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힙합 1세대 MC한새를 대치동에 있는 사무실에 만났다. 3년 반 만에 여섯 번째 앨범 〈My Birthday〉로 팬들에게 돌아왔다. 홍경민과 함께 작업한 5집 〈두 번째 이야기의 시작〉을 낸 후, 모든 활동을 접고 프로듀서로만 활동하다가 오랜만에 앨범을 발표했다.
MC한새는 티셔츠에 청바지, 모자를 쓰고 사무실에 나타났다. 힙합뮤지션이라기보다는 또래의 평범한 청년처럼 보였다.
“예전에는 굉장히 옷차림에 신경을 썼는데 지금은 편하게 하고 다녀요. 나이를 먹으니까 그런 게 별 의미가 없게 느껴져요. 진짜 자기 모습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어느 순간 드러나요. 그냥 솔직한 내 본 모습, 편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요. 무대에 올라갈 때나 팬들과 미팅이 있을 때는 제대로 차려입어요. 그건 팬들에 대한 예의니까. 너무 수수하게 하고 다니니까 주변에서 '옷 좀 사 입어라'고 많이들 그래요. 그럼 '제작비로 다 써버려 돈이 없어.' 그러죠. (웃음)”
고등학교 들어가면서 흑인음악을 접하고 완전히 빠졌다.
“음악을 듣고 너무 좋아서 음반가게에 가서 '이런 장르의 음악을 다 달라'고 그랬어요.” 이름도 모르는 가수들의 노래를 계속해서 찾아 듣고, 채널 V에서 방송되는 뮤직비디오를 녹화해 수없이 보고 따라 했다. 처음엔 R&B를 듣다가 점점 힙합에 빠지게 되었다.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음반으로는 힙합에 대한 갈증을 풀 수 없어서 미국으로 출장 가시는 아버지에게 CD를 사다 달라고 부탁해 듣고 또 들었다.
“너무 충격이었어요. 센세이셔널 했죠. 한 마흔 장을 사오셨는데 서른 장은 듣지도 못했어요. 그중에서 내가 들을 수 있겠다 싶은 열 장을 열심히 듣고 나니 그제야 나머지 서른 장을 들을 수 있었어요. 아, 뭐라 말할 수 없이 음악이 좋았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가수로 데뷔하기 위해 기획사를 전전했다. 백댄서도 하고 객원래퍼로 하면서 음반을 만들었지만 번번이 '대중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음반을 낼 수 없었다. 다섯 군데의 기획사에서 다섯 개의 앨범을 만들었지만 발매된 것은 한 장도 없었다. 그렇게 스물다섯이 되었고 인생의 위기가 닥쳐왔다.
“다섯 번째 기획사에서 앨범이 퇴짜 맞았을 때 나 자신을 돌아보니까 너무 끔찍한 거예요. 음악 한다고 친구들과도 멀어지고 벌어둔 돈도 없고, 군대도 안 다녀왔고, 음악 외에는 잘하는 것도 없는데 음악으로 밥 먹고 살 일은 요원하고. 여자친구와도 깨졌어요. 사람이 이렇게 되면 죽는 거밖에 생각이 안 나요. 세상이 너무 원망스러워서 낙산사에 들어가 중이 되려고 했죠.”
| 3년 반 만에 여섯 번째 앨범 〈My Birthday〉로 팬들에게 돌아온 MC한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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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가 1999년. 그는 중이 되는 대신 다시 음악을 부여잡았다. 인터넷이 그의 음악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 미국의 MP3닷컴에 곡을 올렸는데 아시아 차트에서 3위를 했다.
“아, 나 음악을 잘하는구나. 용기가 났죠.” 인터넷을 통해 그의 음악이 서서히 알려지자 음반을 만들고 싶었다. 돈도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그는 가정용 PC로 작업을 하고 아버지에게 백만 원을 빌려 CD를 천 장 찍었다. 그렇게 만든 CD가 대박이 났다. 인터넷과 음반소매점(상아레코드) 한 곳에서만 그 앨범이 만 장 이상 팔린 것. 이 앨범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마음의 병> <작은 행복> 등의 노래가 실린 그의 1집 앨범이다.
“그렇게 앨범이 성공하고, 저는 너무 거만하게도 '그건 내 고생에 대한 보답이다.'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죽기 직전까지 갔는데 이런 보답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그때 전 정말 신이라도 된 기분이었어요. 그때 번 돈 후배들 데리고 다니면서 미친 듯이 썼어요. 그 순간을 정말 즐기고 싶었죠. 이전에 고생했던 나 자신에게 뭔가 보상을 해주고 싶었어요. 1집이 대박 나니까 욕심이 났어요. 더 좋은 조건에서 앨범 만들고 싶다고 그랬는데 그때 딱 기획자가 나타나서 꼬시는 거예요. '너 정말 대단하다.' 그 말이 넘어가서 앨범 계약을 했는데 앨범도 못 내고 완전히 이용만 당했죠.”
그러고 나자 다섯 번이나 연장한 군대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정말 이제는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입대지원자가 너무 많아서 1년 반이나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2집 앨범을 만들었는데, 하필 발매일이 입대일이었어요. (웃음)” 그렇게 들어간 군대에서 4일 만에 나왔다. 지병 때문이었다. 군대하고는 지독하게 타이밍이 안 맞았다. 다시 돈 한 푼도 없는 상태에서 대출을 받아 혼자 힘으로 3집을 냈다.
“내고 나니까 할 일이 없어요. 기획사가 없으니까 공연도 없고 홍보활동도 못하고. 방구석에서 인터넷으로 반응만 보고 있는데 평도 좋지 않았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죠.”
그때 마음 맞은 기획자를 만나 4집을 냈다. 순조롭게 음반이 팔려나가고 방송에서 심심찮게 노래가 흘러나왔다. MC한새라는 이름이 대중들의 귀에 익숙해질 때 문제가 생겼다. 이번에는 기획사가 문제였다.
“회사가 힘들었어요. 때마침 공익을 가야 할 때라 '군대나 가야겠다.' 그런데 기획사가 계약을 해버려서 무조건 5집을 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급하게 5집을 냈다. 급하게 냈지만 완성도에서는 전혀 부끄러울 게 없다고 생각했다. 팬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MC한새 정말 좋아했는데 너무 실망이다'는 글들이 올라왔다.
“5집을 내고 평생 먹을 욕을 다 먹었죠. 얼마나 비난을 받았는지 '사람들이 MC한새를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관객들이 '쿡쿡' 웃는 거예요. 왜 좋아서 웃는 거 말고 그런 웃음 있잖아요. 내 노래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그때부터 3년 동안 공연을 못했어요.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소주만 마셨죠.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때 오래 사귄 여자친구가 떠나갔어요. 또 인생이 바닥을 쳤죠.”
그를 가장 힘들게 했던 팬들의 반응이 'MC한새답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MC한새고 내가 하는 음악이 MC한새다운 음악이잖아요? 그런데 팬들이 'MC한새답지 않다'고 하니까 도대체 나는 뭐고, 내 음악은 뭔지 너무 혼란스러웠어요. 음악을 못 만들겠어요. 사람들은 MC한새다워야 한다고 하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으니까.” 그는 자신이 금세 그 바닥에서 올라올 거라고 생각했다. 한 번 떨어져 본 바닥이다. 두 번째에는 훨씬 빨리 회복할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치유에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가 자신의 방에서 나와 다시 세상과 마주하기까지 3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는 음악을 버릴 수 없었다. 방에 틀어박혀 다시 노래를 만들었다. 그렇게 한 곡, 두 곡 쌓여갔다. 1년 전쯤 주변 사람들에게 새로 작곡한 노래를 들려줬다.
“사람들이 듣고, '어, MC한새답다'고 그러는 거예요. (웃음) 솔직히 아직도 모르겠어요. MC한새다운 게 뭔지.”
그는 작사, 작곡, 편곡에 음반 프로듀싱 그리고 믹싱에 뮤직비디오까지 직접 찍는다.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 건 아니었지만 하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재능이 튀어나왔다고 말하며 웃었다. 직원이 한 명밖에 없는 작은 음반사이기에 음반에 관련된 자잘한 사무도 모두 그의 몫. 음반을 내기 전에는 노래를 만드느라 바쁘고 음반을 낸 후에는 홍보작업으로 바쁘다.
“옛날에는 성공에 대한 욕구가 개인적인 거였어요. 내 노래가 인기를 얻고, 앨범이 많이 팔리면 좋고 그랬는데 지금은 책임감이 강해졌죠. 내가 성공해야, 내 앨범이 팔려야 나 믿고 같이 일 해준 사람들도 살 수 있다는 생각. 내가 책임져야 할 식구가 열여덟 명이에요. 옛날에 전 '비즈니스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음악 하는 사람이 비즈니스를 하면 정말 싸 보이거든요. 그건 저의 최후의 보루였어요. '나는 음악 하는 사람이다. 절대 싸 보이지 말자.' 그랬는데 지금은 어쩔 수 없어요. 사람들이 한 번이라도 내 노래를 듣고, 팬들이 'MC한새 새 앨범 나왔어?' 하고 알리기까지가 너무 힘들어요. 단 한 번이라도 기회를 잡기 위해 수없이 고개를 숙이는 거죠.”
음악 하는 사람이 비즈니스를 하면 자기 음악, 정말 하고 싶은 음악을 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방송국 앞에서 큰 한숨 쉬고 가죠. 그 역할을 해줄 사람이 지금은 없으니까. 그 역할을 제작자가 해주고 가수는 음악을 만들고, 수익을 정당하게 배분하고 그러면 참 좋을 텐데, 그게 우리 현실에서는 참 힘들어요. 어쩔 수 없는 거죠.”
음악적인 고민은 없다.
“제 입으로 이야기하기는 쑥스럽지만 음악적인 자신감은 항상 가득해요. 음악은 내 삶이니까. 음악적으로는 별로 고민 안 해요. 뭔가 요구를 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것을 팬들에게, 대중들에게 알리는 게 너무 힘들어요.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가수들이 겪는 어려움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방송은 주입식이잖아요. 다양한 음악을 틀어주기보단 몇몇 인기 있는 곡들만 계속 반복해서 틀어 대중들에게 주입시키죠. 공연할 때도 없어요. 저희 같은 가수들은 숨통 트일 때가 없는 거죠.”
요즘 가장 자극을 받았던 것은 서태지 의 ‘모아이’를 들은 것.
“저는 처음엔 별로 기대하지 않았어요. 주변에서 하도 좋다고 하니까 모니터 할 겸 들었는데 아, 지금까지 한국 대중음악이 얼마나 쓰레기 같은 건지 알겠더라구요. 정말 모아이는 한국 최고의 곡이에요. 한국의 아티스트가 만들 수 있는 최정점의 곡이에요. 그리고 '모아이'가 끝이 아닌 걸 아니까. 곧 있어 나올 정규 앨범에서는 얼마나 대단한 음악을 들려줄까 너무 기대가 돼요.”
이것은 음악을 듣는 사람으로의 그의 감탄. 아티스트로서는 도전의식에 불탄다.
“음악에 들인 노력과 자금이 정말 부러웠어요. 그냥 듣는 사람은 잘 모르지만, 음악을 하는 분들이라면 '모아이'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곡인지 알아요. 음악 하는 사람들은 정말 '요만큼'의 차이를 위해 돈을 쏟아 붓고 고민을 합니다. 보통 사람은 1 dB(데시벨) 차이를 구별하기를 힘들어요.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0.1dB을 고민해요. 그런데 제가 존경하는 기사님이 술을 마시면서 그러시더군요. '사람들은 내가 0.01dB을 고민하는 걸 알까?' 그러셨어요. 그 순간 나는 아직 멀었구나 싶었죠. 이런 식으로 자극 받는 건 참 좋아해요. 더 잘해야겠다는 욕심도 생기고.”
그는 음악을 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제가 직접 만든 첫 CD를 들고 차에 들어갔어요. 뚜껑이 날아간 CDP를 카팩 연결해서 노래를 듣는데 정말 행복했어요. 시동 걸어놓고 하염없이 들었어요.” 고민도 많고 어려움도 많지만 그는 한 번도 음악 이외의 삶을 꿈꾸지 않았다.
6집을 낸 그는 불안해했다. 5집 때 많은 비난을 받았고, 3년 반의 공백도 있었다. 과연 내 음악을 들어줄 사람이 있을까, 고민도 된다. 하지만, 그는 그 기억을 떠올린다. 차 스피커로 수없이 반복해 듣던 자신이 만든 첫 CD를. 음악을 하고 싶어 바닥까지 떨어졌지만 결국 음악이 그를 다시 위로 끌어올려 줬다. 음악이 있는 한, 그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