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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 부럽지 않은 궁녀·고위직 지낸 노비도

글쓴이: 책읽는 사랑방 | 2013.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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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의 작품 `쌍검대무(雙劍對舞)`의 일부. 학계에서 연구한 바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전체 인구에서 최소 30% 이상이 노비 신분이었다.가무에 능했던 기녀들은 관청 소속 공노비들이 많았다. 조선시대 기생문화의 주류는 관기였던 것이다. 조선왕조를 지탱하던 노비제도는 18세기 들어 와해되기 시작했고, 동학농민운동을 거쳐 갑오개혁을 겪은 뒤 최종적으로 종언을 고했다.


 


저는 인조 기묘년(1639년)에 옥사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궁녀 기옥이라 합니다. 본래 영창대군 집에 속한 나인이었지요. 아버지는 양민이었지만 여종인 어머니와 결혼해 저를 낳았기 때문에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종이 되었습니다.

 


15세가 되던 해 궁녀로 입궁해 인목대비전 생과방(生果房)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한 살 어린 서향을 동생처럼 아끼며 살았지요. 당시 중전이던 인열왕후 한씨께서 태기를 보이자 아기씨 유모로 서향을 천거했습니다. 하지만 대군 아기씨는 태어나자마자 사흘 만에 숨을 거두셨고, 중전마마께서도 출산한 지 나흘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청나라의 침략 등으로 모진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저와 서향은 주상 전하 저주 사건의 주모자라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누명을 쓰고야 말았습니다. 김 상궁이 꾸민 일로 의혹을 사 여섯 차례의 형문을 받은 것이지요. 모진 고문으로 죽어가면서도 저는 끝까지 무고를 주장했습니다. 가장 마음 아픈 것은 죄 없는 아버님까지 모진 고문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궁녀의 하루에 소개된 조선 왕실 한 나인의 일대기다. 한 번 들어오면 살아생전에는 다시 나갈 수 없다는 구중궁궐에는 이처럼 애처로운 사연이 많았다.


 


역사는 늘 밝은 곳을 비춘다. 승자들이 쓴 사료를 해석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읽고 듣는 역사인 까닭이다.


 


하지만 왕조를 지탱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왕과 권력자를 보필한 이들이 있었고, 외진 곳에서 묵묵히 땀 흘린 이들이 있었다. 역사에서 조명받지 못하던 그늘진 곳을 비춘 역사서 두 권이 나란히 출간됐다.조선 노비들궁녀의 하루다. 두 책은 사료의 숲 안에서 길어낸 아웃사이더들이 걸어간 작은 오솔길의 흔적이다.


 


궁녀의 하루》는 궁중에서 왕과 왕비 등 왕실 가족들을 모시고 일하던 궁녀들의 일상을 낱낱이 해부한다. 입궁하면 궁을 나갈 수 없었으므로 궁녀는 보통 가난하거나 특별한 사연이 있는 이들이 많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앵무새 피를 이용한 '처녀 감별법'을 통해 선발됐다는 것. 처녀만 궁녀가 될 수 있다는 법도 때문에 앵무새 생피를 팔뚝에 떨어뜨려 피가 묻으면 처녀로 인정하는 미신을 믿고 시행했다.


 


궁녀 중 대표적인 이들이 지밀궁녀다. 지밀 소속 상궁과 나인은 왕과 왕비의 신변 보호는 물론이고 입고 먹는 것에서부터 잠자는 것과 기타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중을 들었다.


 


왕조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된 생활을 했으면서도 궁녀들 삶의 풍경은 다채로웠다. 여가시간엔 마작이나 쌍륙놀이 화투를 했고, 달밤이면 뜰에 나가 한시를 짓는 놀이를 하기도 했다. 궁궐 안에서 술을 빚어 팔고 아이를 기르거나, 기생을 불러다가 질탕하게 잔치를 베풀고 놀기도 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궁녀도 많았다. 조선 최고 갑부 궁녀가 된 박 상궁, 푸른 눈의 프랑스 공사 플랑시와 사랑에 빠졌던 궁녀 리진의 비극적인 죽음, 사도세자의 숨은 여인 수칙 이씨 등 이야기도 흥미롭다.


 


반면 '조선 노비들'은 '무당을 쓰는 사람' '툭하면 얻어맞는 사람' 정도로 여겨온 노비들에 관한 편견을 벗겨주는 책이다. 학계에서 연구한 바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전체 인구에서 최소 30% 이상이 노비 신분이었다.


 


노비가 인구 중 절반을 차지한 때도 있었다. 이처럼 많은 인구가 노비로 산 것은 주인에게 평생 신분적으로 예속되는 노비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고선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옛날에 일자리를 얻는다는 것은 노비가 되어 남의 땅을 경작하는 것을 의미했다.


 


노비의 삶은 그 시대의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선은 법으로 노비에 대해 벼슬길을 금지했지만 학문의 뜻을 펼친 이도 있었다. 조선 중기 시인 박인수는 정2품 중추부지사를 지낸 신발의 노비였다.


서경덕 제자로 명종 때 당대 최고 학자로 꼽혔던 박지화가 그를 학문의 길로 이끌었다.


 


유교와 불교를 두루 공부한 박인수의 집 마당에는 매일 아침 제자 수십 명이 찾아와 절을 올렸다고 한다. 이름이 알려지면서 당대 선비들에게 존경을 받기도 했다. 중종대 문신으로 공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지낸 반석평 역시 태생은 노비였다.


 


노비 유형에는 무형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선상노비와 솔거노비, 유형의 현물을 제공하는 납공노비와 외거노비가 있었다.


 


선상노비에 속한 관기도 노비의 일종이다. 조선 후기 소설 `배비장전`에는 관기 애랑의 이야기가 나온다. 제주목사에 임명된 김경을 따라 제주로 간 배비장은 제주18경 중 하나인 망월루에서 제주 최고 관기 애랑을 만난다. 꼬드김에 넘어가 배비장은 방자와 내기를 하기에 이른다.


 


이곳에 있는 동안 애랑에게 넘어가지 않으면 자신이 배비장의 종이 되고, 아니면 자신에게 말을 달라는 방자의 제안에 동의한 것이다. 배비장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개울가에서 목욕하는 애랑을 보자마자 넘어가고야 만다. 애랑과 배비장에 관한 소문이 퍼져 결국 한성으로 되돌아가고 마는 배비장 이야기는 관기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 중 하나다.


 


사극 속 기생은 민간 술집에서 활동한다. 하지만 기록 속 기생은 관청을 주 무대로 활약했다.


관청에 속한 노비들이 기생 노릇을 담당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기생문화의 주류는 관기였다.


 


태종실록에 기록된 노비 불정은 화폐 대신 통용되던 베를 1500필이나 모을 정도로 부자였다.


면포 세 필이 논 한 마지기에 거래되었으니 그가 장사를 통해 얼마나 큰돈을 벌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조선시대 관청인 장흥고 소속 한 공노비는 한성 최고 기생 성산월을 자기 여자로 만들기도 했다.


그의 재산은 거만(鉅萬)이었다고 기록이 남아 있다. 대부분 노비들은 먹고살기 바빴지만, 일부 노비 중에는 이처럼 재산을 축적한 이들이 여럿이었다.



책은 노비의 기원, 결혼, 직업, 사회적 지위, 몸값, 면천 등을 18명의 삶을 통해 입체적으로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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