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앞에 적어도 서너 개 이상의 ‘최초’가 붙은 사람. 국내 최초로 남성복컬렉션을 개최했고, 남성복 디자이너로는 최초로 파리의상조합에 정식회원으로 가입했고, 국내 최초로 파리 프레타포르테 남성복컬렉션에 참가했다. 그것도 여섯 번씩이나. 대한민국 남자 연예인 중 그의 옷을 입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할 만큼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 그의 옷을 입은 명사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인지도와 유명세를 실감할 수 있다. 인기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에 ‘장샘’으로 출연해 일반 대중들에게도 눈에 익은 유명인. 이것이 남성복 디자이너 장광효의 화려한 ‘외피’다.
그럼 장광효의 안은 어떨까? 남들이 어렵다고 생각한 길을 일찍 선택해 과감히 걸어갔고, 실패와 굴곡도 있는 인생이었지만 언제나 최선을 다했고, 인간으로 디자이너로 자존심을 지켰다. 멋을 알고, 조화를 사랑하고, 고전의 깊은 맛을 음미하고, 자연의 위대함을 느끼며, 일상을 구석구석 섬세하게 가꾼다. 자신이 죽으면 혼자 남을 아내가 안쓰러워 건강을 챙기고, 아흔 노모에 대한 애잔함을 가슴 한구석에 가지고 살아간다. 20년 후 디자이너에서 은퇴해 자연으로 돌아가길 꿈꾼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체를 통해 그의 화려한 외피만을 보았다. 그런 그가 책을 통해 솔직하게 자기 안쪽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장광효, 세상에 감성을 입히다』는 그가 쓴 첫 번째 책. 팔이 아프도록 글을 써서 한 권의 책을 내놓았다. 디자이너로서의 고군분투,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이야기, 제2의 장광효를 꿈꾸는 디자이너에게 전하는 따뜻한 충고, 옷으로 맺어진 인연들, 그가 생각하는 ‘멋있는 생활’……. 오랫동안 마음속에만 담아둔 이야기를 글로 풀었다. 솔직하고 담백한 글이다. 자신이 만든 옷만큼이나 멋스러운 글을 쓴 디자이너 장광효를 청담동에 있는 그의 사무실 겸 작업실에서 만났다.
“방송계에 이어 이번엔 도서계도 제패하실 생각이신가요?(웃음)”
“무슨 말씀을. 원래 책을 쓸 계획은 없었어요. 은퇴하기 전에 정리하는 마음으로 책을 쓸 생각은 했지만. 아직 은퇴할 나이는 아니잖아요. 앞으로 20년은 더 해야 하는데요. 제의를 받고 머뭇거리긴 했지만 글을 썼고 책으로 나왔습니다.”
“첫 책인데, 글 쓰시는 일은 어떠셨나요?”
“제가 초등학교 나온 지가 너무 오래돼서 받침을 많이 틀렸어요. 글이라고는 초등학교 때 일기 쓴 것과, 패션에 대한 2~3페이지 정도 되는 칼럼 정도가 전부였으니까. 칼럼은 내 전문분야니까 그리 어렵지 않은데 책을 한 권 쓴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작가가 대단히 위대해 보여요.”
“디자이너도 위대하죠.”
“아니에요. 얼마 전에 허연 씨가 쓴 『그 남자의 비블리오필리』를 보면서 ‘역시 작가는 위대하구나, 창조자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그분 글 참 잘 쓰시더라고요. 이전에 책 읽어둔 게 글 쓰는 데 큰 도움이 되더군요. 학생 때 책을 많이 읽었고, 책을 읽다가 좋은 구절이 있으면 메모를 해둔다거나 기억하려는 습관이 있어요. 일반인치고는 잘 쓰지 않았나요?”
“네. 잘 쓰셨어요.(웃음) 옷을 디자인하는 일과 비교하면 어떤가요, 글 쓰는 일은?”
“똑같은 것 같아요. 둘 다 창조적인 작업이니까. 창작하는 방식도 비슷한 것 같아요.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는 점에선 큰 차이가 없어요. 책은 읽는 사람에게, 옷은 입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작업이잖아요.”
“또 책을 쓰실 계획이 있으신가요?”
“아니, 아니요. 쉬운 일이 아니에요. 20년 후에 은퇴할 즈음에 다시 제대로 써보고 싶어요.”
“은퇴하실 생각은 있으세요? 어떤 분들은 죽을 때까지 ‘현역’을 고집하잖아요. 특히, 창작하시는 분들이요.”
“죽을 때 은퇴하면 그건 은퇴가 아니라 사망이죠. 디자이너로 대중과 대화를 할 수 있을 때까지만 하려고요. 선배들 중에서 지금도 왕성하게 쇼를 하고 있는 분이 있지만 왠지 감각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이전보다 감이 떨어지면, 전 그만둘 생각이에요. 옷 만드는 게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옷에만 매달려서 ‘나는 죽을 때까지 옷만 만들겠다.’ 그러고 싶진 않아요. 나이가 들어 디자이너로 은퇴하면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고 그렇게 살고 싶어요. 그건 그것대로 즐거울 것 같아요.”
내가 주역이 되는 길을 걷고 싶다
| 자신의 디자인 인생을 솔직하게 풀어쓴 『장광효, 세상에 감성을 입히다』를 펴낸 패션 디자이너 장광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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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이름 앞에 붙은 '최초'라는 타이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지금 하라면 못 해요. 젊음과 패기가 있었으니까 할 수 있었죠. 젊었을 때만 해도 내가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겁이 없었죠. 남이 안 한 거에 관심이 많았어요. 주류보다 비주류가 더 좋았어요. 젊었을 때 난 아나키스트 같았어요. 뭔가를 하고 싶은데 남이 해놓은 걸 하기는 싫고…… 내가 주역이 되고 싶었어요. 남이 안 하는 일을 내가 해서 더 힘이 났을 지도 모르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걸 좋아하시나요?”
“나는 옷 하나 가지고 만족을 못 해요. 누가 나한테 옷만 만들면서 80세까지 살라고 하면 자살할지도 몰라요.(웃음) 재미없어요.”
“어째서요?”
“옷이 재미없다는 게 아니라 옷 하나만으로는 재미가 없을 것 같다는 뜻이에요. 음악, 미술, 책, 여행, 사람과의 만남……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는 걸 즐기죠. 타고난 멀티태스커예요. 일뿐만 아니라 생활에서도 그래요. 다양한 것에서 감동을 느끼죠. 어제 아내가 집에서 노래 연습을 했어요, 얼마 후에 음악회가 있다고 하면서.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 순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했어요. 그런 느낌? 그림을 보면서 색깔, 구도, 빛의 움직임을 세세하게 느끼면서 감동을 느낄 때 행복해요.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나를 감동시키고 만족시키는 것을 만나기가 힘들어져요.”
“슬픈 일이네요.”
“내가 앤틱을 좋아해서 앤틱 시장을 기웃거려요. 거기서 물건을 보면 ‘아, 저거 내가 예전이라면 샀을 텐데, 지금은 이래서, 저래서 마음에 안 들어. 집에 있는 물건들과 잘 안 어울려. 미학적으로 어떤 점이 부족해.’ 이런 것들이 순간적으로 판단이 돼요. 그런 나를 만족시키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더 찾으러 다니는 것 같아요. 하나를 봐도 눈이 아프도록 꼼꼼히 보고.”
“최근에 선생님을 감동시킨 것은 무엇인지 궁금한데요.”
“자연처럼 좋은 게 없는 것 같아요. 얼마 전,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습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는데, 전라도 무안에 있는 17만 평이나 되는 연꽃 습지를 보여줬어요. 연꽃이 가득 피어 있는 습지를 보면서 어렸을 때 내가 가장 순수했을 때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리고 KBS에서 했던 <차마고도>라는 다큐멘터리. 정말 좋았어요.”
“양방언 선생님 음악도 참 좋았죠.”
“‘차마고도’의 음악은 정말 최고죠. 양방언 씨의 대표곡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예요. 무척 마음에 들어서 이번 쇼에 그 음악을 쓰려고 해요.”
“영감 같은 것은 어디서 많이 받으시는 편인가요?”
“굉장히 많이 받는 질문인데요, 저는 어느 순간 ‘이건 영감이야!’ 하고 오는 것 같지 않아요. 딱히 어떠한 특정 대상에서 영감이 떠오르는 것 같지도 않고요. 삶에서 내 안에 스며든 것들, 여행이나 사람과의 만남, 수많은 예술작품들, 인생의 경험, 독서 등등이 자연스럽게 디자인에 반영되죠. 그런 게 내게는 영감이 아닐까 싶어요.”
멋이 결핍된 시대에 디자이너를 꿈꾸다
“디자이너 분들은 일상에서도 예민하다고 하는데 어떠신가요?”
“저는 일상에선 평범해요. 아내가 당신은 끼도 없는데 어떻게 디자이너로 유명해졌는지 정말 궁금하다는 말을 해요. 끼는 많은 편인데 그 끼가 일에서만 발휘되는 것 같아요. 한때는 일상의 ‘내’가 너무 평범해서 ‘나는 디자이너로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 고민한 적도 있어요.”
“실제 성격은 조용하고 수줍음 많으신 분 같은데요.”
“내성적이에요. 사람 잘 못 사귀고. 너무 일찍 부모 곁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해서 그런가 봐요. 어려서 객지 생활을 하면서 자기 세계가 일찍 확립된 점도 있지만 잃은 것도 있어요. 부모 곁에서 누리는 편안함이나 아이다운 장난기 같은 것이요. 아이라면 떼도 쓰고 그래야 하는데 남의 집에서 그럴 수 없잖아요. 밥도 시간에 맞춰야 먹을 수 있고. 양보하고 남에게 나를 맞추는 법을 먼저 배웠던 것 같아요. 지금도 어머니가 그 점을 안타까워하시죠.”
“21세기가 바라는 예술가는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회사원보다 더 규칙적으로 사는 타입이잖아요?”
“그래야 해요. 나는 밤 열두 시 전에 자고, 여덟 시쯤 일어나요. 거의 그때 일어나요. 술이나 밤 문화 별로 안 즐기고. 일을 할 때는 굉장히 몰두하지만, 일을 마치고 이 언덕을 올라 집으로 갈 때면(자택이 작업실 근처에 있다) 그때부터는 ‘오늘 저녁은 뭐로 할까, 순이(기르는 개의 이름)랑 몇 시에 산책하러 나가나, 청소나 빨래를 해야 할까, 장은 언제 보러 갈까.’ 그런 생각을 해요. 집에 가면서 생활인이 되고 여기에 오면서 디자이너가 되죠. 책을 봐도 집에서 보는 책과 여기서 보는 책이 달라요. 여기서는 일에 관련된 책만 보죠.”
“선생님이 80년대에 처음 남성복 디자인을 할 때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다고 들었는데요.”
“내가 자랄 때 여기저기에 가난이 있었어요. 파괴되어서 재건해야 했던 시절이었죠. 눈을 뜨면 황량한 풍경이 보였어요. 먹고살기 바쁠 때였어요. 멋을 부리는 사람은 연예인 정도였어요. 기껏해야 구호품을 리폼해서 입거나, 보따리장사가 외국에서 사온 옷들을 남대문시장에서 사 입는 정도였어요. 조금만 멋을 부려도 확 눈에 띄는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은 다 멋쟁이니까 오히려 멋을 안 부려야 눈에 띄는 시대잖아요.(웃음)”
“멋이 결핍된 시대에 디자이너를 꿈꾼 셈이네요.”
“그렇죠. 멋이 없었기 때문에 더 강하게 멋이 추구했던, 역설적인 구석이 있어요. 꽃밭에서 꽃들은 눈에 잘 띄지 않잖아요? 그런데 들에 피어있는 들꽃의 모습은 눈에 확 들어오죠. 그 향기도 짙게 느껴지고요. 또 기억에도 오래 남지요.”
나의 디자인 철학, 과거에 미래가 있다
“우리 역사에서 옷을 제일 잘 입은 시대는 언제였을까요?”
“고려 때 자료를 보면 화려해요. 부도나 의상이나 장식물도. 조선시대에는 심플하고 정적으로 변한 것 같고요. 그때 문화들이 좋아요. 디자이너 입장에서 앞으로의 디자인은 옛것, 자연으로 돌아가는 게 모티프가 될 것 같아요. 조선시대의 모든 것이 좋아요. 현대 패션의 절정기는 80년대. 화려하게 멋을 부렸죠. 소비자 입장에서는 지금이 더 좋지만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그때가 화려했죠. 야할 정도로. 지금에서는 촌스러울 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거의 심플, 거의 심플이죠.”
“디자이너로 활동하기에는 80년대 쪽이 더 좋았을 듯한데요.”
“80년대가 더 좋았죠. 폭발이라고 해도 좋을 시대였으니까. 또, 옷장사로도 80년대가 더 잘됐어요. 그때 사람들이 옷을 살 만한 경제력을 갖추게 되었어요. 어느 정도 먹고살 만해지니까 옷에 눈을 돌리게 된 거죠. 그때는 옷을 만드는 족족 팔렸어요.
지금은 국내 브랜드가 고전 중이에요. 국내 디자이너들이 해외 유명 디자이너들과 동시에 경쟁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고, 한국 사람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소비자들이죠. 그런 까다로운 소비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우리의 ‘명품’ 브랜드를 갖게 되지 않을까요. 그 속에서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나올 테고요. 그래서 전 지금의 상황을 꼭 비관하지는 않아요.”
“조금 더 늦게 태어났으면 좋았겠다는 생각, 해 본 적 없으신가요? 좀 더 늦게 태어났다면 디자이너로 더 좋은 조건에서 일하고, 더 많은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은 것 같아요. 하지만 학생들에게는 나가라고 해요.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려면 나가야 돼요. 우리 현실에서는 아직 힘들어요. 마켓도 그렇고, 시스템도 그렇고, 디자이너를 키우려는 기업의 마인드도 아직 부족하고.
세계에서 디자인 인구가 제일 많은 나라가 한국이에요. 그래서 세계의 유명 패션학교에 가면 우리나라 사람들끼리 또 경쟁을 해요. 규모로 보면 한국은 패션 강국이에요. 그런데 그 규모에 걸맞은 세계적인 디자이너는 전무하죠.
우리 디자이너들은 너무 늙어서 해외로 가요. 내가 파리 컬렉션을 하러 갔을 때 거기 디자이너들이 ‘너희는 왜 이렇게 늙은 사람만 오느냐?’고 그랬어요. 우리는 졸업하고 군대 갔다 오면 서른이고, 기반을 잡으려면 직장을 다녀야 하잖아요. 그러다 마흔이 돼서 겨우 자기 브랜드를 갖고, 또 쇼를 하려면 돈도 벌어야 하죠. 그래서 오십, 육십이 되어서야 겨우 간다 그랬더니 웃더군요.
거기는 십대 때부터 해요. 우리로 치면 중학교를 마치고 바로 직업학교로 가요. 스물두세 살 때 이미 교육을 마치고 열심히 자기 색깔을 찾는 거죠. 이십 대에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된 사람이 적지 않아요.”
“경쟁이 안 되겠네요.”
“그래서 일찍 가라고 해요. 가서 현지 사람들을 만나고 그 문화에 흠뻑 빠지라고 말하죠.”
“일찍 가도 꼭 성공하라는 보장은 없잖아요.”
“좋은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선 많은 게 필요하죠.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좋은 디자이너가 되려면 인격이 갖추어져야 해요. 그리고 의상디자인은 상업예술이어서 팀워크가 중요해요. 비즈니스 마인드도 갖춰야 하고. 우리나라 학생들, 들어갈 때 실력은 일등인데 나갈 때는 꼴찌예요. 창의력이 부족해서죠. 뭐, 이건 너무 광범위한 문제라 제가 뭐라고 하긴 힘들 것 같아요. 일단 우리 교육 제도에서는 학생들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없잖아요. 외워서 맞는 것, 틀린 것 고르는 시스템이니까.”
| “저는 젊은 사람들이 로망과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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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선배로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지요.”
“저는 젊은 사람들이 로망과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요즘 젊은 사람들에겐 현재밖에 없는 것 같아요. 현재진행형도 없어요, 달랑 현재 하나, 그것 하나만 보고 살죠.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특히 과거가 없어요. 과거가 있어야 현재도 있고, 미래도 있는 건데 말이죠. 이게 누구의 책임이냐 하면 결국 기성세대의 책임인 거죠. 뭐든 빨리 빨리, 돈이 최고다 그러면서 아이들을 키웠잖아요. 그리고 IMF를 거치면서 가정이 파괴되어 버렸죠. 아이들이 가장 따뜻한 울타리를 잃어버린 셈이에요. 그러니 무섭게 현실적이 될 수밖에 없죠.
패션 쪽에서 일하고,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젊은 사람들을 많이 접하는 편이에요. 형편이 좋은 아이들도 있지만 힘든 아이들도 많아요. 그런 아이들과 이야기해보면 무섭도록 솔직해요. 하지만 난 차라리 이 아이가 거짓말이라도 했으면 좋겠어요. 거짓말이 좋은 건 아니지만 거짓말에는 ‘내 현실은 이렇지만 나는 앞으로 이렇게 살겠다’는 의지가 있거든요.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이 조금은 남아있는 거죠.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그대로 현실에 순응해서 거기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거죠. 인생의 밑그림도 비전도 없는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앞이 캄캄해져요.”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그래서 궁극적으론 디자이너로 내가 이 사회에 어떻게 해야 하나를 고민하게 됩니다. 옛날에는 새로운 것이 미래지향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달라요.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과거로, 자연으로 돌아가게 마련이에요. 연어처럼. 그렇게 회귀하죠. 과거에 미래가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의 과거를 새롭게 포장해서 이 시대에 보여주면서 사람들에게 아름답고 풍요로운 과거를 돌려주고 싶어요. 그것은 결국 진정한 미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죠. 그게 제 디자인 철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