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소설 속에서 걸어 나왔다, 뚜벅뚜벅 - 소설가 박상륭
무엇이 박상륭을 독자에게서 멀어지게 했을까?
광화문의 한 아파트에서 박상륭을 만났다. 햇살이 밝은 오월의 한낮이었다. 인터뷰를 위해 그의 자택을 방문한 것인데, 굳이 '한 아파트'라고 표현한 것은 이 건축물의 구조가 박상륭이라는 이름 석 자에 걸맞게 묘한 낯섦이 있기 때문이다. (2008.05.30)
우리 시대의 잘나가는 젊은 작가인 박민규가 언젠가 그의 소설만큼이나 멋진 말을 한 적이 있다.
“이외수 선생님이 개업의라면 박상륭 선생님은 연구의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두 작업이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저는 인기 높은 개업의가 되려고 노력 중이지만 언젠가 박상륭처럼 연구의가 되고 싶습니다.”
대충 이런 식의 말인데,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카스테라』『핑퐁』 등의 소설을 연이어 발표하며 제법 개업의로서 자리를 잡아가는 박민규의 앞에 이제 새롭게 개발된 신약이 도착했으니, 이게 바로 박상륭 선생의 신작 장편소설 『잡설품(雜說品)』이다.
그가 잡설(雜說)이라 말했다
광화문의 한 아파트에서 박상륭을 만났다. 햇살이 밝은 오월의 한낮이었다. 인터뷰를 위해 그의 자택을 방문한 것인데, 굳이 '한 아파트'라고 표현한 것은 이 건축물의 구조가 박상륭이라는 이름 석 자에 걸맞게 묘한 낯섦이 있기 때문이다. 13년 전에 지어진 이 건물은 아파트라기보단 오피스텔 혹은 요즘 유행하는 주상복합에 가깝다. 밖에서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사무용 빌딩인데, 이 16층 빌딩의 가로 1/4 정도 되는 공간이 따로 아파트 60세대로 구성되어 있다. 온전한 아파트라면 페인트칠이라도 밝게 할 수 있겠지만 사무용 빌딩이 주가 되는지라, 시간의 흔적이 외벽에 새겨져 OO아파트라는 명판만 없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그의 집이 있는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려 복도로 접어들었을 때 비로소 아파트의 형태가 느껴졌다. 이 복도형 아파트는 위에서 내려다보면 가운데가 빈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곳으로 적량의 햇살이 스며들어 부드러운 봄날의 고즈넉함이랄까, 어쨌든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만나기 힘든 평온이 제법 맘에 들었다.
선생을 뵙는 건 두 번째의 일이다. 올해 한국 나이로 예순아홉, <사상계>라는 잡지에 처음 소설을 발표한 게 1963년의 일이니까 소설가라 불린지도 사십 년이 훌쩍 넘는다. 그간 『열명길』『죽음의 한 연구』『칠조어론(七祖語論)』 등 열 권의 소설책과 『산해기』라는 한 권의 산문집을 냈다. 그의 소설은 한 번 영화화가 됐는데, TV 드라마 <파리의 연인>으로 만인의 연인이 된 배우 박신양의 데뷔작 <유리>가 바로 그것이다. <유리>는 장편소설 『죽음의 한 연구』를 영화화한 것인데, 양윤호 감독의 작품이다. 감독은 6년 동안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고 한다. 영화는 1992년에 개봉됐고 크고 좋은 소설이 작은 영화 속으로 들어가기엔 무리가 있는지라 『죽음의 한 연구』의 지지자들에게는 그리 좋은 평을 얻지 못했다. 영화는 1999년에 예술의 전당에서 다시 소개됐는데, 당시 개최된 '박상륭 문학제'의 한 섹션에서였다. 보기 드물게 현존 작가를 추앙하는 자리였는데, 『죽음의 한 연구』를 연극화한 <두 문 사이>와 단편소설 「뙤약볕」으로 만든 동명의 무용극도 함께 소개됐다. 나는 그를 그곳에서 처음 보았다. 그리고 올해 5월에 장편소설 『잡설품(雜說品)』이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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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상륭 선생. 아니, 이 글에서는 ‘박상륭’ 또는 ‘그’라고 호칭하고자 한다. 선생을 선생이라 부르지 않는 것은 굳이 경외감으로 거리를 두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간 박상륭은 그의 업적에 걸맞지 않게 우리 곁에서 너무도 멀리 있었다. 우리 시대 최고의 평론가 중 한 명인 고(故) 김현 선생은 박상륭의 대표작인 장편소설 『죽음의 한 연구』를 일컬어 “이광수의 『무정』 이후 씌어진 가장 좋은 소설의 하나”라고 평했고, 최고의 평론가 중 또 다른 한 명인 김윤식 선생은 “아무리 쇠귀에 경 읽기라 해도 고토의 중생들을 외면하지 말고 다시 하산하라”는 말로 박상륭의 집필 활동을 격려했다. 그 외 김정란 시인은 “박상륭은 한 세월에 흐른 뒤 무덤에서 가장 많이 불려 나올 소설가”라는 말로 그를 정의했고, 김사인 시인은 “40년 가까이, 존재의 근원에 맞서 ‘글쓰기’의 형식으로 치러지고 있는 박상륭의 고투는 가히 영웅적”이라며 그에게 존경을 표했다. 그러나 이 모든 상찬에도 불구하고, 박상륭을 읽은 일반 독자는 그리 많지 않다. “박상륭 선생은 한마디로 UFO죠. 봤다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는 그런 존재요.” 이렇듯 소설가 박민규는 UFO라는 발랄한 표현을 썼지만 한편으로는 “대한민국에서 박상륭의 책을 다 읽은 사람은 4명밖에 없다”는 우스갯소리도 제법 진지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무엇이 박상륭을 독자에게서 멀어지게 했을까?
우리 시대의 문학청년들에게 박상륭은 가히 종교적이고도 신화적인 존재이다. 알 만한 사람은 알 듯 말 듯하고 모르는 사람은 아예 모르는 게 박상륭인데, 일단 그의 글을 스쳐 지나보면 대개는 모를지라도 가슴 한 구석에는 화인(火印)과도 같은 기억이 남는 게 바로 박상륭이다. 실상 그는 신화와 종교를 새로 쓰고 있다. 소설집 『아겔다마』『열명길』, 장편소설 『죽음의 한 연구』, 3부작 소설 『칠조어론(七祖語論) 1, 2, 3』, 그리고 『잡설품(雜說品)』에 이르기까지 그는 죽음과 삶을 다루고 깨달음을 위한 난행 고행을 다루고 이윽고 인간의 해탈에 대해 말한다. 그의 말은 두툼한 소설책에 담겨 우리에게 전해지는데, 이것이 기존의 서사적이거나 리얼리즘이거나 단문의 스타일리스트의 글이 아니어서 세 문장, 네 문장 심지어는 그 이상의 문장들이 하나의 복합체 문장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또 그 문장 속에는 여러 개의 담론이 괄호와 쉼표를 통해 부언되고 서로 섞이기도 하다. 또 그 담론들은 동양과서양의 철학과 종교를 넘나들며 통종교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어, 소설 자체가 종교 서적이기도 하고 신화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박상륭은 독자에게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단 한 번도 독자와 가까웠던 적이 없다. 철학이 아니면서 철학이고 서사시가 아니면서 서사시이고 경전이 아니면서 경전이고 소설도 아니면서 소설인 그의 글을 스스로 ‘잡설(雜說)’이라 부르는데, 어쩌면 이것이 박상륭을 읽는 한 열쇠가 될 것이다.
박상륭을 읽기 위하여
박상륭은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다녔다. 서라벌예대는 나중에 중앙대학교에 합쳐지는 학교이다. 1960년대 초 문예창작과 교실에는 이문구, 한승원, 조세희, 권명옥, 이건청 등이 있었고, 그들은 후에 한국 문단의 거장으로 불리게 된다. 또 박상륭은 <사상계>라는 종합교양문예잡지에 단편소설 「아겔다마」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오는데, 당시 <사상계>에 함께 작품을 투고한 황석영, 박태순, 박순녀 등도 역시 한국 문단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작가들이다. 이들이 글을 쓰기 시작한 1960년대는 이른바 리얼리즘의 시대였고 서사문학의 시대였다. 그럼에도 박상륭은 홀로 훗날 ‘잡설’이라 불리는 독특한 글쓰기를 시작하는데, 이것이 그를 독보적으로 만들었고 한편으로는 외톨이로 만들었다.
얼마 전 박상륭은 광주의 조선대학교에 가서 작가를 꿈꾸는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굵고 또렷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문체를 닮은 이야기가 천천히 이어졌는데, 그는 문장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양에는 긴 문장, 깊이 있는 문장, 복합체 문장들이 있었고 역사적으로 그런 선배 작가들이 있어서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같은 짧은 문장이 발달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우리에게는 그런 긴 문장을 쓰는 배경이 없었으므로 먼저 긴 문장을 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작가들 중에는 짧은 문장을 잘 써서 문장의 스타일리스트가 된 분도 있지만, 우리 일반인이나 학생들이라면 최소한 두 개의 문장을 한 문장으로 묶을 수 있는 문장력을 길러야 합니다. 문장 속에 여러 가지 뜻도 담아야 하고 깊이 있게 생각하고 아름답게 생각하고 복합적으로 생각하려면 아무래도 문장이 길어져야 하지요. 또 문학은 역시 문학이래서 일반적으로 쓰는 구어체보다는 조금 더 깊이가 있거나 조금 더 나아야겠지요. 그런데 짧은 문장에만 익숙했던 독자들이 긴 문장을 만나면 당황하는 것 같아요. 노루가 뛰어가다가 무엇 때문에 뛰어가는지 잊어버리듯 문장을 읽다가 갑자기 ‘내가 무엇을 읽었더라.’ 처음의 기억력을 되살려야 하는 식인데, 이것이 계속되면 우리의 뇌가 오래 생각하고 철학을 하기가 쉬워집니다.”
흔히들 박상륭을 읽기 어려운 까닭으로 그의 긴 문장을 말하곤 한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가 쓰는 세 문장, 네 문장이 그에게로 가선 한 문장으로 이어지고 때론 그 문장 속에 담론이 있는데 그것들이 괄호나 쉼표를 사용해서 부언되기도 한다. 또 그 부언이라는 것이 다른 담론을 담고 있어서 독자들은 이윽고 신성한 언어의 숲에서 방향성을 잃고 책장을 덮는 식이다.
“어렵다는 선입견을 좀 버려 주세요. 어렵다는 말이 독자와 작가 간에 거리를 멀게 만듭니다. 외국의 소설을 봐도 예를 들어 도스토예프스키를 처음 읽으면 상당히 딱딱하고 눈에 잘 안 들어오죠. 그런 소설이라도 홍역 치르듯 한 번 읽고 또 읽다 보면 갈수록 눈에 들어오잖아요. 자신의 수준이 모르는 사이에 굉장히 높아지는 것이고요. 그런 고전과문제작들을 통해 우리는 세계의 문학 수준이 어떤 것이라는 알게 되는 것이지요. 쉬운 소설, 말랑말랑한 소설들만 읽어서는 문학이 도달하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가 없죠. 인류가 달성해 놓은 것이 있는데 그걸 어렵다고 피하고 재미없다고 피하면 우리는 선인들이 이뤄놓은 것을 도저히 섭렵도 못하고 관 속에 넣고 말아요. 그래서 어렵다는 것들도 한두 권만 독파하고 나면 그다음엔 좀 쉬워지고 나중에는 재미있어 집니다. 그만큼 독자들의 지적 수준이 높아진 거죠. 그것은 노력을 통해 깨트려야 하는 건데, 누구에게나 그 정도 노력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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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륭을 읽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문학 대부분이 삶과 존재의 근원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다양한 종교, 철학, 동서고금의 신화 등을 통해 이를 형상화한다. 또 단순히 다양한 말씀을 전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 스스로가 초인이 되어 새로운 말씀의 우주를 제시하기도 한다. 예컨대 최근작 『잡설품(雜說品)』의 시초가 된 『죽음의 한 연구』는 중국 선종의 육조대사 혜능을 주인공으로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3부작 소설 『칠조어론(七祖語論) 1, 2, 3』은 혜능 이후 대가 끊긴 선종의 칠조대사를 가상으로 내세우고, 여기에 마침표를 찍는 『잡설품(雜說品)』에서는 역시 가상의 인물인 팔조대사가 등장한다. 이 일련의 소설에 대해 줄거리를 간단히 정리하면 육조는 죽음과 삶의 문제를 탐구하고, 칠조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난행고행을 하며, 팔조는 인간의 해탈을 이루고자 한다. 그런데 이러한 탐구의 과정이 선불교만을 통해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불교, 기독교, 천주교, 힌두교, 라마교, 조로아스터교, 자이나교 등의 다양한 종교와 철학, 민담, 패설, 신화 등을 넘나들며 하나의 소설, 박상륭의 표현대로라면 하나의 잡설로 형상화되기에 일반 독자로서는 그의 지식과 사유의 깊이를 감히 따라잡을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여러 가지 종교가 한데 섞여 있다는 점에서 통종교라는 말로 부를 수 있을 텐데요. 이는 소설적 장치일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종교의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종교라는 게 어느 정도 자라기까지는 문도 닫고 서로 배척도 하고 그렇게 커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 종교가 작은 종교를 먹어 치우는 약육강식이 이뤄지죠. 그런데 오늘날처럼 기독교 불교 천주교 힌두교들이 전부 다 자라났기 때문에 이제는 종교의 벽을 허물고 세계를 하나의 사원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인지가 모두 같은 게 아니라서, 어떤 인지는 기독교에 적당하고 어떤 인지는 불교, 힌두교, 샤머니즘, 이런 식으로 그 인지가 전부 다르거든요. 샤머니즘을 믿어야 할 사람을 기독교 사원에 갖다 넣어서 그 구원이 제대로 행해질지 어떨지 몰라요. 일생을 두고 방황할지도 모르죠. 종교는 식당의 메뉴처럼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지금 세상에 메시아가 나온다면 모든 종교의 벽을 허무는 자가 메시아가 되겠죠.”
박상륭표 소설, 즉 ‘잡설(雜說)’을 읽기 위해서는 독자가 소설에 대한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흔히 보는 소설책이 야구로 치면 깔끔한 직구이거나 격투기로 치면 단순한 권투에 가깝겠지만, 때론 소설책 혹은 편의상 소설로 구분되는 잡설이, 공기 중의 변화에 따라 꿈틀거리는 너클볼이거나 무규칙 이종격투기 같은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흔히들 박상륭을 한국의 짜라투스트라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실제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도서 분류 상에서 인문서이기도 하고 철학서이기도 하고 문학작품, 서사시이기도 하다.
“니체와 박상륭 모두 잡설을 씁니다. 둘 다 철학책도 아니지만 철학책으로 읽을 수도 있고,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인물을 내세워 서사의 시정으로 썼는데 서사시도 아니고 허구의 설정으로 보면 소설인데 육하원칙이나 기승전결에 의해 씌어진 소설도 아니고 이건 경전도 아닌데 또 경전일 수도 있고 이걸 뭐라 불러야 하냐, 이것이 잡설이죠. 이 모두를 포함하고 있고 이 모두가 아닌데도 모두 다 이럴 때, 여기서 나타나는 게 잡설이 되는 것이죠. 잡설도 읽다 보면 재미있는 게 많습니다. 송두리째 삼켜버릴 소설책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책은 독자들로 하여금 겁내지 않고 덥석 물어서 씹고, 토해냈다가도 다시 씹어서 삼키고 하는 것이 필요하죠.”
박상륭을 읽기 위하여, 우리는 어깨의 힘을 뺄 필요가 있다. 느긋하게 눈에 힘을 뺄 필요가 있다. ‘소설 따위가 감히, 이렇게 안 읽혀? 이렇게 어려워?’ 하고 힘을 잔뜩 준 순간, 마지막 진화의 날개를 펼치기 위해 나무에 매달린 자벌레의 몸통 위로 까마귀가 내려와 쫀다든지 소가 뒷걸음치다가 나뭇가지를 분지른다든지 하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다. 소설은 원래 어려워도 되는 것이다. 어려워도 읽다 보면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재미있어지는 것이다. 오늘 안 읽히면 며칠 후에 다시 읽어보고 일 년, 이 년, 십 년을 두고 띄엄띄엄 찬찬히 다시 읽어도 무방한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다행한 것은 박상륭의 잡설이 소설과 경전과 신화와 이야기의 경계, 그 어디쯤에 있는 것이어서 경전을 따로 읽거나 신화를 따로 읽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마음먹고 읽어보기가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날개를 연금(鍊金)하는 방법
올해 5월에 발표한 장편소설 『잡설품(雜說品)』은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냈다. 박상륭의 소설 중 다수를 이 출판사에서 펴냈는데, 기존에 발표된 『박상륭 소설집』을 『열명길』이라는 제목으로 개판 증보하여 1986년에 재출간한 것을 시작으로 역시 같은 해에 『죽음의 한 연구』를 재출간했고, 이후로 『칠조어론(七祖語論) 1, 2, 3』(전4권), 초기작 모음인 소설집 『아겔다마』 등이 출간됐다.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작품들은 그의 대표작인 『죽음의 한 연구』『칠조어론』 등을 앞뒤로 잇는 일련의 컬렉션 성격을 지닌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또 문학동네라는 출판사는 산문집인 『산해기』와 소설집 『평심』『잠의 열매를 매단 나무는 뿌리로 꿈을 꾼다』 그리고 장편소설 『신(神)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 등의 책을 출간했고, 출판사 현대문학은 2005년에 장편소설 『소설법(小說法)』을 펴냈다. 모두 고맙다. 이런 출판사들이 있어 우리나라의 문학이 일방적으로 말랑말랑하거나 칙릿(Chick-lit)이거나 스타일리스트의 글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균형을 잡아준다는 면에서 독자로서는 정말 고마운 일이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잡설품(雜說品)』과 함께 보내온 보도자료에 의하면 이 장편소설은 『죽음의 한 연구』의 5부이자 마지막 책이다. 이는 『칠조어론(七祖語論) 1, 2, 3』이 2부에서 4부까지 구성함을 뜻한다. 보도자료의 헤드 카피는 “잡설의 공력으로 우주를 쌓다. 잡소리로 인간 세상의 상극적 고통과 폭력들을 위무하다.”라고 씌어 있고, “우리 문학의 거봉(巨峯), 할방패관(O榜稗官) 박상륭. 그 방대하고 심오한 문학 세계의 완성”이라는 카피도 있다.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문구들이 좀 어렵고 또 한편으로는 그 지극한 겸손함에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할방패관’이라는 것은 할방과 패관이 합쳐진 말이다. ‘할방’은 과거에 급제도 안 하고 벼슬아치가 된 것을 뜻하고 ‘패관’은 민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모아 기록하는 일을 맡아 하던 임시 벼슬아치를 뜻한다.
“스스로 할방패관이라고 하는데, 이는 학문적으로 배운 게 없이 무식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서도 작가 노릇을 하고 있다는 얘기죠. 예술대학 다니면서 공부도 별로 안 했고, 그러다 보니 사실은 김동리, 서정주 선생에게 배운 것도 별로 없고. 그러다 보니 결국 할방이죠.”
할방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거대한 우주를 품고 있는 박상륭의 종교, 신화, 철학 등의 지식과 사유의 깊이는 오랜 독서의 산물이다.
“신화적인 부분은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시간이 한없이 많고 해서 소위 말하는 고전이라는 것들, 신화라는 것들을 대개 섭렵을 했어요. 그게 큰 자산이 됐다면 된 거죠. 그리고 선불교다 뭐다 하는 것은 『우리말 팔만대장경』이라고 해서 팔만대장경을 압축해놓은 책이 있어요. 그것을 계속 읽었어요. 그러다가 1969년에 캐나다로 이민을 가니까 동양학 책이 참 많아요. 문화적인 제국주의의한 형태인데 서양에서는 어느 나라를 정복하면 문화까지 정복하기 위해서 그 나라 책을 전부 번역을 합니다. 그래서 오리엔탈 책이 옥스포드에서 번역이 안 된 게 없습니다. 당시 티베트불교까지 번역이 되어 있었죠. 그래서 짧은 영어실력으로 떠듬떠듬 읽었는데 그게 읽어서 읽는 게 아니었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람이, 예컨대 어떤 중이 수도를 닦다 어느 상태에서 사고나 병고로 죽으면 다음에 태어날 때 거기까지 깨우치는데 시간이 걸리지, 결국은 중단했던 거기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거예요. 그때 못 읽는 영어로 힘들게 읽었던 것이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 보니 틀리지가 않아요.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영어를 잘해서가 아니고 어떤 한 단어 어느 한 구절이 쏙쏙 들어와 이해가 됐던 거죠. 그렇게 동양학을 서양에 가서 한 겁니다.”
오랜 독서의 끝에서 그는 ‘죽음의 한 연구’를 하고 ‘칠조의 어론을 정리’하다가 이윽고 『잡설품(雜說品)』에 이르러 서양의 이원론적인 세계관으로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나아가 인간이 해탈할 수 없다는 선언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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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는 죽음과 삶의 문제를 다룬 거고 칠조는 해탈에 의한 고행의 과정, 점수(漸修)의 과정입니다. 팔조는 혹자에 의하면 시동이(‘팔조’가 되기 전의 주인공)가 광야에서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단견의 소치입니다. 왜냐하면 육조와 칠조가 이미 고행을 치르고 있는 걸 우린 너무도 뼈저리게 보아 왔잖아요. 이제 팔조는 해탈의 과정에 와 있는 겁니다. 저는 이걸 자벌레 이야기로 비유하는데, 자벌레가 오체투지를 해서 어느 한계에 다다르면 나비가 되기 위해 어딘가에 매달리죠? 그러다가 껍질이 벗겨지면서 날개가 돋습니다. 시동이는 바로 이 상태에 있는 건데 자벌레 속에서 날개가 나오는 것이지, 날개라는 게 하늘에서 큰 손이 내려와서 달아준 게 아니잖아요. 오체투지 고행을 통해서 날개를 연금(鍊金)을 해낸 겁니다. 우리 동양의 일원론적인 세계관에 의하면 우리 속에서 신이 우리를 깨우쳐 내야 하는 겁니다. 이렇듯 동양은 구상적인 이미지를 추상적인 이미지로 변화시키는 방법을 오래전부터 개발해 온 거예요. 나무도 신이 되고 돌도 신이 되고, 모든 것이 추상화될 수 있기 때문에 신들로 꽉꽉 채울 수 있어요. 이는 상승의 축에 있는 방법입니다. 반면 서양의 이원론적인 세계관에 의하면 신은 밖에 있고 인간은 그 아래에 종속되어 있는 식인데, 밖에서 찾아지는 신은 또 죽어요. 니체 다음의 또 누군가가 죽이려고 나섭니다. 대신에 신의 죽음 이후로 서양은 실학이 발전하고 과학에 의해서 인류에 크게 공헌을 했는데요. 문제는 과학에 의해서 우리가 몸이 비대해지자 정신이 줄어들어서 차츰 축생(畜生)으로 떨어져 내려요. 인간은 지혜가 있기에 가장 무서운 축생이죠. 이건 몰락의 축에 있는 겁니다. 즉,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몰락의 축에 있는 잡설이라면 박상륭의 『잡설품(雜說品)』은 상승의 축에 있는 잡설로 씌어진 거에요.”
박상륭은 인터뷰 중간에 세 번인가 네 번인가를 힘주어 자신의 소설이 어렵지 않다고 강변했다. 그간의 인터뷰나 신문기사에서 박상륭은 어렵다 난해하다는 말이 자주 나왔는데 막상 책을 다 읽어보고 북리뷰를 쓴다면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내게 대화의 중간에 "somehow"라고 강조하여 뭔가를 요청하는 말을 했는데, 이것이 어느 문맥에 속하는 것인지 지금 생각하면 분명치가 않다. (그는 캐나다에서 삼십여 년을 지낸 지라 간혹 강조하는 부분에서 영어단어가 섞여 나왔다.) 아마도 독자들이 보기에 어렵지 않게 인터뷰 글을 써달라는 것이거나, 인터뷰어인 내가 『잡설품(雜說品)』을 다 읽고 나서 글을 쓰면 어렵지 않다고 생각할 거라는 그런 둘 중 하나의 의미였던 듯하다.
그렇다면 나는 그의 요청에 부응하지 못한 게 확실하다. 두 시간 남짓한 인터뷰의 기록을 옮기느라 나는 하룻밤을 꼬박 새웠고, 매일 밤 침대에 억지로 끌고 들어간 『잡설품(雜說品)』은 아직 반이나 남았다. 더군다나 눈곱만큼 남은 양심으로라도 박상륭이 어렵지 않다 난해하지 않다는 말은 차마 못하겠다. 많이 양보하면 ‘읽다 보면 눈에 들어온다.’ 정도가 되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세상에는 어려워도 힘들어도 꼭 해야 하는 몇 가지의 것들이 있는 법인데, 만약 신이 내게 지구 상에서 딱 세 가지 해야 할 일을 선정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면 그 중 하나는 ‘박상륭 읽기’에 기꺼이 할당을 하겠다. 나와 우리의 정신을 살찌우는 일, 그리고 우리 문학을 살찌우는 일. 그 정도의 일이라면 동메달 정도 순위권에 세워 줘도 무난한 선택이 아니겠는가. 명색이 서점에서 책을 파는 사람이 제 이름을 걸고 추천하는 일이니, 이번 한 번만은 인터뷰어를 믿고, 부디 박상륭을 널리 읽어주기 바란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궁금한 거 하나 더 물어봤다. 요즘 관심 있게 보는 후배작가는 누구누구가 있는지. 워낙 독특한, 독보적인 소설 쓰기를 하는 그인지라 그가 읽는 다른 소설이 궁금했다.
“나는 동업자 얘기 안 합니다. 결단코 안하고 누가 돈 잘 번다면 축하하고, 그럽니다. 수필이나 시나 그런 분야는 동업자가 아니니까 좋다 나쁘다 얘기할 수 있지만. 소설은 동업자니까 얘기 안 합니다.”
아아, 독하다. 박상륭은 정말 프로 잡설가이다. 이십 대에도 그랬을 테고 삼십 대에도 그랬을 테고 사십 대에도 오십 대에도 그랬을 테고 또 세월이 한참 흘렀을 터인데 지금에 와서까지도 그렇다. 아아, 나는 그런 그가 참 좋다. 글자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 참으로 독해서, 참하게 독해서, 정말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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