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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한국인이 좋아요” - 푸른 눈을 가진 전라도 사나이, 인요한

“전 좌도 우도 아닙니다. 이념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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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영락없는 한국인이다. 누군가 친구를 통해 ‘절대로 안 되는 부탁’을 슬쩍 찔러 올 때가 있다. 속으로는 ‘아이 씨, 내가 미쳐부러’ 하면서도 단칼에 거절하지는 못한단다.

외증조 할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아들은 한국 전쟁을 겪었다. 손자는 피 끓는 20살 광주 사태를 직접 목격한다. 굴곡 많은 한국 현대사, 한 많은 땅 전라도. 어느 집인들 사연 없는 집이 없겠지만,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임을 자처하는 인요한 씨 4대의 고난은 남다르다. 그들은 이 땅에 태어난 한국인이 아니라, 먼 곳에서 사명을 갖고 이 땅을 찾아와, 한국이 너무 좋아 이곳을 고향으로 삼아버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

인요한 씨를 만나면 세 번 놀란다. 큰 덩치에 놀라고,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에 놀라고, 처음 보는 사람도 일가붙이처럼 반가워하는 정 많은 성격에 놀란다. 그리고 목소리는 어쩌면 그렇게 ‘한국 사람처럼’ 큰지. 동민 회관 앞 전봇대에 달려있는 확성기와 이야기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저 위에서 왕왕 울려 퍼지는 폼이 말이다.

외증조 할아버지 유진 벨과 린튼 가 3대는 한국이 좋아 한국에 미친 사람들이다. 외증조 할아버지 유진 벨은 전라도 목포에서 선교와 의료 사업을 펼쳤고,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은 48년 동안 한국 선교 사역에 힘쓰며 기독교 대학을 설립했다. 아버지 휴 린튼은 해군 장교 인천 상륙 작전에 참가하고, 전역한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죽는 날까지 아내와 함께 선교와 교육, 의료사업에 힘썼다.

4대째인 인요한 씨는 한국에 응급 앰뷸런스를 개발해 보급했고, 북한 결핵 퇴치 사업에 7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했고, 현재 세브란스 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렇게 써놓으면 어떤 사람은 그를 ‘영웅’ 내지 ‘성자’로 취급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는 평범한 생활인이다. 한 여자의 남편, 두 딸과 한 아들의 아버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우리 이웃이다.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 출간한 인요한 세브란스 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미운 정으로, 고운 정으로 살아가는 한국인

그가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을 낸 이유는 잃어버린 유년 시절을 다시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연어가 바다를 여행하다가 꼭 고향으로 돌아와 알을 낳잖아요. 제가 돌아가야 할 고향은 전라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입니다. 그 시절의 소중함을 기억하기 위해서 책을 썼습니다.”

책은 이 땅을 사랑한 조상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은 가족사이기도 했고, 한국을 사랑하는 절절한 마음을 담은 편지이기도 했다. 연어가 고향으로 돌아오듯, 한국 사람도 정의 고향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의 코흘리개 개구쟁이 시절을 읽노라면 누구나 ‘그 시절’, 못 살아도 마음만은 따뜻했던 그 때가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짓게 된다.

그의 진료실 벽에는 알밤 같은 개구쟁이 소년 셋이 나란히 앉아 웃고 있는 사진이 있다. “나는 이 사진이 정말 좋아요. 밖에서 아무리 화가 나고 기분이 울적한 일이 있어도 이 사진만 보면 기분이 좋아져요. 그냥 막 웃음이 나고. 나는 이 사진 밖에다 걸어두고 싶은데 병원 사람들이 다 말려요. 한국 거지 미국 거지 사진이라고.(웃음)”

세상 걱정 없이 웃고 있는 아이들. 그것이 바로 그가 늘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정’이요 ‘고향’이다. “지금에야 어린 시절이 소중함을 알죠. 제 인생 목표가 뭔지 아세요? 별거 아니에요. 나이가 들면 애가 된다고 하잖아요. 두 손에 꼽을 만한 친구들과 재미나게 놀고 싶어요. 인생에 정 빼면 뭐가 남나요. 미운 정으로 살고 고운 정으로 사는 거죠.”

순천에서의 어린 시절. 인요한 소장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다.

영어보다 전라도 사투리를 먼저 배운 어린 시절

구수한 남도 창 한 가락이라도 목청껏 뽑아내듯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온다. 그는 여섯 남매의 늦둥이 막내로 태어나 영어보다 전라도 사투리를 먼저 배웠다. “우리 부모님은 서양식으로 우릴 가르쳤죠.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잘못하면 맞기도 하고.” 그런 그에게 48시간 고아낸 설렁탕 같이 뜨끈하고 구수한 정을 가르쳐 준 사람은 옥자 누나와 순천의 친구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딜 가도 자신이 ‘전라도 순천 사람’인 것이 자랑스럽다 못해 신이 난다.

“제가 대전에 있는 외국인 학교에 다닐 때 정말 외로웠어요. 거기엔 주로 선교사 자녀들이 많이 다녔기 때문에 분위기가 미국적이었죠. 미국은 ‘It's none of your business’인데 한국정서는 ‘우리가 남이가!’잖아요. 미국 참 좋죠. 집만 봐도 멋지잖아요. 그렇지만 별장살이도 하루 이틀이죠. 외로워서 못 살아요. 서로 비비고 싸우고 성질도 내고 화해도 하고 그러고 정 나누며 사는 게 사람 사는 거죠.”

그는 어느 집 장이 맛있는지를 손바닥 보듯 환히 알 수 있는 작은 마을에서 온갖 개구쟁이 짓을 다하며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그런 그에게 개인적이고 합리적이며 규칙을 중요시한 대전 외국인 학교는 감옥과도 같았다고 했다. 그러나 한 선배의 따뜻한 정이 그를 감동하게 했다.

“외출은 해야겠는데 옷이 없어서 학교에서 유일한 한국인 선배의 옷장에서 양복하고 구두까지 말없이 빌려 입고 나갔어요. 저는 선배가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아무 말 안하고 그냥 두고 가라고 하더군요. 아마 외국인 선배였다면 ‘도둑’으로까지 몰릴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왜 선배인들 화가 안 났겠어요. 그렇지만 그냥 이해한거죠. 저는 그때 아 이 정이라는 것이 정말 인간적이고 좋은 것이구나, 한국 문화가 참 좋은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저의 터닝 포인트였죠.”

그는 영락없는 한국인이다. 누군가 친구를 통해 ‘절대로 안 되는 부탁’을 슬쩍 찔러 올 때가 있다. 속으로는 ‘아이 씨, 내가 미쳐부러’ 하면서도 단칼에 거절하지는 못한단다. “당구의 쓰리쿠션 알죠? 한국 사람들 청탁이 그래요. 부탁이 ‘요렇게’ 돌아서 들어오죠. 안되는 건 안되는 거지만, 말이라도 따뜻하게 해주죠. 컵에 물이 반이나 있는 것과 반밖에 없는 거는 뜻은 같지만 뉘앙스가 다르잖아요.”


아직도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 이름, 아버지

그의 일상은 평범하다. 결혼 생활 20년을 넘기면 무조건 아내한테 실권을 넘기고 찍 소리도 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너스레를 떠는 남편이고, 막둥이 늦둥이 아들이 예뻐서 어쩔 줄 모르는 아빠다. 일찍 세상을 뜬 아버지에게 잘해드리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못내 사무치고, 나이 드신 어머니가 하시는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드리고 싶고, 용돈이라도 많이 드리고 싶은 이 땅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제가 의대 본과 2학년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그때 학생이니까 부모님에게 모든 걸 받는 입장이었죠. 그런데 교통사고로 너무 허망하게 돌아가신 거예요. 지금이라면 차라도 한 대 좋은 걸로 뽑아 드릴 텐데, 돈 없으면 할부라도 해서요. 부모님 돌아가시면 정말 그만입니다. 아무리 의견 차이가 있어도 살아계신 부모님께 순종하고 잘하세요.” 아버지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그는 응급구조 시스템과 앰뷸런스의 개발과 보급에 관심을 가지고 직접 뛰어들게 되었다.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진정한 멋쟁이다. “아버지는 복장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셨어요. 사시사철 까만 고무신을 신고 다니셨고, 겨울에는 담요 같은 오버를 입고 다니셨죠. 어릴 땐 그 모습이 참 창피했는데 지금은 참 아버지가 멋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죠. 멋을 안 부려서 더 멋있는 분이셨어요. 아버진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을 안 쓰시는, 진정 해방된 분이셨죠.” 세월이 흘러 그가 아버지처럼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신도 그런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을 느낀다고 했다.

소탈하고 편안한 점도 닮았다. “저 실수를 잘해요. 오죽하면 제가 직원들 앞에서 ‘장애인 수준이다’라고 농담을 할 정도겠어요. 실수하면 실수했다고 인정해요. 환자들에게도 편안하고 솔직하게 대하죠. 감추는 게 별로 없어요. 저는 투명하게 살기 때문에 늘 발 뻗고 잡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덜렁거리는 의사’라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의사로서 그는 항상 진지하고 꼼꼼하게 환자를 대한다.


순정과 의리로 북한을 돕는다

의사로서, 한국인으로서 그는 북한의 의료 지원 문제에 관심이 많다. 7년 동안 북한에서 결핵 퇴치 사업에 앞장서기도 했다. “정말 일하면서 작은 스파이 큰 스파이 취급을 받고, 혼신을 다해서 결핵 퇴치 사업이 성공을 하니까 바로 차단을 시키더라구요.” 그렇다고 해서 그가 북한에 대한 사랑을 접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순정과 의리로 무장한 전라도 사나이니까. 한번 준 정은 끝까지 책임을 진다.

“전 좌도 우도 아닙니다. 이념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가 걱정하는 것은 북한과 남한 사람들이다. 남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식량을 달라, 비료를 달라, 의약품을 달라고 손을 벌리는 가난한 친척 취급을 한다. 북한 사람들은 돈에 미친 남한 사람들이 점점 두려워진다. “우리 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저는 통일이 어떤 식으로도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지리라고 봅니다. 통일을 빨리 해야 하는 이유는 이산가족 때문이죠. 그 분들이 다 돌아가시면 우리는 북한에 대한 인맥을 다 잃어버리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북한과 남한이 융합하기가 정말 힘들어집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정을 간직한 북녘의 사람들

마음은 결코 힘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6.25 전쟁 때 미국 조종사의 일기에 보면 더 이상 북으로 폭격을 보내지 말아 달라, 이젠 폭격할 것이 없다, 라고 씌어진 글이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평양에 남은 건물이 딱 하나였어요. 그 폐허 속에서 그들이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힘으로 굴복시키려면 저항하려는 의지가 강해질 뿐입니다.”

우리의 태도는 통일 이후를 생각해서도 바뀌어야 한다. “통일 후 10년이 흘렀다고 가정해 봅시다. 한 북한 사람이 일한 뒤에 통닭과 맥주를 마시면서 옛날 생각을 하겠죠. 살기는 좋아졌다고요. 그리고 자신들의 자존심을 생각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인 혼란이 온다. “통일은 정치?경제가 아니라 사회?문화적인 문제가 더 큽니다.”

그는 북녘 땅의 사람이 우리가 잃어버린 1%, 순수한 인간성과 정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에 가서 저는 그곳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그곳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어린 시절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요. 관료들과의 싸움에 지쳤지만 그곳 평범한 사람들에게 인간적인 감동을 받았습니다.” 강대국이 쪼갠 나라를 강대국이 합칠 수는 없다. “남한 사람이 가야 하고, 북한 사람이 와야 합니다.”

그는 한국인이 참 좋다. 어디를 가도 뿌리를 내리는 강인함과 붉은 악마가 보여준 신명이 좋다. 잘나면 잘난 맛에 못나면 못난 맛에 사는 그 자유로운 멋스러움이 좋고, 의리와 순정에 죽고 사는 촌놈의 ‘뜨거운 마음’이 좋다. 그의 피에도 그런 한국인의 멋과 맛과 정이 흐른다. 그는 전라도 순천에서 태어나 그곳의 정이 키운 한국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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