 문이 열린다. 이렇게 해서 폴은 찌찌의 안내로 여자 친구 ‘니나’와 그녀가 기르는 개 ‘삐삐’와 함께 이상한 나라로 떠난다. 이곳에서는 찌찌와 삐삐가 사람처럼 걸어 다니고 말을 하는가 하면, 찌찌가 가진 마술봉의 힘으로 장난감들이 엄청나게 커지기도 하고 날아다니기도 한다. 이상한 나라를 여행하던 폴 일행은 인간의 방문으로 인해 이천 년 만에 깨어난 대마왕의 습격을 받게 되고, 그 과정에서 니나가 대마왕에게 잡혀간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정해진 시간만큼 머무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폴은 혼자서 시간의 문을 통과해 현실로 돌아온다. 현실 세계에서는 니나의 실종으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지만, 아무도 폴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데…….
<이상한 나라의 폴>은 『눈의 여왕』과 상당히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소년?소녀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점, 그중 한 명이 어떤 거대한 힘을 가진 존재에 의해 현실 너머 미지의 공간으로 납치되어 간다는 점, 납치된 짝을 구하기 위해 다른 한쪽이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의 길을 떠난다는 점 등이 그렇다. 물론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눈의 여왕에 비해 머리에 뿔 달리고 엉덩이에 꼬리 달린 대마왕은 짐승 캐릭터에 가깝지만, 강력한 카리스마로 따지면 막상막하인 듯하다.
무엇보다 이야기 전반을 관통하는 신비롭지만 어딘가 불온해 보이는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눈의 여왕이 살고 있는 거대한 얼음 궁전은 차갑게 비어 있는 공간이다. 성 밖에는 기괴한 모습의 눈으로 만든 병사들이 지키고 있고, 내부는 죽음처럼 고요한 가운데 투명한 바닥으로 이따금씩 오로라가 일렁거리는 곳. 니나가 잡혀 있는 4차원 세계도 예사롭지 않다. 그곳은 달콤한 과자의 나라와 신기한 장난감의 나라가 있는가 하면 공포의 거미성, 해골 군대, 콘도르의 공격, 전염병 인간, 세포 세계, 태양을 잃어버린 야채인간 등이 공존하는 기이한 세상이다. 두려우면서도 매혹적이고 불안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끌리는 판타지의 세계. 이런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무언가 일어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오래전,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한겨울에 야간열차를 타고 국경을 이동할 무렵. 침대칸을 예약하지 못해서 같이 갔던 친구랑 마주 앉아 밤새 뜬눈으로 보냈던 기억이 난다. 어두운 차창 밖으로는 눈발이 마구 휘날렸다. 적당히 춥고 적당히 쓸쓸하고 적당히 적막한 풍경. 당시 10개 일간지에서 스크랩해 간 따끈따끈한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읽으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는데, 문득 친구가 이렇게 속삭였다. “있잖아, 지금 꼭 눈의 여왕이 카이를 납치해 가고 있을 것 같지 않아?” 그 멘트가 어찌나 감각적으로 느껴지던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어둠 속으로 빨려가듯 질주하는 밤기차와 눈발이 흩날리던 풍경, 마치 현실 세계가 아닌 듯한 낯선 시공간의 아득한 느낌. 그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미묘한 자극들이 ‘눈의 여왕’이라는 하나의 이미지로 완벽하게 응축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날 밤을 떠올리면 왠지 모를 전율이 느껴진다. 그것은 아마도 나만이 느낄 수 있는 판타지의 세계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였습니다. 째깍! 째깍!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시계 바늘도 여전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자신들이 어른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 본문 중에서
대부분 동화의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게르다는 눈의 여왕이 사는 성에서 카이를 구출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다. 한바탕 모험을 겪으면서 아이들은 성장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아이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나는 굳이 물음표를 그려 본다. 해피엔딩이라고 결론지으려니 자꾸 의심이 생긴다. <이상한 나라의 폴>의 결말도 비슷하다. 이상한 나라에서 대마왕을 무찌르고 니나를 구출해서 현실 세계로 돌아온 폴. 이제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 마법이 풀린다. 찌찌는 낡은 봉제 인형으로, 삐삐는 평범한 개로 되돌아온다. 평화를 되찾은 마을, 그리고 해피엔딩. 하지만 이 불분명한 정체의 불편함은 뭘까. 소년과 소녀의 앞에 더 이상의 판타지는 없다. 오직 추억만이 남아 있을 뿐.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들.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나는 왠지 슬프다.
“이상한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겠죠? 그러나 믿어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폴과 니나의 마음속에는 이상한 나라가 언제까지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을 테니까요.”
- <추억의 애니메이션: 이상한 나라의 폴>의 마지막 내레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