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소설 『천사를 찾습니다』를 낸 귀여니 이윤세를 강남역 근처의 작은 카페에서 만났다. 소설가 귀여니가 인터넷에서 연재하는 소설을 통해 거침없이 자기 목소리를 토해내는 데 비해, 인간 이윤세는 수줍음이 많고, 말수가 적은 여대생이다. 나직한 목소리로 느릿느릿 이야기를 이어간다. “제가 말을 잘 못해요. 친구들이 제가 소설 쓴다고 하면 안 믿을 정도로요. 그런데 컴퓨터 앞에 앉으면 글이 막 써져요. 신기할 정도로요.”
아침에 눈을 떠보니 스타가 되었다는 말, 귀여니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도 없다. 인터넷에 재미로 연재한 소설이, 십 대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출간돼,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그게 2001년의 일. 그 후로 매년 한 권씩 새로운 책을 출간하고 있으며, 일곱 번째 소설이 책으로 묶여 나왔지만 아직 이윤세에겐 ‘소설가’라는 타이틀이 어색해 보인다.
“해마다 거의 꼬박 한 권씩 책을 내고 있네요. 이번 책은 어땠어요?”
“쓰면서 너무 힘들었어요. 그전에는 가벼운 필치로 편하게 썼는데, 이번 책은 그렇게 쓰면 안 되겠다는 압박감이 컸어요. 예전에는 참 글이 쉽게 풀려나갔어요. 캐릭터들을 던져놓으면 자기들이 알아서 움직이고 뛰어놀고 그랬는데, 이번에는 캐릭터들이 스스로 움직이질 않더군요. 다른 시도를 하고 싶었는데, 쉽지 않았어요. 문장이 손에 익지 않은 느낌이랄까.”
“남의 옷 빌려 입은 느낌이요?”
“네. 그런 느낌.”
“
『천사를 찾습니다』는 인터넷이 아니라 모바일(ebook21)을 통해 연재되었는데요.”
“예. 인터넷에 작품을 올리면 독자들과 바로바로 피드백을 하잖아요. 그걸로 독자들 반응도 살피고, 대화도 나누고, 독자들 반응에 신나서 쓰기도 하고 시무룩해지기도 해요. 그런데 이번에는 처음으로 완전히 고립되어서 글만 썼어요. 지루했어요. 그렇게 글만 쓰는 게.”
“인터넷 소설 독자들은 꽤 적극적으로 소설의 결말에 대한 의견을 내놓는 편이잖아요. 그런 의견들을 이야기에 반영하는 편인가요?”
“‘태성이 죽이지 마요.’ 이런 쪽지 많이 받았는데, 안 죽일 듯, 안 죽일 듯하다가 허를 찔러요. (웃음) 그런 걸 즐겨요.”
“예전 작품을 읽을 때는 작가가 글을 쓰면서 두근거리는 마음, 캐릭터가 예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그런 마음이 느껴졌는데,
『천사를 찾습니다』는 객관적이고 냉정한 관찰자적 느낌이랄까요. 한발 뒤로 물러나서 바라본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제가 성장하는 시기잖아요. 사랑이나 인간관계에 대해서 10대 때와는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어요. 지금의 느낌으로는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어요. 옛날에는 작품 쓰고 난 후 너무 힘들었어요. 남자 캐릭터와 사랑에 빠졌으니까, 후유증이 컸죠. 그런데 지금은 이성적으로 변했어요. 10대 때처럼 ‘와, 까아!’ 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몰입해서 쓸 수는 없는 것 같아요. 한 발짝, 두 발짝 뒤로 물러나서 볼 수밖에 없어요. 다만, 『천사를 찾습니다』는 스물네 살의 내가 공감하도록 쓴 소설이죠.”
“십 대 때 쓴 소설을 지금 읽어보면 어떤 느낌이 드나요?”
“지금의 나는 절대 쓸 수 없다는 느낌이 들어요. 굉장히 쉽게, 재미있게, 멋모르고 썼구나 싶은 느낌도 들고. 그 나이 때만이 가질 수 있는 감수성으로 썼던 소설이에요.”
“이번 작품은 ‘사랑’ 자체를 부정하는, 굉장히 메마르고 거친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이 등장했죠. 찬수는 사랑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는 남자고, 선민이는 두 번의 배신으로 사랑 자체를 믿지 않는 여자니까요. 두 주인공들 성격도 우울하고 어두워요. 주변 인물들도 저마다 가슴 속에 어둠이나 상처를 묻고 있고요.”
“사람과 사랑에 대한 경험치도 예전보다 늘었으니까요. 직접 사랑을 해보기도 하고, 듣고 보는 이야기들도 많으니까요. 예전처럼 순수한 느낌으로 사랑을 쓰긴 힘들죠. 십 대 때는 영원한 사랑을 믿었지뢸 지금의 전 사랑에 회의적이에요. 제 작품의 여주인공은 어느 정도 ‘저’를 반영한 인물이에요. 『천사를 찾습니다』의 선민이가 굉장히 상처가 많고 시니컬한 캐릭턴데, 제가 요즘 좀 그랬거든요. 그런 캐릭터로 이야기를 쓰면서 스스로 기분이 많이 처졌어요. 저는 제가 ‘그렇다.’라고 느끼는 것만 쓸 수 있어요. 그렇게 느끼지 않는 걸 쓰는 순간 글이 탈선해버려요.”
귀여니는 쉽게 정상에 올라갔다. 유명세와 판매 부수, 영향력 측면에서 귀여니를 뛰어넘는 작가가 몇 되지 않는다. 그러나 독자로서 궁금한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 작품을 쓰겠다는 끈질긴 고집이 그에게 있는지, 새로운 것을 보여줄 수 있는지, 그가 보여준 새로움이 기존 문학 독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지다. 여전히 작가로의 그의 정체성은 미완성이다. 그는 일곱 편의 소설을 낸 작가이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것을 보여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 스물넷, 선택을 해야 하는 시점에 놓인 작가, 귀여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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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국 나이로 스물넷, 십 대보다는 이십 대 쪽으로 기울었는데, 여전히 십 대들의 사랑 이야기를 썼는데요. 자기 또래에 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나요?”
“솔직히 어떤 작품을 써야 하는지 고민이 많아요. 지금 작가로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시점인 것 같아요. 또래 친구들의 삶이나 주변의 연애를 많이 관찰하게 되는데, 그들을 모델로 해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십 대 시절이 그리울 때는 없어요?”
“1년 전만 해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지금은 십 대 시절이 생각나지 않아요. 정말 이상하게도.”
“글을 쓰면서 힘들었다고 했는데, 어떤 부분이 힘들었어요?”
“성장에 대한 부담, 이전보다 발전된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 작가라면 다 겪는 단계지만, 저는 유독 어렵게 그 단계를 밟아가는 것 같아요. 글에 대한 고민도 있어요. 지금처럼 계속 쓸 수도 없지만, 이른바 ‘잘 쓴 글’을 쓰는 순간 내 개성이랄까, 내 장점이 다 날아가 버릴 것 같고요. 좀 더 재미있는 작품, 제가 늘 쓰던 소재가 아니라 다른 소재로 글을 쓰고 싶은 의욕은 커요. 하지만 글이 의욕만으로 되는 건 아니니까요.”
“미문(美文)에 대한 욕심은 있나요?”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글에 대해 지적을 하잖아요. 그 부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음, 일단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쓰려면 그 부분은 고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문장을 다듬는 것보다는 구성을 좀 더 완성도 있고, 짜임새 있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요.”
“고민이 많아 보여요. 예전처럼 글 쓰는 게 마냥 재밌고 즐겁지만은 않나요?”
“글쓰기는 좋아요. 한동안 글이 써지지 않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 너무 괴롭고 힘들었어요. 처음에는 그냥 글 써서 올리고 사람들이 재미있어하는 게 신기했어요. 그런데 작가는 그냥 재미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어느 순간 안 거죠. 작가로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하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그 짐이 너무 무겁게 느껴져서 어떨 때는 ‘쓰는 것만이 내 인생일까? 다른 일을 하고 살면 안 될까?’ 하고 생각할 때도 있어요. 어느 순간 내가 글 쓰는 사람으로 인생이 굳어진 게 싫을 때도 있고요.”
“대부분의 작가들은 습작기 때 그런 고민을 하는데, 이미 작가로 궤도에 오른 후에 그런 고민을 하는군요.”
“그땐 너무 어렸죠. 무턱대고 글을 써서 사람들이 좋아하기만 해주면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귀여니’라는 이름이 글쓰기에 방해가 되진 않나요? 독자들이 바라는 작품과 자신이 쓰고 싶은 글 사이의 괴리도 분명 있을 텐데요.”
“2년 전 한참 욕을 먹고 있을 때 필명으로 글을 써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어요. 왜,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내서 공쿠르상을 받은 적이 있잖아요. 어떤 글이 굉장히 쓰고 싶었는데, ‘귀여니’라는 이름으로는 마음껏 쓸 수 없었어요. 결국 그렇게 하진 않았죠.”
“작가로서 어떤 놼택을 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 있는 셈이네요.”
“그렇죠. 다음 작품은 어쩌면 제게 있어 굉장히 힘든 작품이 될 것 같아요.”
그는 대학에 입학한 후 다양한 글쓰기에 몰두했다. 학교 공부로 희곡 책도 열심히 읽었고, 연기 수업도 받았다. 극본도 써 무대에 올렸다. 자신이 쓴 극본이 무대에 오른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무대가 펼쳐진 것. 혼자서, 100%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 수 있는 소설의 매력에 더 빠져드는 계기가 되었다. 공동작업은 그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희곡 작품이 연극 무대에 올랐다고 들었어요. 어땠나요?”
“소설은 나 혼자 쓰는 거고, 독자들이 감상 글을 보내는 것도 나뿐이잖아요. 희곡은 공동작업이고, 연출자의 몫이 작가보다 더 큰 것 같아요. 관람객들이 환호하는 것은 대본 작가가 아니라 무대 위의 배우고, 연출자죠. 무대에 올라간 연극을 보면서 ‘정말 내가 쓴 것과 다르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극작가와 연출가가 많이 싸운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물론 극본을 썼긴 했지만 아직 그 분야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은 입장이니까 관객의 입장에서 연극을 봤어요. 재밌다, 다르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계속 이쪽 일을 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전공이 연기예술학과니까 연기 수업도 받았겠네요. 희곡도 많이 읽었을 테고.”
“네. 대부분의 수업이 희곡을 공부하고 연기 공부하는 거예요. 과 친구들도 80% 이상이 연기자 지망이고. 수업에서 읽었던 희곡 작품 중에선, 몰리에르 희곡이 재밌었어요. 몰리에르는 17세기에 활동했으니까, 굉장히 오래된 작가인데, 유머 감각이랄지, 이야기 구조랄지, 굉장히 현대적인 느낌이 들어요. 셰익스피어도 좋아하고요.”
“연기를 직접 해보니까 어떤가요? 혹시 연기자로 활동할 생각이 있나요?”
“아니요. 저하고 연기는 정말 안 맞아요. 너무 수줍음이 많아서 연기를 못해요. 연기 시험을 봐야 되는데,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입술에 파운데이션을 살짝 바르고, 교수님께 가서 아파서 못하겠다고 한 적도 있었어요. (웃음) 연기는 자기 자신에게 도취하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여기서 킥킥대고 농담하고 웃다가도 무대에 올라가면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되어서 눈물을 줄줄 흘리는 친구들을 보면 확실히 연기를 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았어요. 과가 과인 만큼 재미있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무대에서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게 부러웠어요.”
“연기하는 친구는 자기 몸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거고, 윤세 씨는 글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거니까, 어쩌면 비슷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럴지도 몰라요. 저는 글이 편해요.”
“드라마 극본이나 시나리오를 쓸 생각은 없나요? 잘 쓸 것 같은데요.”
“아직은 없어요. 공동작업이 저한테 안 맞는 것 같아요.”
“어떤 귀여니 팬이
『신드롬』을 완성도가 제일 높은 작품으로 꼽고 있던데, 본인은 어떤 작품을 자기의 베스트라고 생각해요?”
“『신드롬』은 사랑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도약하는 이야기였는데, 저로서는 새로운 시도였어요. 아마 그래서 신선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할 땐 『내 남자친구에게』가 지금까지 썼던 작품 중에 제일 마음에 들어요.”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어요?”
“이십 대 여성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예요. 일상적이지만 여운이 남는 글, 가볍게 읽히고 재미있고, 읽고 나면 깔끔한 느낌이 드는 글을 쓰고 싶어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 같은. 요즘 가장 쓰고 싶은 글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