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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글쓴이: 유리병 편지 | 2013.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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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것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p. 9)"

 

"영원한 회귀라는 사상은, 세상사를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 보지 않게 해주는 시점을 일컫는 것이라고 해두자. 다시 말해 세상사는 그것이 지닌 순간성이란 정상참작을 배제한 상태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사실 이 정상참작 때문에 우리는 어떤 심판도 내릴 수 없었다. 순간적인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지는 해를 받아 오렌짓빛으로 변한 구름은 모든 것을 향수의 매력으로 빛나게 한다. 단두대조차도.(p. 10)"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니! 뭔가 시적인 제목에 끌려서 이 책을 손에 잡은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첫 장에서 "이거 뭥미...드럽게 어렵잖아"라며 책꽂이 깊숙히 꽂아두는 것은 니체 탓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책의 시작부터 등장하는 니체의 영원회귀사상은 이 소설을 관통하는 물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p. 11)"

"한 인생의 드라마는 항상 무거움의 메타포로 표현될 수 있다(p. 144)"

 

바꿔 말하자면, 먼저 니체를 이해한 후 이 책을 다시 들추어 본다면 어느 순간 고개를 끄덕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물론 치열한 사랑의 쓴맛이라던가, 드러난 삶의 모습 이면에 숨겨진 사회구조적인 악에 직면한 세월의 깊이도 어느 정도 전제되어야만 한다. 때문에 청년기 이전에 이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면 둘 중 하나다. 누구보다도 절망스러운 삶의 경험이 있었거나, 있어 보이려고 뻥치는 것이거나.

 

거의 제 1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는 토마스는 가벼운 삶에서 무거운 삶으로 옮겨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반부에는 사비나가, 후반부에는 테레사가 그의 곁에 있다.

모든 종류의 키치(전체주의적인 삶, 태도...)를 거부하며 사랑에서조차 자유롭기 원하는 여자인 사비나는 토마스의 가벼움을 더 가볍게 하는 존재이며, 불운한 어린시절부터 차곡차곡 축적된 삶의 무게로부터 무거운 영혼을 소유한 여자인 테레사는 토마스에게 한없는 중력을 더해주는 무거움이라고 할 수 있다.

 

사비나를 사랑하면서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를 끊임없이 왔다갔다하는 프란츠는 키치적인 것에 환상을 가진 몽상가였다. 죽음의 순간 가까이 이르러서야 소중한 것은 바로 "현재"라는 것을 깨닫고 마는 프란츠. 그는 사실 내가 가장 감정이입을 하며 읽었던 인물이었다. 어쩌면 나의 맨얼굴과 가장 닮은 사람이여서일까?......어쩌면 그의 깨달음이야말로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명확한 선을 결정하지 않는 쿤데라가 은연중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p. 340)"

늙고 병들어 시한부 삶을 살게된 개, 카레닌의 시간은 원형이며 반복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란 예측할 수 없는 것, 반복되지 않는 것, 실수투성이로 흘러가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직선으로 덧없이 흘러간다는 측면에서 볼 때 인간 삶의 본질은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다. 순전히 행복이라는 측면에서만 보자면, 반복 속에서 행복을 영위하는 개만도 못한 삶을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그 가벼움의 나락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니체는 영원회귀를 고안해 냈다. 영원회귀가 단순한 윤회사상과 다른 이유는 모든 선택의 순간에 잠시 멈춰 서서 '내가 왜 이 선택을 하고자 하는가?'를 묻게 하기 때문이다. 그 물음은 일직선의 삶이라는 본질에서 허무에 빠질 수 있는 우리를 구원한다. 주체적인 인간, 위버멘시가 되는 한 걸음이자 몽상이 아닌 현실에 뿌리박게 하는 한 걸음이 된다.

 

"이 슬픔이란 우리는 마지막 역에 있다라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는 함께 있다라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p. 358)"

우리 삶의 형식은 가벼움일 수 밖에 없다. 결국 늘 마지막을 향해 가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사람도, 장소도, 익숙해지기 전에 스쳐가고 마는 짧은 여행지이다. 영원회귀는 환생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가벼움을 극복하기 위해 그렇게 전제해 보자는 가정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슬픔의 형식을 행복이라는 내용으로 채울 수 있다. 그 행복은 바로 무거움을 선택할 때 주어지는 것이며, 그 무거움이란 일상에 대한 절절함이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되, 절절하게 사랑할 것! 관념이 아닌 실제로, 머리가 아닌 몸으로 사랑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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