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고독한 사람의 음악, 헤르만 헤세의 시들

글쓴이: Rhizomatous Reading | 2013.08.14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그림과 문학 사이에는 아무런 불화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림에서도 나는 자연주의적 진리가 아니라 시적 진리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보게 될 것입니다.”


- 1920 1 13일『나치오날 차이퉁』에 기고한 편지 중에


 


 


20세기 전반의 독일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전 세계인의 정신적 스승이라 할 수 있는 헤르만 헤세는 평생 동안 정원을 만들고 가꾸는 일을 즐겼다고 한다. 불행했던 가정사와 양차 세계대전과, 망명 생활을 하면서 인간의 야만성을 몸소 겪은 개인적 체험들을 승화한 작품들을 쓸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정원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 있으면 무엇이 화려하고 과장되고 오만한 것인지, 무엇이 즐거우면서 신선하며, 창조적인지 분명하게 알게 된다.”


이 시집에서는 작가이자 화가이며 한때 포도 농사로 생계를 꾸렸을 만큼 솜씨 좋은 원예가였던 헤세의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난다. 헤세에게 정원 일은 한다는 것은 혼란과 고통에 찬 시대에 영혼의 평화를 지키는 방법이었다. 그는 살아 생전에 3천여 점의 수채화를 남겼는데, 불혹에 시작한 그림은 정원 일과 마찬가지로 세계와 자아를 섬세하고 풍부하게 성찰하게 하여 시인으로 한층 성숙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의 수채화 작품들은 순수한 자아로 돌아가 꿈과 이상을 담으려 한 화가 헤세의 기쁨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헤세가 직접 그린 수채화가 곁들여진 이 시집은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화가이자 원예가로서의 헤세의 총체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고등학교 3년간 가장 친하게 지낸 친구가 있다. 우리는 건전하면서도 건전하지 않은, 모범적이면서도 모범적이지 않은 그런 학생들이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금한 것은 하지 않았지만 여느 여고생들처럼 각성제까지 먹어가며 공부는 하지 않았다. 대신 주말엔 등산을 다녔다. 어느 정도의 오만이기도 했지만 형편 없는 과목이나 선생이다 싶으면 수업을 제끼고 사람들 눈에 안 띄는 조용한 곳에서 책을 읽었다. 청소시간마다 열심히 청소를 했고, 옮겨심은 나무들에 양동이 가득 물을 가지고 가 물을 주었다. 그 친구랑 올랐던 산, 그 친구랑 불렀던 노래들, 그 친구와 함께 읽었던 책들은 아직도 모두 생생한데, 열일곱 살 생일날 그 친구에게 받은 선물이 바로  『지와 사랑』이었다. 요즘엔『나르치스와 골드문트』로 번역되어 나오지만 내가 어렸을 땐『지와 사랑』, 엄밀히 말하면 알 지知를 쓴『知와 사랑』으로 번역, 출간되었는데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의 생일선물로 자주 주고받고 했던 책이었다.


 


헤르만 헤세는 일종의 상징이었다. 10대를 생각하면『호밀밭의 파수꾼』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데미안』이나『수레바퀴 아래서』, 『유리알 유희』, 『지와 사랑』, 『크눌프』 등과 같은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이 생각난다.


 


인생의 가장 혼돈스러웠던 시기에 누구나 한 번쯤 헤세를 만나고, 구원을 얻는다.


누구나 한 번쯤 헤세를 읽으며 밑줄을 긋거나 일기장에 옮겨 적거나 이성에게 보내는 편지에 인용을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10대는 그 자체로 헤세였다.


그러나 차차 나이가 들면서 헤르만 헤세도 과거의 유물처럼 잊고 지낸다. 헤르만 헤세가 마치 ‘10대의 전유물이었다는 듯이. 어쩌면 10대라는 터널이 너무나 길고 어두웠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의식적으로 잊고 사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10대의 고민이 유치하게 느껴질만큼 현실의 무게가 질식하기 직전까지 짓누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10대를 지나면서 아주 빠르고 신속하게 헤세와도 결별을 한다.


 


어쩌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곳이 소설이나 시라는 것이 더 이상 구원이 될 수 없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러나 우리가 항상 허기진것은 우리 영혼이 공허하기 때문일텐데, 그 영혼의 갈급함과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이 바로 문학이 아닐까 한다. 특히나 헤세 같은 정신적 스승의 작품들.


 


이 시집에는 시인 헤세와 화가 헤세의 진면목을 보여줄 수 있는 139편의 시와 34점의 수채화 작품을 수록하였다. 각각의 시들은 『젊은 날의 시집』(1902),『고독한 사람의 음악』(1916),『밤의 위안』(1929),『새 시집』(1937)에서 엄선한 것이라고 한다.


 


『젊은 날의 시집』(1902)


1989년에 자비출판한 44쪽 짜리 자그마한 시집인『낭만적인 노래』의 연장으로 그 우수와 감상에 내면적인 깊이가 더하였고, 그 세계도 넓어지고 다채로워졌다. 원래는 카를 부세가 편집한『새 독일 서정시인』시리즈의 제3권으로 출판되었으나 1920년 보완된 후, 1950년부터 현재의 제목으로 바뀌어 전해진다. 헤세의 초기 시는 감상적이고 낭만적이면서 동시에 음악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안개 속에서


 


안개 속을 거닐면 참으로 이상하다.


덤불과 돌은 모두 외롭고


수목들도 서로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다 혼자이다.


 



나의 생활이 아직도 밝던 때엔


세상은 친구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지금 안개가 내리니


누구 한 사람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에서, 어쩔 수 없이


인간을 가만히 격리하는


어둠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정말 현명하다 할 수가 없다.


 



안개 속을 거닐면 참으로 이상하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


사람들은 서로를 알지 못한다.


모두가 다 혼자이다. 


 


 



 


『고독한 사람의 음악』(1916)


대체로 1911~1914년에 발표된 시에서 62편을 골라 실었다. 이 시집의 제목은 그의 시 전체 제목으로도 어울리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이전의 시에서 주제를 이루고 있던 감미롭고 낭만적인 애상이 차차 가시고, 고독한 사람의 내적인 갈등과 고뇌를 노래한 것이 많다. 그리고 무상과 우수의 극복을 위한 사랑을 주제로 삼고 있다.


 



나비


 


몹시 상심하고 있을 때였다.


들을 지나다가


한 마리의 나비를 보았다.


순백색과 진홍색으로 얼룩진 나비가


푸른 바람 속에 하늘거리고 있었다.


 



, 나비여


세상에 아직 아침처럼 맑고


하늘이 무척 가까이에 있던 어린 시절에


아름다운 날개를 팔랑거리는


너를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바람처럼 가벼이 팔랑거리는


하늘에서 온 아름다운 나비여.


너의 아늑한 성스러운 빛 앞에서


수줍음에 싸여, 이리도 서름하게


스스러운 눈초리로 나는 서 있어야 한다.


 



순백색과 진홍색으로 얼룩진 나비는


바람에 실려서 들로 날아갔다.


꿈을 꾸는 듯 걸음을 옮기자, 나에게


천국에서 새어 나온 한 가닥의


잔잔한 빛이 남아 있었다.


 


 



 


『밤의 위안』(1929)


1911년 이후의 시를 모은 시집으로, 그의 시집 중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격동에서 원숙에 이르는 시기의 서정적 결실로, 회의적이며 때로는 자학적인 색채가 짙은 특징을 갖는다. 체념을 담담하게 노래하고 있다.


자기실현을 내면으로 가는 길에서 추구하고 있는데, 그 내면성은 자기 폐쇄적인 좁은 것이 아니고, 신을 내포하는 무한한 넓이에 이르고 있다.


 




 


이 세상의 어떠한 책도


너에게 행복을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살며시 너를


네 자신 속으로 돌아가게 한다.


 



네가 필요한 모든 것은 네 자신 속에 있다,


해와 별과 달이.


네가 찾던 빛은


네 자신 속에 있기 때문에.


 



오랜 세월을 네가


갖가지 책에서 찾던 지혜가


책장 하나하나에서 지금 빛을 띤다,


이제는 지혜가 네 것이기 때문에. 


 



 



『새 시집』(1937)


『새 시집』은 헤세의 환갑을 기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시집으로서의 마지막 이정표가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 『새 시집』에서는 인생의 무상에 대한 동양적인 관조, 서구 문명에 대한 실망에서 오는 초현실적인 지향 등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인생의 무상과 현실의 혼란에 절망감을 느낄 때도 불멸의 정신과 영원한 삶에의 신념은 잃지 않고 있다.


 



고독으로 가는 길


 


세계가 너에게서 떨어져 나간다.


지난날 네가 사랑하던


모든 기쁨이 다 타 버리고


그 재 속에서 암흑이 위협한다.


 



더 강력한 손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너는


네 속으로 갈앉아서


추위에 얼며 죽은 세계 위에 선다.


너의 뒤에서, 잃어버린 고향의 여운이


아이들의 소리와 은은한 사랑의 노래가


흐느끼며 울려 온다.


고독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어렵다.


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꿈의 샘도 말라 있다.


 



그러나 믿으라.


네 길의 끝자리에 고향이 있으리라.


죽음과 부활이


그리고 무덤과 영원한 어머니가.


 


 



인간은 죽을 때까지 순례하는 존재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방랑성탐구성에 천착한 헤세의 작품은 온 생애에 걸쳐 유효하다고 볼 수 있겠다. 오늘 당신이 헤세의 시를 읽어야 할 이유이다.


 

전체목록보기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